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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꿈을 비는 마음"
늦봄 문익환 목사 선종 25주년
[문익환목사님 28주기를 맞아]
늦봄 문익환목사(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의 사상과 신학
(조헌정 목사)
- 목차 -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2) 시 신학 (Poem Theology)
(3) 감옥신학 (Prison Theology)
(4) 예언자 신학(Theology of Prophets)
(5)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히브리 민중사
(6) 통일신학(Theology of Reunification): 주체사상과의 대화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해방이라는 단어는 1945년 이래 우리역사를 가로지르는 핵심단어이며, 문익환 목사 또한 함께 동참했던 민중신학의 중심명제이자 기독교성서역사의 주요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신학사상을 해방의 신학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예언자로서, 문익환은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불꽃같은 생을 살았다.” 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대학로에서 진행된 노제에서 그의 영정이 움직이자 누군가 격정을 못 이기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문익환 목사는 단순히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의 목사로서 사회선교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예언자였다.
목사님의 독특한 삶은 그의 독특한 가족배경에 기인한다.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이 흔들리던 1899년 2월 28일 관북의 네 가문 1백 41명은 북간도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키울 것을 약속하고 함께 국경을 넘는다. 문익환의 고조부 문병규는 이 새 공동체의 웃어른이었다. 일제시대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의사 안중근 등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문씨네 식객이 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장로와 전도사를 거쳐 평양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된다. 당시 캐나다 선교부는 미국 선교부와는 달리 장차 조선의 교회는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여겨 유능한 인재를 눈 여겨 보고 있었는데, 문재린이 그 첫 수혜자가 되어 캐나다 유학을 하게 된다. 유학 후 용정의 한 교회를 섬기던 문재린 목사는 3.1 봉기에 가담했던 일로 일본영사관과 헌병대에 구속된 이후, 조선공산당 그리고 소련사령부에 차례로 체포를 당해 옥고를 치르면서 죽음의 문턱을 여러 차례 오고간다. 이는 당시 북간도의 현실이 외세가 난무하는 살벌한 전쟁터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문 목사님이 방북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을 당시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재판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아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아들은 72살이고 나는 95살이오. 익환아! 너는 우리 7천만 민족을 위해 일하고 감옥에 들어갔으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아라! 익환아, 그것을 기억해라!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익환의 어머니 또한 젊은 시절 기독교 여성해방 운동에 힘입어 ‘고만녜’ 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갖는다. 이때 명동촌에서 믿을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갖게 된 여성이 50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기독교 신(新)여성운동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신묵은 이 ‘신’자 여성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명동여학교 동창회장과 여전도사로 일하면서 용정 만세시위에 참가한 지도자였다. 문익환과 동생 문동환 형제의 민족사랑은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이었다.
2) 예수 가문, 그리고 문익환 가문
이 대목에서 나는 문익환 목사를 ‘오늘의 (작은) 예수’로 이해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가문과 문익환의 가문을 연계시켜보려고 한다. 물론 역사적 예수라고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가족 얘기는 극히 작은 몇 구절에 불과하기에 신학적 상상력을 더해 얘기를 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얘기는 서구의 전통 성서 해석 방법인 기록된 문자에서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는 ‘문자주석’(exegesis) 방식이 아닌 오늘의 상황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상황주석’(eisegesis) 방식이다. 강연자는 ‘문자주석’을 넘어선 ‘상황주석’이야 말로 예수께서 ‘사람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바, 성서의 본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진리 추구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족 또한 문익환의 가족과 같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의 피압박민으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수 탄생에 관한 얘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둘 다 동정녀 탄생을 말하지만, 마태가 아버지 요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누가는 어머니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우선 관심하는 것은 예수의 가족이 헤롯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는 마태의 얘기이다. 물론 마태는 그의 전체 신학 틀을 모세 오경에 맞추고 있기에 편집사적 관점에서 예수가 제2의 모세로서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해방의 역사를 펼쳐 나갈 메시아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보다 실(實) 역사적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문익환의 고조부로 시작하는 가족사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하였듯이 예수의 가문 또한 요셉 이전 세대에 다윗 왕조의 회복과 독립을 꾀해 로마와 헤롯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 요셉 또한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 아들 예수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을까? 물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교리에 물든 사람이라면 필자의 얘기에 대해 코웃음을 치겠지만, 역사적 예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해방을 염원하는 문익환의 정신세계가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듯, 예수의 정신세계 또한 그의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 큰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언제나 한반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압박과 지배를 받았고, 그래서 외세 어느 한쪽이 지배세력이 되면 유대는 다른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과 해방을 추구해 왔다. 우리나라 근세 짧은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중국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을 때는 갑오개혁이 보여주듯 일본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고, 일본이 지배세력이 되었을 때는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의 세력을 빌리고자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 탄생 직전 유대왕국은 헬라제국의 후예들인 북방 시리아의 셀류크스 제국과 남방 애굽의 프톨레미 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바 있으며, 예수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방 세력을 대표하는 로마 제국의 지배가 가시화되자 이미 바벨론 제국의 포로에서 해방을 안겨주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파르티아 제국의 힘에 의지했고 이 희망은 동방박사의 출현으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한때 파르티아제국은 로마제국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낸 적도 있었고 이때 헤롯대왕은 로마로 피신을 가기도 했었다. 따라서 요셉 가족의 애굽 피신은 단순한 도피로 보기보다는 문 목사님의 가족 이야기에 견주어 볼 때, 독립운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아니면 요셉의 죽음 또한 십자가라는 정치적 죽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머니 마리아의 얘기로 옮겨가 보자. 신학자 피오렌자는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라는 기도에서 ‘비천한 신세’를 로마군에 의한 강간 임신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갈릴리 민중 전체가 갖고 있는 반제국반식민 저항운동을 더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마리아가 노래하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으로 돌려보내셨다’는 구절이 유대왕국의 독립과 민중혁명을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실현된 바 있다. 어린 문익환이 고조부부터 이어지는 선조들의 투쟁의 역사를 들었던 것처럼 어린 예수 또한 선조들의 영웅적인 투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갈릴리가 마치 예루살렘의 유대주류사회로부터 밀려난 변방이었듯이 북간도 또한 변방이었다. 변방은 밀려난 자들의 한이 넘치는 땅이지만, 이 한은 공동체적으로 해방의 새 역사의 꿈을 키우는 혁명의 용광로였다. 문익환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그의 37년간의 삶은 로마제국 당시의 갈릴리의 예수가 33년간 겪었던 그 억압의 삶 자체였다. 따라서 예수가 그러했듯이 문익환 또한 출애굽으로서의 민족 해방,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 해방은 삶 자체의 지향이었다.
(2) 시 신학 (Poem Theology)
1) 문익환의 다양한 신학 훈련
문익환은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요절한 윤동주 그리고 반 박정희유신정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사상계의 주필 장준하와는 명동 은진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퇴학을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신학교에 입학한다. 평양신학교는 근본주의적이니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를 듣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이후 학병 거부로 인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가 해방 후 1947년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문 목사는 교회를 섬기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부를 접고 귀국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로 일하다 휴전 후 1954년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쳤다.
이후 한빛교회 초대목사로 봉직하는 가운데,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면서 기독교사상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설교와 글을 발표한다. 이어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1년간 공부를 한다. 공부한 신학교만 만주 일본 미국의 모두 저명한 다섯 개 학교이다. 당시 이렇게 다양한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이 또 있었을까? 이는 문익환이 처한 시대의 난국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지만, 어쩌면 이는 그의 신학 또한 영혼처럼 자유로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2) 성서번역가 문익환
문 목사는 51세가 되던 1968년, 개역한글판 번역이 한자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독자에겐 이해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세계 최초, 개신교•가톨릭 공동성서번역 작업에 책임위원으로 8년간 참여한다. 성서번역에 매진하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 히브리 성서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56세에 『새삼스런 하루』라는 첫 시집을 낸다. 이 과정에서 문익환은 제국들의 침략과 압제 그리고 추방 속에서도 야훼 신앙을 고백했던 시편 기자들과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우리 한민족이 펼쳐가야 할 신앙과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중반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는 전통적인 모더니즘 시대의 체계 조직신학, 다른 말로는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구분되는 백과사전적 조직신학(encyclopedia systematic theology)에 대비되는 ‘비체계로서의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 이야기 신학 혹은 ‘이야기 조직신학(Narrative systematic theology)’ 등으로 명명된다. 히브리성서나 헬라성서의 대부분은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는 물론 모세 율법의 상당부분도 역사 이야기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구전전승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은 비유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예수는 민중들의 언어로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으며, 복음서 기록 이전 순회 이야기꾼들에 의해 전승되고 선포되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문학은 크게 이야기와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야기 신학에 비교하는 ‘시 신학(Poem Theology)’라는 용어는 아직 신학 세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예수가 시인이었다는 주장은 많지만, 시 신학이라는 용어가 없는 것은 ‘신학(Theo + logos)’이라는 학문 자체가 ‘logos(말 곧 논리성)’를 기반으로 하는데 반해 시는 논리를 뛰어넘는 비논리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반드시 논리학의 틀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서구신학의 주장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희랍의 논리성에 기초한 철학적 개념 때문이며, 하느님의 나라를 기독교왕국(christendom)으로 치환하려는 서구기독교가 상대적으로 예수보다는 바울을 선호하여 왔기 때문이다. ‘예수신학’이라는 말은 없어도 ‘바울신학’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신학은 근본적으로 신의 절대 영역을 인간의 상대 영역인 언어로 제한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체 모순이다. 오히려 문 목사님은 시야말로 과학적이라고 규정한다.
“시작이란 이미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그 이미지로 표현된 감정의 빛깔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이에 맞는 말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되거든요. 이점에 있어서 시는 철두철미 과학적이에요. 시는 언어의 예술이기 때문에 적절한 말이 없으면 새 말을 만들어도 돼요.”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삼민사 1991 139쪽
인간 역사 속에서 시와 종교는 거의 같은 형태로 내려왔다. 예배의 무게 중심이 개신교에서는 설교에 있지만, 이를 제외한 찬송과 기도는 모두 시어(詩語)이다. 복음서의 헬라어를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로 역번역했을 때, 학자들은 예수의 언어가 본래 시어였다고 논증한다. 마태복음의 5-7장의 산상수훈의 언어들은 대표적이다. “저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빠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저 들에 피는 꽃을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자연을 노래하는 글은 시어체일 수밖에 없을뿐더러, 비유 곧 이야기로 분류되는 예수의 짧은 비유 말씀들은 거의 대부분이 히브리 시의 특징인 대비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곧 이야기가 아닌 시인 것이다. 히브리 성서는 율법과 예언과 지혜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혜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편이다. 히브리 성서의 중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예언서 중 후기예언서는 어떠한가? 대부분이 시어체이다. 결국 히브리 성서의 40%가 시다. 성서의 시 신학을 오늘에 몸소 재현한 이가 문익환 목사님이다.
왜 목사님은 시를 그토록 사랑했는가? 시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시는 대부분의 설교가 지향하는 일방적 방식인 가르침과 설득보다는 읽는 사람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백이 있는 대화의 방식이다. 하나 둘 셋의 삼단논법을 통해 상대방의 입을 닫는 결론을 끄집어내려고 하기 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성찰 단어를 통해 보다 높은 단계인 깨달음의 세계로 상대를 이끌어낸다. 그건 시인들 자신들이 경험하는 그 영적 혹은 신비의 세계가 언어로 결코 설명되거나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익환은 서구의 전통신학의 훈련을 받은 신학자이긴 했지만, 본래 그의 품성이 갖고 있는 이상형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틀을 깨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조직신학 서적으로 분류되는 『히브리 민중사』도 매장마다 종국에는 시로 끝맺고 있다. 혁명은 감성이 주도하는 시적 통찰력에서 일어나지,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3) 시편 1편 번역 비교와 우리말로 신학하기
시편은 무엇인가? 시편은 삶의 현실 앞에서 김정을 표현하는 운율을 담은 시이자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기도이다. 시편은 새 역사를 향해가는 믿음 위에서 출발하며, 시편 속에서 우리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 가운데 현존하면서 생명과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에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렇게 함으로 청중 자신들의 삶과 역사 안으로 초대한다. 그렇다면 시어(詩語)가 우리의 가슴을 흔드는 순수 우리말일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문 목사님 또한 이 부분에 엄청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시편 1편을 공동번역과 이전 개역한글과 비교해 보자.
(공동번역)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은 노래로 하는 시이자 기도이다. 반복되는 운율과 박자가 중요하다. 시는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하나의 단어가 갖는 함축성은 더욱 중요하다. 시에서 단어 하나는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개역과 공동번역의 첫 단어는 그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면서 하나의 서술체로 변해가는 단어와 그냥 “복 되어라!” 하는 선언의 차이는 단순한 단어가 차이가 아니라 시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지 않는가?
구조상으로 보더라도 개역은 ‘복 있는 사람은’ 으로 시작하여 ‘묵상하는 자로다/ 하리로다/ 같도다/ 못하리로다/ 망하리로다’ 곧 ‘다.’ ‘다.’로 끝나는 다섯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공동번역은 중간이 끊어지지 않는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 되어라!” 하는 축복 시어로 시작하고 또 중간에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하는 감탄 시어로 연결되면서 ‘다’(보살피신다)라나 결어는 끝에 딱 한번 나온다.
문법적으로 보더라도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려면 1절의 의인이 악인의 길에 가까이 다가가는 세 개의 형용구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개역은 ‘좇지 않는다’라고 하는 강한 어조가 맨 앞에 등장하므로 이후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가 갖는 의미가 퇴색하고 말았다. 반면 공동번역은 ‘가지 아니하고,’ ‘거닐지 아니하며,’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점진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 역동감을 더하고 있다.
끝으로 시어를 보자. 개역의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리고 공동번역의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를 비교하면 후자가 주는 표현의 생동감은 비할 바가 없다.
이후에 출간된 개역개정판과 표준새번역도 개역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표준새번역에서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겨가 ’흩날린다’는 문구와 ‘까불린다’는 문구를 비교해 볼 때, ‘까불린다’는 표현이 우리말의 강점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겨가 악인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 깊은 신학적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 발제자가 시무했던 향린교회는 홍근수 목사시절부터 지난 25년 동안 국악예배를 드려오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서는 얘기할 게 많지만, 시편에 관련해서 한마디만 하고자 한다. 예배 시에 시편교독문을 읽는데, 본인은 원시편이 노래로 하는 것이기에 이를 국악풍의 짧은 가락으로 인도자와 회중이 교대로 부르는 형식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담당 교인들과의 작업을 통해 만들었다. 이때 만약 문 목사의 공동번역 시편이 없었더라면 많은 부분 생동감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2013년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에서 “The Korean Traditional Hymn in Connection with Ecumenical Spirituality”란 워크샵을 향린교회 단독으로 주최한 바 있었다. 당시 보통의 워크샵은 많아야 2, 30명인데, 여기에는 200명이 참가 신청을 하고 큰 호응을 얻은 바가 있었다. 예배 전체 틀을 국악으로 바꾸는 일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일단 시편 교독문이라도 국악풍의 가락에 공동번역의 시어를 사용하면 한국교회 개혁에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목사님의 회고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 학교 문예지 편집 일을 맡았던 윤동주가 목사님에게도 시 한편을 써내라고 하여 한편을 보냈더니 ‘이게 어디 시야’하면서 되돌려 받게 되면서 시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번역에 참가하면서 시를 쓰게 되는데, 그러면서 상상하기를 만약 동주가 살아 있어 시편 번역을 도와주었더라면 자신은 영영 시를 써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문익환, 『혁명의 해일』 청노루 1988 118쪽)
문 목사님께서 히브리 성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조선인의 정신과 감성을 융화하여 얻어지는 가락과 언어를 발굴함으로서 투명하고 섬세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한 것을 생각할 때,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한다.
문익환의 짧은 시 두 개를 읽어보자.
- 예수의 기도 6 -
새벽 하늘 퍼렇게 멍든 가슴으로 와락 다가서시는이시여
가까워지다 멀어지다 멀어지다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로
이 새벽에도 이 외로운 감방으로 찾아오시는이시여
당신은 오직 사랑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진실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희망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자유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우리의 노래만 들어도 목이 메이시죠
우리의 기도만 들으면 눈앞이 캄캄해지시죠
아 ---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당신의 슬픔에 얻어맞으며
노래도 잃고 기도도 막히는 바닷가 모래알들에 지나지 않는가요
익히 잘 아는 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의 시작 부분이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3) 감옥신학 (Prison Theology)
감옥신학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문 목사님의 삶을 생각할 때, 결코 빠트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기에 실험삼아 붙인 용어이다. 감옥은 마치 성서의 예언자들이 광야에 나가 하느님의 음성을 더 깊이 듣고 깨달았듯이 오늘의 시대에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는 현존의 장소이다. 그래서 감옥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 위한 장소이지만, 오히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역설적으로 영혼의 자유를 훈련하고 자신을 성숙시켜 나가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1975년 공동성서번역 작업을 마쳤을 즈음, 문익환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반대운동에 핵심 인물이었던 죽마고우 장준하의 의문에 찬 죽음을 맞게 된다. 그때 그는 장준하의 못다 한 삶을 이어갈 것을 다짐한다. 다음은 장준하의 3주기에 그를 추모하며 감옥에서 쓴 시이다.
......
우리는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운 부끄러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 되리라
네 마음으로 네 사랑으로
하나 되어 죽으리라
부나비처럼
불 속에 뛰어들어
너를 얼싸안고
신나게 춤추며 죽으리라
어둠과 탐욕을 비웃어 주면서
통일 조국을 목이 터지게 노래하면서
<산중 고혼아> 중에서 김지형 김민희 『통일은 됐어,,』 지성사 1994 134쪽
1976년 문익환은 3.1명동구국선언 성명서를 작성하는 주역을 담당함으로 첫 번째 옥고를 치른다. 나이 59세였다. 그의 호는 '늦봄'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역사에 대한 늦은 자각을 고백하는 언어였지만, 동시에 뜨거운 여름을 준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부름을 상징하는 호이기도 하다.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인해 5번의 옥고를 더 치렀으며 이후 17년간 이어진 투쟁의 삶 가운데 감옥 안의 기간이 11년 반, 감옥 밖의 기간이 5년 반이었다.
사실 문 목사님 자신이 존경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저항의 신학이 남한 땅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본회퍼 목사의 옥중서신은 70년대 민족과 민중을 사랑했던 신학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성서와도 같은 역할을 했는데, 80년대 신학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문익환의 옥중 글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영복, 서승 선생을 비롯한 여러 옥중 글들이 우리 시대의 역작으로 많이 남아 있지만, 문 목사님의 옥중서신은 더욱 의미가 크다고 본다. 고난이 삶의 열매를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1973년 첫 시집을 낸 이후 나온 10여권의 저서 모두가 감옥생활에서 얻은 결과물이다.
감옥신학은 새로운 용어로 들리지만, 사실 바울서신의 일부가 감옥 안에서 쓰였기에 성서 일부 자체가 감옥신학이다.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았던 시절의 남은 초대그리스도인들의 글이 감옥신학의 일부이고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 관련 글들 또한 감옥신학의 일부이며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었을 때, 생겨난 모든 글들이 감옥신학이다. 옥중서간은 관제봉합엽서로 제한되기에 아무리 작게 쓴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압축적일 수밖에 없으며 엽서이기에 공개서한의 형식을 갖는다.
감옥에서 봄길 아내에게 보낸 글의 일부이다.
“오늘 새벽 무슨 꿈을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깜깜한데, 그 꿈이 어제 새벽 꿈의 고민을 풀어 준 것만은 지금도 뚜렷해요. 그게 뭐냐고 하면 이런 거였소. 호세아의 사랑의 고민은 결코 하느님과 사람의 상징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소. 고멜의 배신, 그 배신을 끌어 안는 호세아의 가슴 에이는 아픔,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포함하는 모든 사랑의 실체라는 걸 이틀 새벽 꿈이 나에게 깨우쳐 주었군요. 이것이 내가 법정에서 말한 성속의 이원론의 완전한 극복인 거죠. 가톨릭에서 생각하듯 그것만이 성체가 되는 것은 아니구요, 밥상에 오르는 모든 밥이 예수의 몸인 거구요, 그리고 그것은 그래도 농민들의 살덩어리, 그들의 피눈물,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그들의 소원인거죠.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소원인 거구요. 호세아서의 해석이 리얼하게 새로워졌으니, 오늘 감방 생활도 또 하나 커다란 축복이 되었군요. 감사 감사.”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202쪽.
(4) 예언자 신학(Theology of Prophets)
1) 제사장적 전통과 예언자적 전통
로마의 세네카는 일찍이 종교의 본질을 꿰뚫는 말을 했다. “종교는 범인들에게는 진실로 보이고 현자들에게는 거짓으로 보이며 권력자들에겐 이용의 대상으로 보인다.” 여기에 종교의 위험성이 숨어 있다. 종교는 크게 두 개의 기능이 있다. 제사장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이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분명한 차이점을 들라고 한다면 그건 한마디로 예언자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 혹은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찬양과 기도를 하느님께 올리고 개인적인 위로와 축복을 비는 제사장적 전통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향한 회개의 촉구 그리고 약자 보호 우선에 따른 사회 정의 실현을 외치면서 국가 권력과 박제화 된 종교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예언자적 전통은 히브리인들의 역사에서 두드러진다. 주위 대부분의 종교가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그 권력이 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옹호하는 국가종교의 형태로 나아갔지만, 여호수아와 사사기(판관기)는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온 히브리 노예들이 국가 종교의 틀은 물론 왕권마저 거부하고 계급 없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워가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정의와 자유와 평등의 가치 실현 이것이 예언자들이 지향했던 하느님 나라이며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가나안의 축복의 실체인 것이다. 필자는 아브라함의 축복 또한 탈도시화에서 이루어지는 유목평등공동체의 삶으로 이해하고 있다.
복음서 또한 이 점에서 매우 분명하다. 네 개의 복음서는 모두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생전 모습을 띠고 로마의 식민지 시대에 광야의 예언자로 등장한다. 엘리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가장 부유했던 시절인 아합 왕 시대에 국가권력에 저항한 예언자이다. 야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합 가문의 통치를 끝장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인물로 예언자들을 대표한다. 세례요한 또한 로마제국의 허수아비였던 헤롯왕의 비행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 옥에 갇히고 끝내 참수형을 당한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국가 권력 비판이라는 예언 활동에서 그 맥을 같이 한다.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세상에 나온 시기를 ‘요한이 잡힌 뒤에’(1장 15절)라고 말한다. 곧 마가는 예수를 부당한 국가권력을 비판했던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누가복음 또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는데,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장 18,19절) 여기서 핵심 단어는 ‘은혜의 해’이다. 이는 레위기에서 일곱 번의 안식년 다음에 오는 50년째의 희년(Jubulee)을 말한다. 희년은 처음 분배받았던 땅을 되찾는 해이며 모든 빚을 탕감 받고 노예 또한 해방을 시켜 집으로 돌려보내는 해이다. 곧 희년은 국가권력에 기초한 불평등한 모든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혁명(革命)의 해인 것이다. 프랑스의 성서학자 트로크메는 예수는 당시 명목상의 희년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였음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문 목사님이 온 힘을 기울여 참여했던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은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히브리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가는 오늘의 신앙운동이었으며,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예수의 갈릴리 하느님나라 운동의 연장이었다.
2) 고난 받는 예언자 예레미야와 문익환
40대 초반 목사님이 월간지 기독교사상에 2년에 걸쳐 기고한 글의 제목을 보면 예레미야라는 한 예언자에 완전히 ‘필’(feel)이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도 이명박 정권 초기 하늘뜻펴기(설교)를 통해 문서 예언자 전체를 연속하여 다루고 이를 출간한 바 있지만, 예레미야 한 사람에게 2년 동안 몰입했다는 것은 너무나 특이한 일이다. 예레미야는 누구인가? 모태에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그리고 민족의 운명을 세워나가는 예언자로 불림을 받은 사람이다. 곧 아버지 문재린 목사님의 뒤를 잇는 문익환 자신의 운명적인 삶을 그대로 말해주는 예언자이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며,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권력자들에 의해 옥고를 치루고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수모를 당하는 예언자이다. 문 목사님은 이미 18년 후에 일어날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본 것은 아니었을까?
예레미야가 유대 종교지도자를 향해 피를 토하는 회개를 촉구하였듯이 58년 전 1960년 4.19혁명 직후 <기독교사상>에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언급하면서 기독교의 반성을 촉구하는 <기독교도 아편이 된다>란 글을 남겼다.
‘기독교도 아편이다’라는 단언 명제에 나는 찬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중독증에 걸려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그 첫 증상은 죄에 대한 불감증이다. 둘째는 움직여야 할 몸이 반드시 움직여야 할 때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 종교성(religiosity)의 그늘 아래서 인간성(humanity)이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종교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종교의 타성(inertia)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참사람-하느님께 지음 받은 대로의 참사람-으로 회복해 주시려고 참사람-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기독교가 이것을 무시하고 자체의 권한과 자리만을 생각하는 한 종파(cult)로 전락해 버리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아편이라는 낙인을 찍혀도 변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생에서 ‘온통(tatality)’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우리는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옹근 교회’ ‘옹근 사람’이어야 생명을 건전하게 지탱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는 분열되어 버리고 말았다. 교계의 분열은 한국 교회를 마비 상태에 떨어뜨리고 말지 않았는가?
셋째로 지적해야 할 원인은 ‘은총’의 남용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밖에는 구함을 받을 길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생의 태도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부정을 덮는 아름다운 보자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심판도 받기 전에 자신이 다 용서하고 깨끗이 치워버리고는 다른 부정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능글맞은 철면피로 보이는 까닭이 실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율법주의, 타계주의 같은 것을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4월 혁명의 무서운 충격으로도 한국 교회가 그 중독증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무서운 충격이 주어지고야 말 것이다.
지금 남한 교회의 현실이 어떠한가?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이 급성장한 교회요 세계 최대 50대 교회 중 절반이 서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남한 기독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기독교’가 ‘개독교’로 ‘목사’가 ‘먹사’로 ‘평신도’가 ‘병신도’라고 조롱당한지 오래이며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린 지 오래이다. 20년 전 천만 명이 넘는다던 개신교 숫자는 현재 육백만 명 정도로 줄었으며 이백만 명 가까운 신도들이 교회 주변을 맴돌며 약속의 땅을 바라는 ‘가나안신자’들이다. 현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고령 신자들이 사라지는 15-20년 후에는 현재의 절반인 3백만 명으로 준다 해도 전연 이상할 것이 없다. 문 목사님이 60년대에 행했던 예언자적인 외침이 그간 8,90년대 교회의 성장하는 굉음에 눌려있었지만, 남한 개신교의 쇠퇴 내지는 몰락이 분명한 지금 우리는 그의 예언의 소리가 적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5)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히브리 민중사
민중신학이란 항목은 앞서 언급한 해방의 신학 그리고 예언자신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따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문 목사님의 말년의 역작인 『히브리 민중사』가 지닌 신학적인 독창성과 세계 신학계에서 남미의 해방신학과 더불어 민중신학이 갖고 있는 무게감 때문이다. 이 책이 절판이 되었다가 올해 문 목사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복간되었다는 것도 매우 뜻깊은 일이다.
흔히 제1성서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이해한다. 성서공부를 진행하다 보면 곧잘 신도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놔두고 왜 다른 민족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답이 문익환의 『히브리 민중사』이다. 『히브리 민중사』는 제1성서가 하나의 민족사가 아니라 세계 모든 약소민족이 강대국에게, 또는 한 나라의 밑바닥 민중이 지배권력으로부터 겪는 억압 가운데, 야훼 하느님께서 어떻게 해방의 역사를 이끌어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사와 한국 민족사를 민족 수난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내었듯이 목사님 또한 유대민족과 한국민족을 ‘히브리’라는 한 단어로 묶어내고 있다. 히브리 민중사는 제1성서 전체를 민중 해방의 이야기로 풀어낸 역사 파노라마이자 야훼 하느님의 인간 역사 개입의 본질을 드러낼뿐더러 목사님 자신의 고난에 찬 삶을 노래한 가슴풀이이다.
우선 히브리라는 단어는 고대 서남아시아에서는 핏줄로 이루어진 하나의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닌 밑바닥 계층을 일컫는 사회용어였음에 대해 여러 문헌을 통해 그 사례를 밝히고 있다. 먼저 성서에 등장하는 히브리 또한 그 쓰임새를 보면 특정한 사회계층을 일컫는 것을 볼 수 있다.(창 43:32, 고후 11:22) 히브리와 같은 어근을 가진 ‘하비루’라는 용어는 고대 중동의 기원전 18세기 기록에서는 용병 혹은 강도떼로 나온다. 또 15세기 기록에서는 ‘하비루들의 신들’로 등장함으로 국제조약 체결의 증인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애굽의 기록에서는 왕의 전리품으로 혹은 해방 혁명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하비루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달리 지칭되면서, 전쟁포로, 노예, 용병, 강도떼, 해방군, 소작농, 떠돌이, 더부살이 등의 다양한 계층으로 말해진다. 목사님은 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결국 히브리는 종족 혈족으로 단위를 이루는 배타적인 칭호가 아니라 자주적인 주격으로 해방되어야 할 밑바닥 계층이자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약자들을 포함하는 총칭”이라고 규정한다.(30쪽 이하)
그리하여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하비루 부대와 가나안 내부에서 반애굽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농민해방군으로서의 하비루가 합세한 해방전쟁으로 이해한다. 목사님은 여기서 ‘난 발바닥으로’라는 유명한 시를 읊으며 하비루의 저항정신을 자신의 현존으로 끌어온다.(42-43쪽)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십계명에 대한 해석은 더욱 놀랍다. “십계명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그건 모세의 등허리에 패인 열 줄 핏자국입니다. 성난 시나이 산 가슴 터지며 내뿜는 불꽃입니다. 아니, 그건 불꽃처럼 뒹구는 하비루 노예들의 살점들이었습니다. 다시는 억울하게 짓밟히고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죄 없이 맞아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살점들의 아우성이 바로 십계명이란 말입니다. 이 아우성이, 이 요구가 바로 야훼 하느님이 모세를 시켜 세우려는 새 공동체의 정신이요 뼈대가 아니겠습니까?”(109쪽)
이어 유일신 신앙 또한 해방과 자유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신앙 지키기 운동이었지, 이웃종교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교리가 아니었음을 설파한다. “어렵게 터득한 유일신 신앙이 지배자의 종교가 되면서 배타적인 독선에 빠져 독재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온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서도 잘못 이해하면 침략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정당화하고 급기야는 독재를 뒷받침해 주는 이념이 되는 것입니다.”(114쪽)
창세기 2장의 선악과 열매에 대한 해석 또한 (제국)권력자의 흑백논리의 시각 안에서 보는 점은 정확하다. 곧 (권력자의) 선악 판단이 독선이 되어 (민중) 생명이 이에 짓눌려 짓밟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가인의 아벨 형제 살해 해석에도 같은 흑백논리를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는 선뜩 동의하기 어렵다.(144쪽) 오히려 이는 농부로 상징되는 집단정착문명 곧 땅을 사유화하고 부를 확대해나가는 도시의 제국성(가인)이 목자로 상징되는 곧 땅을 공유하고 부의 확대를 스스로 절제해야 하는 ‘유목생명공동체(아벨) 파괴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북방 이스라엘은 62년 동안 세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고 세 왕이 비명으로 죽어가는군요. 어쩌면 분단 44년에 걸친 이 남쪽의 역사를 보는 것만 같군요. 거기 비해서 남쪽 유다는 세 왕이 세습으로 대를 이어 가거든요. 다윗 왕조가 확고한 지배권을 유지해 내려갔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평양 정권이 확고한 지배권을 유지해 내려온 것과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는 하비루 두목 다윗의 전통이 예루살렘이라는 뚜렷한 상징과 난공불락의 도성과 함께 지속될 수 있었던 반면 북쪽 이스라엘에는 중앙집권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문익환, 『히브리민중사』 2018 152쪽)
남북왕국의 분열의 역사를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읽는다. 확고한 통치 지배권을 세웠다고 해서 역사의 정당성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김일성주석을 다윗으로, 주체사상을 다윗의 전통으로 보는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다. 역으로 상황주석을 해 본다면 남한이 확고한 통치 지배권을 확립하지 못한 이유가 일제 식민지지배 청산에 대한 불충분과 외세의 간섭으로 본다면 이는 북 왕국의 정치적 혼란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간접 설명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무당들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짓누르며 머리에 떠오르는 건 웬일일까요? 무당들이란 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천대를 받아 가면서도 그걸 탓하지 않고, 남의 아픔을 짊어지고 그걸 풀어 주는 걸 천칙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거든요. (상게서 166쪽)
목사는 한(恨)의 사제(司祭)여야 한다는 말은 서남동의 말이긴 하지만, 누구의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감옥에서 민중의 한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익환은 예언자들의 중요한 점을 신학에서 말하는 말(logos)이 아닌 몸짓, 몸부림으로 보았다. 해방을 갈구하는 민중의 저항의지의 표현으로 본 것이다. “꿈틀거리는 격정이 먼저이다. 거기서 말이 터져 나오면 그 말이야말로 역사를 변혁시키고 새 질서를 줄 수 있는 말인 거죠.”(169쪽) 필자는 이 ‘새 질서를 줄 수 있는 말’이란 다름 아닌 목사님께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29명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이었다고 본다. 모든 이를 전율에 떨게 하는 그 외침은 하느님의 몸부림이요 땅의 뜨거운 저항이었다.
아모스 2장 9-12절에 나오는 짧은 구절을 통해 나실인의 해방전승과 예언자들의 해방전승을 비교하고 이를 이사야를 다루면서 유목민들의 해방전승을 언급하면서 이를 장소에 연계하여 언급하는 부분에서 그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문 목사님만의 번뜩이는 통찰력과 혜안을 느낀다. 곧 자원하여 몸을 하느님께 바친 나실인들을 출애굽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사막을 떠도는 반농경사회의 해방운동가로, 예언자들은 주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해방운동가로, 유목민들은 광야의 초원지대에서의 해방운동가로 보는 관점이다.(190-191쪽) 이사야가 그리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사자와 어린 양과 늑대와 염소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가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는 새 역사 창조의 장소를 사막과 농경지대의 경계선상에 있는 광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광야 유목민이 사막의 나실인 그리고 농경지대의 예언자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 못내 아쉽다.
구원에 있어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개혁교리는 오늘날 남한교회의 핵심 가르침인데, 이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교회의 폐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 믿음만의 교리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으로서, 이는 본래 예언자 하박국에 기인하고 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개역, 합2:4) -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공동) 여기서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큰 오해가 없는데, 개역으로 읽으면 이 믿음에 대한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여기서 문익환은 오늘의 교회가 하박국 예언자의 본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 본래 뜻은 ‘힘을 하느님이라고 믿는 사람들, 힘이 정의라고 믿고 설치는 사람들을 무서워 말라. 힘의 횡포-그건 옳지 않은 거야. 이런 뜻이죠. 하박국은 악에 항거해서 소신껏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를 환상으로 보았던 겁니다.’ 곧 하박국이 말하고자 했던 의인 신앙이란 ‘눈 딱 감고 믿는’ 현실 도피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와짝 뜨고 믿는’ 현실 역사 참여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269쪽)
『히브리 민중사』는 예언자들의 해방 전통이야 말로 성서의 일관된 중심 사상임을 밝히고 있다. 곧 ‘서구백인남성 신학자’들이 지난 이천 년동안 애써 외면해온 성서 안의 핵심인 발바닥 민중의 역사를 찾아낸 것이다. 문익환을 통일지상주의자 혹은 그래서 민족지상주의로 말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하비루 곧 민중해방사상의 실현을 꿈꾸는데 있는 것이다.
문 목사님의 뒤를 이어 가는 후학들이 담당해야 할 두 가지 신학 작업을 얘기하고자 한다. 우선 중도에서 그친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이후 바벨론 포로기의 에스겔과 제2, 3이사야 그리고 포로 귀환 이후의 에스라와 느헤미야까지 다룸으로 히브리 민중사를 완성하는 일이다. 강연자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바벨론 포로기의 문서들을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추구한 바 있다. 그리고 민중신학의 폭넓은 소개와 발전을 위해 『히브리 민중사』를 영어로 번역 출판하는 일이다. 사실 민중신학은 80년대 초 여러 학자들의 짧은 논문들을 모아 영문으로 번역된 책 한권 외에 특별한 책이 없어 매우 아쉬웠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국내외 소장 조직신학자들의 논문을 엮은 『Minjung Theology Today』라는 책이 곧 출판된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중신학 제1세대 학자들의 역작들이 세계 신학계에 소개되는 것이다. 제2성서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책이 올해 안에 영문으로 출판될 예정에 있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히브리 민중사』를 번역 출판할 때에 비로서 민중신학의 전체가 소개되는 것이다.
(6) 통일신학(Theology of Reunification): 주체사상과의 대화
1) 통일의 시급성
남한은 현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제1의 자살률국가이다. 국민소득은 계속 올라가고 국가안보는 신무기로 계속 튼튼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전쟁 아닌 전쟁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건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반생명 반평화 죽음의 기운이 한반도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세계 자살율 2위 국가가 같은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사이프러스임을 알 때 더욱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 안의 99마리 양보다 우리 밖의 한 마리의 양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교회의 복음 사역은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에 그 초점이 맞혀져야 한다. 38년 전 서울대 신입생 환영예배에서 행한 문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를 들어보자.
대한민국의 국시가 민주주의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는 ‘민족을 통일하는 민주주의’가 아닌가요. 요새 저같이 민족통일을 말하는 사람을 관변측에서는 뉴레프트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저는 그런 건 일소에 붙일 겁니다.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때려잡는 칼은 한 번도 우리의 목을 떨어뜨리지 못했어요. 저는 국토 분단을 고정시키고 민족 분열을 심화시키는 민주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거부할 거예요. 이것이 이 땅에서 신앙을 사는 길이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민족을 통일하는 민주주의-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휴전선으로 갈려 있는 민족의 통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휴전선의 철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려 있는 한, 휴전선의 철폐만으로는 민족이 통일되지 않아요. 민족 통일의 실체는 휴전선의 철폐가 아니라, 우리의 국토인 이 한반도에서,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에서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를 몰아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자유인으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민족의 주체적인 자기주장의 함성 앞에 휴전선은 여리고성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문익환,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민사, 1984. 136쪽.)
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들 대부분이 장밋빛 환상에 젖어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휴전선의 철폐를 넘어서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를 몰아내는 일이 통일의 실체라고 하는 목사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목사님이 지적하는 일차적 지배자는 미국이지만, 지금은 여기에 동승하고 있는 시장자본주의하의 투자 자본가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도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빈민들은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되고 있다. 또 목사님의 발언 가운데 우리가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부분은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에서’라는 단서이다. 북조선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우선의 NL주의와 민중우선의 PD주의를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합일의 정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통일신학이란 단지 통일의 필연성을 주창하는 신학이 아니라, 남과 북의 이념과 체제가 하나로 통일이 되는 신학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남쪽의 자본주의에 기초한 자유사상과 북쪽의 사회주의에 기초한 평등사상이 만나는 신학이어야 한다. 물론 남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이고, 다수는 성공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의 평등 또한 상당부분 제한적이다. 지역적으로는 평양 그리고 계급적으로는 10%에 해당하는 당원과 관료들에게 부가 편중되어 있다. 97년 처음 평양을 방문하면서 느꼈던 것은 자본에 물들기 시작하는 관료들이었다. 지금은 훨씬 더 심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체 모순에도 불구하고 강연자는 남쪽의 신자본주의와 북쪽의 신사회주의가 함께 만나 어우러지는 새로운 경제체제야말로 이 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경제모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이 말한 대로 ‘세계사의 하수구’인 한반도의 수난의 역사는 세계를 구원하게 될 것인데, 강연자는 이 세계 구원은 바로 남과 북이 만나 창출해 내는 새로운 정치사회경제체제라고 본다.
오늘 문 목사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어떤 신학적 작업을 진행할 것인가? 이미 해외에서는 여러 차례 시도된 바 있지만, 그건 민중신학과 주체사상의 만남이라고 본다. 여기서 필자는 주체사상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80년대 브리태니카사전은 <World Religion> 이라는 항목에서 북의 주체사상을 세계 8위의 ‘주체종교’로 분류하고 있다. 필자는 97년 이후 2013년까지 3,4년 주기로 다섯 차례 평양을 다녀온 바 있는데, 곳곳에 붙어 있는 여러 구호들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 이념을 엿보게 된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첫 방문에서 “주석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등등의 구호를 보면서 이는 기독교의 부활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었다. 지금도 김정은 위원장이 핵개발 중단 내지 핵폐기를 말하면서 그 정당성의 근거로 김주석의 유훈을 언급하는 것은 북조선이 유사종교 사회체제를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김일성 개인숭배사상’으로 치부하고 마는데, 이는 북에서 기독교를 향해 ‘주 예수 개인숭배사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가 되고 만다. 교회가 이천 년 전 예수의 사상과 행동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듯이 북 또한 수십 년 전의 김일성의 사상과 행동을 오늘의 시대에 재해석하고 있다. 물론 교회에도 문자 근본주의자가 있듯이 북에도 그런 근본주의자들이 있을 것이다. 남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단들이 있듯이 북에도 그런 이단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극단의 예를 갖고 전체를 속단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며, 탈북자들이 하는 얘기를 전적으로 신뢰해서도 안 될 것이다. 북에서 비판하는 기독교는 미국의 제국성을 대변하는 국가종교로서의 비판이 우선이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닌 것이다.
2)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대화
이제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통일신학의 과제는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만남이다. 문제는 북은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고 있으나 남은 ‘빨갱이 덫’에 걸려 주체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순 우리말인 ‘동무’ 대신 한자어 ‘친구’를 사용해야 하고 ‘인민(人民)’이란 좋은 단어 대신에 ‘민중(民衆)’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사용해야 했으며 주체(主體)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비주체성에 휘둘리며 살아온 것이다. 남에서 가장 선호하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건 민(民)의 주체인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는 곧 주체(主體)의 실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대화는 오히려 30년 전 한때 해외에서 진행된 적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도 비판할 게 많듯이 주체사상도 비판할 게 많다. 그러나 일단 저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자.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진정한 통일을 이루겠는가? 화해와 평화를 말하면서 내 것만 옳다고 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진정한 통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80년대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로 “주체사상과 기독교”라는 과목을 가르친 바 있는 홍동근 목사도 주체사상의 매력을 정치혁명의 맑스주의를 넘은 도덕철학과 종교성에 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주체사상을 주체종교 내지는 주체신학으로 읽는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주체사상은 맑스주의처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생소하지 않다. 해방 직후 맑스주의자들이 무신론과 유물사관을 가지고 기독교를 관념론이라고 조소하고 인민의 아편으로 치부하였을 때 (김일성주석은) 이념적 반대나 적대의식을 표시하지 않았다. 반대로 토착적인 따뜻함과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하여 좋다. 맑스주의도 차이점을 거두고 공통점만을 찾으며 기독교와 사촌사이까지 갈 수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주체사상과 기독교』 선우학원 홍동근 공저 북미주체사상연구회 1990. 78쪽) (가로 안은 필자의 첨가)
이 배경에는 김일성 자신이 어렸을 때, 외가 특히 어머니 강반석 집사의 영향 아래 교회를 다녔으며 아버지 김형직 또한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김형직 사후, 그의 절친인 손정도 목사 가정에서 양아들로 같이 자라났던 이가 김일성이다. 그리고 김일성의 외삼촌 강량욱 목사는 초기 수상을 지낸 바도 있다. 적어도 김일성에게 있어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함께 갈 수 있는 사상이었다. 서구기독교가 세계패권 제국주의와 결별하고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조선의 기독교로 탈바꿈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김주석은 여러 차례 남에서 온 목사님들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접점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주체사상의 기본 교리는 다음과 같다. (상게서 78쪽)
(1) 사람 중심의 사상 (2) 민족 자주성의 신앙 (3) 공산주의사회의 열망 (4) 혁명가적 풍모. 1. 주체사상의 사람 중심의 사상은 기독교의 하느님 중심 사상과는 반대개념으로 들리지만, 불트만이 지적했듯이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관점에서 얼마든지 접점은 가능하다. 2. 민족 자주성의 신앙 또한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 관점에서 보면 예수 운동의 실체이기도 했다. 3. 공산주의를 논할 때에 원론적 의미에서 맑스의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체를 물질이 아닌 사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나눠 쓰는 초기교회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원형이지 않는가? 4. 혁명가적 풍모는 헤롯왕을 여우로 비웃고 유대사회 지배의 근간인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휘두르며 상을 뒤집어엎고 종교장사꾼들을 쫓아내고 성전을 장악하는 모습이야 말로 과연 혁명가적 풍모가 아닌가?
이러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를 만약 문 목사님의 <히브리민중사>의 민중신학과 인민의 삶을 극대화하고자 하여 사회주의로 탈바꿈하고 있는 북조선의 주체신학으로 그 폭을 더욱 좁힌다면 둘 사이의 간극은 훨씬 더 좁아질 것이다. 필자는 목사님께서 지금 살아계신다면 분명 이 작업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의 통일시대를 바라보면서 한신신학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진행하여야 한다고 본다. “민중신학과 주체사상 연구소”(가칭)를 설립하는 것을 제안한다. 10년 전 홍근수 목사께서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라는 과목을 개설했을 때, 등록학생 미달로 취소된 바 있지만, 이번의 한신신학의 광맥을 찾아가는 연속강좌가 하나의 행사로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던 김재준 목사님과 송창근 목사님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의 유지를 이어 반드시 이런 연구소가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문 목사님은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것이 바로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7) 나가면서
출애굽의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야웨흐 아세르 야웨흐’라고 답하신다. ‘나는 곧 나다.’라고 번역되는 이 말을 필자는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한다. 첫째는 ‘백성들 사이에 거하는 신의 현존성’이고 둘째는 ‘인간의 언어로 규정받지 않는 곧 이름이 없는 신의 자율성’이다. 늦봄 문익환은 이러한 하느님의 본질적 형상을 가장 잘 보여준 분으로 하느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언자였다. 미국의 퀘이커 봉사회는 1992년 문익환 목사를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천거하기도 했다.
끝으로 그의 평생의 반려자 박용길 장로를 언급한다. 그는 남편의 가는 ‘늦봄’ 길을 함께 가겠다는 뜻에서 ‘봄길’이란 아호를 짓고 명동구국선언에서부터 뜻을 같이 하며 십자가 수난의 길을 걸었다. 남편을 대신하여 1995년 김일성주석의 1주기에 방북을 하였고 이로 인해 구속을 당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의 대표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과 생명의 역사를 한반도에 펼쳐 보인 자랑스러운 부부였다.
《문익환평전》은 다음의 문장으로 문 목사님의 삶을 정리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잘못된 수치심 없이 저 아득한 21세기의 나날들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고, 또 분단ㆍ전쟁ㆍ국가폭력 같은 두려운 단어들이 아닌 따뜻한 언어로도 우리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꿈과 사랑을 보여준 그의 업적 덕분에 새로운 세대는 다른 눈으로, 더 잘, 더 자유롭게, 더 정직하게 자기들의 시대를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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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
[문익환목사님 28주기를 맞아] 늦봄 문익환목사(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의 사상과 신학 - 목차 -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2) 시 신학 (Poem Theology) (3) 감옥신학 (Prison Theology) (4) 예언자 신학(Theology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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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늦봄 문익환 목사님(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 선종 25주년!
오신지 100년이 지나고 가신지 25년 !
어릴 적 동문의 친구 윤동주 시인의 시심을 가슴에 담고, 1975년 8월 17일 의문의 죽음을 맞은 평생 친구 "장준하의 대타자"임를 자처하며 57세에 늦게 뛰어든 재야운동권의 길!
"너 외로운 山中 孤魂아,
... ...
아아, 산중 고혼 우리의 임
장 준 하 !
너를 잊으면 우리는 죽는다
너없이는 우리는 없다 조국도 없다
너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사랑
우리의 정의
우리의 양심
우리의 자유
우리의 전부
차라리 우리의 하늘이다 땅이다
우리의 새벽이다 새벽별이다
... ...
우리는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부끄러운 부끄러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 되리라
네 마음으로 네 사랑으로
하나되어 죽으리라
부나비처럼 불속에 뛰어들어
너를 얼싸안고 신나게 춤을 추며 죽으리라
어둠과 탐욕을 비웃어 주면서
목이 터지게 통일 조국을 노래하면서"
('산중고혼아-장형의 주기를 맞아-'3주기추도시, <씨알의소리> 1978년 9월호)
가톨릭 선종완 신부님과 함께 공동번역 구약성서를 번역하신 성서신학자의 "늦봄"이란 호!
늦봄 목사님은 귀양살이 다산 선생의 심정도 간직하셨나 봅니다 !
大綱旣隳圮(대강기휴비)
萬事窒不通(만사질불통)
中夜拍案起(중야박안기)
歎息瞻高穹(탄식첨고궁)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만사가 앞뒤로 꽉 막혔다
한밤에 책상을 치고 일어나
탄식하며 하늘을 쳐다본다
정약용은 그의 <하일대주>(夏日對酒)라는 장시에서 그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그래 생각다 못해 이런 상상을 하게된다.
那將萬箇竹(나장만개죽)
束箒千丈長(속추천장장)
盡掃秕穅塵(진소비강진)
臨風一飛颺(임풍일비양)
참대 만 개를 가져다가
천길 길이의 빗자루로 묶어서
검부러기, 찌꺼기일랑 모조리 쓸어
한바탕 바람에 날려보고 싶다
(천관우, '한국사에 있어서의 저항', <씨알의 소리> 1977년 4-5월호)
문익환 목사 "꿈을 비는 마음"
늦봄 문익환 목사 선종 25주년
[문익환목사님 28주기를 맞아]
늦봄 문익환목사(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의 사상과 신학
(조헌정 목사)
- 목차 -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2) 시 신학 (Poem Theology)
(3) 감옥신학 (Prison Theology)
(4) 예언자 신학(Theology of Prophets)
(5)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히브리 민중사
(6) 통일신학(Theology of Reunification): 주체사상과의 대화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해방이라는 단어는 1945년 이래 우리역사를 가로지르는 핵심단어이며, 문익환 목사 또한 함께 동참했던 민중신학의 중심명제이자 기독교성서역사의 주요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신학사상을 해방의 신학으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예언자로서, 문익환은 우리 시대의 중심에서 불꽃같은 생을 살았다.” 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아 대학로에서 진행된 노제에서 그의 영정이 움직이자 누군가 격정을 못 이기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문익환 목사는 단순히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의 목사로서 사회선교와 통일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예언자였다.
목사님의 독특한 삶은 그의 독특한 가족배경에 기인한다.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이 흔들리던 1899년 2월 28일 관북의 네 가문 1백 41명은 북간도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키울 것을 약속하고 함께 국경을 넘는다. 문익환의 고조부 문병규는 이 새 공동체의 웃어른이었다. 일제시대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의사 안중근 등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문씨네 식객이 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장로와 전도사를 거쳐 평양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된다. 당시 캐나다 선교부는 미국 선교부와는 달리 장차 조선의 교회는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여겨 유능한 인재를 눈 여겨 보고 있었는데, 문재린이 그 첫 수혜자가 되어 캐나다 유학을 하게 된다. 유학 후 용정의 한 교회를 섬기던 문재린 목사는 3.1 봉기에 가담했던 일로 일본영사관과 헌병대에 구속된 이후, 조선공산당 그리고 소련사령부에 차례로 체포를 당해 옥고를 치르면서 죽음의 문턱을 여러 차례 오고간다. 이는 당시 북간도의 현실이 외세가 난무하는 살벌한 전쟁터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문 목사님이 방북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을 당시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재판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아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아들은 72살이고 나는 95살이오. 익환아! 너는 우리 7천만 민족을 위해 일하고 감옥에 들어갔으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아라! 익환아, 그것을 기억해라!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익환의 어머니 또한 젊은 시절 기독교 여성해방 운동에 힘입어 ‘고만녜’ 라는 이름을 버리고 김신묵이라는 새 이름을 갖는다. 이때 명동촌에서 믿을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갖게 된 여성이 50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기독교 신(新)여성운동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신묵은 이 ‘신’자 여성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명동여학교 동창회장과 여전도사로 일하면서 용정 만세시위에 참가한 지도자였다. 문익환과 동생 문동환 형제의 민족사랑은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이었다.
2) 예수 가문, 그리고 문익환 가문
이 대목에서 나는 문익환 목사를 ‘오늘의 (작은) 예수’로 이해하면서 역사적 예수의 가문과 문익환의 가문을 연계시켜보려고 한다. 물론 역사적 예수라고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가족 얘기는 극히 작은 몇 구절에 불과하기에 신학적 상상력을 더해 얘기를 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얘기는 서구의 전통 성서 해석 방법인 기록된 문자에서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는 ‘문자주석’(exegesis) 방식이 아닌 오늘의 상황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상황주석’(eisegesis) 방식이다. 강연자는 ‘문자주석’을 넘어선 ‘상황주석’이야 말로 예수께서 ‘사람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바, 성서의 본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진리 추구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족 또한 문익환의 가족과 같이 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의 피압박민으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수 탄생에 관한 얘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둘 다 동정녀 탄생을 말하지만, 마태가 아버지 요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누가는 어머니 마리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우선 관심하는 것은 예수의 가족이 헤롯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을 갔다는 마태의 얘기이다. 물론 마태는 그의 전체 신학 틀을 모세 오경에 맞추고 있기에 편집사적 관점에서 예수가 제2의 모세로서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해방의 역사를 펼쳐 나갈 메시아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보다 실(實) 역사적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문익환의 고조부로 시작하는 가족사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하였듯이 예수의 가문 또한 요셉 이전 세대에 다윗 왕조의 회복과 독립을 꾀해 로마와 헤롯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 요셉 또한 단순한 목수가 아니라 아들 예수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을까? 물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는 교리에 물든 사람이라면 필자의 얘기에 대해 코웃음을 치겠지만, 역사적 예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해방을 염원하는 문익환의 정신세계가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듯, 예수의 정신세계 또한 그의 부모님에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 큰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언제나 한반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압박과 지배를 받았고, 그래서 외세 어느 한쪽이 지배세력이 되면 유대는 다른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과 해방을 추구해 왔다. 우리나라 근세 짧은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중국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을 때는 갑오개혁이 보여주듯 일본에 기대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고, 일본이 지배세력이 되었을 때는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미국의 세력을 빌리고자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 탄생 직전 유대왕국은 헬라제국의 후예들인 북방 시리아의 셀류크스 제국과 남방 애굽의 프톨레미 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바 있으며, 예수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방 세력을 대표하는 로마 제국의 지배가 가시화되자 이미 바벨론 제국의 포로에서 해방을 안겨주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파르티아 제국의 힘에 의지했고 이 희망은 동방박사의 출현으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한때 파르티아제국은 로마제국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낸 적도 있었고 이때 헤롯대왕은 로마로 피신을 가기도 했었다. 따라서 요셉 가족의 애굽 피신은 단순한 도피로 보기보다는 문 목사님의 가족 이야기에 견주어 볼 때, 독립운동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아니면 요셉의 죽음 또한 십자가라는 정치적 죽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머니 마리아의 얘기로 옮겨가 보자. 신학자 피오렌자는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라는 기도에서 ‘비천한 신세’를 로마군에 의한 강간 임신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갈릴리 민중 전체가 갖고 있는 반제국반식민 저항운동을 더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마리아가 노래하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으로 돌려보내셨다’는 구절이 유대왕국의 독립과 민중혁명을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실현된 바 있다. 어린 문익환이 고조부부터 이어지는 선조들의 투쟁의 역사를 들었던 것처럼 어린 예수 또한 선조들의 영웅적인 투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갈릴리가 마치 예루살렘의 유대주류사회로부터 밀려난 변방이었듯이 북간도 또한 변방이었다. 변방은 밀려난 자들의 한이 넘치는 땅이지만, 이 한은 공동체적으로 해방의 새 역사의 꿈을 키우는 혁명의 용광로였다. 문익환 해방이 되기 전까지의 그의 37년간의 삶은 로마제국 당시의 갈릴리의 예수가 33년간 겪었던 그 억압의 삶 자체였다. 따라서 예수가 그러했듯이 문익환 또한 출애굽으로서의 민족 해방,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 해방은 삶 자체의 지향이었다.
(2) 시 신학 (Poem Theology)
1) 문익환의 다양한 신학 훈련
문익환은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요절한 윤동주 그리고 반 박정희유신정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사상계의 주필 장준하와는 명동 은진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문익환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 퇴학을 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신학교에 입학한다. 평양신학교는 근본주의적이니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를 듣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이후 학병 거부로 인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가 해방 후 1947년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문 목사는 교회를 섬기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부를 접고 귀국 자원입대하여 통역장교로 일하다 휴전 후 1954년 다시 프린스턴 신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쳤다.
이후 한빛교회 초대목사로 봉직하는 가운데,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면서 기독교사상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설교와 글을 발표한다. 이어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1년간 공부를 한다. 공부한 신학교만 만주 일본 미국의 모두 저명한 다섯 개 학교이다. 당시 이렇게 다양한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이 또 있었을까? 이는 문익환이 처한 시대의 난국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지만, 어쩌면 이는 그의 신학 또한 영혼처럼 자유로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2) 성서번역가 문익환
문 목사는 51세가 되던 1968년, 개역한글판 번역이 한자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독자에겐 이해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세계 최초, 개신교•가톨릭 공동성서번역 작업에 책임위원으로 8년간 참여한다. 성서번역에 매진하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 히브리 성서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56세에 『새삼스런 하루』라는 첫 시집을 낸다. 이 과정에서 문익환은 제국들의 침략과 압제 그리고 추방 속에서도 야훼 신앙을 고백했던 시편 기자들과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우리 한민족이 펼쳐가야 할 신앙과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중반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는 전통적인 모더니즘 시대의 체계 조직신학, 다른 말로는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으로 구분되는 백과사전적 조직신학(encyclopedia systematic theology)에 대비되는 ‘비체계로서의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 이야기 신학 혹은 ‘이야기 조직신학(Narrative systematic theology)’ 등으로 명명된다. 히브리성서나 헬라성서의 대부분은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는 물론 모세 율법의 상당부분도 역사 이야기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구전전승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은 비유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이야기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예수는 민중들의 언어로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으며, 복음서 기록 이전 순회 이야기꾼들에 의해 전승되고 선포되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문학은 크게 이야기와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야기 신학에 비교하는 ‘시 신학(Poem Theology)’라는 용어는 아직 신학 세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예수가 시인이었다는 주장은 많지만, 시 신학이라는 용어가 없는 것은 ‘신학(Theo + logos)’이라는 학문 자체가 ‘logos(말 곧 논리성)’를 기반으로 하는데 반해 시는 논리를 뛰어넘는 비논리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반드시 논리학의 틀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서구신학의 주장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희랍의 논리성에 기초한 철학적 개념 때문이며, 하느님의 나라를 기독교왕국(christendom)으로 치환하려는 서구기독교가 상대적으로 예수보다는 바울을 선호하여 왔기 때문이다. ‘예수신학’이라는 말은 없어도 ‘바울신학’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신학은 근본적으로 신의 절대 영역을 인간의 상대 영역인 언어로 제한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체 모순이다. 오히려 문 목사님은 시야말로 과학적이라고 규정한다.
“시작이란 이미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그 이미지로 표현된 감정의 빛깔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이에 맞는 말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되거든요. 이점에 있어서 시는 철두철미 과학적이에요. 시는 언어의 예술이기 때문에 적절한 말이 없으면 새 말을 만들어도 돼요.”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삼민사 1991 139쪽
인간 역사 속에서 시와 종교는 거의 같은 형태로 내려왔다. 예배의 무게 중심이 개신교에서는 설교에 있지만, 이를 제외한 찬송과 기도는 모두 시어(詩語)이다. 복음서의 헬라어를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로 역번역했을 때, 학자들은 예수의 언어가 본래 시어였다고 논증한다. 마태복음의 5-7장의 산상수훈의 언어들은 대표적이다. “저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빠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저 들에 피는 꽃을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자연을 노래하는 글은 시어체일 수밖에 없을뿐더러, 비유 곧 이야기로 분류되는 예수의 짧은 비유 말씀들은 거의 대부분이 히브리 시의 특징인 대비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곧 이야기가 아닌 시인 것이다. 히브리 성서는 율법과 예언과 지혜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혜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편이다. 히브리 성서의 중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예언서 중 후기예언서는 어떠한가? 대부분이 시어체이다. 결국 히브리 성서의 40%가 시다. 성서의 시 신학을 오늘에 몸소 재현한 이가 문익환 목사님이다.
왜 목사님은 시를 그토록 사랑했는가? 시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시는 대부분의 설교가 지향하는 일방적 방식인 가르침과 설득보다는 읽는 사람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여백이 있는 대화의 방식이다. 하나 둘 셋의 삼단논법을 통해 상대방의 입을 닫는 결론을 끄집어내려고 하기 보다는 예상하지 못한 성찰 단어를 통해 보다 높은 단계인 깨달음의 세계로 상대를 이끌어낸다. 그건 시인들 자신들이 경험하는 그 영적 혹은 신비의 세계가 언어로 결코 설명되거나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익환은 서구의 전통신학의 훈련을 받은 신학자이긴 했지만, 본래 그의 품성이 갖고 있는 이상형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틀을 깨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조직신학 서적으로 분류되는 『히브리 민중사』도 매장마다 종국에는 시로 끝맺고 있다. 혁명은 감성이 주도하는 시적 통찰력에서 일어나지, 이성과 논리의 영역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3) 시편 1편 번역 비교와 우리말로 신학하기
시편은 무엇인가? 시편은 삶의 현실 앞에서 김정을 표현하는 운율을 담은 시이자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기도이다. 시편은 새 역사를 향해가는 믿음 위에서 출발하며, 시편 속에서 우리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들 가운데 현존하면서 생명과 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에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렇게 함으로 청중 자신들의 삶과 역사 안으로 초대한다. 그렇다면 시어(詩語)가 우리의 가슴을 흔드는 순수 우리말일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문 목사님 또한 이 부분에 엄청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시편 1편을 공동번역과 이전 개역한글과 비교해 보자.
(공동번역)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은 노래로 하는 시이자 기도이다. 반복되는 운율과 박자가 중요하다. 시는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하나의 단어가 갖는 함축성은 더욱 중요하다. 시에서 단어 하나는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개역과 공동번역의 첫 단어는 그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면서 하나의 서술체로 변해가는 단어와 그냥 “복 되어라!” 하는 선언의 차이는 단순한 단어가 차이가 아니라 시 전체의 생명을 좌우하고 있지 않는가?
구조상으로 보더라도 개역은 ‘복 있는 사람은’ 으로 시작하여 ‘묵상하는 자로다/ 하리로다/ 같도다/ 못하리로다/ 망하리로다’ 곧 ‘다.’ ‘다.’로 끝나는 다섯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공동번역은 중간이 끊어지지 않는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 되어라!” 하는 축복 시어로 시작하고 또 중간에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하는 감탄 시어로 연결되면서 ‘다’(보살피신다)라나 결어는 끝에 딱 한번 나온다.
문법적으로 보더라도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려면 1절의 의인이 악인의 길에 가까이 다가가는 세 개의 형용구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번역이 되어야 하는데, 개역은 ‘좇지 않는다’라고 하는 강한 어조가 맨 앞에 등장하므로 이후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가 갖는 의미가 퇴색하고 말았다. 반면 공동번역은 ‘가지 아니하고,’ ‘거닐지 아니하며,’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점진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 역동감을 더하고 있다.
끝으로 시어를 보자. 개역의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리고 공동번역의 “제 철따라 열매 맺으리,”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를 비교하면 후자가 주는 표현의 생동감은 비할 바가 없다.
이후에 출간된 개역개정판과 표준새번역도 개역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표준새번역에서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겨가 ’흩날린다’는 문구와 ‘까불린다’는 문구를 비교해 볼 때, ‘까불린다’는 표현이 우리말의 강점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겨가 악인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 깊은 신학적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 발제자가 시무했던 향린교회는 홍근수 목사시절부터 지난 25년 동안 국악예배를 드려오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서는 얘기할 게 많지만, 시편에 관련해서 한마디만 하고자 한다. 예배 시에 시편교독문을 읽는데, 본인은 원시편이 노래로 하는 것이기에 이를 국악풍의 짧은 가락으로 인도자와 회중이 교대로 부르는 형식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담당 교인들과의 작업을 통해 만들었다. 이때 만약 문 목사의 공동번역 시편이 없었더라면 많은 부분 생동감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2013년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에서 “The Korean Traditional Hymn in Connection with Ecumenical Spirituality”란 워크샵을 향린교회 단독으로 주최한 바 있었다. 당시 보통의 워크샵은 많아야 2, 30명인데, 여기에는 200명이 참가 신청을 하고 큰 호응을 얻은 바가 있었다. 예배 전체 틀을 국악으로 바꾸는 일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일단 시편 교독문이라도 국악풍의 가락에 공동번역의 시어를 사용하면 한국교회 개혁에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목사님의 회고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 학교 문예지 편집 일을 맡았던 윤동주가 목사님에게도 시 한편을 써내라고 하여 한편을 보냈더니 ‘이게 어디 시야’하면서 되돌려 받게 되면서 시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번역에 참가하면서 시를 쓰게 되는데, 그러면서 상상하기를 만약 동주가 살아 있어 시편 번역을 도와주었더라면 자신은 영영 시를 써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문익환, 『혁명의 해일』 청노루 1988 118쪽)
문 목사님께서 히브리 성서 정신에 바탕을 두고 조선인의 정신과 감성을 융화하여 얻어지는 가락과 언어를 발굴함으로서 투명하고 섬세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구축한 것을 생각할 때,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한다.
문익환의 짧은 시 두 개를 읽어보자.
- 예수의 기도 6 -
새벽 하늘 퍼렇게 멍든 가슴으로 와락 다가서시는이시여
가까워지다 멀어지다 멀어지다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로
이 새벽에도 이 외로운 감방으로 찾아오시는이시여
당신은 오직 사랑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진실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희망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오직 자유일 뿐이어
늘 슬픔이시군요
당신은 우리의 노래만 들어도 목이 메이시죠
우리의 기도만 들으면 눈앞이 캄캄해지시죠
아 ---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당신의 슬픔에 얻어맞으며
노래도 잃고 기도도 막히는 바닷가 모래알들에 지나지 않는가요
익히 잘 아는 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의 시작 부분이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3) 감옥신학 (Prison Theology)
감옥신학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문 목사님의 삶을 생각할 때, 결코 빠트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기에 실험삼아 붙인 용어이다. 감옥은 마치 성서의 예언자들이 광야에 나가 하느님의 음성을 더 깊이 듣고 깨달았듯이 오늘의 시대에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는 현존의 장소이다. 그래서 감옥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 위한 장소이지만, 오히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역설적으로 영혼의 자유를 훈련하고 자신을 성숙시켜 나가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1975년 공동성서번역 작업을 마쳤을 즈음, 문익환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반대운동에 핵심 인물이었던 죽마고우 장준하의 의문에 찬 죽음을 맞게 된다. 그때 그는 장준하의 못다 한 삶을 이어갈 것을 다짐한다. 다음은 장준하의 3주기에 그를 추모하며 감옥에서 쓴 시이다.
......
우리는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운 부끄러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 되리라
네 마음으로 네 사랑으로
하나 되어 죽으리라
부나비처럼
불 속에 뛰어들어
너를 얼싸안고
신나게 춤추며 죽으리라
어둠과 탐욕을 비웃어 주면서
통일 조국을 목이 터지게 노래하면서
<산중 고혼아> 중에서 김지형 김민희 『통일은 됐어,,』 지성사 1994 134쪽
1976년 문익환은 3.1명동구국선언 성명서를 작성하는 주역을 담당함으로 첫 번째 옥고를 치른다. 나이 59세였다. 그의 호는 '늦봄'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역사에 대한 늦은 자각을 고백하는 언어였지만, 동시에 뜨거운 여름을 준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부름을 상징하는 호이기도 하다.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인해 5번의 옥고를 더 치렀으며 이후 17년간 이어진 투쟁의 삶 가운데 감옥 안의 기간이 11년 반, 감옥 밖의 기간이 5년 반이었다.
사실 문 목사님 자신이 존경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저항의 신학이 남한 땅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본회퍼 목사의 옥중서신은 70년대 민족과 민중을 사랑했던 신학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성서와도 같은 역할을 했는데, 80년대 신학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문익환의 옥중 글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영복, 서승 선생을 비롯한 여러 옥중 글들이 우리 시대의 역작으로 많이 남아 있지만, 문 목사님의 옥중서신은 더욱 의미가 크다고 본다. 고난이 삶의 열매를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1973년 첫 시집을 낸 이후 나온 10여권의 저서 모두가 감옥생활에서 얻은 결과물이다.
감옥신학은 새로운 용어로 들리지만, 사실 바울서신의 일부가 감옥 안에서 쓰였기에 성서 일부 자체가 감옥신학이다.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았던 시절의 남은 초대그리스도인들의 글이 감옥신학의 일부이고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 관련 글들 또한 감옥신학의 일부이며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었을 때, 생겨난 모든 글들이 감옥신학이다. 옥중서간은 관제봉합엽서로 제한되기에 아무리 작게 쓴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압축적일 수밖에 없으며 엽서이기에 공개서한의 형식을 갖는다.
감옥에서 봄길 아내에게 보낸 글의 일부이다.
“오늘 새벽 무슨 꿈을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깜깜한데, 그 꿈이 어제 새벽 꿈의 고민을 풀어 준 것만은 지금도 뚜렷해요. 그게 뭐냐고 하면 이런 거였소. 호세아의 사랑의 고민은 결코 하느님과 사람의 상징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소. 고멜의 배신, 그 배신을 끌어 안는 호세아의 가슴 에이는 아픔,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포함하는 모든 사랑의 실체라는 걸 이틀 새벽 꿈이 나에게 깨우쳐 주었군요. 이것이 내가 법정에서 말한 성속의 이원론의 완전한 극복인 거죠. 가톨릭에서 생각하듯 그것만이 성체가 되는 것은 아니구요, 밥상에 오르는 모든 밥이 예수의 몸인 거구요, 그리고 그것은 그래도 농민들의 살덩어리, 그들의 피눈물,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그들의 소원인거죠.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소원인 거구요. 호세아서의 해석이 리얼하게 새로워졌으니, 오늘 감방 생활도 또 하나 커다란 축복이 되었군요. 감사 감사.” 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202쪽.
(4) 예언자 신학(Theology of Prophets)
1) 제사장적 전통과 예언자적 전통
로마의 세네카는 일찍이 종교의 본질을 꿰뚫는 말을 했다. “종교는 범인들에게는 진실로 보이고 현자들에게는 거짓으로 보이며 권력자들에겐 이용의 대상으로 보인다.” 여기에 종교의 위험성이 숨어 있다. 종교는 크게 두 개의 기능이 있다. 제사장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이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분명한 차이점을 들라고 한다면 그건 한마디로 예언자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 혹은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찬양과 기도를 하느님께 올리고 개인적인 위로와 축복을 비는 제사장적 전통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다. 그러나 민족 전체를 향한 회개의 촉구 그리고 약자 보호 우선에 따른 사회 정의 실현을 외치면서 국가 권력과 박제화 된 종교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예언자적 전통은 히브리인들의 역사에서 두드러진다. 주위 대부분의 종교가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그 권력이 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옹호하는 국가종교의 형태로 나아갔지만, 여호수아와 사사기(판관기)는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온 히브리 노예들이 국가 종교의 틀은 물론 왕권마저 거부하고 계급 없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워가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정의와 자유와 평등의 가치 실현 이것이 예언자들이 지향했던 하느님 나라이며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가나안의 축복의 실체인 것이다. 필자는 아브라함의 축복 또한 탈도시화에서 이루어지는 유목평등공동체의 삶으로 이해하고 있다.
복음서 또한 이 점에서 매우 분명하다. 네 개의 복음서는 모두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생전 모습을 띠고 로마의 식민지 시대에 광야의 예언자로 등장한다. 엘리야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가장 부유했던 시절인 아합 왕 시대에 국가권력에 저항한 예언자이다. 야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합 가문의 통치를 끝장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인물로 예언자들을 대표한다. 세례요한 또한 로마제국의 허수아비였던 헤롯왕의 비행을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 옥에 갇히고 끝내 참수형을 당한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국가 권력 비판이라는 예언 활동에서 그 맥을 같이 한다.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세상에 나온 시기를 ‘요한이 잡힌 뒤에’(1장 15절)라고 말한다. 곧 마가는 예수를 부당한 국가권력을 비판했던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누가복음 또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 분명하게 밝히는데,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장 18,19절) 여기서 핵심 단어는 ‘은혜의 해’이다. 이는 레위기에서 일곱 번의 안식년 다음에 오는 50년째의 희년(Jubulee)을 말한다. 희년은 처음 분배받았던 땅을 되찾는 해이며 모든 빚을 탕감 받고 노예 또한 해방을 시켜 집으로 돌려보내는 해이다. 곧 희년은 국가권력에 기초한 불평등한 모든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혁명(革命)의 해인 것이다. 프랑스의 성서학자 트로크메는 예수는 당시 명목상의 희년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였음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문 목사님이 온 힘을 기울여 참여했던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은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히브리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가는 오늘의 신앙운동이었으며,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예수의 갈릴리 하느님나라 운동의 연장이었다.
2) 고난 받는 예언자 예레미야와 문익환
40대 초반 목사님이 월간지 기독교사상에 2년에 걸쳐 기고한 글의 제목을 보면 예레미야라는 한 예언자에 완전히 ‘필’(feel)이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도 이명박 정권 초기 하늘뜻펴기(설교)를 통해 문서 예언자 전체를 연속하여 다루고 이를 출간한 바 있지만, 예레미야 한 사람에게 2년 동안 몰입했다는 것은 너무나 특이한 일이다. 예레미야는 누구인가? 모태에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 그리고 민족의 운명을 세워나가는 예언자로 불림을 받은 사람이다. 곧 아버지 문재린 목사님의 뒤를 잇는 문익환 자신의 운명적인 삶을 그대로 말해주는 예언자이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며,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권력자들에 의해 옥고를 치루고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수모를 당하는 예언자이다. 문 목사님은 이미 18년 후에 일어날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본 것은 아니었을까?
예레미야가 유대 종교지도자를 향해 피를 토하는 회개를 촉구하였듯이 58년 전 1960년 4.19혁명 직후 <기독교사상>에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언급하면서 기독교의 반성을 촉구하는 <기독교도 아편이 된다>란 글을 남겼다.
‘기독교도 아편이다’라는 단언 명제에 나는 찬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중독증에 걸려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그 첫 증상은 죄에 대한 불감증이다. 둘째는 움직여야 할 몸이 반드시 움직여야 할 때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 종교성(religiosity)의 그늘 아래서 인간성(humanity)이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종교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종교의 타성(inertia)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참사람-하느님께 지음 받은 대로의 참사람-으로 회복해 주시려고 참사람-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기독교가 이것을 무시하고 자체의 권한과 자리만을 생각하는 한 종파(cult)로 전락해 버리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아편이라는 낙인을 찍혀도 변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생에서 ‘온통(tatality)’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로서도 개인으로서도 우리는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옹근 교회’ ‘옹근 사람’이어야 생명을 건전하게 지탱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는 분열되어 버리고 말았다. 교계의 분열은 한국 교회를 마비 상태에 떨어뜨리고 말지 않았는가?
셋째로 지적해야 할 원인은 ‘은총’의 남용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밖에는 구함을 받을 길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생의 태도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부정을 덮는 아름다운 보자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심판도 받기 전에 자신이 다 용서하고 깨끗이 치워버리고는 다른 부정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능글맞은 철면피로 보이는 까닭이 실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율법주의, 타계주의 같은 것을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4월 혁명의 무서운 충격으로도 한국 교회가 그 중독증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무서운 충격이 주어지고야 말 것이다.
지금 남한 교회의 현실이 어떠한가?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이 급성장한 교회요 세계 최대 50대 교회 중 절반이 서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남한 기독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기독교’가 ‘개독교’로 ‘목사’가 ‘먹사’로 ‘평신도’가 ‘병신도’라고 조롱당한지 오래이며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린 지 오래이다. 20년 전 천만 명이 넘는다던 개신교 숫자는 현재 육백만 명 정도로 줄었으며 이백만 명 가까운 신도들이 교회 주변을 맴돌며 약속의 땅을 바라는 ‘가나안신자’들이다. 현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고령 신자들이 사라지는 15-20년 후에는 현재의 절반인 3백만 명으로 준다 해도 전연 이상할 것이 없다. 문 목사님이 60년대에 행했던 예언자적인 외침이 그간 8,90년대 교회의 성장하는 굉음에 눌려있었지만, 남한 개신교의 쇠퇴 내지는 몰락이 분명한 지금 우리는 그의 예언의 소리가 적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5) 민중신학(Minjung Theology): 히브리 민중사
민중신학이란 항목은 앞서 언급한 해방의 신학 그리고 예언자신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따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문 목사님의 말년의 역작인 『히브리 민중사』가 지닌 신학적인 독창성과 세계 신학계에서 남미의 해방신학과 더불어 민중신학이 갖고 있는 무게감 때문이다. 이 책이 절판이 되었다가 올해 문 목사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복간되었다는 것도 매우 뜻깊은 일이다.
흔히 제1성서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 이해한다. 성서공부를 진행하다 보면 곧잘 신도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놔두고 왜 다른 민족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답이 문익환의 『히브리 민중사』이다. 『히브리 민중사』는 제1성서가 하나의 민족사가 아니라 세계 모든 약소민족이 강대국에게, 또는 한 나라의 밑바닥 민중이 지배권력으로부터 겪는 억압 가운데, 야훼 하느님께서 어떻게 해방의 역사를 이끌어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사와 한국 민족사를 민족 수난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내었듯이 목사님 또한 유대민족과 한국민족을 ‘히브리’라는 한 단어로 묶어내고 있다. 히브리 민중사는 제1성서 전체를 민중 해방의 이야기로 풀어낸 역사 파노라마이자 야훼 하느님의 인간 역사 개입의 본질을 드러낼뿐더러 목사님 자신의 고난에 찬 삶을 노래한 가슴풀이이다.
우선 히브리라는 단어는 고대 서남아시아에서는 핏줄로 이루어진 하나의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닌 밑바닥 계층을 일컫는 사회용어였음에 대해 여러 문헌을 통해 그 사례를 밝히고 있다. 먼저 성서에 등장하는 히브리 또한 그 쓰임새를 보면 특정한 사회계층을 일컫는 것을 볼 수 있다.(창 43:32, 고후 11:22) 히브리와 같은 어근을 가진 ‘하비루’라는 용어는 고대 중동의 기원전 18세기 기록에서는 용병 혹은 강도떼로 나온다. 또 15세기 기록에서는 ‘하비루들의 신들’로 등장함으로 국제조약 체결의 증인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애굽의 기록에서는 왕의 전리품으로 혹은 해방 혁명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하비루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달리 지칭되면서, 전쟁포로, 노예, 용병, 강도떼, 해방군, 소작농, 떠돌이, 더부살이 등의 다양한 계층으로 말해진다. 목사님은 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결국 히브리는 종족 혈족으로 단위를 이루는 배타적인 칭호가 아니라 자주적인 주격으로 해방되어야 할 밑바닥 계층이자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약자들을 포함하는 총칭”이라고 규정한다.(30쪽 이하)
그리하여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하비루 부대와 가나안 내부에서 반애굽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농민해방군으로서의 하비루가 합세한 해방전쟁으로 이해한다. 목사님은 여기서 ‘난 발바닥으로’라는 유명한 시를 읊으며 하비루의 저항정신을 자신의 현존으로 끌어온다.(42-43쪽)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십계명에 대한 해석은 더욱 놀랍다. “십계명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그건 모세의 등허리에 패인 열 줄 핏자국입니다. 성난 시나이 산 가슴 터지며 내뿜는 불꽃입니다. 아니, 그건 불꽃처럼 뒹구는 하비루 노예들의 살점들이었습니다. 다시는 억울하게 짓밟히고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죄 없이 맞아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살점들의 아우성이 바로 십계명이란 말입니다. 이 아우성이, 이 요구가 바로 야훼 하느님이 모세를 시켜 세우려는 새 공동체의 정신이요 뼈대가 아니겠습니까?”(109쪽)
이어 유일신 신앙 또한 해방과 자유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신앙 지키기 운동이었지, 이웃종교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교리가 아니었음을 설파한다. “어렵게 터득한 유일신 신앙이 지배자의 종교가 되면서 배타적인 독선에 빠져 독재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온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성서도 잘못 이해하면 침략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정당화하고 급기야는 독재를 뒷받침해 주는 이념이 되는 것입니다.”(114쪽)
창세기 2장의 선악과 열매에 대한 해석 또한 (제국)권력자의 흑백논리의 시각 안에서 보는 점은 정확하다. 곧 (권력자의) 선악 판단이 독선이 되어 (민중) 생명이 이에 짓눌려 짓밟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가인의 아벨 형제 살해 해석에도 같은 흑백논리를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는 선뜩 동의하기 어렵다.(144쪽) 오히려 이는 농부로 상징되는 집단정착문명 곧 땅을 사유화하고 부를 확대해나가는 도시의 제국성(가인)이 목자로 상징되는 곧 땅을 공유하고 부의 확대를 스스로 절제해야 하는 ‘유목생명공동체(아벨) 파괴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북방 이스라엘은 62년 동안 세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고 세 왕이 비명으로 죽어가는군요. 어쩌면 분단 44년에 걸친 이 남쪽의 역사를 보는 것만 같군요. 거기 비해서 남쪽 유다는 세 왕이 세습으로 대를 이어 가거든요. 다윗 왕조가 확고한 지배권을 유지해 내려갔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평양 정권이 확고한 지배권을 유지해 내려온 것과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는 하비루 두목 다윗의 전통이 예루살렘이라는 뚜렷한 상징과 난공불락의 도성과 함께 지속될 수 있었던 반면 북쪽 이스라엘에는 중앙집권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문익환, 『히브리민중사』 2018 152쪽)
남북왕국의 분열의 역사를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읽는다. 확고한 통치 지배권을 세웠다고 해서 역사의 정당성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김일성주석을 다윗으로, 주체사상을 다윗의 전통으로 보는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다. 역으로 상황주석을 해 본다면 남한이 확고한 통치 지배권을 확립하지 못한 이유가 일제 식민지지배 청산에 대한 불충분과 외세의 간섭으로 본다면 이는 북 왕국의 정치적 혼란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간접 설명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무당들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짓누르며 머리에 떠오르는 건 웬일일까요? 무당들이란 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천대를 받아 가면서도 그걸 탓하지 않고, 남의 아픔을 짊어지고 그걸 풀어 주는 걸 천칙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거든요. (상게서 166쪽)
목사는 한(恨)의 사제(司祭)여야 한다는 말은 서남동의 말이긴 하지만, 누구의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감옥에서 민중의 한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익환은 예언자들의 중요한 점을 신학에서 말하는 말(logos)이 아닌 몸짓, 몸부림으로 보았다. 해방을 갈구하는 민중의 저항의지의 표현으로 본 것이다. “꿈틀거리는 격정이 먼저이다. 거기서 말이 터져 나오면 그 말이야말로 역사를 변혁시키고 새 질서를 줄 수 있는 말인 거죠.”(169쪽) 필자는 이 ‘새 질서를 줄 수 있는 말’이란 다름 아닌 목사님께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29명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이었다고 본다. 모든 이를 전율에 떨게 하는 그 외침은 하느님의 몸부림이요 땅의 뜨거운 저항이었다.
아모스 2장 9-12절에 나오는 짧은 구절을 통해 나실인의 해방전승과 예언자들의 해방전승을 비교하고 이를 이사야를 다루면서 유목민들의 해방전승을 언급하면서 이를 장소에 연계하여 언급하는 부분에서 그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문 목사님만의 번뜩이는 통찰력과 혜안을 느낀다. 곧 자원하여 몸을 하느님께 바친 나실인들을 출애굽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사막을 떠도는 반농경사회의 해방운동가로, 예언자들은 주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해방운동가로, 유목민들은 광야의 초원지대에서의 해방운동가로 보는 관점이다.(190-191쪽) 이사야가 그리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사자와 어린 양과 늑대와 염소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가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는 새 역사 창조의 장소를 사막과 농경지대의 경계선상에 있는 광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광야 유목민이 사막의 나실인 그리고 농경지대의 예언자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 못내 아쉽다.
구원에 있어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개혁교리는 오늘날 남한교회의 핵심 가르침인데, 이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교회의 폐해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 믿음만의 교리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으로서, 이는 본래 예언자 하박국에 기인하고 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개역, 합2:4) -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공동) 여기서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큰 오해가 없는데, 개역으로 읽으면 이 믿음에 대한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여기서 문익환은 오늘의 교회가 하박국 예언자의 본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 본래 뜻은 ‘힘을 하느님이라고 믿는 사람들, 힘이 정의라고 믿고 설치는 사람들을 무서워 말라. 힘의 횡포-그건 옳지 않은 거야. 이런 뜻이죠. 하박국은 악에 항거해서 소신껏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를 환상으로 보았던 겁니다.’ 곧 하박국이 말하고자 했던 의인 신앙이란 ‘눈 딱 감고 믿는’ 현실 도피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와짝 뜨고 믿는’ 현실 역사 참여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269쪽)
『히브리 민중사』는 예언자들의 해방 전통이야 말로 성서의 일관된 중심 사상임을 밝히고 있다. 곧 ‘서구백인남성 신학자’들이 지난 이천 년동안 애써 외면해온 성서 안의 핵심인 발바닥 민중의 역사를 찾아낸 것이다. 문익환을 통일지상주의자 혹은 그래서 민족지상주의로 말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하비루 곧 민중해방사상의 실현을 꿈꾸는데 있는 것이다.
문 목사님의 뒤를 이어 가는 후학들이 담당해야 할 두 가지 신학 작업을 얘기하고자 한다. 우선 중도에서 그친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이후 바벨론 포로기의 에스겔과 제2, 3이사야 그리고 포로 귀환 이후의 에스라와 느헤미야까지 다룸으로 히브리 민중사를 완성하는 일이다. 강연자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바벨론 포로기의 문서들을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추구한 바 있다. 그리고 민중신학의 폭넓은 소개와 발전을 위해 『히브리 민중사』를 영어로 번역 출판하는 일이다. 사실 민중신학은 80년대 초 여러 학자들의 짧은 논문들을 모아 영문으로 번역된 책 한권 외에 특별한 책이 없어 매우 아쉬웠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국내외 소장 조직신학자들의 논문을 엮은 『Minjung Theology Today』라는 책이 곧 출판된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중신학 제1세대 학자들의 역작들이 세계 신학계에 소개되는 것이다. 제2성서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책이 올해 안에 영문으로 출판될 예정에 있다. 따라서 문 목사님의 『히브리 민중사』를 번역 출판할 때에 비로서 민중신학의 전체가 소개되는 것이다.
(6) 통일신학(Theology of Reunification): 주체사상과의 대화
1) 통일의 시급성
남한은 현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제1의 자살률국가이다. 국민소득은 계속 올라가고 국가안보는 신무기로 계속 튼튼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전쟁 아닌 전쟁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건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반생명 반평화 죽음의 기운이 한반도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세계 자살율 2위 국가가 같은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사이프러스임을 알 때 더욱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 안의 99마리 양보다 우리 밖의 한 마리의 양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교회의 복음 사역은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에 그 초점이 맞혀져야 한다. 38년 전 서울대 신입생 환영예배에서 행한 문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를 들어보자.
대한민국의 국시가 민주주의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는 ‘민족을 통일하는 민주주의’가 아닌가요. 요새 저같이 민족통일을 말하는 사람을 관변측에서는 뉴레프트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저는 그런 건 일소에 붙일 겁니다.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때려잡는 칼은 한 번도 우리의 목을 떨어뜨리지 못했어요. 저는 국토 분단을 고정시키고 민족 분열을 심화시키는 민주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거부할 거예요. 이것이 이 땅에서 신앙을 사는 길이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민족을 통일하는 민주주의-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휴전선으로 갈려 있는 민족의 통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휴전선의 철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려 있는 한, 휴전선의 철폐만으로는 민족이 통일되지 않아요. 민족 통일의 실체는 휴전선의 철폐가 아니라, 우리의 국토인 이 한반도에서,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에서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를 몰아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자유인으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민족의 주체적인 자기주장의 함성 앞에 휴전선은 여리고성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문익환,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민사, 1984. 136쪽.)
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들 대부분이 장밋빛 환상에 젖어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휴전선의 철폐를 넘어서 지배자-피지배자의 관계를 몰아내는 일이 통일의 실체라고 하는 목사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목사님이 지적하는 일차적 지배자는 미국이지만, 지금은 여기에 동승하고 있는 시장자본주의하의 투자 자본가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도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빈민들은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되고 있다. 또 목사님의 발언 가운데 우리가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부분은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에서’라는 단서이다. 북조선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우선의 NL주의와 민중우선의 PD주의를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합일의 정신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통일신학이란 단지 통일의 필연성을 주창하는 신학이 아니라, 남과 북의 이념과 체제가 하나로 통일이 되는 신학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남쪽의 자본주의에 기초한 자유사상과 북쪽의 사회주의에 기초한 평등사상이 만나는 신학이어야 한다. 물론 남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이고, 다수는 성공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의 평등 또한 상당부분 제한적이다. 지역적으로는 평양 그리고 계급적으로는 10%에 해당하는 당원과 관료들에게 부가 편중되어 있다. 97년 처음 평양을 방문하면서 느꼈던 것은 자본에 물들기 시작하는 관료들이었다. 지금은 훨씬 더 심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체 모순에도 불구하고 강연자는 남쪽의 신자본주의와 북쪽의 신사회주의가 함께 만나 어우러지는 새로운 경제체제야말로 이 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경제모델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이 말한 대로 ‘세계사의 하수구’인 한반도의 수난의 역사는 세계를 구원하게 될 것인데, 강연자는 이 세계 구원은 바로 남과 북이 만나 창출해 내는 새로운 정치사회경제체제라고 본다.
오늘 문 목사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어떤 신학적 작업을 진행할 것인가? 이미 해외에서는 여러 차례 시도된 바 있지만, 그건 민중신학과 주체사상의 만남이라고 본다. 여기서 필자는 주체사상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80년대 브리태니카사전은 <World Religion> 이라는 항목에서 북의 주체사상을 세계 8위의 ‘주체종교’로 분류하고 있다. 필자는 97년 이후 2013년까지 3,4년 주기로 다섯 차례 평양을 다녀온 바 있는데, 곳곳에 붙어 있는 여러 구호들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 이념을 엿보게 된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첫 방문에서 “주석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등등의 구호를 보면서 이는 기독교의 부활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었다. 지금도 김정은 위원장이 핵개발 중단 내지 핵폐기를 말하면서 그 정당성의 근거로 김주석의 유훈을 언급하는 것은 북조선이 유사종교 사회체제를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김일성 개인숭배사상’으로 치부하고 마는데, 이는 북에서 기독교를 향해 ‘주 예수 개인숭배사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가 되고 만다. 교회가 이천 년 전 예수의 사상과 행동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듯이 북 또한 수십 년 전의 김일성의 사상과 행동을 오늘의 시대에 재해석하고 있다. 물론 교회에도 문자 근본주의자가 있듯이 북에도 그런 근본주의자들이 있을 것이다. 남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단들이 있듯이 북에도 그런 이단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극단의 예를 갖고 전체를 속단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며, 탈북자들이 하는 얘기를 전적으로 신뢰해서도 안 될 것이다. 북에서 비판하는 기독교는 미국의 제국성을 대변하는 국가종교로서의 비판이 우선이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닌 것이다.
2)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대화
이제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통일신학의 과제는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만남이다. 문제는 북은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고 있으나 남은 ‘빨갱이 덫’에 걸려 주체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순 우리말인 ‘동무’ 대신 한자어 ‘친구’를 사용해야 하고 ‘인민(人民)’이란 좋은 단어 대신에 ‘민중(民衆)’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사용해야 했으며 주체(主體)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비주체성에 휘둘리며 살아온 것이다. 남에서 가장 선호하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건 민(民)의 주체인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는 곧 주체(主體)의 실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대화는 오히려 30년 전 한때 해외에서 진행된 적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도 비판할 게 많듯이 주체사상도 비판할 게 많다. 그러나 일단 저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보자.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진정한 통일을 이루겠는가? 화해와 평화를 말하면서 내 것만 옳다고 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진정한 통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80년대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로 “주체사상과 기독교”라는 과목을 가르친 바 있는 홍동근 목사도 주체사상의 매력을 정치혁명의 맑스주의를 넘은 도덕철학과 종교성에 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주체사상을 주체종교 내지는 주체신학으로 읽는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주체사상은 맑스주의처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생소하지 않다. 해방 직후 맑스주의자들이 무신론과 유물사관을 가지고 기독교를 관념론이라고 조소하고 인민의 아편으로 치부하였을 때 (김일성주석은) 이념적 반대나 적대의식을 표시하지 않았다. 반대로 토착적인 따뜻함과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하여 좋다. 맑스주의도 차이점을 거두고 공통점만을 찾으며 기독교와 사촌사이까지 갈 수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주체사상과 기독교』 선우학원 홍동근 공저 북미주체사상연구회 1990. 78쪽) (가로 안은 필자의 첨가)
이 배경에는 김일성 자신이 어렸을 때, 외가 특히 어머니 강반석 집사의 영향 아래 교회를 다녔으며 아버지 김형직 또한 기독교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김형직 사후, 그의 절친인 손정도 목사 가정에서 양아들로 같이 자라났던 이가 김일성이다. 그리고 김일성의 외삼촌 강량욱 목사는 초기 수상을 지낸 바도 있다. 적어도 김일성에게 있어서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함께 갈 수 있는 사상이었다. 서구기독교가 세계패권 제국주의와 결별하고 약소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조선의 기독교로 탈바꿈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김주석은 여러 차례 남에서 온 목사님들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민중신학과 주체사상과의 접점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주체사상의 기본 교리는 다음과 같다. (상게서 78쪽)
(1) 사람 중심의 사상 (2) 민족 자주성의 신앙 (3) 공산주의사회의 열망 (4) 혁명가적 풍모. 1. 주체사상의 사람 중심의 사상은 기독교의 하느님 중심 사상과는 반대개념으로 들리지만, 불트만이 지적했듯이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관점에서 얼마든지 접점은 가능하다. 2. 민족 자주성의 신앙 또한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 관점에서 보면 예수 운동의 실체이기도 했다. 3. 공산주의를 논할 때에 원론적 의미에서 맑스의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체를 물질이 아닌 사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나눠 쓰는 초기교회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원형이지 않는가? 4. 혁명가적 풍모는 헤롯왕을 여우로 비웃고 유대사회 지배의 근간인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휘두르며 상을 뒤집어엎고 종교장사꾼들을 쫓아내고 성전을 장악하는 모습이야 말로 과연 혁명가적 풍모가 아닌가?
이러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를 만약 문 목사님의 <히브리민중사>의 민중신학과 인민의 삶을 극대화하고자 하여 사회주의로 탈바꿈하고 있는 북조선의 주체신학으로 그 폭을 더욱 좁힌다면 둘 사이의 간극은 훨씬 더 좁아질 것이다. 필자는 목사님께서 지금 살아계신다면 분명 이 작업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의 통일시대를 바라보면서 한신신학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진행하여야 한다고 본다. “민중신학과 주체사상 연구소”(가칭)를 설립하는 것을 제안한다. 10년 전 홍근수 목사께서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라는 과목을 개설했을 때, 등록학생 미달로 취소된 바 있지만, 이번의 한신신학의 광맥을 찾아가는 연속강좌가 하나의 행사로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던 김재준 목사님과 송창근 목사님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의 유지를 이어 반드시 이런 연구소가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문 목사님은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것이 바로 벽을 문으로 알고 부딪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7) 나가면서
출애굽의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야웨흐 아세르 야웨흐’라고 답하신다. ‘나는 곧 나다.’라고 번역되는 이 말을 필자는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한다. 첫째는 ‘백성들 사이에 거하는 신의 현존성’이고 둘째는 ‘인간의 언어로 규정받지 않는 곧 이름이 없는 신의 자율성’이다. 늦봄 문익환은 이러한 하느님의 본질적 형상을 가장 잘 보여준 분으로 하느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언자였다. 미국의 퀘이커 봉사회는 1992년 문익환 목사를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천거하기도 했다.
끝으로 그의 평생의 반려자 박용길 장로를 언급한다. 그는 남편의 가는 ‘늦봄’ 길을 함께 가겠다는 뜻에서 ‘봄길’이란 아호를 짓고 명동구국선언에서부터 뜻을 같이 하며 십자가 수난의 길을 걸었다. 남편을 대신하여 1995년 김일성주석의 1주기에 방북을 하였고 이로 인해 구속을 당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의 대표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과 생명의 역사를 한반도에 펼쳐 보인 자랑스러운 부부였다.
《문익환평전》은 다음의 문장으로 문 목사님의 삶을 정리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잘못된 수치심 없이 저 아득한 21세기의 나날들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고, 또 분단ㆍ전쟁ㆍ국가폭력 같은 두려운 단어들이 아닌 따뜻한 언어로도 우리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꿈과 사랑을 보여준 그의 업적 덕분에 새로운 세대는 다른 눈으로, 더 잘, 더 자유롭게, 더 정직하게 자기들의 시대를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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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
[문익환목사님 28주기를 맞아] 늦봄 문익환목사(文益煥,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의 사상과 신학 - 목차 - (1)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 (2) 시 신학 (Poem Theology) (3) 감옥신학 (Prison Theology) (4) 예언자 신학(Theology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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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늦봄 문익환 목사님(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 선종 25주년!
오신지 100년이 지나고 가신지 25년 !
어릴 적 동문의 친구 윤동주 시인의 시심을 가슴에 담고, 1975년 8월 17일 의문의 죽음을 맞은 평생 친구 "장준하의 대타자"임를 자처하며 57세에 늦게 뛰어든 재야운동권의 길!
"너 외로운 山中 孤魂아,
... ...
아아, 산중 고혼 우리의 임
장 준 하 !
너를 잊으면 우리는 죽는다
너없이는 우리는 없다 조국도 없다
너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사랑
우리의 정의
우리의 양심
우리의 자유
우리의 전부
차라리 우리의 하늘이다 땅이다
우리의 새벽이다 새벽별이다
... ...
우리는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부끄러운 부끄러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 되리라
네 마음으로 네 사랑으로
하나되어 죽으리라
부나비처럼 불속에 뛰어들어
너를 얼싸안고 신나게 춤을 추며 죽으리라
어둠과 탐욕을 비웃어 주면서
목이 터지게 통일 조국을 노래하면서"
('산중고혼아-장형의 주기를 맞아-'3주기추도시, <씨알의소리> 1978년 9월호)
가톨릭 선종완 신부님과 함께 공동번역 구약성서를 번역하신 성서신학자의 "늦봄"이란 호!
늦봄 목사님은 귀양살이 다산 선생의 심정도 간직하셨나 봅니다 !
大綱旣隳圮(대강기휴비)
萬事窒不通(만사질불통)
中夜拍案起(중야박안기)
歎息瞻高穹(탄식첨고궁)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만사가 앞뒤로 꽉 막혔다
한밤에 책상을 치고 일어나
탄식하며 하늘을 쳐다본다
정약용은 그의 <하일대주>(夏日對酒)라는 장시에서 그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그래 생각다 못해 이런 상상을 하게된다.
那將萬箇竹(나장만개죽)
束箒千丈長(속추천장장)
盡掃秕穅塵(진소비강진)
臨風一飛颺(임풍일비양)
참대 만 개를 가져다가
천길 길이의 빗자루로 묶어서
검부러기, 찌꺼기일랑 모조리 쓸어
한바탕 바람에 날려보고 싶다
(천관우, '한국사에 있어서의 저항', <씨알의 소리> 1977년 4-5월호)
시대를 훌쩍 앞서 30년 전 김일성 주석을 만난 (1989년3월25일) 통일의 열정과 투옥!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90년 10월말, 문목사는 〈한겨레 신문〉에 실린 최일남씨와의 인터뷰에서 '시인이란 앞에 놓인 바위를 뚫고 뒤에 있는 꽃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는 현실 정치를 뛰어넘은 통찰력을 말하고 역사를 꿰뚫는 혜안을 말합니다. 시인은 결코 환상주의자가 아니라 상상력과 투시력을 겸비해 현실의 벽을 깨는 사람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1994년 2월 3일)
늦봄 선생님의 생애는 "국가가 백성을 아프게 하는" 야만의 시대와 치른 정면 대결로 점철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책장에서 선생님의 책 두 권을 꺼내 봅니다. 두 권 모두 옥중에 계실 때 펴낸 책입니다.
가톨릭수녀회의 <생활성서>에 연재한 글을 모은 <히브리민중사>(1990년 5월, 삼민사). 이 책의 처음과 마지막 문장을 새기며 이 시대의 거짓과 헛것을 겸손하게 질타하는 노경의 예언자를 성찰합니다.
“공주교도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햇빛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밖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추워도 온몸을 햇빛에 노출시키고 손바닥으로 문지르지요. 맨 마지막으로 발바닥을 문지르다가 하루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중략) 60여년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언제 발바닥의 고마움을 느끼고 발바닥에 영광을 돌린 일이 있었던가? 모든 기쁨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면서 자신은 말없이 땅을 밟을 뿐인 발바닥에 얼굴을 대고 나는 엉엉 울었습니다.”
"만방의 예언자가 되는 길이 따로 있는게 아니군요. 철저하게 뜨겁게 겨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겨레에게서 거짓을 벗겨 내고 진실을 살려 내는 일이 그대로 만방의 예언자가 되는 일이었군요. 진실만이 겨레를 살리는 길이라면, 그 길이 그대로 세계를 살리는 길로 통하는 것이었군요"
옥중의 시편 <옥중일기>(1991년 9월, 삼민사)에 펄펄 끓고 있는 통일의 염원. 늦봄 목사님의 천국지복을 기원하며 올해에는 금수강산 한반도에 영구평화의 날이 임하도록 하느님께 빌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책 첫장의 지묵!
"백두에서 한라까지
조국은 하나다
통일염원 47년 정초 문익환"
"문규현 신부
적시 후속 안타 작렬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돌진"
(1989.6.7. 21쪽)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노(老)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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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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