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혜능이라는 사람을 한번만 더 정리해보자.
1. 혜능은 모두가 경멸하는 오랑캐땅 출신이어서 수계를 받고 출가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2.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를 모시고 스무살이 되도록 나무를 해서 먹고 살았으며 글자를 전혀 배우지 못했다.
3. 길에서 어떤 사람의 게송을 듣고 크게 생각한 바가 있어서 동선사에 오기는 했으나 그 이전에 불교에 대해 알거나 공부한 적은 전혀 없었다.
4. 동선사에 와서도 팔개월 동안 행자로 허드렛일이나 했을 뿐 공부나 수행은 꿈도 꾸지 못한 사람이었다.
5. 나이는 겨우 스물셋이었다.
나는 여기서 이때 혜능의 나이를 유심히 본다. 스물셋.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일자무식의 문맹인 스물셋의 촌놈이 아무런 공부도 수련도 연마의 과정도 없이 혼자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란 어떤 것일까. 전전생의 공덕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우기면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이나 그러나 우리는 혜능의 나이 겨우 스물셋이었음을 기억하자.
나는 홍인이 차마 이 젖비린내나는 스무살 머시마한테 달마의 의발을 넘겨주지 못했던 심정을 이해한다. 나였더라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홍인은 혜능에게 립써비스로 떼울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냥 타이르고 야단쳐서 보내려고 했는데 상대가 워낙 빡빡하게 나오니까 구슬려서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 전후사정으로 유추한 그날밤의 강상유람이다.
그러니까 "신수의 것보다 너의 게송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마. 그리고 약속대로 제6대조로 인정할테니 다만 멀리 가기만 해다오."
똑똑한 혜능이 여기서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스승님, 후계자에게 전수한다는 달마조사의 의발은 안 주십니까?"
"당연히 달마조사의 의발을 너에게 주어야 하겠으나...."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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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29 ( 1 ) 구름~~ 2004-12-21 21:52:47 912
홍인은 혜능에게 다음과 같은 궁색한 변명으로 둘러대었다.
"예전에 달마스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법을 처음 펴실 때는 사람들이 믿음이 얕아서 이 가사와 그릇을 전하여 믿음의 표본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법이란 마음에서 아음으로 전해져 은밀하게 간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뒤로는 가사와 발우의 전법함을 없게 하라. 만일 이 뒤로도 법을 전할 때 가사와 발우를 법의 상징으로 한다면 다툼의 원인이 될 것이니 명심하라."
"예 스승님."
스무세살짜리 촌놈은 노회한 선사의 교활한 구슬림에 넘어가고 말았다. 홍인은 이렇게 해서 달마의 의발을 혜능에게 주었을 때 일어날 지도 모를 골때리는 소동을 예방할 수 있었다. 홍인은 배에서 내려 멀어져 가는 제자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면서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원례 선이란 지혜의 다른 말이다. 선수행은 지혜를 닦는 것이다. 그런데 선불교의 5대조인 홍인의 하는 바를 보면 선수행이 지혜라는 것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잘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 두명 중의 하나인 홍인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자.
1. 홍인은 5대째 선종의 조사로써 동선사를 운영했는데 그 결과는 보았다시피 개판오분전이었다.
2.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홍인은 양위를 선언하고 후계를 게송으로서 결정짓는다고 발표했다.
3. 홍인은 신수의 게송을 보자마자 이름이 없어도 신수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이 말은 이미 동선사 중들의 수준을 누구보다 홍인이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4. 자기가 관리하는 절의 수준을 잘 알면서도 게송으로 후계자를 뽑는다는 발표를 했다. 즉 뻔한 결과조차 예견치 못할 정도로 우매한 사람이었다.
5. 혜능의 게송을 보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신발로 문질러 버리고는 다음날 밤에 혜능을 불러 후계자로 삼았다. 하루 뒤의 일도 예상치를 못하는 사람이다.
6. 후계자를 뽑아놓고도 당당하게 발표를 못하고 새벽을 틈타 강을 타고 탈출을 시켰을 정도로 겁이 많고 심약한 사람이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의 전형이다.
7. 제자를 멀리 떠나 보내면서 어떤 징표도 주지 않았고, 제자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않았다. 노자돈도 안주고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혜능은 그야말로 입고있던 옷만 걸치고 쫓겨난 것이다.
8. 그렇게 혜능을 보낸 후에 홍인은 입을 싹 딱고 떠나보낸 제자에 대해서 일언반구하지 않았으며, 임종을 맞아서도 이 제자를 찾지 않았다.
선을 수행하면 사람이 이리도 어리석어지는 지 나는 묻고싶다.(교활함은 어리석음의 반려이니 교활한 것으로 지혜를 가장하지는 말고.)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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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30 구름~~ 2004-12-22 00:25:34 907
지금까지 구름이 해온 추론이 맞다는 징후는 혜능을 떠나보낸 후에 홍인이 보여준 태도에서 제일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다.
홍인은 혜능을 보낸 후 며칠 동안 공양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태를 식음을 전폐한다고 한다. 더 쉽게 말하면 며칠 동안 끙끙 앓았다는 소리다. 왜였을까? 당근 홍인의 머리속은 복잡했을 것이다. 혜능이라는 미친 넘을 일단 멀리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도 있었을테고, 온 세상에 공표한 선종의 후계자 문제도 발등의 불이었다. 만약에 홍인이 혜능에게 후계 약속을 해준 것이 크게 맘에 걸리지 않았다면 다음날 바로 자초지종을 사람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홍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을 앓았을까? 혜능이 충분히 멀리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곡기를 끊고 돌아누운 이유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이유였다면 홍인은 더 태연히 식사를 하고 평상시처럼 행동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어쨌거나 홍인이라는 대선사가 보여주는 행동은 범인의 상식이 안통하는 경지에 서있다. 육조단경에는 홍인이 혜능에게 가사와 바리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이해불가능한 짓이다. 가사는 스님이 입는 옷이며, 바리는 밥그릇과 목탁, 그리고 불경 등이 들어있는 조그만 보따리다. 시주생활에 필수적인 물건이다. 그런데 혜능은 그 시점까지도 중이 아니었다. 중이 되려면 수계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수계식 때 머리를 깍는다. 그러나 혜능은 중이 될 수 없는 신분이어서 행자였다. 홍인은 중도 아닌 사람에게 중옷과 시주밥그릇을 주었다. 이건 정신나간 짓이다. 일의 순서는 후계자를 삼을 양이면 차라리 단둘이서 간단하게나마 수계식을 하고 홍인이 혜능의 머리를 깍아주어야 했다. 이게 순서다. 그런데 홍인은 중도 아닌 행자에게 중질에 필요한 물건을 주었으니 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선사의 하는 행동이나 판단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 나는 홍인이 그저 혜능을 빨리 보내는 데만 급급해서 덤벙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며칠 동안 제자들에게 닥달을 당한 끝에 겨우 실토를 하고 자백을 했는데, 그 조차도 당당하지 못했다. "여차여차하여 혜능에게 제6대 법통을 넘겼으니 너희들은 시비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의 불쌍한 5대조께서는 그저 "가사와 법이 남쪽으로 갔느니라"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면서 방귀끼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혜능이 조사스님한테서 무엇을 뺏어서 달아났다는 소리로 오해하기 좋을만 하다. 홍인은 동선사 중들이 혜능을 잡으러 뒤쫓아가는데도 이것을 막아주지도 못했다.
더 골때리는 것은 시간을 어떻게 벌어주었길래, 이 불쌍한 제자가 몇발도 못가서 잡혔다는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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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31 구름~~ 2004-12-22 08:47:23 900
사람이 한 닷새 걸으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조선시대에 한양에 과거보러 가는 사람의 경우 부산서 서울까지 보름에서 스무날 정도 걸렸다고 한다. 열흘이면 대전까지, 닷새면 못 가도 대구까지는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홍인이 식음을 전폐하고 돌아누워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혜능이 부지런히 걸었다면 그 정도 거리는 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동선사 중들은 혜능을 잡으러 나섰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동선사 중들이 혜능을 뭐하러 잡으러 나섰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잡으면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었을까. 살생을 금하는 불자들이, 더구나 승려들이 암만 오랑캐 행자라 해도 산사람을 때려죽일 생각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면 죽이지는 않더라도 몰매라도 가할 생각이었을까? 혜능이 그래야할 만큼 지은 죄가 뭐란 말인가? 만약에 혜능이 법통의 후계자로 낙점받은데 대한 앙심이나 시기라면 이건 혜능을 붙잡아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것을 번복할 사람은 홍인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승에게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아달라고 청원할 지언정 혜능을 치도곤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때문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동선사 중들이 달려간 이유는 하나 뿐이다. 바로 홍인이 혜능에게 주었다는 가사와 바리떼이다. 수백명이 넘는 중들이 상시 먹고자는 대사찰에서 가사 한벌이 그리 소중할 리는 없다. 그것이 달마조사의 사리마다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동선사 중들이 분기탱천했던 이유는 혜능이 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계도 받지못한 미천한 오랑캐가 가사와 바리떼를 가져갔다는 소리에 스님들이 야마가 돈 것이다. 거기다가 홍인은 자기가 손수 주었다거나 하는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사가 남으로 갔느니 하고 안개자욱한 소리만 했다. 나는 생각컨데 이때 동선사 중들은 혜능이 가사와 바리떼를 조사스님한테서 훔치거나 뺏어서 달아난 것으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가사는 단순한 옷 한벌이 아니라 바로 중이라는 신분의 상징이다. 가사와 바리떼를 훔쳤다는 것은 스님이라는 신분을 도둑질한 것이다. 동선사 스님들은 공부할 때는 보여주지 않았던 결기를 이 신분도둑놈을 잡는데는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상한 것은 대구만큼은 가 있어야 할 혜능이 얼마 못간 자리에서 덜미가 잡혔다는 것이다.
혜능은 왜 며칠 동안 멀리 도망을 안가고 동선사 가까이에서 깔짝거리다가 잡으러 온 스님들한테 붙잡히고 말았을까? 나는 혜능이 부러 잡혔다고 본다.
혜능은 영리한 사람이다. 홍인의 사탕발림에 홀려서 헤어지고 보니, 영 이게 아니올시다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누가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후계자 임명장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달마조사의 의발을 전수받지도 못했고, 하다 못해 추천서 한장 챙기지를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쳤겠지.
훗날에 돌아왔을 때 홍인이 오리발 내면 자기만 병신된다는 결론이 쉽게 나왔다. 그래서 혜능은 멀리 가지 못하고 동선사 주변을 맴돌았다. 자기가 홍인으로부터 제6대조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확인 내지는 증거 또는 증인을 남겨두려 했을 것이다.
혜능은 뒤쫓아온 스님들에게 붙들림으로써 목적을 달성했다. 이때 혜능이 보여줬다는 신통력은 소개할만한 가치를 못 느낀다. 혜능에게는 가사와 바리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어차피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어느 절에를 가도 스님되기는 글른 몸이었고, 아무 절에나 다 게송의 응시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선종의 6대조가 되기에 충분할만큼 혜능이 깨달은 선사였다면 어느 절이라도 가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송이나 선문답에 의한 시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냐는 그 시험을 당당 스무세살의 약관에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5대조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은 혜능의 경지로도 그후 15년 동안 엉덩이 붙일 절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혜능은 그 후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혜능의 진술에 의하면 사냥꾼 무리를 만나서 그들과 합류한 후에 사냥질을 했다고 한다. 사냥이 뭔가? 살생이다. 선종의 제6대조는 15년 동안 살생을 하며 살았다. 물론 혜능은 변명하기를 '자기는 고기를 못먹는 체질이라고 동료들에게 말하고 언제나 풀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먹던 안먹던 사냥은 그 자체가 살생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후 다시 나타날 때까지 혜능이 절에 있었다던가 스님 생활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수계를 받은 사실이 있을 것이고, 같이 공부한 스님들의 이야기도 나올 것이고, 그 기간 중에 이미 인구에 회자될만한 사건들을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혜능은 일자무식의 나무꾼으로 동선사를 찾아왔고, 15년 후에는 살생의 업을 잔뜩 쌓은 몸으로 온 몸에 피냄새를 풍기면서 이번에는 광주의 법성사에 나타났다.
혜능이 광주의 법성사에 홀연히 나타난 것은 38세의 장년이 되어서였다. 스승 홍인은 이미 죽은지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홍인은 혜능을 떠나보낸 후 3년 쯤 뒤에 죽었다. 모르긴 해도 혜능 사건은 내내 그를 괴롭혔을 것이고, 소심하고 심약한 홍인이 그 고뇌번민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수명을 단축시켰을까 생각하면 구르미 맴이 아프다. 그렇게 타이르고 구슬러서 멀리 멀리 가버리라고 일렀건마는 그 새벽에 가사장삼을 물에 적셔가면서 노 저은 보람도 없이 이 띨빵한 제자는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뽀록을 다 내버린 것이었다. 후계자를 정했다던가 법통을 넘겨주었다던가 하고 똑 부러지게 말을 하지 않고 안개를 피우고 구렁이 담넘는 쑈를 보여준 것이 마카 허사가 되버린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혜능에게 보란듯이 물려주고 말걸." 하는 후회도 치밀었다. 그러다가 한편으로는 "이 넘이 어떤 넘인지 알아야 법통을 물려주지... 아이고 골이야"하고 돌아눕기도 했다. 이 얄미운 놈은 지 맘도 모르고 사람들한테 나발을 있는 대로 불어 버린 것이다. 잔머리를 굴리다가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홍인은 그 자책과 내상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고 부처님 면회를 서둘렀다.
어쨌거나 홍인의 이 황당한 양위 소동으로 말미암아 전통과 역사에 빛나는 선종은 졸지에 조사 유고 사태를 빚게 되었다. 5대조가 후계로 삼았다는 머리 땋은 머시마는 종적을 알 길이 없고, 5대조는 대책도 없이 입적해 버린 것이었다. 종통이 없는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1년, 2년, 3년... 그러나 행자 조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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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34 구름~~ 2004-12-22 15:30:08 996
어느 따뜻한 봄날, 점심공양을 잘 드신 스님들이 식곤증에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쯤, 할일이 너무나도 없다는 것이 유일한 삶의 문제였던 법성사의 스님 두분이 세계 철학사에 길이남을 대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절 마루에 세워놓은 깃발이 바람이 불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한 스님이 '음... 바람이 부니 깃발이 움직이는군'하고 잠꼬대같은 소리를 했는데, 이를 받아 옆에 한 스님이 반박하기를 "아냐, 저건 바람이 움직이는 거야" 했다.
"머시라꼬? 일마가 돌았나? 저기 깃발이 움직이는 거지 우찌 바람이 움직이는 거고?"
"이 땡초가 밥을 잘못 묵었나? 저기 바람이 움직이는 거지 깃발이 움직이는 거가?"
'깃발이 움직인다', '바람이 움직인다'를 놓고 두 땡중이 드디어 멱살잡이에 들어가려는 찰나, 어디선가 부처님의 화신인 듯, 온화한 미소를 띤 거룩한 선사 한분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두 땡초를 보고 가라사대 왈,
"저건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니라."
바이블에 보면 요단강가에서 예수님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베드로를 보고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시니 베드로가 두말도 않고 그물을 걷고 예수님 뒤를 따랐다는 일화가 나온다. 이 정도는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 얼마나 황홀한 소리고? 그래서 지금도 기독교의 문양이 바로 물고기다.
그런데 바람처럼 나타난 이 사나이의 한마디에 쌈박질을 하던 두 땡중은 물론이고 법성사 마당에서 졸고있던 중들이 전부 뻑 가버렸다. 마침 해우소에 가려고 마당에 내려서던 인종법사가 그 말을 듣고 이 싸나이를 법당 위에 모셔서 윗자리에 앉으시게 했다.
이 일화는 혜능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 법성사를 비롯한 불교의 수준이 얼마나 형편무인지경이며 참담했는가를 보여준다. 얼마나 중들이 밥처먹고 할 일이 없었으면 깃발이 움직인다, 바람이 움직인다를 갖고 논쟁을 하냐 이말이다. 세계의 어떤 철학사에도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안 나온다. 유치원 얼라들의 이야기지 이게 출가수행자들의 이야기겠나? 내가 이 일화를 처음 읽은 것이 스물이 되기 전이었는데, 읽고나서 욕밖에 안 나왔다. '뭐 이런 미친넘들이 다 있지?'
이게 얼라들 소꿉살이하다가 나오는 소리지 무슨 철학적인 논쟁이나 된다고 불교사에 버젓이 올라와 있으며, 선의 창시자라는 6조혜능은 또 뭐하는 짓이고? 신수가 지은 게송을 모작해서 동선사에서 한번 히트쳤던 그 수법을 또 써먹고 나온다.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니라' 개뿔. 이게 무슨 선지식이야? 그냥 말장난이야. 처음 싸웠던 두 땡중이나, 끼여든 혜능이나, 끔뻑 넘어가서 혜능을 상좌로 모신 인종법사나 다 도낀데낀이야. 불교가 그랬던 것이야. 한때. 지금도 뭐 나아진 것도 없지만, 내가 쪽팔리서 어데가서 불자란 소리를 못하고 산다.
더 가관인 것은 이 일화를 읽고 오늘날에도 뿅가는 날중생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고.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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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35 ( 4 ) 구름~~ 2004-12-22 17:52:45 1105
오호 통재라! 달마독이 퍼지기 시작한지 채 2백년이 되지도 않아서 가장 엄격하고 정밀하고 심각하며 진지한 학문의 꽃이었던 불교가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참람한 말장난 개그로 타락해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고사하고 초딩이들 사이에서도 '깃발이 움직이는 거다', '아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거다' 수준의 언쟁은 없다. 이 다툼에는 어떠한 철학적 가치도 없고, 논리적 규명도 필요없으며, 종교적 물음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 의미없는 헛소리일 따름이다. 문제는 불철주야 경전을 탐독하고, 궁극적인 의문에 도전하여 그 답을 찾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하고, 한편으로는 중생을 제도하는데 여념이 없어야 할 멀쩡한 스님들이 이런 농담따묵기나 하면서 소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 한심한 것은 정작 본인들은 농담따묵기가 아니었고 딴에는 심각하고 진지한 설전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전에 뛰어든 6대조사 혜능선사께서도 장난이 아니었다. 아주 진지한 대답이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 혜능의 답변은 선불교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며, 선불교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개선문이다. 선불교 역사에서 선문답이라 하는 헛소리 중 백미로 꼽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라. 저게 답이 되는지를. 답은 고사하고 말이나 되는 지를. 애초의 설전이 농담따묵기였으므로 답도 그럴 수밖에 더 있냐 하면 말은 그렇다. 그러나 정말 깃발이나 바람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가 물어보면 이건 논리적으로 답이 안 나온다. 원효가 깜깜한 밤에 해골물을 마시고 대오했다는 일체유심조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원효의 일체유심조는 그야말로 하나의 화두로서 손색이 없다. 그것 자체가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그 해골물 사건을 가지고 선사들은 10년 동안 생각할 거리가 나온다. 그러나 깃발 사건은 그렇지 않다. 해골물이 밤에는 꿀물이었는데 해골임을 안 순간에는 썩은 물이었다. 같은 물이지만 생각에 따라서 감로수도 되고 시체 썩은 물도 되는 것이구나 하는데서 일체유심조라는 각성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깃발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깃발이 움직이고, 우리 마음이 바람이 움직이는 거라 생각하면 바람이 움직이나? 두 땡초의 설전부터가 말장난이었고 혜능의 저 빛나는 명답도 들추어 볼 수록 똥바가지다. 원효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빛나는 영감은 고사하고 하나의 우화로서도 함량이 미달이다.
이 일화가 갖는 의미는 한가지뿐이다. 혜능으로부터 시작되는 선문답이란 황홀한 헛소리의 본격적인 효시라는 것이다. 5대조까지 전해지는 만화같은 이야기들은 예고편일 뿐이었다. 이로부터 불교는 찬란한 헛소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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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36 ( 2 ) 구름~~ 2004-12-24 13:23:33 1152
우리의 히어로 혜능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혼자였고, 돌아오기 전의 이야기는 깜깜하다. 혜능은 얽힌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린 알렉산더처럼(31일날 애들과 알렉산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누구도 풀지 못할 철학적 난제를 단 한마디로 해결해 버리고 그 길로 인종법사의 상좌로 모셔진다. 그리고는 엄청난 말빨로 단번에 법성사 땡중들을 제압해 버린다. 이것도 물론 소개하겠지만 혜능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법성사 중들의 수준에 문제가 있었다. 어쨌건 청산유수같은 설법에 뻑간 인종법사가 "혹시 15년 전에 사라졌다는 선종의 6대조사가 아니십니까?"하고 물었다. 이때 혜능은 맞다 틀리다 대답을 않고 그저 "부끄럽습니다"라고만 했다고 전한다. 왜 선를 하는 사람들은 딱 부러지게 대답을 못하고 이렇게 구렁이 트위스트를 추는 것일까? 기면 기고 아이면 아이고가 없다. 매사 이런 식이다. 부끄럽기는 뭐가 부끄럽다는 뜻일까?
"하이고, 몰라뵈었나이다. 용서하소서."하고 바싹 엎드린 인종법사는 선종의 6대조사의 머리를 자기가 깎아드리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드디어 혜능은 수계를 받고 비로소 스님이 되는 것이다.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햇던 것처럼 천하의 혜능도 수계를 받아야 스님인 것이다. 비로소 선종은 조사의 유고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 15년이 흐르는 동안 혜능의 동선사 탈출 사건은 엡솔롯 탈출처럼 하나의 전설로 변해 있었다. 사건 자체는 황당한 것이었지만 5대조인 홍인이 후사를 점지하지 않고 고만 꼴까닥해버리고, 법통이 공중에 떠 버리자 사람들은 자연히 홍인에게서 법통을 이어받고 떠나노라고 했던 그 머시마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 미친넘이라도 나타나주지 않으면 달마의 맥이 여기서 끊길 판이었다. 15년을 기다리다 보니 차츰 사람들의 기억은 신비로운 6대조사의 환영을 갖게 되엇을 것이다. 영리한 혜능은 그것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15년. 영리할 뿐만 아니라 인내심도 대단한 사람이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할 줄도 안다. 전설은 시간이 만든다는 것도 알고 그는 15년을 기다렸다. 그 동안 사냥질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시도 자신이 선종의 6대조사라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불과 스물셋의 나이에 5대조인 홍인으로부터 후계자로 지정을 받았는데 어찌 한시인들 잊을 수 있었으랴. 화려하개 복위하는 그 날을 꿈꾸면서 이 거지왕자는 부단하게 자신을 연마했다. 물론 제대로 된 공부는 꿈꿀 수 없었다. 독학을 할 학문의 기초도 없었고, 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자신을 받아주는 건 고작 사냥꾼 무리뿐이었으니까. 수련이라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창작이었다. 혜능은 자신이 만든 독창적인 교리를 들고 나타났다. 어디서 줏어들었는지 달마교의 교리와 비슷하게 끼워 맞추기는 했으나 불교와는 전혀 다른.
의아스러운 것은 이 천재가 15년의 방랑기에 단 한명의 추종자도 만들지 못해서 여전히 혼자였다는 점이다. 무식한 사냥꾼 두어명은 감화를 시켜 똘마니로 만들었을 법도 하건마는 우리의 6대조께서는 수발드는 시종 하나 없이 나타나셨던 것이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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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37 ( 1 ) 구름~~ 2004-12-27 16:48:50 1066
수계는 출가비구가 되는 의식이다. 수계식의 가장 커다란 세가지 의미는 법명을 받는다는 것과 머리를 깎는다는 것과 스승을 가진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으면서 세례명을 짓듯이 모든 스님들은 수계식 때 법명을 받는다. 이 법명을 지어주고 머리를 깎아주는 분이 바로 스승이 된다.
때문에 혜능이 법성사의 인종법사에게서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면 인종법사가 혜능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인종법사가 자기로부터 수계를 받은 혜능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계식에서 인종법사는 혜능의 법명을 지어주지 않았다. 혜능은 그의 속명이다. 그래서 혜능은 속세의 이름을 스님이 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한 사람이다. 이런 점들을 살펴보아도 애당초 혜능은 불교도가 아니고 불교라는 종단의 규칙을 따를 생각도 없었던 사람이다. 혜능이 태어난 날, 스님 두분이 찾아와 중생을 제도하고 능히 불사를 할 아이이니 이름을 혜능이라고 지으라 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기쁘다 혜능 오셨네, 성인의 탄생에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찾아오는 것은 꼭 창조주의 독생자라야 일어나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혜능의 어머니는 젖이 모자랐는데 신인(神人)이 감로수를 먹여 키웠다고 한다. 탄생 신화는 예수그리스도를 능가한다. 유모가 신인이었다.
수계라는 것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뒤를 따라 해탈정각과 중생제도의 길을 가기로 맹세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혜능은 이런 맹세를 한 바 없고, 부처님께 귀의하겠다고 결심한 바도 없다. 혜능은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된 것이 아니라, 스님들의 오야붕이 되었다. 수계를 받은 후에 수행하고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공부가 완성된 사람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공부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혜능이 스스로 깨친 대단히 독창적 세계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중들한테 가르치고 퍼트리기 위해서 수계를 받았다. 혜능은 배우기 위해 출가를 한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해 출가를 한 사람이다. 그는 수계를 받기 전에도 불교를 공부한 적이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혜능은 그의 이력 어디를 들추어보아도 그를 불자라고 인정해 줄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다. 홍인과 인종이라는 자격미달의 중들이 부처님의 교의를 무시하고 종단의 규정도 아랑곳없이 마도에 무릅꿇고 불교를 더럽히고 말았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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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38 구름~~ 2004-12-27 15:20:56 1091
앞서 말했지만 불교 교리의 두 기둥은 연기와 중도이다. 이 두가지가 모두 공(空)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空)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면 끝이다. 그것이 바로 정각이고,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 이 공(空)의 실체를 알면 인생과 생노병사의 모든 의문이 다 풀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게되는 순간 고뇌와 번민으로부터 풀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두가지 뿐이다. 영원히 살던가, 아니면 죽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던가이다. 전자는 불가능하지만 후자는 가능하다. 죽음이란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고나면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알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공(空)이다. 이 공(空)이 바로 세계의 실상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여 법(法)이라 한다.
공(空)은 결코 무(無)와 동의어가 아니다. '없음(無)'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있는 것인가? 아니다 '있음(有)'도 아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면 그럼 뭐란 말인가? 모든 것은 연기를 따라 일어난 가실상이다. 용수는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했다. 진실로 공한 가운에 묘한 것이 있다는 모순된 어법이다. 진실된 공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데, 그 속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노자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유황유홀, 홀혜황혜. 황혜홀혜, 요혜명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두 성인의 눈에 비친 이 세계의 본바탕은 그렇게 신비롭고 불가해하며 황홀하고 홀황한 무엇이었다.
두 성인이 파악한 바 이 세계는 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을 제법의 실상으로 본다. 이것이 중도이다. 중도의 공사상을 가장 잘 표현해 놓은 것이 반야심경의 구절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부연이 뒤따라 나온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靜), 부증불감(不增不減).
색이면서 동시에 공이고, 공이면서 동시에 색인 이 것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이라고. 때문에 공에는 색이 없다(空中無色)고 결론 짓는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한치의 빈틈도 없이 증명해 낸 것이 용수의 중론이다.
혜능이 수계를 받은 후에 선종의 6대조사로 행세하면서 떠들어 설법한 내용은 이런 연기와 중도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떤 논리적인 검증도 뒷받침되지 않은 헛소리의 나열이었다. 그건 연기도 아니요, 중도도 아닌 '불이론(不二論)이란 말장난이었다. 세상 만물을 두개씩 짝지워서 'A와 B는 둘이 아니고, C와 D는 둘이 아니고, E와 F는 둘이 아니고....' 하염없이 '둘이 아니고'로 이어지는 하품나는 소리 뿐이다. 둘이 아닌데 뭐가 어쨌다는 거냐? 하고 물으면 아무 할말이 없는 날맹탕같은 지겨운 헛소리.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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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39 ( 1 ) 구름~~ 2005-01-10 16:59:26 910
내가 작년에 온누리의 큰언니께서 외국인 근로자 후원의 밤 행사에 초청해주셔서 서울을 갔을 때였다. 아이들하고 같이 작은 백화점에를 갔는데 - 규모는 작아도 분명 백화점이었다. - 큰아이 눈에 아주 맘에 드는 핸드백이 발견되었다. 엄마한테 어울리는 핸드백이라고 생각되었던지 내 팔을 끌길래 들여다보았더니 디자인, 색상, 재질, 장식 등이 나무랄 데 없는 상품이었다. 특히 얼마나 싼지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면 돈번다는 말이 과히 틀리지 않는 경우였다. 그래도 한국 아줌마가 안 깎고 사면 뭔가 속은 듯 하자나. 그렇게 싼 가격에서 또 얼마를 빼고 핸드백을 샀다. 핸드백이라기보다는 조금 큰 손지갑이었다. 그런데 점원 아가씨가 물건을 건네주기 전에 "아줌마 딱지 바꿔 드릴까요?" 하고 묻는 거였다. 나는 딱지를 좀 더 나은 걸로 바꾸어주는 줄 알고 "그러세요" 했다. 그랬더니 그 점원 냉큼 마크를 부욱 뜯어내고는 새 마크를 딱 붙여주는 거다. 보니 명품 '에트로' 상표였다. 2만원짜리 남대문표가 순식간에 백만원짜리 진품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역시 서울은 마산 시골하고는 노는 물이 달랐다. 마산 창원에는 이렇게 노골적인 짝퉁짓은 구경하기 힘들다. 점원도 뭐 전혀 어색하거나 민망한 눈치가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원래 그렇게 판다는 그런 태도였다. 아이들하고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웃었다. 나는 오늘도 2만원짜리 '에트로' 지갑을 들고 동창들을 만나고 왔다. 갱수기 손에 들린 명품 '에트로'가 짝퉁인 줄이야 눈치챘을라고. 저거가 들고 나온 것인들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제. 울나라 짝퉁은 진짜 겁나게 명품과 빼닮았다. 짝퉁 표띠가 거의 안 난다. 오리지널 메이커의 검사부 직원들도 한국 짝퉁은 보고서 분간을 못해낸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다.
새해 벽두에 왠 짝퉁 타령이냐 의아하실 법하다. 새해에는 구르미가 기가 막힌 짝퉁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게 바로 선불교란 짝퉁이다. 불교라는 레떼르를 붙이고 불교인 척 행세하지만 기실은 전혀 불교와는 무관한 짝퉁불교, 사기불교, 남대문 불교, 길표불교에 대한 보고서를 벗님들께 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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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0 ( 1 ) 구름~~ 2005-01-10 20:04:09 908
지금까지의 연재를 통해서 나는 선의 창시자라는 혜능이 선종의 6대조사가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교와 관계없는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를 말했다. 선을 창시한 혜능은 불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공부한 적도 없었고,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바탕인 학문적 소양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문맹이 불교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학자가 혼자 궁리해서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혜능이 독학을 했건, 혼자서 궁리를 했건, 전생의 공덕이 있어 천재성을 물려받았건 간에 그가 무언가를 알아낸게 있다면 그것은 혜능의 것이지 석가세존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한가지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두사람의 천재적인 물리학자가 서로의 교류나 지식의 공유없이 각자가 독자적으로 연구한 결과, 둘다 똑같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즉 혜능이 일자무식이고,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중이 될 수조차 없어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천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홀로 깨친 것이 부처님의 깨친 것과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방법은 달라도 그 지향하는 목적지와 그 궁극의 목표는 동일한 것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반론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나는 부처님의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일 수 있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만약에 여러가지 길이 있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왜 석가세존은 그것들을 다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부처님도 몰라서 안 가르쳤을까? 그러나 선가의 수행법은 부처님이 다 해보시고 난 후에 하지말라고 만류하신 것이다. 금하신 바다.
나는 부처님이 다른 방법도 있는데 몰라서 혹은 다른 이유로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달마나 혜능이 그럼 부처님도 못찾은 길을 새로 찾아냈다는 소리가 된다. 청출어람일까? 그것을 확인해 보자.
지금부터는 과연 달마나 혜능이 주장한 바와 제자들에게 가르친 바가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인가를 하나 하나 따져보자. 달마가 10년 동안 벽보고 않아서 갔던 그곳과, 혜능이 활들고 사냥질 하면서 깨우친 바가 석가세존의 정각과 같은 것인지 살펴 보자. 과연 우리는 벽보고 눈감고 앉아서 또는 일자무식에 활들고 사냥질하면서 부처가 될 수 있겠는지 그 가능성을 알아보자.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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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1 구름~~ 2005-01-11 10:59:03 957
달마교와 혜능의 선이 불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려고 하면 우선 무엇이 불교인가가 분명하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됫박이 제대로 만들어졌는가 재 보려면 표준 됫박이 먼저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며, 그분의 말씀에 귀의하고 실천하여 그분의 뒤를 따라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생사윤회의 업장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평온을 얻는 길과 방법에 대한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전자를 사성제라 하고 후자를 삼법인이라 한다.
우리는 사성제를 통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고, 삼법인을 가지고 이 세계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이 양자를 모두 어우르는 원리를 학문적으로 이름붙이면 연기와 중도가 된다.
때문에 불교는 사성제와 삼법인이라는 절대진리를 연기와 중도라는 이론으로 밝힌 과학이요, 철학이다. 아니 불교를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불교가 과학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불교적이어야 한다. 불교적이지 않은 과학은 불완전한 과학이요, 아직 채 밝혀지지 않은 과학이요, 검증되지 않은 과학이요, 가설로서의 과학이다. 불교적인 과학일 때 비로소 과학은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삼법인은 과학의 토대를 이루고 과학적인 모든 삼라만상이 존재할 수 있게 하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절대진리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법칙은 그것이 원리라고 이름지은 것이라 해도 절대진리는 없다. '우주에 광속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과학적 결론도 특수한 조건과 상황하에서는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나 삼법인은 절대 무너지지 않으며, 훼손되지 않으며, 수정되지 않는 만고불변의 절대진리이다. 때문에 불교가 과학적인가를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고 주객이 바뀐 것이다. 불교는 절대진리이며, 과학은 이를 검증하고 확인하는 수단일 따름이다.
회자정리,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는 절대진리를 우리는 왜 알아야 하는가? 왜 깨달아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사성제를 통해 우리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것을 모르고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기에 의해 이 꿈같은 세상을 세세윤회하면서 고통의 질곡 속을 유전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이 허상의 세계에 붙잡혀있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보셨다. 그 원인을 우리는 왜 만드느냐? 무가치한 대상들에 대해서 무의미한 집착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집착을 끊으면 우리는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말이 쉽지. 집착을 무슨 수로, 어떻게 끊는다는 말일까? 눈감고 벽보고 돌아앉아 10년만 버티면 집착이 저절로 다 끊어지나? 화두를 물고 하루종일 벽에 대글빡을 찧으면 집착이 사라지나? 부처님은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셨다. 집착을 끊는 힘은 오직 한가지 '앎'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부처님은 스스로의 체험으로 아셨던 것이다. 그 올바른 앎을 정각이라 했다. 그 앎을 얻은 것을 해탈이라 한 것이다. 해탈이 신비스러운 어떤 영적 체험의 상태나 경지가 아니다. 바로 삼법인을 체득하여 깨달으면 그것이 해탈이다. 회자정리를 깨달으면 모든 대상으로부터 애착을 거두게 된다. 제행무상을 알면 헛된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제법무아를 알게 되면 절로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게 해탈이다. 그렇다면 해탈이 곧 부처냐? 아니다. 해탈은 부처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삼법인의 절대진리를 한점 티끌만한 의혹도 없이 온몸으로 깨달아 납득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생명체로서 심어진 뿌리깊은 습기가 남아있다. 이 습기를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것이 제거된 만큼 완전한 부처의 경지로 다가가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단계까지 이 습기를 제거하신 분이다.
그러면 달마와 혜능은 뭔가? 그들이 하는 짓은 뭔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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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2 구름~~ 2005-01-11 19:56:03 903
선불교라는 해괴한 수행교단의 사도들이 외우고 다니는 주기도문이 있다. 일컬어 달마가 제창한 선의 종지라는 것이다. 전부 4개의 구절인데, 앞의 두개는 날조된 거짓말이요, 뒤의 2개는 황당한 헛소리다. 선불교의 주기도문은 제법 유명해서 당나라 때는 절마당의 개도 외우고 다녔다. 교외별전에 불립문자요, 직지인심이면 견성성불이라 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교외별전이 무슨 소리냐 하면 종교의 진수는 비밀리에 따로이 전해졌다는 말이다. 달마는 이런 새빨간 거짓말로 천하중생을 속여먹고 지옥에 갔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비밀리에 따로 은밀하고 내밀한 전수법에 의해서 전해진 적이 없다. 달마의 선의 종지는 첫마디부터가 완전한 날조요 쌩구라요 철면피한 거짓말이다. 부처님은 깨달아 아신 모든 것을 모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근기와 지식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공개리에, 백일하에 투명하게 전해주셨지, 어느 누구에게도 은밀한 속삼임을 들려주신 적이 없다. 도대체 무슨 법이, 어떤 교가 별도로 전해졌다는 소리인가?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란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이 연꽃 한송이를 들어보이셨을 때, 마하가섭이 홀로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일에 대하여 경에 적혀있기를, 마하가섭이 대견하신 부처님께서 가라사대, "나에게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 이르는 비법이 있다. 이 비법은 형상이 없어 나타낼 수 없으나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문자나 말로는 표현할 수도, 전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비법의 열쇠를 마하가섭에게 전한다"리고 하셨다는 것이다.
달마는 이 일을 거론하여 불교의 진수는 문자나 말이 아닌 내밀한 비법으로서 별도로 전해졌다고 구라를 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 기록은 의심스러웠다. 평소의 부처님 답지 않은 말씀인데다가 평상시의 가르침과도 전혀 어긋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었을까? 정말 진짜 법은 별도로 마하가섭에게 넘어간 것일까? 나머지 1천2백55명의 제자들은 전부 부처님한테 뒷통수를 맞고 바보가 된 것일까? 이 사건이 유일하게 기록된 경전은 오직 '대범천왕문불결의경' 하나 뿐이다. 이 경은 대장경에 포함되지도 못하는 짜투리 경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근세에 들어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이 경은 사용된 언어와 고증의 확인을 통해볼 때에 백프로 조작된 위경임이 밝혀졌다. 누가 조작했을까? 달마는 이 날조된 경전의 구절을 들먹여서 '교외별전'이라고 사기를 친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불교에 교외별전은 없다. 부처님은 그렇게 은밀하게 한두명에게만 법을 전하신 적이 없고, 밝혀서 설명치 않고 숨겨놓으신 비법이라는 것도 없었다. 부처님이 아신 모든 것은 다 말씀하셨고, 그것은 문자로 남아서 오늘날에도 전하는 바다. 부처님이 문자나 말로 표현할 수도, 전할 수도 없는 비법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날조된 사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악한 달마교의 사도들이 불교를 도둑질해서 자기들의 가면으로 뒤집어쓰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인 것이다.
교외별전이 아니라 교전명백이다. 교는 분명하고 밝게 전해진 것이다. 달마의 선의 종지라는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조금 더 살펴보자.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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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3 ( 5 ) 구름~~ 2005-01-12 21:22:41 1022
정각해탈, 성불열반이 불교의 목표라면 성통공완 우화등선은 도교의 목표이다. 즉 신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교에서는 수백년을 산 진인들의 열전이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써 전해져 오고 있으며, 중인환시리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인(仙人)들의 기록이 역사로서 남아있다. 도교의 수련을 흔히 신선술, 또는 도인술, 또는 양생술이라 한다. 이런 신선이 되는 수행의 방법은 극히 내밀한 것으로써 각 도관마다 비전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불교와 달라서 이런 신선술은 교과서가 없다. 즉 무소의경전(無所依經典)으로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런 비전의 최상승 경지는 다수의 제자들에게 강의되지 않으며 극히 소수의 계승자들에게만 물려진다. 이런 도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무가들도 이런 성향을 띤다. 무협지의 주된 테마가 바로 이런 무공의 비전이다. 도교의 신비주의가 뿌리깊게 스며든 중국에서는 부처님의 불교처럼 비전이 따로이 없고 모든 것이 명백하고 밝게 드러난 진리라는 것이 쉽게 어필되지 않았다. 아무리 이게 다다 라고 설명해주어도 중국인들은 '그래도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그것을 들여다 보려고 하는 것이다. 최고의 것, 지고의 가르침은 몰래 전승해주고 숨어서 배운다는 이상한 습벽이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두 도교에서 생긴 풍토이다. 승복을 걸치기 전의 달마가 도사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달마에게서 나온 선불교라는 것이 불교와 도교의 트기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불교보다는 도교에 더욱 가까운 트기였다. 선불교라는 사생아는 불교라는 어머니를 닮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지 애비를 쏙 빼닮았다. 사람들은 이 선불교의 애비가 누군지를 모르고 그 어미만을 보고 '불교의 자식'이라고 쳐주었던 것인데, 그러나 일마는 결코 불교의 호적에는 오를 수 없는 놈이다.
사생아를 낳고야 만 달마는 이 애비없는 불쌍한 자식을 억지로 불교의 호적에 올리려고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위조하고야 만다. 그래서 마하가섭을 교외별전의 시전으로 조작하고 달마를 가섭의 28대손으로 조작하였다. 이 엉터리 호적의 이름이 전등록이다. 스승과 수제자 사이에 내밀하게 이루어지는 법통의 전수라는 도교 특유의 승계방식을 불교에 이식하면서 마치 그것이 불교 본래의 방식인 것처럼 조작한 것이 바로 염화미소라는 날조된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도교의 전수방식을 부처님이 시범해 보이신 불교의 본래적 방식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선불교는 달마의 범죄적인 사기극의 산물이다.
본시 부처님의 불교에는 교외별전이 없으며, 불립문자라는 해괴한 소리가 있지 않았다. 부처님은 그런 무당파의 장문인 같은 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선불교라는 사생아를 족보를 위조해서 불가에 입적시키는데 성공한 달마는 혹시 사람들이 이 아이의 정체를 알게 될까봐 노래를 지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이 노래는 아이의 혈통을 감추는 비밀의 커튼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노래야말로 선불교가 석가세존의 핏줄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히는 산 증거가 될 줄은 달마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천년 후에 구름이 태어나서 이 노래의 비밀을 밝혀내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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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4 구름~~ 2005-01-13 20:46:35 766
달마는 사람들이 헷갈리기 좋도록 교묘하게 암시와 최면을 걸고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구절 속에 들어있는 '성불(成佛)'이 그것이다. 이 한 마디 때문에 사람들은 달마의 선이 마치 성불의 첩경인 줄로 깜빡 속고 말았다. 성불. 부처가 되라는 소리다. 그런데 문제는 달마가 말하는 부처는 신선이지, 석가세존이 이루신 부처가 아니라는 점이고, 그 방법이 석가세존이 가르쳐주신 방법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달마는 직지인심(直旨人心)하여 견성(見性)하면 그 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헛소리 나발을 불었다. 공부도 필요 없고, 경전도 소용없으며, 근기도 막론이고, 아저씨나, 아줌마나 할배나 할매나, 심지어 개나 소나 전부 자기 마음 하나 척 바로 보고 자기 본성을 척 보면 곧바로 부처된다 이 소리다. 이게 바로 개뿔이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다. 그래, 달마 이후 천년 동안 그렇게 해서, 지 마음 하나 척 보고 곧바로 앉은 자리에서 성불한 넘 있으면 함 나와 봐바. 잘난 낯짝 함 보자.
달마는 저런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어린 백성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놓고, 사도말법으로 정법을 흐려놓고 지 말에 책임도 안 지고 죽었다. 아주 나쁜 넘이다. 왜냐? 달마는 저 소리에 대해 꼭 해줘야 할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는 건지,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 본성을 보면 뭐가 달라지는지, 자기 본성을 본 것과 성불하는 것, 즉 부처가 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각론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벙어리 흉내만 내다가 죽었다. 하기사 교외별전이고 불립문자라 했으니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이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법통을 전수해준 혜가한테만 귓속말로 전해줬는지 그건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구르미처럼 알고지비 하는 불쌍한 중생들의 열망에는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후 지금까지 천년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본성이 뭔지, 마음이 뭔지, 어떻게 보는 건지, 그걸 보고서 우찌 부처가 된다는 소린지 오리야 기리야 영문도 모른 채 달밤에 봉사들끼리 어깨동무하고 불놀이 구경가듯이 더듬더듬 하다가 모진 인생, 허송세월, 도로아미타불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도 절마다 가봐. 속절없이 억울하게 고생만 하다가 골병이 들어서 뼈마디마다 진주가 생긴 넘들이 다비하면서 남긴 사리가 밤만 되면 기나와서 유령처럼 춤을 춘다. 속고 산 인생, 아니 중생이 서럽고 억울해서.
달마가 저걸 선의 종지라고 척 내농께네 천하의 돌중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환호를 지르고 난리가 났지. 마치 구름이 이번 연말에 '오페라의 유령' 영화보고 감명받은 것 맹쿠로 뻑 가고 자빠진 거다. 왜냐? 공부 안 해도 된다 소리였거든. 그 골치아픈 방대한 경전들을 날마다 디다보고 궁리하고 이해하고 그 이치에 통하려 하니까 안 그래도 근기가 80% 부족한 넘들이 죽을 맛이었는데, 달마 얘기를 들어봉께네 망구에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거든. 척 한 손가락 가리켜 지 마음만 보면 된다 카능기라. 할배 할매, 얼라들까지 난리가 났제. 일자무식 영감 할매도 할 수 있고, 영희도, 철수도 계남이도 할 수 있는 일인게라. 지 마음 지가 보는데 그거 못할 시러배 아들넘이 어디 있겠노? 부처가 되고 안되는 건 두고 볼 일이고, 당장에 마음 디다보는 거야 식은 죽 먹기제. 그래서 너도 나도 팔만대장경을 갇다 버리불고, 그날부터 벽보고 앉아서 눈감고 용을 쓰기 시작했는게라. 그노무 마음이 무엇인지 그거 함 보자꼬. 그런데 달마가 이 어린 중생들한테 미리 워닝을 안 해준 게 있었다.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을 한번 보고 나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벙어리가 된다는 사실을 안 가르쳐 준 것이다. 정말 나쁜 넘이다. 지는 알았으면서 안 가르줬다. 그 후 천년 동안 줄잡아 1만명의 벙어리가 생겼을 뿐 부처는 단 한명도 안 나왔다. 어버버나무아미 벙어리타불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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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5 ( 1 ) 구름~~ 2005-01-13 23:53:45 857
좋다, 달마가 내민 선의 종지란 것이 일리가 있다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달마는 최소한 했어야 할 일이 있다. 저 소리를 하려면 달마 본인은 자기 마음을 척 한번 바로 보고 성불을 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아무리 자비심이라고는 개미 뒷다리 비듬만큼도 없는 사람이라 쳐도 구르미처럼 간절하게 구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마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보라는 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도대체 마음을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것을 주의하면서, 어떤 부작용을 피하면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빠르게, 또 쉽게 그것을 볼 수 있는지 설명을 해주고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달마는 저 소리만 내질러놓고, 마음이 뭔지도 안 가르쳐줬다. 본성에 대해서 설명도 안했다. 대관절, 마음 속에 있다는 본성이 무엇이관데 그것을 보면 부처가 되는 건지 그 이유도 말을 안했다.
달마가 남긴 저서라고 하는 '혈맥론'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일언반구도 없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혈맥론'을 달마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유일하게 달마의 오리지널 창작으로 여겨지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망구에 씨잘떼기 없고 영양가 없는 소리만 지지 늘어놓은 것이 이입사행론이다.
"곧바로 가리켜 한 마음을 보라!" 억수로 쉬운 소리 같다. 그래서 땡중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것인데... 그러나 개뿔, 쉽기는 토끼머리에 뿔나는 게 쉽지, 마음을 보는 게 쉬울 리가 있나. 달마 지부터가 그노무 마음을 보는데 장장 9년 동안이나 벽보고 앉아 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면 나 같은 중생은 도대체 몇 년이나 벽을 보고 눈감고 앉아있어야 되겠노? 한 백년 버티면 되겠나? 도대체 마음이라는 물건이 무엇이관데, 그것을 보는데 9년씩이나 그 지랄삥을 떨고 앉았노 말이다. 지는 그랬으면서, 얼레, 남들보고는 아주 쉽게 말한다. 그네 타는 춘향이 고쟁이 훔쳐보는 일 정도 되는 듯이, 한 손가락 척 가리켜 지 마음을 보면 바로 부처니라 하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를 했던 거였다. 그 마음 하나 보는 일이 팔만대장경 디벼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힘든다는 사실이다. 힘든 건 감수하겠는데 그 지랄염병을 하고도 얻는 게 하나 없는 도로묵 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중들이 이 겨울에 뭐하는지 아나? 동안거한다. 동안거 뭔지 모르지? 선방에 기드가서 봄소식 올 때까지 버티는 거다. 요즘은 그정도 해갖고 중노릇 못한다. 중도 아무나 하나? 요즘은 아주 봉안거라고 최신 시스템이 도입됐다. 아예 선방 문을 밖에서 잠가분다. 그리고 개구멍으로 세끼 공양만 넣어준다. 수행이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감옥놀이 하는 거다. 부처님이 이 꼬라지를 보시면 기함을 하실 거다. 무슨 노무 마음 하나 보는데 밖에서 방문을 잠가놓고 개구멍으로 밥을 넣어주냐? 차라리 교도소를 가라. 도 딲는 데는 그보다 좋은 곳이 없다. 해마다 땃뜻한 봄이 오면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기도 전에 동자승 대갈통만한 자물통을 채워놨던 선방의 문들이 열리면서 까까중들이 기나온다. 그런데 뭘했는지, 그 컴컴한 방구석에서 무슨 지랄염병을 하다가 나왔는지, 봤다는 넘 하나도 없다. 그 수많은 세월을, 그 많은 절마다 선방마다 빼곡 들어차서 마음을 본다나 뭐라나 했으면 한 해에 열댓명은 '왔노라 봤노라 깨쳤노라!'하고 선방문을 걷어차고 중간에 튀나오는 넘이 있어야 될 거 아냐. 그러나 눈물겹게도 우리의 선불교 역사 천년에 그런 넘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해마다 동안거, 하안거, 봉안거가 끝나고 수많은 까까머리가 햇볕 속으로 나오지만 그 중에 본 넘은 없다. 그래 디다보니 보이데? 그 마음이라는 것이 우찌 생겼데? 본성은 뭐하디? 물어보면 다 꿀먹은 벙어리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럴거면 그 짓을 뭐하려 하노?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봐라. 부처님 말씀이나 읽고 생각해라. 무슨 뜻인가 궁구해서 이치에나 통할 생각을 해라.
달마가 해놓은 짓이 이거다. 내말 틀리나? 마음을 봐? 지랄한다캐라. 미련곰탱이 콘테스트고, 깡다구 올림픽이지 그게.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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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6 ( 1 ) 구름~~ 2005-01-14 12:53:54 863
달마교는 부처가 아니라 시시껄렁한 말장난의 대가, 조사들을 만들어냈다. 이 조사라는 물건들이 뭔가. 승복을 입혀놓은 도사들이다. 염불을 하는 신선 후보생들이다.
이 물건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혜능이라는 작자이다. 선불교의 땡중들이 중국 역사 1만년에 최고의 지혜로 꼽는 사람이다. 이 혜능은 스스로 자기의 깨친 바가 달마의 그것과 일치하노라 했다. 불제자라면 당연히 자기 깨우침이 석가세존과 같은 것이라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달마와 일치한다고 말했을 뿐 석가세존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이 혜능이 선종의 6대조로 등극하사, 높디높은 단상에 주장자를 짚고 앉아 온 법당을 가득 메운 어린 중생들을 굽어보시며 '내가 너희들의 눈 앞에 극락을 펼쳐 보이리라."하시면서 거룩한 한 말씀 설법하신 내용이 6조단경에 전한다. 이 황당무계한 말장난의 백미를 같이 감상해 보자.
6조 선사 왈,
"사람의 육신이 하나의 성(城)이요, 눈, 귀, 코, 입이 네개의 문(門)이다. 이 성 안에는 마음이 주인으로 자리하고 있어 주인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도 있고 전쟁을 일삼을 수도 있다. 기쁜 잔치를 벌릴 수도 있고, 슬픔에 겨운 목마름이 더해질 수도 있다. 이 마음의 주인이 현군이면 성안이 태평하여 극락세계의 안락을 누릴 것이요, 이 마음의 주인이 폭군이면 성안이 나날이 불안해 지옥세계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항시 밖으로만 구하나 눈, 귀, 코, 입, 몸과 뜻을 잘 다스려 길들이면 이 몸이 서방이 정토요, 이 마음이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임을 알지 못한다. 나를 떠나서는 행복과 불행도 없고 기쁨과 슬픔도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의 작용이 극락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
마음에 등불을 밝힌 자는 어둠 속에서 헤매이지 않아 극락세계에 있는 것이요, 마음에 주림과 목마름만이 있는 자는 스스로 지옥의 고통을 지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의 부처, 마음속의 극락세계를 잘 보존토록 하라.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어떻노, 지기제? 이 문디손을 불제자라 말할 수 있겠나? 저 법문에서 극락세계를 무릉도원으로 바꾸고, 부처를 신선으로 바꾸면 딱 도교의 강설이다. 신선술의 요점이다. 그러나 불교하고는 거리가 만리나 떨어진 삿되고 요망한 소리다. 저 혜능의 요설은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완전히 배치된다.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으니 오직 마음이 부처이다." 혜능의 이 소리는 그가 얼마나 불교를 모르고, 부처가 무언지도 모르고, 마음이 무언지를 모르는 지 잘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혜능은 사이비 도사지 승려가 아니다. 달마 역시 마찬가지.
저 해괴한 헛소리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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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7 구름~~ 2005-01-14 13:33:04 847
달마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댄 데다가 혜능이 '마음 밖에 부처가 없으니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해괴한 소리로 맞장구를 친 바람에 석가세존 팔십년의 설법이 도로아미타불이 되버렸다. 부처님의 간곡하고 절절했던 가르침이 고마 하루아침에 무색해져 버리고 말았다. 말법으로 정법을 가리고 사도로 정도를 흐린 달마와 혜능의 죄는 성철의 말마따나 수미산보다 크고 항하수 보다 깊다.
육신이 성이요 눈, 귀, 코, 입이 대문이라? 그 안에 마음이라는 주인이 있다고라? 하하하하하하하, 부처님이 관 속에서 두 손바닥을 내 보이실 판이다. 잘 주무시는 부처님이 기여코 부활을 해서 창에 찔린 겨드랑이와 못이 박힌 손바닥을 보여주셔야 정신을 차리겠나?
달마와 혜능이 노는 꼬라지는 먼 훗날 데카르트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근대 서구가 나은 최고의 철학자라는 데카르트가 평생 동안 온갖 것을 의심하고 의삼해 본 나머지 오직 하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자기가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나발을 불었다. 이 유명한 철학적 명제는 그러나 참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는 전제가 참이면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이 참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는 전제는 참이 아니다. 이게 참이라면 부처님의 삼법인은 그 봉인을 뜯어서 스레기통에 처넣어지고 만다. 만약에 데카르트가 조금만 더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불교를 배웠더라면 저런 유치한 나발은 불지 않았을 것이다. 저 명제에 대해서는 이미 2천5백년 전에 부처님이 결론을 내려주신 바가 있다. 부처님의 말씀이 정답이다. 부처님은 명백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이게 제법무아이다. 생각하는 나가 있다면, 마음이라는 주인이 과연 있는 것이라면 삼법인은 날구라다. 꽝이다. 불교 전체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만약에 데카르트가 옳고 부처님이 틀렸다면 구름은 실존주의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달마와 혜능이 맞고 부처님이 틀렸다면 나는 달마교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데카르트가, 달마가, 혜능이 부처님보다 더 생각을 똑바로 한 넘들이었을까? 천만의 말씀이요, 만만의 콩떡이다. 부처님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중생들이다. 과연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하는지, 생각하지 못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따져 보자.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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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8 구름~~ 2005-01-14 17:06:10 822
한국기독교총회에는 이단을 조사하고 판정하는 기구가 있다. 이 기구는 어떤 종파가 이단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조사항목들을 가지고 있다. 그 항목들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이단으로 판정을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기독교가 기독교일 수 있는 본질적 항목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땅에 온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메시아 예수, 창조주의 독생자 예수를 부인하면 다른 어떤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배다른 아들들을 자꾸 만들어내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 아들은 한명 뿐이다. 오직 예수다.
그렇다면 같은 이치로 무엇이 불교인가 생각해 보자. 불교의 가장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의 최종 결론인 절대진리, 삼법인을 깨우치는 것이다. 이 삼법인 속에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것으로서 불교는 이 세계의 실상과 나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법인과 배치되는 소리를 하는 철학이나, 종교나, 단체나, 문파는 무조건 불교가 아니다. 때문에 선불교는 당연히 불교에서 제외된다. 달마나 혜능이 떠든 소리들은 비록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지만 한가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교리는 제법무아가 아니라 제법유아를 따른다는 사실이다. '마음 속에 부처가 있다'고 주장하면 이미 이것은 반불교적 주장이며, 비불교적 철학이다. 그 외의 것은 돌아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마음 속에는 부처가 없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도 없고, 마음이 주인 행세를 하는 나라는 성도 없다. 생각은 홀로 있으나 그 곳에 '생각하는 나'는 없다.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불적이며, 이단이며, 사이비다.
달마와 혜능이, 그리고 선불교가 왜 이단인가 계속해서 살펴보자.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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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49 구름~~ 2005-01-14 18:31:41 829
달마의 '견성성불'을 풀어서 설명하면, 사람-아니 미물들을 포함한 모든 중생의 마음 속 깊은 어디인가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 있으므로, 누구나 자기 마음을 바로 보고 이 본성을 발견하면 바로 부처가 될 수있다는 소리다. 여기서 본성(本性)이라는 말은 본래자성(本來自性)의 준말이다. 부처님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에는 그것이 없으니 이 진리를 '제법무아'라 하느니라 하시고 도장까지 꽝 찍어서 시비를 할 수 없도록 선반 위에 올려버리신 바로 그 자성이다. 그런데 달마와 혜능은 사람의 마음 속에 이런 본성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 본성은 청정하고 깨끗해서 그 자체가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것을 찾아 발견하기만 하면 부처가 된다고 했다. 부처되기 너무나 쉽다. 쉬운건 좋은데 과연 우리 마음 속에 그런 본성이라는 것이 있느냐가 문제다.
석가세존은 우리 마음 속에 그런 얄구진 물건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아 안 사람이 부처라고 가르쳤는데, 달마와 혜능은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본래 진면목이 바로 부처다'라고 나발을 불었다. 어느 쪽 말이 옳은 것일까? 과연 마음 속에는 본성이 있나? 그것을 발견한 넘이 있나? 그 본성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 과연 불성인가?
원래 진리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만가지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이 나와야 진리다. 진리임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허위, 오류, 진리가 아닌 쌩뚱스러운 강짜들은 한걸음만 더 나가서 물어보면 콱 막히고 만다. 사람의 마음 속에 불성이 있다고 뻥을 쳐놓으니까 당근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그럼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원래 불성이라는 자체가 뻥이었기 때문에 개의 불성에 이르면 대답이 콱 막혀버리고 만다. 그래서 있다 했다가 없다 했다가 횡설수설로 도망다니게 되는 것이다. 첫단추가 잘못 꿰어진 옷이 끝에 가서 맞을 리 없다.
개한테 불성이 있냐고? 그렇게 묻는 너한테는 불성이 있을 거 같으냐? 니는 딴에 사람씩이나 되니까 불성 같은 고상한 물건을 달고 태어난 걸로 생각되는 모양이지.
좋다, 그노무 본성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한번 찾아보자.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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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50 ( 1 ) 구름~~ 2005-01-14 19:54:07 852
우리가 꼬인 실타래를 풀려고 하면 우선 실의 끝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실마리라고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몇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어떤 대상이던지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것의 첫 시작점이 어딘지부터 본다. 선불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것이 최초에 누구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History는 모든 Story의 실마리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내가 나의 마음이라고 알고있는 것이 처음 생긴 것이 언제였는가부터 생각해 보자. 내 마음이 언제 이 세상에 나타났나 이 말이다. 일곱살 때 생겼나? 아니면 돌잔치할 때 선물로 얻었나? 아니면 백일 잔치때 내가 잔치상 위에서 거머쥐었나? 아니면 어머니 뱃속에서 생긴 것인가?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언제쯤인가? 아버지 몸 속에서 튀어나온 한마리 벌레일 때 내 마음은 그때부터 있었을까? 어머니 몸 속에서 수정되었을 때 생겨났나? 아니면 세포분열이 시작되서 몸통과 사지가 생겨나고 대글빡 속에 뇌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때 생겨났나? 그렇다면 뇌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을 때 마음이라는 것이 있게 된 것일까?
혜능이 말하기를 이 육신은 성이요, 눈, 귀, 코, 입은 대문이요, 마음이 주인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나라는 성은 언제 완성된 것이며, 그 주인인 마음은 어느 단계에서 입성해서 주인노릇을 하기 시작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이 실마리다. 이 실의 끝을 잘 잡고 따라들어가면 본성이 있는지 없는지, 마음에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불성이라는 넘이 언제쩍에 내 마음 속에 깃들었는지 그걸 알 수가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눈감고 벽보고 앉아서 마음 속을 헤집다가 찾은 게 아니다. 이와 같이 모든 세상이치에 대해 실마리를 잘 찾아서 그것을 끈기있게, 정연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따라가신 끝에 찾은 답인 것이다. 눈감고 지릴염병하다가 쪼대로 씨부리는 말장난이 아닌 것이다.
각자 생각해 보시라. 내 마음이 언제 생겨난 것인지. 언제부터 내가 마음을 갖고 살았는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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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 51 ( 3 ) 구름~~ 2005-01-14 23:13:06 953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갖게된 싯점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뇌라는 것이 생기기보다 이전은 아닐 것이다. 뇌가 처음 생기자마자 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나의 뇌를 구성하는 수억개의 뇌세포 중에 최초의 하나가 맹렬한 속도로 분열하고 있는 세포덩어리의 한 귀퉁이에 생겨난 그 찰나에 그 하나의 뇌세포에 마음이 생겼을까? 그건 아니지 싶다. 조금 더 뒤로 밀자. 아마도 뇌라는 것이 최초의 어떤 정보를 처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떨까? 약간 신빙성이 생길라 한다. 최초의 뇌가 최초로 처리하기 시작한 정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최초로 생기기 시작한 육신과 정보기관에서 들어오는 시그널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처음에 그것은 아마도 테스트 시그널로서 한번씩 뇌세포를 자극하고는 사라지고 또 건들여보고 없어지고 했을 것이다. 감각이라는 정보라기에는 너무나 단편적이고 정보의 양이 적어서 무엇인지도 해독하기 곤란한 희미한 신호들이 온 육신과 생기기 시작한 불완전한 감각기관들로부터 아직은 효율적이지 못한 신경망을 따라 흘러들어와서 뇌세포를 자극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자극들에 반응하여 마음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어떤 사념이 조그만 핏덩이의 내부에서 움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마음의 탄생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서 이 마음은 점점 더 많아지고 빨라지는 정보의 흐름 속에서 보다 체계화되고 유기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주변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어머니의 창자 속을 음식물이 통과하면서 내는 천둥같은 소리들이 우주의 반대편에서 전해오는 태초의 소리처럼 아련하게 생기기 시작한 고막을 울리고 그 소리는 뇌에 전해졌을 것이다. 온 몸의 피부에 신경조직이 연결되고 촉감세포가 자리를 잡으면서 자궁 속 양수의 따뜻함이 뇌에 전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몸통에 머리가 생기고 팔다리가 자라면서 눈, 코, 귀, 입의 형태가 생기면 유전자의 명령은 보다 명료한 형태로 마음의 일부로서 스며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의 크기가 엄마의 엄지 손가락만 하게 되면 나의 마음은 유전자의 명령을 받아들여서 나라는 것에 집착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만약에 나의 부모가 나를 없애버리려고 결심해서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의 무시무시한 기구가 다가오면 나는 겁이 나 자궁 속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도 칠 것이다. 이쯤 되면 마음이 생겼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살려고 하는 생의 집착이 있고,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존재라면 마음이 있으리라고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자,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누가 이 일련의 과정을 주도했는가 하는 점이다. 최초의 소리가 최초의 고막을 통해서 최초의 뇌에 전달되게 만든 것은 누구였을까? 나라는 주인이 있어서 그렇게 결심하고 행했나? 최초의 마음은 어느 마음이 있어서 일으켰는가? 첫마음이 일어나게 만든 주인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었다. 마음은 누가 불러 일으킨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느날 홀연히 지 혼자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이 나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마음이 생기기 전에는 내가 없었다는 소리다. 열심히 엄마 몸에서 영양분을 빨아대면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던 핏덩어리는 그러면 뭔가? 그건 내가 아니고 내 껍데긴가? 마음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있었다. 이미 있는 나한테 어느날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눈깜짝할 사이에 마술과 같이 솟아오른 것이다. 나의 의사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생겨난 것이 내 마음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물건도 아니었다. 나하고는 관계없는 생소하고 낯선 놈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산다. 내가 생각하면서 산다고 믿는다.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착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한가지 결론을 얻게 된다. 생각은 저절로 솟아나서 지혼자 움직이는 것이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는 있지 않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