|
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살던 곳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22-4 전화번호 (041)332-7860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李存昌, 1759-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 순교사적지는 신례원 본당의 공소를 거쳐 2008년 성지본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로 구성되어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복자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와 인근의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살았다.
농민 출신으로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의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42-1792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신부로서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와 지황 사바(池璜, 1767-1795년)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복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하였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크게 성장했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 제대.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 해 4월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丁若鍾, 1760-1801년)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바위에서 42세를 일기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순교사적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2008년 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하고, 그 해 12월 22일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였다. 이존창의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기념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다. [출처 :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2월 20일)]
여사울 - 신앙의 못자리(이존창의 생가)
천안에서 예산 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신례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서해안의 합덕 쪽으로 향하다가 십 리쯤 되는 곳 오른편에서 여사울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곳에는 현재 이존창 생가 터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생가 터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두 개의 첨탑으로 유명한 합덕 성당이 나오며, 성당을 조금 지나 왼편으로 십리쯤 가다 보면 신리 교우촌이 나온다. 이처럼 이 지역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유명한 사적지들을 자주 만날 수 있으니, 바로 이곳이 내포(內浦)라 불리던 충청도 교회의 요람지였다.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여사울’(餘村,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고향이다.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76년에 양근 지역의 유명한 남인 학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중인 김범우(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다음과 같이 여사울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존창은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자기 스승(권일신)에게 고향에 돌아가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전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잠깐 동안에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 그리고 그의 지식과 덕행의 평판에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다져졌다. 그때부터 내포 지방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312면).
고향으로 돌아간 이존창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셨고, 그 결과는 곧 내포 공동체의 설립으로, 차령산맥 동쪽으로 복음이 확대되어 나갔다. 또 이존창은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에 끼여 1786년 이래 약 2년 동안 지속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사울 이존창의 집은 자연스럽게 교우들의 집회소이자 숙소가 되었다.
이존창 생가 터 오른쪽에서 시작해 언덕 주위를 돌아 언덕 위 광장 전까지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어 있다.그러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존창은 자주 시련과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연이어 고통을 받게 된 그는 배교와 회두를 거듭하였다. 특히 처음 박해 때 형벌과 회유가 번갈아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마침내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비판하고 말았다. 교회 기록에서는 이 사실을 두고 “내포 교우들에게 가장 슬프고도 가장 창피스런 배교였다.”라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이존창의 배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진정한 회두(回頭)가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신유박해로 서울로 압송되어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된 그는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 희광이의 칼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낱같은 흉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때 발굴된 유물들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내용 일부 수정)]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평야라고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 여사울에서 이존창 루도비코(1759-1801년)는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양민 신세이나 가세가 넉넉하여 집안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였고 성장하면서 변혁의 열의가 깊어져. 마침내 학문에 대한 불타는 열망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삼남지방에 그 이름이 자자하던 권일신의 형제들을 알게 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 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스승은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질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존창이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주었다.
이존창은 그가 얻은 신앙을 혈족과 고향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열의에 찬 마음으로 여사울로 돌아왔다. 그는 사도적 열의에 불타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얼마 뒤에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그를 따르는 신자수가 삼백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외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 천주교회는 한국 복음선교의 효시가 되는 명례방 집회 다음의 시자 공동체로서, 그뒤에 생긴 다른 어느 공동체보다 열심했다. 그리고 이후 백년 동안의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가 있었다. 이렇게 내포지방에 널리 복음을 전한 그를 우리는 '내포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더욱 열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이 창설된 한국 초대교회의 평신도의 임시 성사 집행기에 이승훈, 권일신, 유항검과 함께 평신도 임시 성직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내포교회를 이끌었다. 그후 북경 주교로부터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채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연락을 받고 곧 중단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로 여전치 열성적으로 전교활동을 하면서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을 도와 사제 영입운동을 전개하며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의 놀라운 전교활동에 대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위대한 재능에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특별한 재주까지 겸하고 있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그에게 이끌려왔다. 그의 전교에 저항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천주교 신자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집안이 이제는 선비들의 집안뿐만 아니라 농부, 노동자, 서민, 빈민들까지 확대되었고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멀리서 무리를 지어왔고, 종종 다른 신자들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존창의 헌신적인 전교활동으로 예산, 아산, 면천, 당진, 해산, 서산, 덕산, 태안 등 내포지방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놀라운 활동은 결국 조정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791년 제사문제로 '잔산사건'이 일어나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전국각지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도 체포되어 충청감영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에게는 최대의 시련이었다. 극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마음이 흔들리고 생각은 착잡하게 엇갈렸다. 그러다 쇠약해진 몸과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비록 한때나마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약속하여 석방되었다.
이 한때의 나약함은 그에게 크나큰 아픔이었다. 이존창은 베드로 사도처럼 뉘우치며 배교에 대한 가책과 고통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한 이곳에서 다시 전교활동을 펴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형이 나서서 그를 방해했다. 어쩔 수 없이 이존창은 자신의 땀이 어린 내포교회를 떠나 새로운 땅으로 사시로 결심하고 홍산을 거쳐 금산에 이르러 회개의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날의 배교를 깊이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계명을 지켰고 전교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홍산과 금산 지방에서도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는데 김대선 신부님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12년 동안의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큰 기여를 한 최양업 신부님은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처럼 그가 전교한 친인척 가운데에서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교로 입교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었다고 할만큼 그의 활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우의 상당수가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공헌이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85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최인길 회장의 집을 급습하여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고 했던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신자 색출소동이 벌어졌다. 주문모 신부에게 충직하게 협력했던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충청감영으로 연행되었고, 신문을 받고 천안으로 이송되어 이번에는 연금생활을 겪게 되었다. 6년 동안의 연금 생활은 큰 시련이었지만 그는 감사라는 마음으로 기도와 명상을 통해 주님께 향한 신심을 더욱 깊게 하였다.
그러던 중 정조가 제위 24년만에 승하하고 순조가 열한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벽파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고 서울에서 체포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대질하기 위해 서울로 끌려가 국청에서 거듭 신문을 당하였다. 이미 한차례 뼈아픈 실수를 경험했던 이존창은 이제 순교의 열의에 불타올랐다. 스스로 충청도 지방 천주교 신자들의 지도자임을 시인하고 모진 곤장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굴하지 않았다.
그는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과 초대교회 지도자 최창현 등이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다음날인 4월 9일에 여섯 번이나 내리친 칼날 아래 치명하였다. 며칠 뒤 친지와 동료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는데 이존창의 목에는 칼자국만이 흉터로 남았을 뿐 잘리 목이 단단히 붙어 있어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전교업적은 교회사의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차례 배교의 아픔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점 때문에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그의 삶은 잘못을 참회하는 깊이만큼 짙고 치열하였다. 이 뉘우침과 회개의 새 삶이 그를 영원한 '내포의 사도'가 되게 하고 있다. 역사는 내포를 열심한 순교자들의 못자리로 기억하게 될 것이며, 그때마다 이존창은 그곳의 사도로 함께 기억될 것이다. [출처 : 김길수,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1999년 11월호(내용 일부 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