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어링]은 배우의 영화다. 배우들의 관록만으로도 화면은 압도당한다. 로버트 레드포드, 헬렌 미렌, 윌리암 데포.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세 사람의 배우가 끌고 나간다. 배우의 역량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컨셉이다. 일반적인 납치사건과는 다르게, 범인을 뒤 쫒는 숨막히는 추격전도 없고, 인질 협상 과정의 두뇌싸움도 없다. 밋밋하게 느껴지는 서사구조는 그러나 캐릭터의 수직적 깊이를 드러내는 데 위력을 발휘한다.
성공한 렌트카 회사 사장인 웨인은 아침 출근길에 납치당한다. 그를 납치한 사람은 예전에 웨인의 회사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한 아놀드. [클리어링]은 납치사건의 주범에게 인질을 넘기기 위해 산 속 숲길을 걸어가는 맥과 웨인, 그리고 웨인의 무사귀환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다리는 부인 에일린의 장면이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웨인은 맥과 대화하면서 그가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고 느낀다. 비록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는 있지만 자신을 해치려는 의사가 맥에게는 없다고 판단한다. 외부와 차단된 깊은 숲 속의 공간은,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를 가깝게 하는데 기여한다. 해고된 뒤 집에서 빈둥거리는 아픔을 토로하는 맥, 그리고 항상 남편이 자신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 부인을 사실은 가슴 절절하게 사랑하고 있는 웨인. 두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서로의 은밀한 비밀을 이해하는 데 하룻밤은 충분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은 된다.
에일린은 오래 전 남편이 자신의 회사에서 근무하던 여직원과 몰래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후 그 여직원은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웨인은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종 사건 이후 수사를 맡은 FBI에 의해 남편의 전화통화 기록이 열람되면서 최근까지도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눈썰미 있는 관객들이라면, 웨인과 맥이 숲 속을 헤메는 시간은 단 하루. 그러나 에일린이 FBI의 수사에 협조하면서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범의 전화를 받고 돈을 준비하여 만나러 가기까지 걸리는 몇 주 동안의 시간차에 주목할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같은 시간대에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교차로 편집된 크로스 컷팅이라고 할 수 없지만, 피터 얀 브루게 감독은 의도적으로 시간차를 무시하고 웨인과 아일린의 모습을 교차로 편집해서 보여준다.
그러므로 [클리어링]은 납치극이 아니다. 납치를 소재로 해서 부부간의 심리적 갈등, 납치범과 인질의 섬세한 감정의 드러냄에 더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정통 스릴러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심심한 영화가 될 수 있지만, 심리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괜찮은 매력을 선사해준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그의 나이 32살에 폴 뉴먼과 함께 공연한 [내일을 향해 쏴라]로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실제로 미국 개척기의 전설적 은행 강도들인 부치와 선댄스의 짧은 삶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맡은 배역은 선댄스. 미국 남서부의 우체국과 은행을 털면서 경찰의 추격을 피해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갔다가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은 이 젊은 갱을 로버트 레드포드는 매력적으로 표현해냈다. 갱들이 갖고 있는 어두운 이미지대신, 삶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단순한 열정과 순수함을 갖고 있었던 선댄스 역에 매료된 그는, 지난 1980년 고향 유타주로 돌아와서 선댄스 인스티튜트를 만들고 젊은 감독들과 인디 영화, 독립영화를 후원하는 선댄스 영화제를 개최한다.
헬렌 미렌은 [칼](1984년)과 [조지왕의 광기](1995년)로 칸느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배우다. 우리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아더왕의 전설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표현한 [엑스칼리버](1981년)지만, 배우로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펜트하우스에서 제작한 [칼리큘라]와 영국의 천재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였다. 주름살이 깊게 패인 [클리어링]에서의 에일린 역은 세월이 흐르면서 연기의 깊이를 더해가는 대배우의 관록을 느낄 수 있다.
윌리엄 데포는 주연보다는 조연, 그것도 악인 캐릭터로 자주 등장한 성격파 배우다. [플래툰]의 순진한 병사를 시작으로 [잉글리쉬 페이션트]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기대 이상의 몫을 해냈다. [클리어링]에서도 가진자 로버트 레드포드와 맞서서 갖지 못한 자로서의 비애를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섬약하면서 강인하고, 선하면서도 악한 보편적 인간의 이중적 흔들림이 그의 내면에는 가득 차 있다. 그의 연기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이것이 극대화 되면서 드러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