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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새벽 51
하진은 에어컨을 켜고 데워진 핸들을 쥐었다가 놓는다.
시원한 곡을 듣고 싶다,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음악을 튼다. Aqua의 We belong to the sea.
파도 소리.
바다가 보고 싶다.
지난 새벽, 서현과 편의점에서 오렌지 쥬스를 사들고 근처 놀이터로 갔다.
서현이 그네를 타고 싶다고 해서였다.
서현은 열심히 그네를 타고 하진은 벤치에 앉아 서현이 그네를 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접었다 폈다 신나게 탄다.
날아오를 듯, 날아오를 듯, 하늘로 날아오를 듯,
서현의 웃음 소리가 모래 위로 떨어지고, 서현은 날아오르고,
하진은 지켜보고, 펄럭이는 옷자락을,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함박 웃음 짓는 얼굴을, 지켜보고.
- 우아, 덥다. 또 샤워해야 겠어요.
서현이 땀을 닦으며 하진의 옆에 앉는다.
더운 열기와 함께 서현의 향이 후끈 하진에게 파고든다.
하진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쥬스 병의 뚜껑을 열어 건넨다.
- 고마워요.
- 오랜만에 출근 했더니 어때?
- 가뿐하죠.
- 후후..
- 언니.
- 응.
- 허대리님이 반지를 주면서 프로포즈 했어요.
답은 나중에 해달래요. 생각 해보고.
- ...그래.
- 고민 중이예요.
- 좋아하는 사람 있다면서.
- 네.
- 흔들려?
- 아뇨.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 중인걸요.
- 좋아한다는 사람은 어때.
- 뭐가요?
- 그 사람도 널 좋아하나?
-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귀여워 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가끔 그 사람이 저를 볼 때 느껴요.
날 많이 아껴주는 구나. 나를 많이 좋아해주는 구나.
착각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어떻게 만났어?
- 우연히.
- 모든 만남의 시작은 우연이지.
- 그 우연이 마음을 흔들 때부터 필연이 되는 것 같아요.
- 그래. 인연이란 게 우습고도 무섭지.
- 내일 고백할 거예요.
- 네가 먼저?
- 네.
- 용감하네.
- 헤헷. 그런데 거절 하면 어쩌죠?
- 글쎄..
- 서로 서먹해질까봐 망설여져요.
지금 혼자 좋아하는 것도 저는 좋거든요. 하지만 자꾸 욕심이 나요.
- 마음 가는 대로 해.
- 언닌 마음 가는 대로 다 해요?
- .. 아니.
- 그것 봐요.
백미러로 서현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따라 화장에도 신경을 쓴 것 같고 옷도 고르고 골라 입은 것 같다.
걸음도 조심스럽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짓도 조심스럽다.
아침부터 긴장했군.
서현이 차 문을 열지 않고 앞에 선다.
히치 하이커 처럼 팔을 뻗어 엄지 손가락을 흔든다.
하진이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내민다.
- 처음 와 본 곳이라 길을 잘 모르겠어요.
번화가까지만 태워다 주시겠어요?
하진은 피식 웃는다.
- 목적지가 어디죠?
- 기사의 마음에 맡길게요.
- 처음 보는 사람을 너무 믿는군요.
- 처음 볼 때부터 신뢰할만한 사람이란 걸 알아버렸거든요.
- 타시죠.
하진은 서현이 활짝 웃으며 앞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차 문이 열리고 서현이 옆좌석에 앉는다.
- 고마워요.
하진은 고개를 끄덕, 하고 차를 출발시킨다.
- 아직 긴장 되네요. 나침반이라도 있다면 좋을텐데.
- 오늘은 히치 하이킹 놀이구나?
하진의 물음에 서현이 웃는다.
그러나 히치 하이킹 놀이는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서현이 입을 다물고 창 밖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두 손을 잡았다 놓았다, 입술을 달싹달싹 하는 모습을 보고 하진도 침묵한다.
차는 달리고, 음악은 흐르고, 두 사람은 침묵한다.
음악은 트랙을 돌아 다시 we belong to the sea 가 흐른다.
- 오늘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막 긴급 입수된 내용입니다. 한서현 리포터 연결합니다.
서현의 말에 하진이 웃으며 음악 볼륨을 줄인다.
- 7월 24일 토요일 오전 7시 57분.
하늘의 태양, 눈부시고
도시의 풍경, 햇살에 찬연히 빛나고
흐르는 바람, 풍경 속으로 뜨겁게 스며드는 이 순간.
길 잃은 여행객이 낯선 운전사에게 고백합니다.
한서현, 유하진을 사랑합니다.
아찔한 현기증. 심장이 내려 앉는다.
서현의 말은 계속 된다.
- 나의 파도 안으로 달려오라는,
나의 동굴 속에서 당신의 불면의 밤은 없을 것이라는,
당신과 함께라면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는 이 순간
길 잃은 여행객이 낯선 운전사에게 제안합니다.
유하진, 한서현을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긴 침묵이 이어진다.
- 이상, 보도에 한서현이었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차가 서현의 회사 앞에 선다.
서현은 내리지 않고 한동안 앉아 있다가 하진을 바라본다.
- 오늘 뉴스, 신선했죠?
특종이니까 일요일에 점심 사줄래요?
하진은 서현을 보지 않는다.
서현이 대답을 기다린다.
하진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기사님, 고마워요. 덕분에 길 잘 찾아왔어요.
서현이 내린다.
언제나처럼 창 밖에서 손을 흔들고 돌아서서 회사로 향한다.
하진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한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한 기분으로 앞을 주시한다.
뒤에서 들려오는 클락션 소리에 핸들을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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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ua, we belong to the sea.
저는 여름이 올 무렵이면 이 노래를 듣는답니다.
고마워요. ^^
Take me to the ocean blue
Let me dive right into
Anything I'll ever capture
You can wait up all night
Waiting for wrong or right
I always knew where I had you
You can lie on my waves
You can sleep in my caves
Living on the edge of peace
Knowing that water can freeze
Do you still want me to open
Come on into my waves
You can sleep in my caves
Let me know that you will hold me
Till the tides take my soul
We belong to the sea
To the waves you and me
Living in the ocean so blue
We belong to the sea
Open wide being free
A minute everlasting with you
And as soon as it stops
We'll all be a drop
Coming down on your wide open sea
Can you wash me away
Will you dry me one day
Take me to the place where I came from
If I had a open heart
Would you tear that apart
Why do I feel that you're lonesome
Come on into my waves
You can sleep in my caves
Let me know that you will hold me
Till the tides take my soul
We belong to the sea
To the waves you and me
Living in the ocean so blue
We belong to the sea
Open wide being free
A minute everlasting with you
And as soon as it stops
We'll all be a drop
Coming down on your wide open sea
There's a thunder inside me
That your silence will kill
And I know that you forced me
To get rid of what I feel
We belong to the sea
To the waves you and me
Living in the ocean so blue
We belong to the sea
Open wide being free
A minute everlasting with you
And as soon as it stops
We'll all be a drop
Coming down on your wide open sea
그들의 새벽 52
서현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회사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기둥에 손을 짚었다.
상기된 얼굴로 수줍은 웃음이 번졌다.
토요일이라 오전 중에 일이 끝나 다행이었다.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내일, 하진의 답을 듣는다. 그 생각만 하면 심장이 두근 거리고 머릿속이 짜릿짜릿 울렸다.
혼자서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어보기도 하고 두 손을 기도하듯 꼬옥 맞잡고 웃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 모두들 퇴근하고 서현은 책상을 다시 한 번 말끔히 정리한다.
웬지 모든 것이 깨끗하고, 모든 것이 정돈 되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 서현씨, 퇴근 안 하십니까?
퇴근한 줄 알았던 영민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서며 묻는다.
흥얼거리며 서랍을 정리하던 서현이 고개를 든다.
입가의 미소가 슬며시 사라진다.
영민에 대해서 잠시의 고민도 하지 않았던 것이 조금은 미안하다.
그도 자신에게 고백하고 이런 기분이었을까? 를 생각하니 거절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다.
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낮다 싶어 굳게 결심한다.
- 허대리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영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 가
가방을 놓고 창가 선반에 허리를 기댄다.
긴장한 표정이다.
두 팔을 펼쳐보이며 말씀하세요, 의 제스츄어를 보낸다.
서현이 영민의 책상 앞으로 걸어간다.
- 이거, 받을 수가 없네요.
책상 위에 반지 케이스를 올려놓는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고개 숙인 서현과
한 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턱을 문지르는 영민.
서현은 침묵 속에서 해야할 말을 찾는다.
- 제게 호감을 가져주신 건 고맙습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예요.
하지만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서현이 고개를 든다.
생각과 달리 영민이 미소 짓고 있다.
- 아직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제 마음이 어떤지 확실히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억지가 서현씨께 불편을 드렸다면 사과드리지요.
하지만 전 이걸로 서현씨 포기 안 합니다.
의외의 대답에 서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민을 바라본다.
- 저는 서현씨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서현씨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 아뇨.
서현이 단호하게 답하고 이내 말을 잇는다.
- 죄송하지만,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에게 고백했어요.
영민이 아, 그래요?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 사람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자신만만할까.
이 남자는 자존심도 없을까.
오히려 왜 굉장한 프라이드를 가진 것처럼 보일까.
- 저는 지금 그 사람의 답을 기다리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더이상 이런 일로 얘기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 서현씨가 좋아한다는 사람, 어떤 분인지 보고 싶군요.
- 대리님도 아는 사람이예요.
서현의 답에 미간을 좁히는 영민의 표정이 굳어진다.
- 혹시, 하진?
서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러니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
하진은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리는 거리의 열기를 바라본다.
버스에서 내린다. 도로 앞에 선다.
무작정 도로를 가로지른다.
난폭한 차들이 경적을 울린다.
고개를 숙인 채 중앙선 위에 선다.
노랗게 그어진 중앙선을 노려보듯 시선을 떼지 않는다.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여름 오후의 햇살이 뒷목을 뜨겁게 달군다.
땀이 흘러내린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다.
- 괜찮으십니까?
누군가 묻는다. 고개를 들지 않는다.
- 괜찮으십니까?
반복해서 묻는다. 고개를 들지 않는다.
- 귀머거리인가보지?
- 그러게.
- 저기.
누군가 어깨를 잡는다.
태양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든다.
교통 경찰 두 명이 서 있다. 검게 그을린 청년들. 제복으로 스며든 땀.
- 여기 서 있으시면 안 됩니다.
- 그러면 못 알아듣지.
한 남자가 하진의 어깨를 툭툭 친다.
손가락으로 아래를 몇 번 가리키고
두 팔을 엑스자로 만든 뒤 다시 손을 뻗어 건너편 인도를 가리킨다.
다른 남자가 달려오는 차들을 수신호로 막는다.
- 벌금은?
- 저렇게 된 것도 불쌍한데 봐줘.
등 뒤로 두 남자의 대화를 들으며 하진은 걸음을 옮긴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다.
불볕 더위 아래 한참을 서 있었던 하진은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쉬임 없이 걷는다.
익숙한 집의 문을 연다. 늘 그렇듯 잠겨 있지 않다.
집으로 들어선다. 그곳에 서 있는다. 한참을.
- 어?
암실에서 나오던 선주가 현관에 서 있는 하진을 보고 놀란다.
- 너 언제 왔냐? 꼴이 왜 이래? 왔으면 들어와 있지 거긴 또 왜 서있냐.
하진이 그제서야 안으로 들어선다.
- 차 안 가지고 왔어? 무슨 땀을 이렇게 흘려? 너 어디 아프냐?
하진은 선주가 만들어놓은 기다란 바 앞에 놓인 높은 의자에 걸터 앉는다.
- 선주야.
- 어.
- 나 지금 네 욕조가 필요하다.
침묵.
선주가 휘익 휘파람을 길게 불고 2층으로 올라간다.
선주는 하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왜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문에 기대어 있었는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묻지 않는다.
선주는 하진에게 욕조가 필요하다는 말은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뜻이며,
간절히 답을 구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잘 안다.
서른이 되어도, 예순이 되어도 삶은 질문을 던진다.
서른이 되어도, 예순이 되어도 우리는 어머니의 대답이,
자애롭고 현명한 그 대답이 필요하다.
하진은 바에 머리를 얹는다.
차가운 은색 바의 기운이 서늘하게 얼굴에 와닿는다.
선주가 틀어놓은 Ulver의 연주곡만이 집 안에 감돈다.
하진은 벽에 걸린 흑백사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는다.
선주가 계단에 기대어 서서 하진을 내려다본다.
- 올라 와. 물 받아놨다.
*
욕조에 몸을 담근다.
선주가 욕실로 들어온다.
- 이거 갈아 입을 옷.
선반 한 켠에 개켜진 옷을 올려둔다.
- 쟈스민 포 띄웠다. 향 좋지?
- 다 마셔도 되겠네.
- 농담할 기력은 있나보군.
선주는 한숨을 내쉬고 하진이 벗어놓은 옷을 집어들고 나간다.
눈을 감고 한참을 등을 기대어 있는다.
서현. 영민. 명우.
아침, 서현의 목소리. 진실, 떨리던 고백.
반지, 영민의 웃음. 신뢰, 지켜야할 우정.
사진, 불태운 명우. 상처, 반복하고 싶지 않은.
하진은 콧등만 띄워 놓고 물에 스며든다. 쟈스민도 스며든다.
원채 말 없는 물은 거리에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였음을 넌즈시 속삭인다.
- 공기에겐 비밀로 하세요.
그래서 하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물 밖으로 상체를 일으킨다.
쟈스민을 낚는다.
그럼 나의 비밀도 하나 지켜다오.
손 끝을 살그머니 세워 짝 잃은 카나리아의 빗장을 열던 어린 날처럼
쟈스민 표피를 가르어 연다.
빛 바랜 古書의 낱장들이 풀풀히 흩어지듯
쟈스민을 잃은 쟈스민들이 풀풀히 물 속에서 흩어진다.
그러나 물은 흥건히 고여버리고 풀풀한 흩어짐은 숨을 거두고 만다.
물은 공기가 아니고 쟈스민은 카나리아가 아닌 것이다.
하진은 욕조 바닥의 마개를 들어올린다.
물은 쟈스민들을 가득 안고, 가는 듯 마는 듯 빠져나가고
하진은 공기에게, 가는 듯 마는 듯 다가가고
물은 그렇게 마지막 굽이를 틀다가, 끝내 끝내 소리를 지른다. 안 돼!
무슨 소리였니. 내 딸국질 소리지.
지독한 거짓말을 할 시간이 왔다, 꼬마야.
공기가 물에 젖었던 하진의 몸을 떨게 만든다.
하진은 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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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ver, Søfu-ør Paa Allfers Lund
정말 지독하죠.
오늘은 저에게 지독한 하루였고,
지금 이 순간 지독한 새벽입니다.
저는 슬픔을 만들어내는 음악보다 슬픔이 묻어나는 음악이 좋아요.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그들의 새벽 53
오늘 만큼은 하진과 서현은 약속 시간에 맞춰 따로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인 작은 카페에 먼저 도착한 서현은 창가에 앉아 거리를 바라본다.
기다림의 시간은 심장을 바짝바짝 태운다.
긴장을 떨쳐내려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꼬마 아이, 토끼 모양 풍선 하나 들고 엄마 손을 잡고서 아장아장 걸어간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바닥을 쓰는 힙합 바지의 한 남자,
다리 하나 들고 손을 뻗으며 체킷 아웃~ 외치듯 아이 얼굴 만진다.
아이, 우아앙 엄마 다리에 달라붙는다.
남자, 연신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고는 건들건들 리듬에 맞춰 걷는다.
서현의 긴장한 얼굴 속으로 웃음이 번진다.
한 여자 앞서 걷고 한 남자 뒤에서 뛰어온다.
여자, 돌아서서 얼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인다.
남자, 여자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인다.
여자, 삐죽이며 안긴다.
남자, 여자의 가방을 들고 어깨에 매며 넉살 좋은 웃음 웃는다.
여자, 따라 웃으며..
두근.
흰 면바지에 담청색 여름 남방을 걸쳐 입고
바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반가운 사람.
서현은 입구 쪽으로 눈을 돌린다.
짤랑-
카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리며 하진이 들어선다.
두리번 거리지 않는다.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을 넓게 두고 카페 안을 스윽 훑어본다.
서현과 눈이 마주친다.
서현이 안녕안녕 인사하듯 손을 흔들며 웃는다.
하진이 서현에게로 걸어온다.
- 일찍 왔네.
- 이제 지각생 명찰은 떼 주세요. 저 요즘 안 늦잖아요.
하진이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
하진과 서현은 마주 앉았다.
오븐 속의 머핀을 고루 고루 찔러보듯 서현은 하진의 눈과 표정을 구석 구석 어림한다.
그러나 하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아이스 티가 담긴 투명한 잔으로 눈을 돌린다.
하진은 서현의 긴 속눈썹에서 묻어나는 떨림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 넌 아직 어리고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난 너에게 계절의 한 가운데서 만난 폭풍일 뿐이야.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계절은 순리대로 또 흐른다.
그리고 넌 또다시 다른 폭풍을 만날 것이고.
그때마다 네가 현명하게 이겨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주륵, 잔을 타고 미끄러지는 물방울.
쿵쾅이던 심장, 물방울과 함께 주륵 떨어져내린다.
- 네가 가진 튼튼한 씨앗에서 좋은 열매,
아주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길
인생의 선배로써 그리고 너를 아끼는 사람으로써 마음 깊이 바란다.
네가 멋지게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늘 지켜봐주마.
서현은 입술을 꼬옥 깨문다.
고개를 든다.
- 언니도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착각한 건가요?
- 아마.
하진의 표정은 매끄럽고, 목소리는 담담하다.
서현은 멀게만 느껴지는 하진의 표정과 목소리에 심장이 조여온다.
- 언닌 단 한 번도, 이런 말 우습지만..
물잔을 쥐는 하진의 긴 손.
서현은 입을 다문다.
하진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서현을 바라본다.
- 단 한 번도, 저를 여자로 생각한 적 없었나요?
서현이 하진의 눈을 마주하고 묻는다.
하진이 느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서현은 왈칵 터지는 울음을 참고 웃음을 만든다.
꼭 다문 입술이, 동그랗게 부드러운 턱이,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가늘게 떨린다.
- 계절의 흐름이 순리라고 했어요..?
마음의 흐름도.. 순리예요.
언니를 향해 뛰는 심장.. 멈추지 못하고 멈추고 싶지도 않아요.
다시는 예전처럼 마음을 막고..
그래서 결국 후회하는 어리석은 짓.. 하지 않을 거예요.
진공상태처럼 자신의 말이 귓속에서만 웅웅거리는 것만 같다.
- 네가 이러면 좋은 언니 동생으로 지내기도 힘들어져.
표정 변화 없는 하진의 얼굴.
서현이 고개를 젓는다.
- 거..짓말..
서현의 긴 속눈썹에 맺혀있던 눈물이 투둑 떨어진다.
- 아니잖아요.. 언니도 나 좋아하잖아요..
난.. 언니의 말보다 언니의 눈을.. 믿어요.
언니가 보여 준.. 내가 느꼈던.. 그 깊은 눈.
서현의 눈물 가득한 눈이 하진의 눈을 간절히 그러쥔다.
자꾸만 번지는 눈물에 하진의 얼굴이 일렁인다.
하진이 시선을 내리고 손을 내밀어 물잔을 쥔다.
- 떼 쓰지 마. 아닌 건 아닌 거야.
아주 차갑고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 언젠가 겨울 만져보았던 눈처럼.
하진을 향해 뻗은 마음의 길, 조각조각 무너져 내린다.
서현의 입가에 하늘거리는 웃음 한자락 걸린다.
- 특종인 줄 알았는데,
아무 쓸모 없는 뉴스였다, 그쵸?
그러나 울음이 터지고 만다.
- 미안해요, 언니. 우는 사람 싫다고 그랬는데...
울려고 그런 건 아닌데.. 자꾸 눈물이 나요.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못 한 거 아닌데..
하진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서현은 고개 숙여 눈물을 떨구고
냉방이 잘 된 카페 안은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어느 자리에선가 왁자한 웃음이 터져나오고
음악은 터무니 없게도 영화 유 콜 잇 러브의 주제곡이 흐르고
얼음이 모두 녹아 아이스 티는 밍숭한 색깔로 변하고.
- 하진 언니.
창 밖을 보던 하진이 고개를 돌린다.
- 다 울었어요.
헤죽 웃던 서현은 하진의 얼굴을 보자
다시 코 끝이 짠하게 아파온다.
얼른 고개를 뒤로 젖힌다.
- 이렇게 하면 눈물이 나오다가도 쏙 들어가요. 하하.
울먹이는 목소리.
고개를 젖힌 채로 눈을 깜박이던 서현이 손을 들어 눈 위에 얹는다.
- 이상하다. 이 방법도 소용 없네.
서현의 목소리가 잠겨든다.
두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며 젖혔던 고개를 내린다.
- 언니 말 잘 알아들었어요.
우리, 좋은 언니 동생 해요.
저 먼저 가볼게요. 미안해요.
허둥대며 백을 챙겨 일어나 뛰듯이 걸어간다.
짤랑-
카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하진은 천천히 담배를 꺼내어 문다.
불 붙인 담배를 왼 손에 쥐고 깊숙히 쇼파에 등을 기댄다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는다.
오른 손을 들어 오른 쪽 눈과 뺨을 덮는다.
담배를 쥔 왼 손을 들어 왼 쪽 이마와 눈을 덮는다.
하진의 작게 튀어나온 목젖이 느리게 울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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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oline Kruger, You call it love
이 영화 재밌게 봤어요.
이쁜 소피 마르소가 나오는 오래된 영화죠.
그들의 새벽 54
30분이 지나도록 서현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다렸다.
하진의 차는 천천히 공용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월요일 아침, 서현은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다.
[당분간은 지하철 타고 다닐게요.
감정 정리하도록 노력할 거예요.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면 연락할게요.]
7월의 마지막 일요일,
너무나도 뜨거웠으나 너무나도 추웠던 그 날,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눈물을 떨구고
황망히 일어나는 서현의 팔을 낚아채고 싶었던 그 날이 지나고
어느새 8월이 시작되었고 다시 토요일이 왔다.
그렇게 서현의 집에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잘 하였노라 잘 하였노라 기꺼이 감당하겠노라 되뇌이면서,
감정을 마비시키고 사고를 정지시키고자 애쓰면서,
그렇게 버티어 내고 있는 나날들.
하진은 그 날 이후로 베란다로 나가지 않는다.
서현도 역시 옥상에서 새벽 하늘을 올려보지 않으리라.
아마도 그러하리라.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영민이다. 받고 싶지 않다.
- 그래. 아침부터 어쩐 일이냐..
- 출근길에 생각나서 했지.
- ...
- 잘 지내?
- .. 그냥 그렇지 뭐. 넌?
- 나도 뭐 그냥.. 하진아.
- 어.
- 오늘 퇴근하고 시간 되면 냉면이나 같이 먹자.
함흥냉면 아주 잘 하는 데 있다.
- .. 그러지.
*
- 이거 납치 아닌가? 겨우 냉면 먹여놓고 어디까지 가는 거냐?
- 하하. 삼계탕 먹을 걸 그랬나? 다 와 가.
- 어디 가는 건데.
- 성북동.
- 성북동? 집?
영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 며칠 전에 회사 근처로 집 얻어서 나왔거든.
유학 간 게 무슨 생이별이라고 그동안 못 본 거 억울하시다며
결혼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끼고 살아보자고 하도 성화셔서 지냈는데
이번에 그냥 나왔지 뭐.
안 가져간 물건이 있어서 잠시 들렸다 가려고. 괜찮지?
하진도 고개를 끄덕인다.
- 오랜만에 어머니 뵙겠네.
- 아, 그래, 너 우리 어머니 한 번 뵌 적 있지?
어머니도 반가워 하실 거다.
- 길에서 뵙고 네 옆에서 인사 꾸벅 한 거 밖에 없는데 기억이나 하시려나.
- 기억하시지. 너 이번에 만났다는 얘기 해드렸거든.
말라서, 곱상하니 예쁘던 그 청년 말이니? 하시더라. 하하.
아직도 너를 남잔 줄 알고 계시더군. 내가 그때 말씀 안 드린 모양이다.
내가 네 얘기는 많이 했는데, 네가 이름도 남자 같아서 그냥 그렇게 알고 계시나보다.
하진은 피식 웃고 만다.
- 하진아.
- 어.
- 너 얼굴이 많이 안 좋다? 어떻게 지내길래 얼굴이 그 모양이냐.
- 너도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는데?
- 허헛.. 그런가.
영민의 차는 커다란 정원과 높은 돌담을 가진 집들 사이의 넓은 골목을 지난다.
영민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핸즈프리를 귀에 꽂는다.
- 어, 형수님. 오늘 토요일인데 형님이랑 데이트 안 하십니까.
웬 일로 형수님이 받으세요? 하하. 예.
하진은 까칠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창 밖을 바라본다.
- 예, 어머니는요? 아.. 그래요? 이거 아쉽게 됐네요. 지금 집에 들리러 가는 길인데.
하하하. 아닙니다. 형수님 보고 싶어서 가는 겁니다. 하하. 예.
평화롭고 고요한 집들 위로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흐른다.
- 허헛, 제가 나이가 몇 갠데 밥 굶고 빨래 안 하고 살겠습니까.
하하하하. 형수님, 저는 형님이랑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 하하하하, 그래서 제가 형수님 좋아하지요.
아니오. 예예, 문 열어두세요, 다 왔습니다. 옙.
전화를 끊은 영민이 하진을 바라본다.
- 어머니 안 계신다는데?
- 그래? 그럼 난 그냥 밖에서 기다리지.
- 그럴래?
영민의 차는 어느 집의 거대한 대문 앞에 선다.
- 안 들어갈래? 잠시 들러서 시원한 물이라도 마시고 가자.
- 됐어. 금방 나올거지?
- 어. 물건만 가지고 오마.
영민이 내리고 하진은 차에 남는다.
그러나 영민은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다.
하진은 시트에 기대어 앞을 바라보며 오른손등으로 눈을 스윽 문지른다.
피곤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새 한 마리 담벼락에 앉아서 비비쫑비비쫑 노래한다.
푸득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감는다.
깜박 잠이 들려는데 달칵,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 어어, 미안하다. 많이 기다렸지? 잤냐?
영민이 뒷좌석에 뭔가를 실으며 말한다.
- 졸았지 뭐.
영민이 운전석에 앉는다.
- 금방 나오려고 하는데 형수님이 찬거리며 챙겨주신다고 부산하시길래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
- 어.
- 우리 형수님이 진국이야, 진국.
영민이 차를 돌린다.
- 어머니가 맏며느리 잘 얻었다고 칭찬이 마르고 닳도록이지.
강단에 계시면서도 살림까지 완벽하게 꾸리신다.
우리 부모님도 보수적인 분들은 아니시니까 살림만 하라는 말씀 안 하시지.
더군다나 어디 하나 빠지지 않으시니까 나무랄 데가 없지.
요리 솜씨며, 사람 부리는 거며, 효도에 내조까지. 기품도 있으시고.
한 때 내 이상형이었지 뭐냐. 형수님이 나보다 한 살 많으시거든.
어머니가 둘째 며느리 언제 보겠냐고 선 보라고 난리셔서
근사한 신부감 얻어올거라고 큰소리 탕탕 쳤더니
느이 형수만한 아가씨 아니면 택도 없다 하시더라.
- ...
- 그래서 형수보다 멋진 아가씨한테 애정공세 중이라고
느긋하게 기다리시라고 했지. 하하.
*
- 전망 좋네.
22층 아파트의 16층 거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근사하다.
- 여기 누워서 보면 하늘 밖에 안 보이지.
주말이면 거실에 누워 뒹굴면서 솔로의 애환을 달랜다.
- 혼자 살기엔 넓다? 그러니 솔로의 외로움이 절실하게 와 닿지.
- 하하. 너처럼 원룸 들어갈까 했는데
그냥 있는 집이고 마침 비어서 여기 들어왔어.
서재도 있었으면 했고. 뭐 마실래, 커피?
- 어.
혼자 사는 남자 집엔 홀애비 냄새가 난다 했던가.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증명하듯 영민의 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것이 영민의 호방한 성격을 닮아있다.
영민이 아침마다 사용할 향수, 불가리 옴므의
남성적이면서도 지적이고 점잖은, 고급스런 향이 은은히 배여있다.
- 커피 대령이오.
영민이 테이블에 커피 잔을 놓는다.
페이퍼 백에 꽂힌 신문을 뒤적이던 하진은
커피잔을 들고 그리 푹신하지 않은 쇼파에 앉는다.
영민도 거실 한 구석에 놓여있는 팔 받이 없는 의자를
테이블 앞으로 옮겨와 하진을 마주보고 앉는다.
- 커피 마시라고 집까지 데리고 온 건 아닐 거고, 용건이 뭐냐?
- 커피 마시라고 데리고 왔는데?
영민이 싱긋 웃는다.
하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하진도 싱긋 웃으며 입을 연다.
- 맛, 별론데?
- 하하. 너무한 거 아니냐. 커피가 뭐 다 시커멓고 쓰지.
*
대나무 자리에 누운 하진은 몇 시간 째 쏴아쏴아 매미가 울어대는 소리를 미동도 없이 듣고 있다.
햇살이 기울고, 핏빛 노을이 번지고,
사방이 서서히 푸른 어둠으로 물들 때까지 눈을 감고 움직임 없이 반듯하게 누워.
죽음의 날이 이럴까.
기묘한 슬픔과, 기묘한 평온함이 범벅 되어 있는 여름날의 저녁.
영민과의 대화만이 되풀이 되어 머릿속을 흐른다.
- 요즘 서현씨랑 같이 출근 안 한다면서?
서현씨 얼굴 못 봤겠군. 서현씨 얼굴이 반쪽이 됐다.
- ...
- 요새 회사에서 내가 아주 기운 없다.
서현씨 보면 힘이 났는데 요즘은 서현씨가 웃고 있어도 눈이 울어.
일은 또 착착 잘 하고 말도 잘 하고 농담도 잘 하는데, 전이랑 달라.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안 좋은지..
서현씨한테 무슨 일 있냐.
- 그걸 왜 나에게 묻지?
- 서현씨가 너한테 고백했고, 답을 기다린다고 했거든.
그러면서 반지를 돌려주더라고.
- ...
- 그 다음 주부터 서현씨가 맥 없이 지내거든.
- ...
- 거절 했나보지?
- ....
- 하나 묻자.
- 뭐.
- 너 서현씨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거절했냐.
내 입장에서, 이런 질문이 참 웃기긴한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거든.
- 웃긴 질문인 거, 알긴 아나보군.
서현이랑 네 문제 네가 알아서 해결 해.
잘 되건 못 되건 그건 네 재량이니까.
- 후.. 유학 가서도, 한국 돌아와서도 여자 많이 만났다.
유학 가서는 너 잊으려고 죽어라 책만 파다가도 그것도 안 되면 아무 여자나 안았다.
이런저런 여자 많이 만나봤어. 마음만 먹으면 자고 싶은 여자랑 잘 수 있는 거 아니겠냐.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 마음 많이 망가졌더라.
그래서 아침마다 좌선하면서 건강하게 좀 살아보려고 했는데,
개버릇 남 못 준다고 미칠 것 같을 때 개같은 버릇이 나오더라고.
스스로 광견병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하.
- ....
- 서현씨 만나고 그놈의 광견병 고쳤다.
서현씨보다 예쁜 여자, 조건 좋은 여자, 능력 있는 여자, 많아. 나도 알지.
그런데 서현씨는 내가 지켜주고 싶은 여자다.
안고 싶은 여자이기 이전에 지켜주고 사랑해주고 싶은 여자.
- ...
- 그런데 하진아, 난 왜 이러냐.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 여자는 왜 꼭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너도 그렇고 서현씨도 그렇고. 이거 내 인생의 징크스다. 하하.
- .. 서현인.. 외롭게 지내다가 나랑 정들어서 그래. 한 때지.
- 네가 골수 동성애자라면 서현씨는 양성애자쯤..?
- 골수 동성애자라.. 훗, 그 말 참..
- 어어,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니다. 표현이 거슬렸다면 미안하다.
- 됐어, 임마. 서론 끝났으면 본론 해.
- 흠..
- ...
- 넌 서현씨 하고 내 문제니 내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서현씨가 네게 마음이 가 있는 이상 내 힘만으론 역부족이지.
지금 네 마음도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네가 비록 서현씨를 거절했지만, 아끼는 동생이니 잘 되길 바라겠지.
바로 앞 집에 사니 서로 부딪칠 거고, 서현씨 많이 힘들 거 같다.
이 반지, 주인 찾도록 네가 좀 도와다오.
- ..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 너, 나, 서현씨, 모두를 위해서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말했지, 너한테 나는 안 될 거 같다고.
네가 그곳에서 지내는 한 서로가 힘든 시간만 길어지지 않을까.
아주 극단적인 표현으로 죽은 사람 살리는 셈 쳐다오.
깊은 어둠과 깊은 고요가 하진의 온몸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꼬마야, 너는 내가 나무처럼 푸르게 빛난다고 하였던가.
잎새는 시들고 고목이 되었다.
땅 속 깊이 뿌리 박고, 튼튼한 기둥을 가지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하였던가.
네가 보았던 나의 모습이 그러하였던가.
너의 곁에서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라해도, 너를 그렇게 지키고 싶었지.
모두 다 과한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살아 가며 나의 뜻대로 되는 일이 참 없구나. 그렇구나.
그들의 새벽 55
은옥아, 물 소리가 들렸어.
어둠은 너무 깊어 더이상 깊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어.
어둠 속에 오롯이 앉아 눈을 열고 귀를 열자 눈은 더욱 흐려지고 귀는 더욱 먹먹해졌지.
소리도 없이 일어나 창을 열자 거리의 외로움을 담은 새벽의 흐린 공기가 온몸을 감쌌더랬지.
나는 무언가 잘못 된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어쩔 줄 몰라했지만
사실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그럴 것을 예견했던 것인냥 담담하기도 했단다.
이질적인 풍경. 냄새. 촉감. 바람. 언어.
이곳이 아닌 그러나 그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내 것이 아닌 그러나 누구의 것도 아닌.
가지려한 적 없는 그러나 가질 것만 같았던.
멀고 먼 옛날처럼 낯설게 여겨지는 십대의 어느 날들.
내 방 창으로 바라보던 그 가로등.
가로등을 스쳐 왼쪽으로 뻗은 길고 넓은 길을 올라가면 작은 고아원이 있었어.
휴일 낮이면 나는 그 고아원 지붕의 투명한 창을 무심히 바라보며 낮은 뒷산을 오르곤 했어.
끝이 없을 것 같던 그 길고 예쁜 산책길을 하염 없이 걸었지.
가로등은 매우 지쳐보였어. 따듯해보이기도 했고.
고아원 가는 길의 가로등이기 때문은 아니었을 거야.
내가 지칠 때면, 따듯해지고 싶을 때면 바라보곤 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나는 내 방 창에 이마를 기대고 서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시며 가로등을 바라보는 것을,
고아원 가는 길 언저리를 노랗게 밝히는 그 가로등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어.
나는 요즈음 어둠이 깊어지면 자다 깨어 달려나와
늘처럼 헝클어진 머리와 낡은 소매를 하고
그것보다 더욱 남루한 마음을 끌어안고서 놀이터 그네에 앉아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곤 해.
아아. 물 소리가 들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하고 싶은 말을 아직 하지 못했어.
찰크락-
허공에 홀로 흔들리는 그네를 버려두고 서현은 달린다.
*
요란하게 복도를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어둠 속 정적을 깬다.
탕-
현관문에 부딪치는 손바닥의 울림.
곧이어 인터폰이 울린다.
하진은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간다. 반짝, 노란 등이 켜진다.
- 누구세요.
- 언니, 저예요.
- ...
문을 연다. 서현이 현관 안으로 들어선다.
- 보고 싶어서 왔어요. 안 보면, 안 보면 죽을 거 같아서.
숨을 몰아쉬며 하진을 올려다본다.
서현의 눈을 마주 한 하진의 심장은 찢어지듯 아프다.
나 만큼 보고 싶었니. 나 만큼 죽을 것 같았니.
- 마음의 어긋남은 어쩔 수 없다는 것 알아요.
언니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을 죽이고 언니 곁에 있을 수도 있어요.
거짓말, 못 하지만 그래도 마음 먹으면 잘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러기 싫어요.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고백한 거 후회 안 해요.
서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언니가 틀렸어요.. 언닌.. 지나는 폭풍이 아니에요.
언닌 내게.. 모든.. 계절인.. 거예요.
해가 바뀌어도 그렇게.. 색색으로.. 예쁘게.. 다시 돌아오는 계절.
현관의 불이 꺼지고 어둠으로 가득 찬다.
순간, 하진의 목을 끌어 안는 작은 손.
세차게 끌어당기는 여린 팔.
하진의 입술을 더듬는 젖은 입술.
입 안 가득 번지는 꽃잎 향.
하진의 떨리는 손이 서현의 어깨로 향하다 벽을 짚는다, 고개를 돌린다.
반짝, 다시 등이 켜진다.
- 이걸로 됐어요..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기억해 줄래요..?
계절이 바뀌는 순간마다.. 색색의 옷을 갈아 입는 계절의 여울목마다..
그렇게.. 일 년에 네 번이면 돼요..
언니를 생각하고.. 그리워 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저라는 것.. 기억해 줄래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하진의 옆 얼굴을 바라보며 서현은 젖은 얼굴로 웃는다.
- 고마워요..
*
미친 듯 엑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더운 바람이 열린 창으로 사정 없이 몰아친다.
넓은 길을 돌아 질주한다.
끼이이이익-
어느 집 앞에 선다.
- 누가 저렇게 무식하게 차를 대나. 그것도 남의 집 앞에.
맞은 편에서 들려오는 선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진은 핸들에 얼굴을 묻는다.
- 달링, 그래서 또 한 판 붙을 거야?
- 오늘 마담한테 너무 봉사해서 기력이 없어. 보약 좀 지어줘.
미진의 웃음소리.
- 그러면서 왜 자고 가래?
- 손 잡고 자자는 뜻이지.
- 내가 그 거짓말에 한 두번 속았나?
- 아, 보내기 싫다. 마담 주! 안 가면 안 되나?
- 나 짤리길 바래? 지금부터 밟아도 시간 맞출까 말까야.
- 짤리면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해줄게.
- 나중에 짤리고 나서 고려해볼게요. 사랑하는 므슈, 뽀뽀!
- 어우, 맛있다.
마담은 이슬 먹고 살고 난 우리 마담 입술 먹고 살지.
웃음 소리. 웃음 소리.
- 나 가요.
- 응. 러뷰, 러뷰, 아이 러뷰 베뤼베뤼 머취!
웃음 소리.
미진의 차가 빠져나가는 소리.
정적.
선주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
- 어? 이거 하진이 차 아냐? 차가 왜 이래? 범퍼 다 나갔구만.
선주가 운전석 쪽으로 걸어온다.
- 야, 유하진, 뭐야? 어떤 또라인가 했더니 너냐?
선주가 허리를 굽혀 차 안을 들여다본다.
- 하진아..?
하진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물. 두 번 째 보는 하진의 눈물.
- 일단.. 내리자.
선주가 차 문을 열고 하진의 어깨를 잡는다.
하진이 밖으로 나온다.
선주를 끌어 안는다.
- 어흑.. 선주야, 선주야. 흐윽.. 선주야.
- 그래그래..
선주가 하진을 등을 감싸 안는다.
- 선주야, 나 좀 죽도록 패줘. 어흐흑..
나 좀 때려줘. 어흑, 어흐흑, 아프게. 죽을 만큼 아프게. 어흐흐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