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원희 시집, < >, 푸른사상, 2014년 8월
이순(耳順)의 길
맹문재
1.
만해 한용운이 시작품 「나의 길」에서 제시했듯이 이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산길이 있고, 뱃길이 있다. 새와 곤충의 길이 있고, 달과 별의 길이 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노을을 밟으며 길을 내고, 봄 아침의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을 타며 길을 내며,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낸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고, 의(義) 있는 사람은 옳은 길을 위해 칼날도 밟는다.
시작품에 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의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다. 산길이나 찻길이나 뱃길 같은 대상뿐만 아니라 종교의 길, 정치의 길, 학자의 길, 예술의 길, 어머니의 길, 의사의 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길은 무수히 많은 상징성을 갖는다. 또한 길에는 시인의 세계관이 들어 있다. 만해가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라고 단언한 것이 그 예이다. 만해가 인식한 두 길이란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이다. 만해가 죽음 아니면 삶이라는 길을 제시한 것은 그만큼 님을 품으려는 열망이 강한 것이었다.
박원희의 작품들에서도 길은 시세계의 토대이자 시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고 가치이다. 「산길」「떠나는 길」「비단길」「보살사 가는 길」「장승백이 골목길」「똥 싼 길」등이나, “갈 길 없는 길”(「장마」), “어두운 길”(「존재」), “서울 가는 길”「구름의 두께」) 등의 구절에서 확인된다.
박원희 시인이 제시한 길 중에서 이순(耳順)을 나타낸 작품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주지하다시피 이순은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나이 예순 살을 이른다.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인격의 형성 과정을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고 술회했다. 예순 살이 되어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해 다른 사람의 말을 순순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박원희 시인의 시 세계에는 공자가 술회한 이순의 삶이 여실하다. 모든 해를 살아왔지만 그 경험들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간다. 걸어가는 길의 끝이 있지만, 퇴로가 없다고 여기고 포기하지 않는다. 주체성을 견지하면서 별을 따라 길을 간다. 원망을 잊은 지 오래고, 불효를 반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모님의 길을 따른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길과 옳은 길을 걷는다. 삶은 언젠가는 막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곡예 같은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많은 생명체를 품고 있는 산처럼 시인의 발걸음은 고요하고 넉넉하다. 그러면서도 시끄러운 세상이야말로 무언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일어나는 터전이라고 여기고 들어선다.
2.
장연에서 길을 잃었다
사람이 없어진 곳에서는
집도 없는 것이다
임인년을 보내는 밤
옛사람의 흔적을 찾아서
별을 따라온 길
연락도 해보지 않고
기별도 없이 왔으니
이제 나는 문경으로 가야 하나
괴산으로 가야 하나
이정표를 바라보며
나를, 길을 묻는다
계묘년을 맞이하는 세밑
나는 육십갑자
모든 해를 살아 본 경험이 있는데
모든 해가 낯설었듯
오늘이 낯설다
항상 그곳은 그냥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내 뒤통수는 까이고
세월에도 까이고
다시 돌아온 육십갑자가
까르르 웃다가
별을 따라 검은 눈밭을
검은 토끼가
검은 밤을
뛰는 듯
나는 별을 보고 있으면서
갈 길을 잃은 밤
―「방황」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충청북도 괴산군 동북부에 있는 “장연에서 길을 잃었다”. 화자는 인연이 깊은 사람을 찾아 그곳에 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사람이 없어진 곳”이어서 “집도 없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화자가 그곳을 찾아간 때는 “임인년을 보내는 밤”이라고 밝혔듯이 2022년 마지막 밤이었다.
화자는 장연의 지인에게 “연락도 해보지 않고/기별도 없이” 갔다. 그 대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옛사람의 흔적을 찾아”갔다. 화자가 별을 따라 그곳으로 간 것은 전형화된 시대를 극복한 모습이다. 루카치(Georg Lukacs)가 루카치 소설의 이론 에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진단한 것과 상통한다. 물질 가치가 지배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는 “이제 어떠한 불빛도 더 이상 사건의 세계 위나 영혼이 완전히 소외된 그 세계의 미로 위를 비추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가 “이제 나는 문경으로 가야 하나/괴산으로 가야 하나/이정표를 바라보며” 묻는 것은 방황하는 모습이 아니다. 불안을 느끼거나 불운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모습이다.
화자가 장연을 찾아간 임인년의 마지막 밤은 “계묘년을 맞이하는 세밑”이기도 하다. 화자에게 계묘년은 “나는 육십갑자”라고 밝히고 있듯이 환갑(還甲)의 해이다. 화자는 환갑을 앞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그곳에 간 것이었다. 화자는 “항상 그곳은 그냥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해왔는데, 현실은 달랐다. 그 상황에서 화자는 “모든 해를 살아 본 경험이 있”지만, 그 “모든 해가 낯설었”고, 오늘도 그러하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변화하는 환경에 새로운 결의로 적응하려는 것이다.
화자는 환갑이란 나이가 어느덧 눈앞에 다가온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유한함을 생각하면서 “내 뒤통수는 까이고/세월에도 까”인다고 토로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연도 사라지는 것을 그곳에서 깨닫는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실재를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화자는 “다시 돌아온 육십갑자가/까르르 웃”는 것처럼 자신을 되찾는다. “별을 따라 검은 눈밭을/검은 토끼가/검은 밤을/뛰는 듯” 길을 걷는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나아가는 것이다.
아버지도 떠나간 사람
나의 삶을 비껴 하늘을 만들고
아무것도 없게 만든 아버지
형제를 접고
세상을 접고
나는 혼자 길을 간다
소통할 수 없는 거리
대화의 공간도 잊힐 공간도 없는
옛집을 찾아가도
그림자도 없어진 아버지
나는 하모니카 소리 깊게 우는 시간을 거쳐 간 시대를
기타 소리에 울먹이며 딩딩 울던 시간 앞에서
아버지를 생각한다
원망도 불효도 잊은 지 오래
살고 있는 곳에서 잘 살기를
바람이 부는 날 나는 모두를 날려 보낸다
삶이란 혼자 사는 것
죽음도 삶의 과정이면 죽음도 혼자 하는 것
아버지의 기타 치는 소리
하모니카 울음소리
멀리 어머니의 부름 소리
꿈길에서
나는
아버지를 못 보살핀, 어이 말할까
원망이 묻어나는 어머니 꿈길에서
눈을 꼭 감으시고
큰길을 보시는데
꿈길에도 안 보이는
아버지
―「아버지」 전문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아버지도 떠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보조사 ‘도’의 사전적 의미가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그러한 것을 나타내기에, 아버지 또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떠나간 존재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다소 부정적이다. 화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나의 삶을 비껴 하늘을 만들고/아무것도 없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화자는 “형제를 접고/세상을 접고” “혼자 길을” 가고 있다. “소통할 수 없는 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대화의 공간도 잊힐 공간도 없는/옛집을 찾아가도” “없어진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 만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렇지만 화자는 “하모니카 소리 깊게 우는 시간을 거쳐 간 시대”며 “기타 소리에 울먹이며 딩딩 울던 시간 앞에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천륜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망도 불효도 잊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불효에 대한 죄책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그 대신 “바람이 부는 날” 그 “모두를 날려 보”내고, “살고 있는 곳에서 잘 살”려고 한다.
화자는 “삶이란 혼자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그 배움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삶의 과정이면 죽음도 혼자 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화자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멀리 어머니의 부름 소리”도 듣는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아버지를 당부했지만 화자는 제대로 보살펴드리지 못했다. 화자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나의 불효를/진갑을 앞두고 외”(「어머니 생신에」)우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다. “꿈길에도 안 보”인다. 당신은 자식을 위해 진력을 다했기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화자는 진갑(進甲)을 바라보며 “삶이란 혼자 사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걸어간다. 환갑이 60갑자가 한 바퀴 돌아 원점이 된 것이라면, 진갑은 새로운 갑자로 나아가는 것이다. 화자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고 홀로서기를 이룬 존재자가 되고자 한다. 과거에 의존하지 않고 미래에 기대지 않고 걸어가는 동안에 집중하는 것이다.
3.
떠나는 길에는
돌아오지 않는 자세로 떠나야 한다
가는 길은 끝이 있어도
퇴로가 없는
살아본 길은 있어도
살아갈 길은 없는
적막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막다른 길
떠나는 길에는
준비는 있어도
준비의 설렘은 있어도
설렘의 마지막은 없는
여명의 새벽처럼
나지막한 빛이 있을 뿐
그 빛만이 찬란하게 보일 뿐
기다림은 흔적 없이 지워지고 말아
고요한 세상
떠나는 길에는
이미 미래는 정해진 길
과거는 사라지고
머물러 있는 사람도
사라지고
떠나는 길에
섰을 때
이미 떠난 것들만 있을 뿐
모두 사라져 갈 뿐
―「떠나는 길」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이순의 나이에 이르러 “떠나는 길에는/돌아오지 않는 자세로 떠나야 한다”고 다짐한다. “가는 길은 끝이 있어도/퇴로가 없”다고 마음먹는다. 실제로 화자의 앞날이란 “적막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막다른 길”이다. “살아본 길은 있어도/살아갈 길은 없”는 것이다.
화자는 “떠나는 길에는/준비는 있어도/준비의 설렘은 있어도/설렘의 마지막은 없”다며 자기의 길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킨다. 떠나는 길에는 준비가 있고, 그 준비는 지극히 설레는 것인데, 설렘의 끝은 없다. 화자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끝이 없는 설렘을 지니려고 한다. 그렇다고 요란스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설렘에는 “여명의 새벽처럼/나지막한 빛이 있을 뿐”이고, “그 빛만이 찬란하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다림은 흔적 없이 지워지고” “고요한 세상”이 되는 것을 따른다.
화자는 “떠나는 길에는/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인식한다. “과거는 사라지고/머물러 있는 사람도/사라지고” 자신만 남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외로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아니라 설레는 마음으로 혼자 떠난다. “삶이란 혼자 사는 것”(「아버지」)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착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화자가 혼자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는 외롭게 홀로이 걷는다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걷는다는 것이다. 곧 “산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라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삶의 가치를 견고하게 가지고, 아무리 힘들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지/버려야 할지를”(「테트라포드」) 결정하는 일인 만큼 삶을 놓지 않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결국 자기로의 귀환이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존재자가 아니라 현재의 존재자로서 자신과의 관계에 얽매인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자기의 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정체성을 심화시키는 다원론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보살사 가는 길에 나는 보았다
접신을 하는 잠자리 떼
붉은 노을을 잔뜩 이고 풀끝에서
바람에 일렁이며
곡예하는 사랑을 보았다
삶은 언젠가 끝나는 것
붉은 노을처럼 활활 타오르다
어둠으로 들어가듯
접신을 마친 잠자리들이 각자 날아다니는 풍경
붉은 가을 저녁
보살사에 부처님
오셨나
가셨나
―「보살사 가는 길」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보살사 가는 길에”서 “접신을 하는 잠자리 떼”를 바라본다. 화자는 잠자리의 몸에 신령이 지핀 것으로 여기는데, “붉은 노을을 잔뜩 이고 풀끝에서/바람에 일렁이며/곡예하는 사랑”을 발견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붉은 노을이 눈길을 끈다. 해가 지려고 하는 때에 햇빛을 받은 하늘이 붉게 물드는 현상인 노을은 곧 이순에 이른 화자의 모습이다. 노을은 해가 뜨려고 하는 때에도 보이지만, 위의 작품에서는 저녁 무렵이 확실하다. 잠자리가 풀끝에 매달려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곡예하는 사랑으로 노래한 것도 주목된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만, 그 상황을 긍정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화자는 “삶은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화자는 “붉은 노을처럼 활활 타오르다/어둠으로 들어가듯/접신을 마친 잠자리들이 각자 날아다니는 풍경”을 바라보며 자기가 걸어갈 길을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붉은 가을 저녁”의 “부처님”을 발견한다.
무섭기는 무섭데요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차를 타고 가는 데도
짐승이 되어버린 것 같데요
산에는 많은 생명을 품고 있지요
어릴 적부터 겁 많은 나는
혼자 고모 집 넘는 언덕길도 밤에는
가지 못하고
산길을 늦은 밤
오늘은 가는데
고라니 한 마리 불빛에 놀라 나를 보구요
비척비척 껑충껑충 뛰어서
들어갈 숲을 못 찾고
한참을 뛰어가다가 숲으로 들어갔어요
숨 가쁜 시간
감쪽같이 없어지니
너구리가 나타났어요
북슬북슬 잿빛 털이 빛나는
그놈은 옆구리 길로 가려고 보는데
잘 보이지 않나 봐요
밤에 검은 밤에 달빛을 가는데
하얀빛이 어둠보다 더 짙은 암흑이었는지
길에서 길을 못 찾고
숲을 바라보고
아니 보일 때까지 보고 있는 듯
라이트를 끄고
나는 서 있었어요
길가 숲으로 들어갈 때까지
잠깐이지만 긴 시간이었어요
아무래도 산길에서 차 안의 나보다
그놈들이 더 공포이었겠지요
미안한 산길
그들에게는 내가 간 길은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요
―「산길」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밤에 산길을 걷는 것을 무서워한다.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차를 타고 가는 데도/짐승이 되어버린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화자는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아 “혼자 고모 집 넘는 언덕길도 밤에는 가지 못”했다.
화자가 이순의 나이에 늦은 밤 산길을 가면서 무서워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어렸을 때는 그야말로 위협을 느껴 마음이 불안했다면, 이순의 나이에는 다른 존재들에게 해를 끼칠까봐 무서워하는 것이다. “산에는 많은 생명”이 있기에 밤에 산길을 가다가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자는 산길을 가다가 “고라니 한 마리 불빛에 놀라”는 장면을 맞닥뜨렸다. 고라니는 “비척비척 껑충껑충 뛰어서/들어갈 숲을 못 찾고/한참을 뛰어가다가 숲으로 들어갔”다. 화자는 고라니가 자동차 불빛에 놀라 허둥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두려웠고 미안했다.
화자는 고라니가 “숨 가쁜 시간”에 갇혔다가 “감쪽같이 없어져” 다소 마음을 놓았는데, 곧바로 “너구리가 나타”는 바람에 다시 무서움을 느꼈다. “북슬북슬 잿빛 털이 빛나는/그놈은 옆구리 길로 가려고 보는데/잘 보이지 않”는지 길을 찾지 못했다. “검은 밤에 달빛을 가는데/하얀빛이 어둠보다 더 짙은 암흑이었는지” 허둥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자는 숲을 바라보면서 “라이트를 끄고” 서 있었다. 그 시간은 고라니가 “길가 숲으로 들어갈 때까지/잠깐”이었지만, 길게 느껴졌다. “차 안의 나보다/그놈들이 더 공포”를 느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화자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는 내가 간 길은/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반성한다.
이와 같은 화자의 자세가 곧 자비의 마음이다. 자비는 중생들에게 즐거움과 복을 주고 고통과 괴로움을 없게 하려는 부처님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큰 사랑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인 것이다. 화자가 고라니와 너구리를 비롯해 이 세계의 존재들과 함께하려는 것이 그 모습이다. 결국 화자는 사회적 존재들과 어울려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4.
나는 이 시끄러운 나라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
매일 무언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일어서는 나라가 행복하다
부끄러운 보따리를 풀어 헤치며 하나씩 해결해 가는 것이 행복하다
감출 것이 없어진 나라가 행복하다
80년 100년 전의 암울했던 현실
깜깜한 밤길을 승냥이가 난무하는 길을 가던 선조들
70년 전 분단의 비극을 겪으며 반목의 세월을 견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아버지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다 벗고 마음까지도 잃어버린 역사 앞에서 우리는 빚진 자
나는 나라가 시끄러운 게 행복하다
조용하면 나라인가
수천만 일억이 모여 살며 더 시끄러운 나라
행복은 크게 올 것인데
아침 해는 동해를 일으켜 세우며 붉은색으로 온다
세상을 태우며 가슴을 태우며
온다
휴전선 깊이 물든 단풍도 타고
가슴도 활활 타오르는
11월에 앉아
언젠가 시끄러운 더 시끄러운 날을 기다린다
장마당에 보따리를 풀고
온 민족이 한풀이하는 날 시끄럽지 않고
행복할 수 있으랴
그날이 오면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리라
―「시끄러운 노래」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나는 이 시끄러운 나라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화자는 자신이 걸어가는 세상이 시끄럽지만, 현실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일 무언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일어서는 나라”이기에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화자는 “부끄러운 보따리를 풀어 헤치며 하나씩 해결해 가”려고 한다.
화자의 자세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역사의식을 토대로 한 것이다. “80년 100년 전의 암울했던 현실/깜깜한 밤길을 승냥이가 난무하는 길을 가던 선조들”은 물론이고, “70년 전 분단의 비극을 겪으며 반목의 세월을 견딘 아버지의 아버지의 또 아버지”를 품은 것이다. 화자는 그 아버지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고백한다. 또한 “다 벗고 마음까지도 잃어버린 역사 앞에” 빚졌다고 경의를 표한다. 마치 김수영이 “썩어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거대한 뿌리」)라고 노래한 것과 같다.
화자는 “조용하면 나라인가”라고 반문하며 “수천만 일억이 모여 살며 더 시끄러운 나라”가 되면 “행복은 크게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아침 해는 동해를 일으켜 세우며 붉은색으로”, “세상을 태우며 가슴을 태우며” 온다고 희망한다. 화자의 희망은 “휴전선 깊이 물든 단풍도 타고/가슴도 활활 타오르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분단 조국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장마당에 보따리를 풀고/온 민족이 한풀이하는 날 시끄럽지 않고/행복할 수 있으랴”라는 데서도 확인된다. 화자는 “그날이 오면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리라”고 선언한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종로의 인경(引磬)을 머리로 들이받”(「그날이 오면」)겠다고 외친 심훈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시끄러운 노래를 적극적으로 부르려고 하는 화자의 태도는 사회 및 정치 참여와 결부된다. “모든 억압의 물결로 드리운 천구백칠팔십년대/선배들이 피 흘리며 목숨 걸고/그리워 목메게 찾아 놓은 민주”(「민주를 찾습니다」)를 되찾으려고 한다. “김용균 이후 보령지역 발전소 화부는 떨어져 죽고/알루미늄 포일 공장 노동자는 압사해 죽고/제강회사 노동자는 기계에 끼어 죽고/건설 현장 노동자는 볕 좋은 봄날 하늘로 오르다 떨어져 죽는 사선에서”(「노동의 시간」) 살아가는 노동자들도 직시한다.
화자는 이순의 나이에 이르러 자신의 길을 진지하게 걸어가고 있다. 떠난 길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겠다는 자세로 나아간다. 삶의 가치를 견고하게 가지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시간에 함몰되지 않고 창공에서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방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외로워하거나 불행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님의 길을 새기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려고 한다. 자기를 긍정하는 현재진행형의 사회적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맹문재 ∣ 문학평론가 ·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