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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를 덮치기 시작했다. 위기를 알리는 경고 사이렌만 요란할 뿐, 탈출구를 찾기 쉽지 않다. 이럴 때 세계적 기업들의 경영 플랜을 짜는 비즈니스 전략가들은 어떤 지침서를 준비하고 있을까?
122년 역사의 세계 최장수 컨설팅기업인 아서디리틀(ADL)의 마이클 트램(Traem) 회장과 브랜드 전략의 구루(guru)로 불리는 케빈 켈러(Keller) 다트머스대 석좌교수를 만나 불황기 기업 전략을 들어 봤다. 이들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준비된 기업에게 위기는 기회"라는 것.
트램 회장은 "위기가 없으면, 승자(勝者)도 없는 법"이라며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역이용하라"고 말했다. 그는 인수·합병(M&A)과 기업 성장전략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 "지금까지 비용(cost) 통제나 조직 관리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판단이 들면, 인수·합병이나 전략적 파트너십 등을 통해 기업의 성장을 도모할 시점"이라는 게 그의 조언이다.
켈러 교수는 강력한 브랜드(strong brand)와 신뢰(trust)를 위기 탈출의 처방전으로 제시했다. 그는 디즈니·포드·인텔·나이키·P&G·코닥 등 세계적 기업들의 브랜드 전략을 진두지휘한 인물로 최근엔 삼성전자의 글로벌 브랜드 전략 수립에 관여하고 있다. 그는 "소비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고객들은 여러 물건을 구입하는 대신, 가장 믿을 수 있는 브랜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요즘 같은 때가 오히려 지속적이고 공격적인 브랜드 전략을 통해 기존 고객층을 튼튼히 다지는 동시에 새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수면과 달리, 깊은 곳에서는 문을 열고 기회를 포착하려는 글로벌 기업들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이 두 비즈니스 리더들이 한국 기업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케빈 켈러 다트머스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 “강력한 브랜드다”
세계 경제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터널 속을 헤매는 지금, 브랜드(Brand)란 단어는 너무 사치스럽게까지 들리기도 한다. 브랜드 전략의 세계적 권위자인 케빈 켈러(Keller) 교수에게 처음 물어본 질문도 그런 상식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기자는 "요즘과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브랜드 전략은 공격적이어야 하나, 방어적이어야 하나"라고 물었다.
켈러 교수는 이 질문에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브랜드는 고객에게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경제가 안 좋으면 약속을 잊기 쉽지만 그래선 안됩니다.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약속을 보다 더 확실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힘들 때일수록 메시지가 더 명확해야 합니다. 기업들이 가장 하기 쉬운 실수는 위기라고 해서 하던 것, 꼭 해야 할 일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는 이럴 때 기업은 두 가지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첫째가 신뢰(trust)이고, 두번째가 가치(value)입니다. 소비자가 이런 불황기에 제품 구매를 통해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는지를 오히려 더 잘 설명해야 합니다."
최근 방한한 그는 웃을 때 살짝 보조개가 그려지는 온화한 인상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현장 경험을 살려 마치 학생에게 강의하듯 체계적으로 정리해주었다.
■불황일수록 브랜드는 빛난다
―불황에 브랜드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돈이 부족한 소비자는 이름값보다 품질과 가격을 더 꼼꼼하게 따져 구입하는 게 합리적으로 보이는데.
"핸드백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고 해서 가죽의 질을 정확히 아는 소비자는 별로 없어요. 더구나 그걸 들고 나갔을 때 반응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제대로 된 브랜드라면 기본적으로 이런 정보들을 어느 정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소비자들의 경험이 브랜드에 녹아 있는 것이죠. 이런 브랜드를 선택하면 잘못 구매할 확률을 낮추고 의사 결정을 훨씬 신속하게 할 수 있지요."
―유명 브랜드 제품이 일반 제품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유명 브랜드 제품도 분명 하나의 제품이지만 동시에 다른 제품과 차별화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뛰어난 성능이나 저렴한 가격일 수도 있고 상징성, 감성, 매력 등 무형적인 요소일 수도 있지요. 대부분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요즘 세계적인 기업들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톱 브랜드들이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세계 100대 브랜드 정도 되면 어느 정도 변화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은 브랜드는 완충 장치(cushion)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브랜드 차별성이 없는 미국 자동차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 자동차회사의 브랜드 전략에 문제가 있었나요?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브랜드는 비록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고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했어요. BMW나 렉서스처럼 성능이나 고급스러움 등 경쟁사들과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갖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제품이 따라가지 못했어요. 그런 점에서 강력한 브랜드라고 할 수는 없지요."
■소비자가 브랜드에 무엇을 기대하는지부터 파악
―워낙 브랜드가 많다 보니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고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새 브랜드를 만들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소비자들이 당신의 브랜드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전에 디즈니는 자신의 만화 캐릭터를 청소용 세제에 사용한 적이 있지요. 사업분야를 다각화하려는 시도였지만 브랜드 이미지만 나빠졌어요. 그 후로 디즈니는 재미(fun), 가족(family), 오락(entertainment) 이 세 가지 조건에 맞는 경우에만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단계는 무엇인지요?
"고객이 브랜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강력한 브랜드는 경쟁 상품과 비슷한 점(points of parity)과 다른 점(points of difference)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전자(前者)는 신뢰, 후자는 가치와 연계되어 있지요. '밀러 라이트'라는 맥주는 다른 맥주 못지않게 맛은 좋으면서(parity) 칼로리는 적다(difference)는 특징이 있지요. 이런 메시지를 꾸준히 소비자에게 전달하고 신뢰를 획득해야 합니다. 결국 밀러 라이트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브랜드를 구축한 다음에는 어떻게 관리하나요?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브랜드를 꾸준히 혁신해야 합니다.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Gillette)는 '슈퍼블루'에서 '트랙II' '센서' '마하3' '퓨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개선된 제품을 선보임으로써 소비자에게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지요. 브랜드의 개성을 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는 IBM에 비해 제품력은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사용하기 쉽다는 특징을 앞세워 호감도를 높였습니다."
■한국 기업은 브랜드 인지도 높이는 것이 우선
―한국 기업의 브랜드전략은 어떤가요?
"한국 브랜드는 제품과 디자인, 이노베이션에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글로벌시장에서 고객들과의 소통(communication)에는 약한 것 같습니다. 글로벌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브랜드의 존재를 알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차별화를 통해 고객의 선택을 받아야지요."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가 기업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국가 브랜드가 개별 브랜드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어떤 제품이냐에 따라 다른데, IT 브랜드라면 한국 기업이라는 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금융 같은 분야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나이키입니다. 지역과 연령, 계층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꾸준히 어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키의 'Just do it'이라는 슬로건을 보세요. 도전이라는 브랜드의 메시지를 명쾌하게 전달하고 있지요."
마이클 트램 아서디리틀 회장 “지금이 투자할 때다”
불황(不況)을 먹고사는 기업 중 하나가 컨설팅 회사다. 어려움에 빠진 기업을 진단해 환부(患部)를 찾아내고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하는 것이 일이다. 이렇게 보면 122년 역사의 컨설팅 기업 아서디리틀(Arthur D. Little)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의사인 셈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마이클 트램(Traem) 회장은 아담한 체구에 잘 웃었다. 하지만 생각에 잠길 때면 냉정한 외과의사처럼 차갑게 변했고, 질문에 답할 때는 메스를 들이대듯 에두르지 않고 곧장 정곡을 찔렀다.
"요즘 같은 위기 상황에선 당장 기업의 모든 자원을 핵심 역량에 집중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경쟁자를 힐끗 쳐다보며 비슷한 속도로 혁신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요."
그는 "조직의 효율성을 높여 장기적 생존력을 강화하고, 그 후엔 과감한 성장 전략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긴장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회를 포착하라"고 했다.
■'핵심 역량'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라
―요즘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어떤 전략을 제시하나요?
"불황기에는 무엇보다 핵심 역량(core competency)을 강화하라고 주문합니다. 이를 위해 비용 관리(cost base)와 성장(growth)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기업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비용 관리부터 살펴볼까요. 시장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경쟁사보다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비용 관리의 필요성은 공감하겠는데, 불황기에 성장 전략은 언뜻 수긍하기 힘듭니다.
"원가 경쟁력이 확보된 기업에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주식·자산 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에, 새로운 투자처를 모색하기에는 최적이지요."
―성장 전략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기업의 성장 전략은 크게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로 구분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떻게'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시점이지요. 성장을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덩치를 키우는 방법(organic growth)과 외부의 기회를 활용하는 방법(inorganic growth)이 있습니다. 지금은 투자 환경이나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볼 때 외부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시점입니다. 인수합병(M&A)이나 전략적 파트너십(strategic partnership)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때죠."
그는 저서 '가치성장기업(The Value Growers)'에서 강한 기업이 되기 위해선 이익을 일시적으로 희생하더라도 미래 성장산업을 찾아 끊임없이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기업이 개선(improvement) 활동에만 주력하면 미래 성장의 기회를 잃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M&A보다 전략적 제휴가 유리할 때도 있지 않나요?
"세 가지 경우엔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기술(technology) 같은 무형자산과 시장(market)이 결합하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코닝정밀유리'의 경우, 사업 초기 코닝은 기술을 제공했고, 삼성은 시장(고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시너지 효과를 냈지요. 두 번째는 단일 기업 혼자서 투자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장에 새로운 표준을 설정할 때입니다. 예컨대 차세대 멀티미디어 표준을 만드는 상황에서는 기업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서 공동으로 표준 기술을 만들고 시장의 성장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좋은 전략적 파트너를 고르는 노하우가 있나요?
"처음 오는 기회를 무조건 덥석 물어서는 안됩니다.(웃음) 대부분의 기업들이 범하는 실수가 최적의 기업과 파트너십을 선택하기보다 먼저 다가오는 기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파트너를 찾는 노력이 필요해요."
■"지나친 우려는 금물"
―내년 세계 경제가 매우 불투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요?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잘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제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쟁 기업과 차별화할 수 있는 점이 무엇인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우려는 금물입니다. 귀가 얇아서는 안 됩니다. 경쟁사가 흔들린다고 해서 따라 흔들리면 안 되지요. 오히려 핵심역량에 집중해서 입지를 강화하고, 미래에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10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서구 기업들보다 유리합니다. 세계 경기 환경을 감안할 때, 지금은 기업의 순위와 시장지배력을 뒤바꿀 수 있는 기회이자 위기입니다."
―새롭게 도전할 만한 사업 분야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환경이 대표적이지요. 기후변화는 분명한 도전입니다. GE나 지멘스, P&G 등 지속가능 경영을 추구하는 세계적 기업들은 여기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뛰어들면 경쟁이 심해지지 않을까요?
"당연히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지요. 최근에 유럽의 자동차 기업과 공동으로 상품 기획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부나 경쟁사들은 소형차 개발에 주력했지만, 우리는 기존 차와 같은 크기에 연료 소비를 60% 줄인 엔진을 개발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대형차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에 착안했지요."
―한국 정부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한국에 조언한다면?
"신재생에너지 사업은 한국에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IT 산업의 경우 한국 기업은 아직 핵심 부품을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재생에너지 분야는 아직 공급사슬(supply chain·부품 생산 단계부터 최종 소비 단계까지의 연계망)이 정착돼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기회가 많다는 뜻도 되지요. IT와 달리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을 경쟁국보다 미리 육성할 수 있고, 관련 사업을 전방위적으로 키울 수도 있습니다. 완성품뿐만이 아니라 소재까지 망라할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다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포트폴리오를 잘 구성해야 합니다. 한국형 사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수요에 적합한 분야, 혹은 기존의 기반 산업과 시너지가 높은 분야를 육성할 필요가 있지요. 태양광 발전의 경우 한국이 강점을 가진 반도체 분야와 관련성이 있어, 선도 업체를 성공적으로 육성할 잠재력이 높습니다."
☞케빈 켈러(Kevin Keller)
브랜드 전략의 세계적 리더로 다트머스대의 아모스터크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을 가르치고 있다. 코넬대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했고, 듀크대에서 마케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저서'브랜드 매니지먼트(Strategic Brand Management)'는 세계 수많은 경영대학에서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다.
☞마이클 트램(Michael R. Traem)
인수합병(M&A)과 기업 성장 전략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독일 태생으로 컨설팅회사인 'AT커니(AT Kearney)'에서 기업 인수합병과 성장전략 등을 주로 담당했으며, 2006년 10월 아서디리틀의 글로벌 CEO에 올랐다. 저서로 '가치성장기업(The Value Growers)'과 '합병 그 이후(After the Merger)'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