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만난 安애단 신부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던 시절 그와 나는 '신의 존재 증명'에 열을 올렸다. 강화도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온수리 성공회 교회를 다녔고, 철학과 졸업 후엔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필요 없지 않은가. 그래 그는 이 문제에 많은 집착을 보이곤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론적 신의 존재 증명을 했다. 아퀴나스는 자연 속에서 인과의 연쇄적 고리를 추적할 때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최초의 원인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논리이다.
스피노자는 존재론적으로 신의 존재 증명을 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인정되거나 생각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신 속(in)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생각될 수 없다. 그 자체에 완전성을 소유하는 신은 다른 것에 의존할 수 없으므로 자기 원인(自己原因) 일 수밖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을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어떤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그 본성상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안셀무스의 하느님의 존재이다.
그러나 칸트 등에 의해 이러한 신의 존재 증명 자체가 철저히 비판되면서 인간은 신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인간의 이성은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파악할 능력이 없고, 절대자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자체가 오류라는 것이다.
파스칼은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있다는 주장보다 더 큰 모험'이라고 했던 면에서 신을 인정했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 삶의 의미와 목적 등은 하나님이 없으면 해답이 없다고 했다.
니체는 신을 부정하고 초인을 주장했다. 마르크스도 신을 부정했다.
대부분 종교는 하나님과 믿는 내용을 이성이나 과학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아는 영역이다. 즉 믿음을 통해 알아지고 체험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인간은 강을 건너듯, 인간의 이성과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아는 세계로 들어선다. 인간의 상식과 논리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열어주는 것이 믿음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영국에 가서 신학박사 학위를 얻고 귀국해서 성공회 금호동 성당에 잠시 있다가 미국에 갔다. 나는 50년 만에 돌아온 그의 모습을 모교에서 희랍 철학 강의하다가 타계한 친구 장례식장에서 본 희랍 정교회 신부님처럼 검은 복장 걸친 근엄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부나 수녀도 정년이 있는 모양이다. 신분당선 청계산 입구역에서 만난 그는 사복을 입고 있었다. 둘이 조용한 찻집에 자리 잡자, '안신부! 우리가 대학 시절 '신의 존재 증명'에 열 올린 일 기억하나?' 내가 옛일을 물어보자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쳐다보기만 한다. '지난번 자네 메일에서 권창은이 이야긴 잘 읽었지만.' 그는 모교 교수로 있다가 타계한 권 박사 사연부터 물었다. '창은이와는 일이 많았지. 철학 교수라 그가 좌파 냄새나는 이야길 하면 사람들 관심이 많잖아? 그의 어머니가 도봉산 밑 토굴에 살았는데, 옆집이 청계천에서 분신자살한 전태일 집이었어. 돈 없으면 좌파로 기울잖아? 그래 내가 대폿집에 그를 끌고 가서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토론을 벌여 다시는 고대 신문에 그런 글 싣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았지. 골수암으로 타계하여 임종 때는 증권 신문 회장 권오진이와 파주 쪽 희랍 정교회 묘지에 그를 안장해주었어. 권 박사 미망인은 건대 충주 캠퍼스 부총장 이 모 선배와 몇 년간 둘이서 돌봐드렸지.' '의리가 있었구나. 송휘칠이는 연락 없었나?' '휘칠이는 프린스턴서 학위 받고 모교 강의하려 할 때 문제가 생겼지. 그래 경북대로 미끄러졌잖아? 그 성질 기억나? 술 먹으면 밤 12시에 시외전화로 애꿎은 나한테 전화해서 온갖 쌍욕 다해가며 세상 비난했지. 휘칠이도 가난한 촌놈 이잖아? 젊어 너무 고생해서 그런지 암으로 일찍 가버렸어.' '프린스턴 학위가 아깝구나. 그렇지?' '철학과 30명 입학했는데, 63학번은 이젠 자네와 오진이, 그리고 삼육재활원 이사장 하다 끝난 민군식과 나 넷 남았어. 그 외엔 은정희 씨와 김용옥이 알지? 법대에서 전과해온 은정희 씨는 교육대학 교수되었고, 자살한다고 군에 입대하고 섬으로 돌아다니다가 내가 68년도에 복학했잖아? 그때 생물학과서 전과해온 용옥이는 하바드 학위로 처음엔 저술과 강의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정치판 이집저집 문전 기웃거리다가 걸레가 되고 말았지.'
나에 대해서도 묻길래 나는 가난한 기자 시절과 처자식 먹여 살린다고 성질 참아가며 재벌 회장 비서 20년 한 걸 간략히 소개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 덩치가 재벌 비서 20년 했으면 고생 많았겠구나!' '나야 아수라 같은 속세의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지. 나는 자네 연락받고 80 평생 오로지 신을 섬기고 살아온 자네 경건한 모습이나 위로 삼아 보고 싶었어'. '실물 보고 실망했나?' '아니야 전에 내가 설조스님이라고 모시던 스님을 만나, 그분이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던 모습에 감동받은 적 있어. 자네 역시 수도자라서 그런지 그런 느낌이네.' '자네는 대학 시절 박정희 군부독재를 반대한 고대 홍일점 박정희 파 인사 아닌가? 지금도 기억나는데, 직장 나가서도 초지일관 회장을 박 대통령 시해시 신당동 빈소에 모시고 간 것, 전두환 보안사령관 만난 것 등 역시 지리산 곰 답네'. '어찌 보면 산속 절간이나 수도원에서 도 닦은 일이 쉽고, 파란만장한 속세에서 자네처럼 도 닦는 일이 더 어려울지 모르지'. '나는 도 닦은 일은 없어.' 어쨌든 그는 공부가 깊어 상대편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그나저나 이제 자네도 신부란 직업 은퇴한 모양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 셈인가?' '아낸 미국에 남았어. 거긴 결혼한 딸이 둘 있거든. 나는 아들 있는 한국에 왔고, 7월에 태백 예수원으로 갈 거네.' '자연이 인간 세상보다 더 편안한 곳인지 모르지. 내가 불교신문에서 모시던 법정스님도 송광사 암자에 계시다가 강원도 산골에 가서 혼자 사셨잖아?'
살아보니 인생은 일장춘몽, 이제 80 앞두니 공기는 어느새 가을처럼 소슬하다. 나도 한 때 스님이 될까 생각도 해본 적 있다. 이제 그는 태백 예수원으로 布衣로 가고 나는 백수로 서울에 남는다. '간혹 서울 오면 연락해라. 태백 구경할 겸 나도 찾아갈게.' 이렇게 말하고, 내가 쓴 '책 한 권에 소개한 한국 사상 25편'과 수필집 '한 잎 조각배에 실은 것은' 두 권을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