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하여 야베스라
역대상 4:9-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올해 봄은 참 인상적으로 남을 것 같다. 어제 창립 5주년 색동음악회를 감동적으로 잘 마쳤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자랑하고 싶은 마음, 자화자찬하고 싶은 마음으로 늦게까지 설레었다. 여러분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음악회 이름에 5주년을 빼고 ‘청계동 봄맞이’라고 지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보다 장차 이곳에서 계속 평화를 누리고, 전도의 문을 열려는 우리의 소망과 기대가 담겼다. 내 옆에 앉은 청계동장님이 얼마나 흥분하고 좋아하던지, 우리가 청계동이란 이름을 담기를 정말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동네 주민들이 많이 오셔서 더욱 고마웠다.
사상최대의 47명 합창단을 꾸렸다. 무대에 선 사람 42명, 무대아래 지휘자와 반주자들 5명, 모두 색동저고리에 최종명단을 넣었으니 앞으로 역사가 될 것이다. 계속 더 연습하고, 확대하여 보람 있는 봉사활동, 시민사회 활동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특히 남성중창단의 가능성이 보인다. 이상훈 지휘자의 탁월한 능력과 김민경 반주자의 탄탄한 솜씨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늘 어김없는 참신한 홍보, 여선교회의 꽃누루미 책갈피 선물과 정성스런 음식, 흥미로운 영상제작, 의자를 나르고 무대를 꾸미는 등 모든 색동가족의 참여가 있었기에 더 풍성하였다. 함께 한 남편들과 멀리서 찾아준 가족들 덕분에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청계동 주민 최봉호, 이지현 집사님 부부의 헌신에 감사드리고,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배경이 된 문화부장 김순호 권사님께 높이 치하드린다.
특히 우리에게 감동을 준 로마솔리스트앙상블과 평화산책은 이미 한 가족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 분들의 노래솜씨 뿐 아니라 선교열정에서 배울 것이 참 많더라.
창립 5주년 기념은 음악회만이 아니라 톨레레게 운동으로 365일 계속된다. 여러분의 톨레레게는 여전한가? 지금 진행 중인 역대기 상하는 두 개의 두루마리로 된 역사책이다. 특히 역대상 1-9장은 이름들로 가득한 출석부 같다. 아담에서 사울 자손까지 재미없는 족보책이어서 읽기가 참 어렵다. 여기에 오늘의 주인공 야베스가 존재한다.
1)
한국교회에는 야베스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브랜드 화에 성공한 이름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야베스의 기도> 때문이다. 야베스는 출석부에 무려 두 절에 걸쳐 소개 되어 있다. 야베스란 이름은 이름 석자 때문에 특별한 감동을 준다.
야베스란 이름이 탄생한 배경이 독특하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9).
야베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뜻이 ‘고통’이다. 아주 고통스럽게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그의 어머니가 참 대단하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출산 고통이 극심하다고 해서, 자식의 이름에 고통을 새겨 넣었다. 어쩌면 자신의 고통을 자식에게 낙인찍을 수 있는가? 아들이 평생 어머니의 산고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야베스란 이름만이 아니다. 야곱의 막내 아들, 베냐민의 출생기사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야곱의 대가족이 벧엘에서 에브랏으로 쫒기다 시피 이동 중이었다. 두 번째 아이를 낳게 된 라헬은 외딴 곳에서 출산을 하였다. 얼마나 난산인지, 산고가 매우 컸다. 산파의 노력과 위로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죽게 되었다. 라헬 입장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어렵게 얻은 아들인가? 어쩌면 눈물과 한의 결실이었다. 죽어가면서 라헬은 자기 아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나서 곧 숨을 거둔다. 아이 이름은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었다(창 35:16-18).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곁에서 나선다. 베노니는 무슨 베노니냐, (말이 씨가 된다) 베냐민이라고 불러라.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 35:18).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 이름에는 아버지의 권위, 능력, 자부심, 대단함이 담겨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이든, 사물이나 조직이든 자신의 방향성과 소망이 담겨있다. 특히 성경에서 히브리인들의 이름 하나 하나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이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나 물건의 존재와 본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다. 성경공부 할 때도 이름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년에 한국기독교회협의회 90주년을 기념하면서 앞으로 100주년을 내다보면서 10년 간 주제를 정하였다. 나는 90주년 예배준비위원회의 감리교 위원이었는데, 난상토론 끝에 내가 제안한 주제가 채택되었다. 대체로 100년에 방점을 두고 영광과 기념을 말했으나, 나는 앞으로 10년간 지속되어야 할 교회개혁에 대해 말하였다. “흔들리는 한국교회, 다시 광야로!”.
지금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의식을 담아내자는 취지였다. 이를 JTBC 뉴스에서 손석희 앵커가 인용하였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교회의 위기의식과 처방에 대해 깊이 관심하고 있다. “흔들리는 한국교회, 다시 광야로!”란 주제는 그런 소망을 담아낸 것이다.
아름다운 이름, 좋은 이름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 중에도 야베스란 이름이 많다. 그런 이름이 교훈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야베스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뜻처럼, 고통스러운 탄생이 계속 고통스러운 삶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한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다. 그는 자기에게 복을 베풀어줄 수 있는 분, 만왕의 왕이요, 홀로 한 분뿐이신 하나님을 힘껏 붙잡았다. 그는 이름 속에 담겨있는 부정적인 삶의 그림자를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도전하였다.
2)
성경은 야베스가 그렇게 간구했더니,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한다. 그는 어떤 응답을 받았는가?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10).
먼저 야베스는 복의 복을 간구한다. 그의 기도는 담대하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10, 개역).
더 나아가 그의 후손이 고통 받지 않고 살 넓은 땅과 주의 손으로 자기를 도우셔서 고통을 막아주실 것과 그리고 고통을 없애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사실, 고통이란 뜻을 지닌 야베스란 이름은 어쩌면 불행을 가져올 이름일지도 모른다. 야베스는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붙여준 고통이라는 이름이 이름 뜻 그대로 자신의 운명이 되지 않도록, 자기 이름에 새겨진 고통이 그의 생애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야베스는 안일하게 이름이나 바꾸어 고쳐놓고, 운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불운, 두려운 운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흔히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팔자라고 부른다. 세상적으로 말해 야베스는 적극적으로 팔자를 고치기 위해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였다. 결론은 무엇인가? 야베스는 기도를 통해 제 팔자를 고친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작명소를 찾는다. 아기 이름은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을 개명할 때 제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 작명소에서는 이름을 지을 때 반드시 사주팔자에 따른다. 그 이유는 이름이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경외감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주팔자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사주(四柱)는 네 기둥이고, 팔자(八字)란 여덟 글자를 의미한다. 예로부터 사람을 집에다 비유하여, 사주는 네 기둥이고, 팔자는 네 기둥을 이루는 생년, 생월, 생일, 생시이다. 즉 집의 네 기둥인 사주를 이루는 여덟 글자는 사람이 타고난 운수를 일컫는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래서 ‘팔자가 사납다’는 말은 기박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말이고, ‘팔자가 세다’는 것은 운명이 편안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리 속담에 ‘팔자는 독에 들어가서도 못피한다’라는 말도 있다. 숙명론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행한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고 하자. 그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는 당연히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사주를 바꿀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주, 운명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쓴 십자가 이야기’를 출판한 신촌 연남동 신앙과지성사에 가보면 같은 층에 눈에 띄는 어떤 사무실이 있다. 출판사는 오래 전부터 사무실을 확장해 보려고 그 사무실이 이사 가기를 기다리지만, 권리금을 너무 비싸게 불러 주저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추레한 그런 사무실에 어떤 사람이 찾아올 까 싶더라. 그 앞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알고자 하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무엇하는 집인가? 점집! 문명화된 우리 시대에도 작명소든, 점집이든 여전히 높은 권리금을 따지고, 비싼 값을 부르고 있다.
3)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어느 날 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은밀히 찾아왔다. 그는 유명한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의원이었다. 그는 예수님과 인생의 문제, 철학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논하다가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이 물음은 ‘도대체 어떻게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와 다름없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예수님은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식으로 말해 우리 운명을 떠받치고 있는 ‘네 기둥 여덟 글자’ 곧 사주팔자부터 고쳐야 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정답은 단 하나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것은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름을 탓할 일이 아니다. 또 팔자나 탓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기록된 성경을 통해 우리 모두 다시 태어나는 길을 찾아보자. 그것이 팔자를 고치는 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팔자를 고친 사람도 있고 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주어진 팔자대로 불행하게 살다가 가버린 사람들도 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바꾼 사실이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히 6:14).
사울은 바울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바꾼 데에 머물지 않았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데 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
야베스를 보라. 야베스는 이름을 바꾸려는 시도는 않았지만, 그 이름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구하였다. 가장 위대한 기도는 야베스의 기도처럼 자신의 삶을 바꾸는 기도,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기도이다.
성경에는 반드시 은혜의 원리가 있다.
야곱+하나님의 은혜! 다윗+하나님의 은혜! 베드로+하나님의 은혜! 나 자신+하나님의 은혜!!
신앙의 길은 용서받은 죄인 인 ‘나’ 플러스 ‘하나님의 은혜’로 내 삶을 고치고, 바꾸는 길이다. 여전히 불만스런 과거에 매어있거나, 이름 탓을 하거나, 부정적인 자신의 팔자를 탓한다면 당장 내 신앙생활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 이름+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의 원리에 참여하라!
신앙은 참 아름답고 행복한 믿음의 길이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내 인생을 고치고, 새롭게 하며, 생기 있게 만들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내 이름 위에 하늘의 은혜를 더 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