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20-28 부활의 첫 열매 2005. 11. 27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ㄱ)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1)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19절 말씀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된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성경에서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온통 환난과 핍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아니한 것은 더 나은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배설물이요 해가 됨을 아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수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게 여기겠습니까? 더군다나 학교를 다니면서 고시를 패스하고 높은 관직에 있다가 대학의 총장을 지낸다면 얼마나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바라는 것들이 그런 것이라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대학총장, 도지사, 시장, 회장, 회장의 셋째 딸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살하였습니다. 세상의 영광의 정점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살 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세상의 것이라면 이미 그런 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자살하겠습니까? 그들이 쌓아놓은 사회적 명성, 그 이름이 수치스러워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한 것입니다. 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자살한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달려간다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약속의 세계, 부활의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은혜로 주셔야만 되는 것이지 노력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당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모습이라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서 자살하였습니까? 용서받고 정죄하지 않는 다는 기쁨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라고 그 직업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생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자신을 세리라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살인자요 포행자라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왜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세계는 그런 것들이 다 용서되고 영광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에서 부끄러운지 영광스러운지가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끄럽다고 자살한 사람들이 그것이 끝이겠습니까? 그런 자들까지 하나님은 다시 살려내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부끄러움에 집어넣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에 참여시키실 것입니다.
다니엘서 12: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지막 날의 비밀을 예언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자와 영원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가 있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자란 구원을 얻는 자인데 이런 자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렇지 아니한 자들은 무궁한 부끄러움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런 계시와 예언을 내용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여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고 멋있게 살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살고 싶습니까? 두 가지 다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늘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영광에 있으니 자신의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고삼에서 대학에 가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 많이 생깁니다. 대학에 떨어지거나 재수를 하게 되면 부끄럽다고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온갖 말이 다 나오니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홈페이지 교회 소개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교회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는 일체의 선함과 의로움이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영광의 날을 소망 하는 곳입니다. 원본은 이러한데 관리집사님이 고쳐 놓았습니다. 그런 곳이 늘푸른 교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 못하고 세상의 영광도 없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 중에 더 불쌍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말씀이 소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첫 것은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곡식의 첫 열매만이 아니라 짐승도 첫 것의 수컷은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사람도 장남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모든 장남을 대신하여 레위지파가 드려집니다. 출애굽기 13장에 보시면, 왜 처음 것을 드리라고 합니까? 애굽에서 10번째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장자와 첫 수컷은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드려짐이란 희생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장자의 개념이란 자기의 희생으로 나머지를 살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장자는 르우벤 이지만 장자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11번째 요셉이 장자의 몫인 두 몫을 받는 것은 요셉이 희생으로 형제들을 살려내기에 장자의 명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인 서열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희생하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에스겔 44:30절입니다.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 에스겔서는 새 성전과 새 언약을 말합니다. 옛 성전이 우상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이 신이 떠나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처음 익을 열매와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처음 것이 제물로 희생되어져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떡 덩이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씀이 연결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까? 그것은 다니엘서의 말씀대로 기록된 책에 있는 자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자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첫 열매로서 희생하셨습니다. 희생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에 그 첫 열매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은 다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1-22절입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기에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 사망의 권세아래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고서 죽은 자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합니다.
23-24절입니다. 여기서 순서가 나오는데 순서를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첫 열매의 희생과 부활이 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니 지금 예수를 믿는 자들이나 다 부활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순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이고 그 다음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에 살아서 믿는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절입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2)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십니까?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여 성도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환난을 당하여야 이 말씀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모퉁이 돌 선교회에서 소식지가 올 때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호사스러운 것입니다. 도대체 믿음으로 인한 고난과 환난과 핍박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그러니 성경의 이런 말씀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괴롭고 외로우니 사랑해달라는 투정 외에 무엇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25-27절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 불가불이란 이중 부정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왕 노릇하시는 것입니다. 재림하셔서 제일 나중에 멸망시켜버릴 것이 사망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사망을 이기시고 왕 노릇 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시고 소망이 되십니까? 그런 사람은 28절의 말씀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만유란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든 것의 주가 되십니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희생과 노력이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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