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사람 1
서지아가 백수웅을 처음 만난 것은 1963년 초여름이었다.
한 떼의 젊은 대학생들이, 무교동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경영하는
'민속주점'이라는 막걸리집으로 찾아 들어왔다.
그 때는 서지아가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3년째 어머니 뒷바라지를 해 주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민속 주점을 한 번 두 번 드나들더니, 기어이 그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고,
그 중 가장 키 작은 백수웅이라는 학생이 그들의 리더로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막 자리잡아 가는 5.16 혁명 주체 세력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서지아에게 합석을 권했다. 지아는 그들 모임에서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들을 그들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 날도 그들은 박정희.김종필 등과,
함석헌.장준하 등 민족 지도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들뜬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시킨다구? 돈이라면 영혼이라도 팔아먹을 놈들이야."
"맞다구. 어떻게 일본놈들 앞에 머리를 꿇어? 차라리 굶어 죽는게 낫지! 이건 민족의 수치야."
정부측에서 경제 재건을 위한 방침의 일환으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그리고 대일 보상 청구(對日補償請求)의 수순을 밟아
경제 회복을 위한 자금을 얻어 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차관을 통한 국제 금융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의식화된 일부 대학생들이 이를 비토하고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당시 최고의 지성 잡지 [사상계(思想界)]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는
민족 운동가 함석헌.장준하 등을 신앙처럼 따르고 있었다.
'돈이라면 혁명 세력들은 악마와도 타협할 것' 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던 것이다.
반공과 빈곤 타파를 혁명의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혁명 주도자들은,
이제 한국도 국제 사회의 일원이며,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이룩하지 않고는
경제 재건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제 부흥만이 국제 사회에서 살아 남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 자금이 필요했다.
워커힐, 새나라차 등 4대 의혹 사건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이 4대 의혹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학생 운동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서지아의 민속 주점을 드나드는 학생 그룹도 이 운동권 학생들의 일부였다.
그런데 용케도 이들 생각을 서지아가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맞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구한말 시대에는 일본군이 이나라를 점령했지만,
만일 일본 돈을 얻어 쓰기 시작하면 일본 경제력이 이 나라를 점령하게 된다구요.
돈뿐인가요? 두고 보세요. 이 나라는 언젠가 일본 문화가 판을 치는 세상이 올 테니까요.
경제 속국은 곧 문화 속국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되고,
문화까지 일본 속국이 되면 민족 정신은 자연히 증발하게 되는 거죠."
이건 술집 주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비록 고등 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누구 못지않은 민족 운동가였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언제나 [사상계]가 매달려 있었다.
열띤 토론을 벌이던 그녀가 페인트 상회로 달려갔다.
그리고 '민속 주점'을 '민족 주점'으로 바꾸어 놓았다.
"민속이나 민족이나 뜻은 같아요."
그녀는 깔깔대며 간판을 바라보았다.
백수웅을 중심으로 한 그룹의 일원들은 대개가 문리 대학 출신이었는데,
이들의 모임에 이따금 낯선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법정 대학의 이성구를 알게 된 것도 이 때였다.
그렇게 자주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법정 대학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성균관대 외에도 서울대 . 고려대 . 연세대의 운동권 학생들도 합석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소위 '민비련(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학생들도 보였는데,
이 중에는 문학을 하는 김중태. 현승일, 그리고 정치 지망생들인 박석무. 정대철 등의 얼굴도 간간이 보였다.
재계의 거물이 된 이명박의 얼굴도 그 때 두 번이나 보였다.
아무튼, 서지아는 백수웅 그룹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주머니 돈이 궁했던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고,
때로는 어머니 모르게 용돈을 훔쳐 주기도 했다.
서지아는 그 중에서도 백수웅을 제일 좋아했다. 비록 키가 작고 촌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언제나 당당했고 패기에 넘쳐 있었다. 사회와 민족을 생각하는 이론도 질서 정연했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으며, 또한 자기 통제에도 엄격한 사내였다.
서너 살 아래로 보였지만, 한번 뜨거워진 마음은 걷잡기 힘들었다.
그녀는 술에 취한 백수웅을 몇 번이나 여관으로 유인했지만,
그 사내로부터 사랑을 받는 데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 모임에 뜻밖의 위기가 닥쳐왔다.
한일 외교 회담 반대 데모를 모의한 혐의로 정보 기관의 수사망에 걸려든 것이다.
마침내 백수웅도 쫓기기 시작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겨우겨우 생활해 나가는 어머니에게
말 한 마디 못 하고 금호동 자택을 빠져나와, 삼양동의 서지아집에 숨어든 것이다.
아니, 그 곳으로 자진해서 피신한 것이 아니라, 서지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피신시켜 준 것이다.
위기는 백수웅에게만 온 것이 아니었다. 중앙정보부의 안테나에 민족 주점이 걸려든 것이다.
형사들은 민족 주점을 차려 준 사람 이 누구냐며 다그쳤고,
왜 하필 '민족 주점' 이냐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주위 다른 주점들의 증언으로 서지아는 겨우겨우 풀려났다.
원래는 '민속 주점'으로 막걸리나 빈대떡을 주로 팔아 왔는데,
학생들이 한 획을 더 그어 '민족 주점'으로 만든 것이라고 증언했던 것이다.
민속 주점이 당국에 의해 폐쇄되던 날,
서지아의 어머니는 화병을 이기지 못해 고향 정읍(井邑)으로 내려갔고,
그녀는 골방에 숨어 있는 백수웅에게 밤을 도와 이불 속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백수웅은 잠들어 있었다. 열흘이나 면도를 하지 않은데다가
워낙 턱수염이 많아 '털보 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던 백수웅이었다.
서지아는 오늘 밤 이 사내에게 첫 몸을 바치고 싶었다.
그건 결혼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백수웅의 머리맡에는 그가 읽던 사회학 책이나 철학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한 서지아는 불을 끄고 옷을 벗었다.
오늘밤엔 절대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작정했다. 그 때 그녀는 스물 네살이었고,
백수웅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러나 네 살이나 아래인 그를 서지아는 한 번도 어리다고 느껴 본 일이 없었다.
작은 체구였지만, 그는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 공부만 하는 골샌님이 아니라,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태권도도 2단이나 되었다.
뚜렷한 사회관과 목표, 확실한 자기 주장, 나무랄 데 없는 리더쉽, 그리고 뛰어난 순발력 등,
사내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내를 골방에 혼자 재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침내 그녀는 알몸이 되었다. 백수웅 앞에서 세 번째 벗는 옷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렵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늦가을 불도 피우지 않아 썰렁한 방인데도,
그는 겨우 팬티 하나만 몸에 걸치고 있었다. 백수웅은 넓적한 가슴에 수북한 털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그 털가슴에 입술을 댔다. 사내가 꿈틀대더니 뒤로 돌아 누웠다.
그녀가 뒤에서 다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숨이 턱에 닿을 것 같았다.
숨결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그 때 백수웅은 꿈을 꾸고 있었다.
거리에서 데모를 하다가 잡혔고, 그는 낯선 곳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있었다.
밧줄이 목에 걸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밧줄이 매우 차갑다고 느꼈다.
이제 몇 초 후에는 바닥이 빠져나가게 되고, 자신은 목에 밧줄을 건 채 허공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죽음이 오는 것이다. 이 세상과 영원히 결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죽음을 확인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끝나면 불꽃 속에서 한 줌 재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강물에 꽃잎처럼 하염없이 뿌려질 것이다.
'아, 조금만 더 성공했더라면 이 정부는 일본에 손을 내밀지 못 했을 텐데'
'툭' 밧줄이 늘어졌다. 숨이 가빠 오고 목이 답답했다.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잠을 깼다.
누군가가 뒤에서 목을 잔뜩 껴안고 있었다.
백수웅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서지아였다. 그녀가 잔뜩 목을 누르고 있었다.
"가만 있어, 백수웅."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드라운 젖가슴의 감촉이 몸을 자극시켰다.
그녀는 빰을 그의 등에 댔다. 따뜻했다.
"오늘은 놓치지 않겠어."
손이 겨드랑이로 파고들어 몸통을 감싸안았다. 팔의 힘이 점점 더 조여들었고,
그녀의 숨이 격정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 는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백수웅은 자신에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서지아가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서지아를 누나같이 생각했다. 도움을 줄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는 멋지게 갚아 주리라 맹새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빚갚음은 아니었다.
우리는 남매 같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라고 느껴 왔다.
백수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아가 좋아, 그러나 이런 건 싫어."
그리곤 옷을 입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백수웅의 체온이 남아 있는 이부자리에 서지아는 몸을 묻고 한없이 울었다.
그 후 백수웅은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
백수웅에 대한 서지아의 집념은 날이 갈수록 불꽃같이 타올랐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녀에게는 백수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찾아다녔다. 학교에도 가 보고, 금호동 집에도 가 보았다.
학생들이 자주 찾는 술집도 뒤져 보았다. 그
러나 그는 어디 숨었는지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허가가 취소되었던 민속 주점 영업 허가가 다시 회복되었다.
민속 주점이라는 간판으로 다시 영업해도 좋다는 공문이 날아든 것이다.
서지아는 뛸 듯이 기뻤다. 무교동 민속 주점이 다시 문을 열면
백수웅 일행이 다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술집을 열고 사흘이 지났다. 신문을 집어 든 그녀는 자기 눈을 의심하며
신문에 실린 사진과 기사를 다시 읽어 보았다.
백수웅을 비롯한 몇몇 대학생들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고 있는 사진이었다.
"백수웅이 청와대에"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청와대에 들어가 그들이 던져 주는 미끼에 변절할 백수웅은 아닐 것이다.
서지아는 그걸 믿고 있었다.
뛰어난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 대표들을 적으로 만들기 싫었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쓰러뜨린 것도,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것도 모두 학생들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와 검찰청에 특별 지령을 내렸다. 수배 대상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것이다.
자신의 계획과 입장을 확실히 밝혀 주고 싶었다.
대학생들은 대일 협상만큼은 죽어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당국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요는 경제력입니다. 솔직히 말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우리의 GNP는 북한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는 민족 운동도 통일 운동도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제 한국은 세계 무대로 도약해야 할 때입니다. 일제 치하를 인정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본을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춘궁기, 보릿고개
모두 빨갱이만큼이나 무서운 적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 걱정 마시고 학원으로 돌아가십시오.
정치는 우리가 합니다. 국가 재건을 위해서"
그러나 학생들은 5.16 그 자체부터 인정하지 않았고,
굳이 일본돈이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다고 말했다. 그
러니 이 정도에서 당신들도 군(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학생 초청이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 때부터 학생들은 본격적인 저항 운동을 시작했고, 당국은 무자비한 압박을 가해 왔다.
박정희 대통령과 학생들 간의 시각 차이는 엄청나게 컸다.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백수웅은 그 후 두 번이나 민속 주점을 찾아왔다. 미안하다는 말도, 잘 있었느냐는 인사도 없었다.
"곧 대규모 데모가 있을 것이다." 라는 말만 남겨 놓은 채 또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다시 찾아온것은 다음 해인 1964년 6월 1일이었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삼양동 집을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책을 70권이나 놓고 갔다.
"다시 못 보게 될지 몰라. 보관해 줘. 지아,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그가 따뜻한 인사를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백수웅이 책을 맡기고 돌아간지 이틀이 지났다.
그 날 광화문에서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데모가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각기 자신들의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라는 것을 치르고,
데모사상 처음으로 화형식(火刑式)이란 걸 만들었다.
박정희.김종필.김형욱 등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태운 후, 노도같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4.19혁명 이후 두 번째 격렬한 데모가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다치고 쓰러졌고 체포되었다. 훗날 6.3사태라고 불려진 대규모 데모였다.
서지아는 최루탄 가스와 곤봉이 난무하는 광화문과 무교동 일대를 울면서 헤매고 다녔다.
백수웅 때문이었다. 피를 흘리는 학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그
러나 거기서 백수웅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녀는 민속 주점으로 돌아왔다.
백수웅이 경찰에 쫓기게 되면 이 곳을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을 닫고 쪽문을 열어 놓았다.
꼼짝도 하지 않고 이틀을 보냈으나 백수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서지아는 그 이틀이 마치 십 년처럼 느껴졌다.
틀림없이 체포되어 정보부에 끌려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다니던 동료 학생들도 한 명 만날 수 없었다.
6.3 데모는 실패한 것이다.
서지아는 종로, 동대문, 서대문, 성북 경찰서를 돌며 백수웅을 찾아 헤맸다.
데모도 좋고 이념도 좋지만, 사람이 살고는 보아야 할 것 아니냐며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경찰서에서 백수웅 찾는 것에 실패한 서지아는,
이번에는 대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참으로 눈물겨운 모습이었다.
민속 주점 문을 닫아 버린 지도 어느 새 3주가 흘러 갔다. 매일같이 신문을 사 들고 훑어 갔다.
죽거나 다치기라도 했다면 틀림없이 보도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보도도 없었다.
김석우(金錫雨)라는 그의 고향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애태우며 엉뚱한 곳만 찾아 헤맸을 것이다.
백수웅을 찾아 헤매느라 지친데다가 긴장까지 겹쳐, 그녀는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눈물 많은 서지아였지만, 이제는 흘릴 눈물조차 없었다.
그녀는 문 닫은 민속 주점에 혼자 앉아 손님에게 팔아야 할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백수웅의 고향 친구라며 몇 번 찾아왔던 김석우였다.
백수웅은 권기청 . 이호영 . 노병구 등 시골 친구들과도 이따금 어울렸는 데,
김석우는 그 친구들 중 하나였다. 김석우는 백수웅이 머리를 다쳐,
천호동에 있는 한 학생의 하숙집에서 비밀리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치까지 자세히 일러 주며, 그러나 자신이 알려 주었다는 것은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
고마웠다. 고마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민속 주점 문도 걸어 잠그지 않고,
택시로 천호동을 향해 달려갔다.
천호동 다리를 건너 왼쪽에 있는 풍납동이란 곳의 낡고 초라한 집이었는데,
그녀가 찾아갔을 때 백수웅은 두 명의 여학생들로부터 정성 넘치는 간호를 받고 있었다.
서지아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이 두 여학생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당황한 것은 백수웅도 마찬가지였다.
서지아의 감정은 사랑과 증오로 뒤엉켰다. 전화 한 통이면 단숨에 달려올 수 있는데,
친구에게 귀동냥하여 찾아오게 만들다니....백수웅의 머리가,
예쁘게 생긴 여학생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다니
그녀가 사과를 깎아 그의 입에 넣어 주는 순간이었지.
"서 지아, 여 긴 "
지아는 획 몸을 돌렸다.
또다시 이 녀석을 보게 되면 뺨이라도 갈겨 주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 낡은 집을 뛰쳐나갔다.
옷이나 머리로 보아 여고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이가 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새로 입학한 1학년짜리 병아리 여학생이 틀림없었다.
"그런 애송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다니, 말도 안 돼!"
마치 불륜의 현장이라도 덮친 것처럼 그녀는 흥분했다. 또 한 명의 여학생도 있었지만,
백수웅을 돌보고 있는 것은 그 예쁘장한 여학생이 틀림없었다.
한 달 가까이 피를 말리는 초조 속에서 찾아 헤맨 백수웅,
그가 천호동의 한 여학생 하숙집에서 그녀들의 보호를 받아 가며 치료 를 받다니
그리고 전화 한 통 해주지 않다니....미친 거야. 난 미친 년이 틀림없다구.
저 쪽 건너편에 보이는 화려한 워커힐을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그렇게 돌아선 지 또 한 달이 흘러갔다. 민속 주점은 다시 손님들로 흥청댔지만,
옛날 같은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지아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았다.
증오도 시간이 지나면서 또다시 그리움으로 변했다. 한번 보고 싶어지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 그 얼굴, 그 손길이 눈에 밟혀 견딜 수가 없었다.
변장을 하고 천호동을 찾아갔다. 자존심 같은 건 헌신짝만도 못했다.
그러나 그 하숙집에는 수수해 보이던 여학생 혼자만 있을 뿐,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나 백수웅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실망만 안은 채 돌아왔고, 다음 날은 금호동 백수웅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
백수웅의 얼굴을 본 것은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 또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백수웅은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지아는 돌아섰다.
또다시 백수웅을 찾느니, 차라리 혀를 물고 자살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욕지거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달 후 백수웅이 엉뚱하게도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보도가 나돌았고,
그가 무혐의로 석방된 1964년 12월 이후 어디론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얼마 후 그 사실은 신문 보도로 확인되었다.
학생들은 중앙정보부에서 살해하여 암매장했을 것이라고 했고,
기자들은 아예 산 속 깊이 숨어 버렸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서지아는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다.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분풀이라도 하듯 이 녀석 저 녀석과 몸을 섞으며 돈을 벌었다.
그러면서도 백수웅이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잃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지아는 실제 백수웅의 실종 보도 이후에도 눈물 겨운 탐색 작업을 펼쳤다.
백수웅에 대한 서지아의 사랑,
그러나 이미 그것은 단순 표현의 사랑이라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광기 어린 집념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8년의 긴 세월, 참담한 마음으로 기다려 왔던 그 쓰라린 고통의 보상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내를 기어이 품에 넣었다. 이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지아는 몸을 밀착시키며 백수웅의 넓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어떡할 거지?"
"내 걱정은 하지 마. 생각이 있으니까."
"떠나지는 않을 거지?"
사내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여긴 위험해. 기관에서 냄새 맡은 게 분명하다구. 그보다도 먼저 할 일이 있어."
"또 떠나는 거야? 안 돼. 이젠 옛날처럼 그렇게 쉽게 떠나지는 못할 거야."
백수웅이 서지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서지아와 가졌던 지난 밤의 정사를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결코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국에 돌아왔다는 기뿜과
8년 만에 그녀를 만난 기쁨이 잠시 이성을 흐트려 놓은 것뿐이다.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여자다. 앞으로도 또 많은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나는 지아 곁을 떠나지는 않아. 연락처를 알았으니 수시로 전화할게."
그가 창문을 열었다.
또 하룻밤이 지나고 어느 새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날이지면 통금이 두려웠고, 해가 뜨면 사람이 무서웠다.
당장 이 호텔을 빠져나가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 머리좋은 추격자가 통금 해제 시간을 놓칠 리 없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밖을 살펴보았다.
어둠 속이지만 호텔을 에워싸고 있을 만한 형사들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문으로 걸어 나갈 수도 없다. 그는 열린 창문으로 몸을 집어 넣고 허리를 굽혔다.
"뭐하는 거야?"
지아가 놀라 다리를 움켜잡았다.
"저녁에 전화할게. 지아, 제발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둬."
창 밖에 두 뺨 정도의 콘크리트 베란다가 있었다.
백수웅은 발 끝에 힘을 주고 손으로 벽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텔의 코너를 돌았다. 낙지집이 즐비한 골목이 눈에 보였다. 6미터 정도 높이는 되어 보였다.
그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굽혔다가 잽싸게 허리를 펴며 골목을 향해 뛰어내렸다.
뛰어내릴 때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몸을 두 바퀴나 굴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골목 어둠 속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누구야!"
그가 달려가는 맞은편 어둠 속에서 두 명의 사내 모습이 보였다.
머리에 둥근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범대원이 틀림 없었다.
외골목이다. 뒤로 가면 호텔이 나온다.
호텔에는 자신을 추격하고 있는 기관원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죄 없는 방범대원들을 희생시킬 수도 없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길이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호텔 방 값이 없어 도망치는 거야. 봐 달라구!"
맞붙어 싸우더라도 호텔을 에워싸고 있을 기관원들과 붙고 싶었다.
그 머리 좋은 추격자 녀석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문까지 달려갔지만, 더 이상의 추격자는 볼 수 없었다.
백수웅이 창문을 빠져나갔다. 서지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옷을 주워 입고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모습은 어느 새 그림자처럼 사라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나쁜 자식, 또 사라져 버렸어."
이 때다. 골목에서 어지러운 발 소리가 들려 왔다.
한 사내가 달려나와 새벽 차들이 질주하는 종로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뒤로 두 명의 방범대원이 따라왔지만, 그들은 차마 길을 건너지는 못했다.
뛰는 모습으로 보아 백수웅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정말 못 말릴 사람이야."
그리고 술병 꼭지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셔 대기 시작했다.
술 기운과 사내의 체온이 몸 속으로 스며들어 체온을 올려놓았다.
"안 돼, 이번에는 놓아 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계속 술을 마셔 대고 있었다.
저녁이면 전화가 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폭발할 듯한 감정을 죽이고 있었지만,
하루 해가 가고 어둠이 찾아오고 다시 술집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도 그는 끝내 전화 한 통 걸어 오지 않았다.
서지아가 가슴을 태우며 백수웅의 전화를 기다리던 저녁 시간,
군밤 장수들이 흔히 쓰는 빵털 모자를 눌러 쓴 환경 미화원 하나가 영등포 법원 정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턱에는 제법 많은 수염이 돋아 올라 얼굴을 감싸고 있었고, 키는 작아 보였는데,
그는 깨끗한 법원 담벼락 아랫길을 쓸어 대고 있었다.
이따금 흘끔거리며 정문을 훔쳐보기도 했다.
이윽고 법원 사람들이 정문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사내의 눈이 더욱더 번뜩였다.
이성구는 퇴근 준비를 끝내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이얼을 돌리자,
스타다스트 호텔의 서지아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이성구입니다."
"아, 이성구 씨."
"어제 그 친구"
서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위협을 받고 있는 게로군.'
이성구는 스타 바의 서지아가 일방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것이,
아무래도 기관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위협을?
형사들이 백수웅과 서지아의 관계까지는 모를 텐데
그렇다면 그들은 지난 밤 반도 호텔에서 나와 스타다스트 호텔을 찾아갈 때
형사들이 미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놀란 것은 자신이 미행당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백수웅이 그 곳에서 체포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갔을 때 백수웅은 없었어. 형사들은 내 뒤를 미행해서 스타다스트까지 찾아간 게 분명해.
지아는 내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거야.'
안타까웠다. 마치 자신이 밀고라도 해서 백수웅이 체포된 것으로 그녀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사무실을 나와 버스를 타기 위해 부뺨 일이며,
또 하나는 8년 전 자신을 꼼짝도 못 할 함정에 빠뜨렸던 알 수 없는 인물을 찾는 일이다.
숱한 고문과 치욕에 몸을 떨어야 했던 그 모함의 주인공들을
지프의 꽁무니가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또 어느 새 저만큼 도망쳤다.
숨바꼭질하듯 그렇게 따라붙어 달리다 보니,
자동차는 어느 새 용산을 지나 서울역 가까이 달려가고 있었다.
전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신형 포니 승용차는, 다행히도 검은 지프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어렵기는 해도 서울역까지 무사히 추적해 왔다.
이 때 뒤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백수웅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경찰 백차가 빨간등을 휘돌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운전 기사가 낄낄댔다.
백 미러를 들여다보며 또다시 낄낄댔다.
"녀석들, 한 건 올린 걸로 생각하겠죠? 헤헤해, 잡아 보라구.
형사 어른이 타고 계신 걸 알면 헛다리 긁었다고 분해할걸!"
영업용은 어느 새 서울역 광장을 지나쳐 남대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지프와의 거리는 채 10미터도 되지 못했다. 지프는 시청 방향을 향해 달렸고,
뒤따르는 경찰 백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꽁무니에까지 따라붙었다.
이대로 더 버틸 수는 없다.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노릇이지만,
오늘의 이 기막힌 찬스를 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잘못하다가는 앞의 지프와 뒤의 백차에 포위당할 우려가 있다.
"자를 남대문 근처에 세워 주세요."
"남대문요? 저 차는 직진하는데요?"
"걱정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하세요."
운전 기사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택시를 지그재그로 몰아 길가에 붙여 세웠다. 좌측은 남대문 시장이다.
저녁 시간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들꿇고 있었다.
백차도 길 옆으로 붙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차선 변경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 같았다.
택시가 멈추자 백수웅은 차에서 뛰어내려 그대로 내달아 사람들틈으로 파고들었다.
"야--야, 임마. 차비 내고 가야지."
그러나 운전 기사의 고함 소리도 여기서 멈추었다.
백차에서 내린 교통 경찰들이 운전 기사의 멱살을 움켜잡은 것이다.
백수웅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운전 기사가 손짓 발짓을 해가며 뭐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고,
허리에 양손을 얹은 순경 하나가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남대문 시장 한복판에서 백수웅은 방향을 우측으로 꺾었다.
속칭 양동 사창가 골목이며 자신의 은신처인 무허가 하숙집을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분했다.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따라붙었다면 틀림없이 녀석들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옛날 전우를 팔아먹은 이성구와 그를 조종하는 추적자를 알아 낼 수 있었는데,
그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쳐 버린것이다.
"제기랄."
그는 쓰레기통에 코를 쑤셔 박은 채 킁킁거리는 똥개를 발견하고는,
오른발로 개의 궁둥이를 힘껏 내질렀다.
"깨갱-깨갱."
갑작스러운 발길질에 놀란 똥개가 죽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로 도망쳐 버렸다.
개가 도망치는 것을 바라보며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창녀들과 사내들이 어울려 삼겹살을 구워 먹는 대폿집 구석에 앉아 막걸리와 돼지고기를 시켰다.
소란하기 짝이 없는 대폿집 구석에 앉아 허기진 뱃속을 채우면서도 그는 아직도 분함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백수웅은 이제 경찰들이 왜 자신을 쫓는지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해운대에서의 순경 살해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님을 알았을 것이고,
부산역에서의 그 소란으로 인해 자신이 서울 잠입에 성공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 냈을 것이다.
자신이 노출된 분명한 이유는 순전히 이성구 때문이다.
노옥진을 찾기 위해 이성구를 찾아갔는데, 그가 기관에 밀고한 것이다.
서지아를 찾아가 보라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자신을 쫓는 그 인물은?
술잔을 들어 술을 입에 털어 넣으려던 그의 동작이 석고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지금 쫓기는 이유는 동백섬에서의 순찰대 순경 살해만이 아니다.
이성구는 백수웅 출현을 당국에 밀고했을 것이다.
당국에서는 백수웅 자신이 왜 서울에 나타났는지의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을것 같다.
테러! 그 목적을 기관원들이 알지 못했다면 이토록 집념을 가지고 뒤쫓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이후락, 박성철 접촉을 알려 주었던 도쿄의 히데코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이 엄청난 정보를 미 대사관의 요원을 통해 알았다고 말했다. 브라운이라는 미국인이다.
그 브라운이 한국 당국에 백수웅 자신의 존재와 목적을 통보한것이 틀림없다.
"나쁜 자식. 그 녀석만 입 다물었어도 내 존재가 이렇게까지는 노출되지 않았을 텐데."
아직 자신감을 잃을 단계는 아니지만,
이토록 철저히 노출되었다면 좀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끝까지 이성구를 의심하고 있었고, 복수를 다짐했다.
"옛날 동지를 기관원에 팔아 넘긴 배신자. 나는 그런 놈을 용서할 수 없어."
이성구는 패기도 자존심도 없이 목구멍 풀칠에 친구를 팔아먹은 밀고자라고,
백수웅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한국 당국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압박을 가해 올 것이다.
그리고 회담 장소는 살벌하리만큼 삼엄한 경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는 들고 있던 막걸리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은 회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정확한 회담 일자는 물론,
장소가 어디로 결정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 내는 것이 급하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적인 정보하나 입수하지 못한 채 노출되고 말았다.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일까?
아니다. 아직은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 혹독한 겨울,
그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알지도 못하는 상선에 끌려갔을 때도 목숨을 건져 냈다.
일본에서의 생활도 생각보다는 순탄한 편이었다.
게다가 이런 엄청난 정보도 하늘이 주었고,
동백섬 앞의 해양 순찰함을 만났을 때의 그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하늘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만일 뼈에 사무치게 그리웠던 노옥진을 먼저 찾으려 들지 않았다면,
이토록 철저히 쫓기는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노옥진을 만나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쯤 어디 있을까?"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던 그 예쁘고 착하고 조용하던 여학생.
사내로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해 보았고,
처음으로 여자의 몸을 소유하도록 허락했던 그 예쁜 여학생 노옥진.
백수웅은 가슴이 또다시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때의 이상한 사건은, 자신의 생명은 물론 노옥진까지 파멸시킨 것이 틀림없다.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 사건이.
그는 이제 두 개의 문제를 놓고 순서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하나는 8년 전 자신을 함정에 빠뜨려 파멸의 길을 걷게 했던 의문의 인물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고,
또 하나는 남북 회담의 정보를 입수하는 일이다.
한편, 기관원에 의해 끌려가는 이성구의 가슴은 참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스타다스트 호텔의 서지아에게 백수웅 출현 정보를 알려 준 것이
오히려 자신을 밀고자로 둔갑시켜 버리게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서지아를 찾아가 그렇게 해명하리라 작정하고 나서다가 연행된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백수웅이 체포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비겁한 놈!"
반도 호텔에서 보았던 그 날가롭게 생긴 사내가 기억에 떠올랐다.
그들이 왜 순순히 풀어 주었는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기관원은, 자신을 뒤쫓다 실패한 백수웅의 존재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지프는 시청 앞을 통과하여 광화문의 끝 우측에 위치한 치안국 앞에서 멈추어 섰다.
"내립시다."
그들은 정문을 피해 후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낯선 지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6 - 3 데모 때도 체포되어 이 곳으로 끌려왔었지만,
이런 칙칙하고 음습한 지하실은 보지 못했었다.
사면이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 천장에는 흐린 전구 하나가 매달려 있는데,
책상 옆에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전자식 고문 기구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비록 법원의 말단 서기로 전락해 버리기는 했지만,
결혼해서 아내와 살며 아이 하나를 기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 따위 분위기에 주눅이 들 만큼 이성구는 녹슬어 있지 않았다.
우람하게 생긴 가죽 잠바의 사내가 이성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백수웅이 당신 찾아왔었지!"
" "
"소용 없어. 여기서는 묵비권이 통하지 않으니까."
"당신은 누구요?"
이성구가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래서 묻는 거야. 날 연행해 왔으면 정중하게 대해야지.
너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아. 말해, 백수웅과 만났지? 어디 있어?
지금 어디 있느냐구? 말하지 않으면 거칠어질 수밖에 없어. 다치기 전에 말해!"
이성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취조 태도로 보아 백수웅이 아직은 무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를 만나지 않았다고 버텨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백수웅을 만난 일 없소. 그와 헤어진지도 어느 새 8년이나 지났소.
왜 나를 귀찮게 하는 거요."
"그 녀석, 지금 쫓기고 있어!"
"난 비록 말단이긴 하지만, 틀림없는 국가 공무원이오. 데모를 주도한 덕분에,
고시에 1차 패스하고도 2차 응시 자격을 잃기는 했지만
만나지도 못한 사람을 찾아 내라고 하면 난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사내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10분쯤 지난 것 같았다.
"좋아. 그렇지만 알아볼 게 더 있어! 서지아, 스타다스트의 서지아와 자넨 어떤 사이인지를 말해.
그 날 넌 거기서 술도 마시지 않고 밀담만 나눈 채 돌아가지 않았어?"
그렇다. 추측대로 이들은 그 날 뒤를 밟은 게 틀림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이성구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형사가 불까지 붙여 주었다.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수사관측의 최대 관심거리는 이성구가 왜 스타다스트에 갔느냐,
거기서 여주인 서지아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에 따라 백수웅의 소재가 파악될지도 모른다.
이성구는 참으로 난처했다.
차라리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돌아왔다면 어쨌든 변명을 늘어놓을 명분이라도 서겠지만,
그는 서지아에게 백수웅 출현만 알려주고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성구는 담배를 반 개비나 태우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형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이 녀석은 사실을 말할 것이다. '백수웅을 서지아가 보호하고 있다.'라고
이성구가 고개를 들었다.
"말하죠. 백수웅과 내가 학창 시절 라이벌이었다는 건 당신네들도 조사를 통해 알고 있을 거요.
하지만 또 그만큼 서로 의지했던것도 사실이오. 백수웅이 1964년 12월에 실종되었다고 발표된 이후,
나는 그를 아득히 잊고 있었소. 그런데 그 친구가 나타나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그럼 백수웅과 연락이 되었다는 건가?"
"아니오. 그걸 알려 준 건 당신네들이었소. 당신네들이 날 연행해 백수웅을 아느냐고 물었고,
찾고 있으니 위치를 알면 말하라고 했죠. 바로 어제 반도 호텔에서.
그렇다면 서울 어딘가에 백수웅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되는 거 아니오?"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지아를 찾아간 거요."
무엇인가 한 가지는 말해 주어야 한다. 한 가지라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입을 열게 만들 것이다. 지아와 함께 살아 남을 그런 진실을
"백수웅이 서울에 나타났는데 서지아는 왜 만나지?"
"백수웅이 증발되기 전까지 서지아는 그의 애인이었소."
사내가 그 말을 듣고 곧 밖으로 나갔다. 바로 옆방,
이 취조실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특수 장치가 되어 있는 옆방으로 달려간 것이다.
거기에는 반도 호텔에 자리잡고 있는 백수웅 체포 수사 팀 요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취조하던 형사가 말문이 막히면 달려와, 허열에게 다음 내용을 지시받곤 했다.
허열은 팔짱을 낀 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이성구를 연행할 것이 아니라 미행하는 편이 현명했을 거라는 자책감이었다.
그러나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구가 서지아를 찾아간 분명한 이유를 안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성구가 진술한 내용이 모두 맞는지도 모른다.
지난 밤 스타다스트를 습격했을 때,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백수웅은 찾아 낼 수 없었다.
허열에게는 오히려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백수웅은 분명히 서지아라는 그 술집 여자를 찾아갈 것이다.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제 앞으로는 섣불리 습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서지아를 철저히 미행하라. 본부에 연락해서 바의 전화에 도청장치를 연결하라.
그리고 그녀의 집을 찾아 내라. 백수웅은 사라지는 데 귀신 같은 사내니까 실수 없도록 하라."
스타다스트의 스타 바에 대한 도청 장치를 지시한 허열 검사는,
형사를 제쳐 두고 자신이 직접 취조실로 들어갔다.
법원의 말단 서기라는 이성구가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채 재떨이에서 담배 꽁초를 줍고 있었다.
담배가 떨어진 모양이다.
허열이 의자에 앉자, 그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어제 반도 호텔에서 만났던 분이군요."
"그렇소."
"담배 한 대 주시겠소? 두 대를 피웠더니 거덜이 났군요."
허열은, 백수웅이나 이성구나 배짱 하나는 두둑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이런 험악한 취조실로 잡혀 오면 겁에 질려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 사내는 담배부터 달라고 조른다.
허열이 담댓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당신에 대한 보고는 받았소. 서지아와 백수웅의 관계를 말해주어 고맙게 생각합니다.
부탁이 하나 있소. 아니, 부탁이 아니라 지시요.
만일 백수웅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즉시 당국에 신고하시오.
당신의 도움으로 백수웅이 채포되면, 진급도 시켜주고 원하는 법원으로 옮겨 줄 수도 있소.
장래를 보장해 준다는 뜻이오. 하지만 그를 숨겨 주거나 찾아와도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
당신은 법인 은닉죄를 면치 못할 것이오."
"그렇소? 좋습니다. 협조해 드리죠...
그런데 도대체 백수웅은 무슨 죄를 저질렀으며, 왜 쫓기고 있는 겁니까?"
8년 전,
백수웅이 간첩 용의자로 몰려 체포되었을 때, 데모를 주동했던 학생들은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도 이상했다.
그는 고작 성균관 대학의 문리 대학 하나만 책임지고 있었고, 그것도 1-2학년만 책임지고 있었다.
이성구 자신만 해도 법정 대학의 1-2학년 책임 리더로 일했다.
백수웅이나 이성구 자신이 선배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아 왔고
촉망받는 학생 지도자로 지목된 것은 사실이지만,
유독 그만이 간첩죄에 적용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미스터리였다.
더구나 백수웅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8년의 교도소 생활을 탈옥으로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이상의 형량을 받았다는 증거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허열도 실제 백수웅에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나 다름없는 장인 노범호 회장도,
백수웅이 남북 고위급회담 당사자인 이후락과 박성철을 대상으로 한
테러리스트로 일본에서 밀입국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8년 전 6.3 데모 이후
간첩혐의로 기소되었다가 무죄 석방된 뒤 갑자기 실종되었었다는 정도밖에는 말해 준 것이 없었다.
"백수웅은 사상범이오."
"아니오. 그는 8년 전 무죄 석방되었었소. 그리고 실종되었었지요.
그렇다면 그 8년간 그는 어디 있었소?"
백수웅의 실종은 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었다.
백수웅 자료를 찾기 위해 그 당시 신문을 모조리 찾아 검토했다.
백수웅의 얼굴도 알아 냈다. 허열도 그 점에 대해서는 무척 궁금하게 생각했다.
실종됐다던 그가 8년 만에 일본에서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출옥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뜻인데,
무죄 석방 후 밀항했다는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성구가 바로 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허열은 잠시 머리를 정리했다. 백수웅을 쫓는 그 자신도 의문점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첫째, 백수웅만이 그 많은 각 학교의 데모 주동자 가운데 간첩용의자로 몰려 기소된 이유는 무엇일까.
둘째, 어떻게 해서 무죄 석방되었으며, 왜 석방되자마자 실종보도 되었을까.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무슨 경로로 테러리스트가 되어 밀입국하게 되었을까.
셋째, 백수웅의 배후 인물은 누구일까.
미스터리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머리 좋은 허열도 이 부분은 도무지 추리가 안 되었다.
재판에서 무죄 석방이 결정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8년 동안이나 일본에 잠적하고 있었다 .
핵심을 파고드는 이성구의 질문에, 허열은 대답할 만한 자료가 하나도 없었다.
"난 그런 세부 사항까지는 모르오. 아무튼 그는 사상범이고,
나는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소. 내 말을 잊지 않길 바랄 뿐이오."
'흥.'
이성구는 코웃음을 쳤다. 진급을 미끼로 옛날 동지를 팔아넘길 이성구로 보았다면,
이들은 오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들은 백수웅이 왜 쫓기는가조차도 모르고 있다.
백수웅이 정말 북한과 접촉했다면, 그래서 채포된 것이라면, 당국에서 무죄 석방 시킬 이유가 없다.
백수웅이 찾아왔을 때 그는 탈옥했다고 고백했다.
당국은 백수웅을 무죄 석방이라고 발표한 후 다시 집어 넣었을 것이다.
왜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다. 누군가가 취조실로 들어와 허열에게 귀엣말로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허열의 얼굴이 잠시 긴장되는 것 같았다.
"좋다. 이 자를 석방하라!"
허열이 이성구 석방 명령을 내렸다. 이 자에게서 더 빼먹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서둘러 석방시킨 이유가 또 있었다.
노범호 회장으로부터 급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노 회장은 퇴계로의 한국 물산 본사 회장실에서 허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백수웅 수사는 얼마나 진전되었나?"
"생각보다는 쉽지가 않습니다만, 체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에 머물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백수웅이 실종된 64년 당시의 애인이었다는 여인의 소재를 파악해 수사 중입니다.
확실한 조치를 취해 놓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종로 1가 스타다스트 호텔 스타 바의 서지아라는 여자입니다."
"호텔 바의 여주인 서지아?"
"네. 녀석은 분명히 그 여자를 찾아갈 겁니다. 체포는 시간 문제입니다."
"음---."
노 회장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회장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무엇인가 중대 결심을 내린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허 검사!"
"네, 아버님."
"잊지 마라. 백수웅을 보거든 무조건 사살하라. 체포하면 안된다."
허열은 깜짝 놀라 노 회장을 바라보았다.
백수웅을 체포하면 물어 볼 것이 너무나 많았다.
왜 그는 남북한 모두를 테러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또 지난 8년 동안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그런데 뜻밖에도 노 회장은 그를 사살해 없애 버리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무조건 사살을 하라구요?"
"그래. 처음에도 말했지만, 더 이상 내게 질문하지 마라.
이제부터 지시하는 세 가지를 너의 뼈에 새겨 넣어라.
넌 앞으로 이 나라 장래를 이끌어가야 할 재목이니까.
첫째, 백수웅의 국내 침투 목적을 끌까지 비밀에 부쳐라.
둘째, 그 자가 체포되기 이전에 사살해 없애 버려라.
셋째, 그 자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더라도 더 이상 질문하지 마라.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어긋나도, 너와 나는 물론 우리 가족 모두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거야.
그러나 만일 녀석을 사살하는 데 성공한다면,
너는 장래 이 나라 대권을 움켜쥘 꿈을 꾸어도 결코 헛된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 봐."
질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잡으라면 잡아야 되고,
사살하라면 녀석의 가슴에 총알만 박으면 된다. 모든 것은 어른이 알아서 할일이다.
"아참, 잠깐만!"
등을 돌려 반도 호텔로 가려는 허열을 노 회장이 다시 잡아 불렀다.
"네 부하들이 내일 바뀐다. 연락원을 제외한 일선 형사들이 모두 바뀌는 거야.
이건 이후락 부장님의 지시니까 그런 줄 알라구."
"갑자기 왜"
"질문하지 말라고 했잖아!"
노 회장이 신경질을 부려 대며 고함을 질렀다. 허열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아무래도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손으로 턱을 괴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노범호 회장을 뒤에 두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체포가 아니라 무조건 사살이라니. 또 어떤 질문도 허용치 않는다니.
그러나 허열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정보부장께서 은빛 권총을 선물한 이유와 무조건 사살 명령이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키는 명령만 충실히 이행하면 그의 장래는 탄탄대로일 것이다.
더구나 이번 테러 저지는 대통령 지위 문제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이성구를 돌려보낸 후 수사 팀은 다시 반도 호텔로 돌아왔고, 다음 날 일선 형사 세 명이 교체되었다.
그들에게 백수웅에 대한 일체의 정보에 대해 특별한 함구령이 내려졌다.
교체된 세 명의 전문 수사관들은 뜻밖에도 8년 전 백수웅을 직접 검거하고 수사했던 인물들이었다.
말하자면 백수웅에 관한 한 전문적인 요원들이 되는 셈이다.
노범호 회장이 노기를 터뜨린 이유는 아무래도 신경 과민 외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왜 그리 과민하신 걸까?"
첫댓글 사상범이라니 얼마나 무서운 존제기에 정치인들이 벌벌 기는거여?
백수웅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빨리 알고싶다 ㅎㅎㅎ
잘 읽고갑니다~~
감사
좋아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