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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文字) 침몰하다
- 수정분관 도서관에서 -
늦은 저녁
어둠 삼키는 고요한 이 곳
간밤의 일기예보는 뒤꿈치를 들고 몰래 탑승했다
정기간행물실 비어있는 자리가 들썩이고
순백의 지면 위 글자들이 자리를 뜰 즈음
후두둑! 후두둑! 솨~
하늘의 가파른 질주
세상이 뒤집어 진다
벌어진 책 위로 부스스한 표정들
유리창, 복도, 입구로 모여들어 술렁이기 시작한다
구조신호를 기다리는 승객들
허공을 향해 탕! 신호를 쏘아 올렸다
삼단 자동우산이 빗속을 뚫고
파문처럼 동그란 탈출구를 그렸다
꽉 찬 공간으로 불안한 듯 매달리는 시선들
발걸음을 멈칫거리게 만든다
한 평되지 않는 공간
빗속에서는 더 없이 소중한 공간임을
부러운 눈빛들이 말해 준다
서둘러 몇몇이 도착하지만
구조되지 못한 많은 이들
배는 차츰 중심을 잃고 입구 쪽으로 기울어진다
탈출을 감행한 몇몇
다시 돌아와 주위를 더욱 불안케한다
세찬 바람에 물결처럼 출렁이는 책장들
책속 글자들이 끝없이 쏟아져 내린다
침몰하지 않은 꿈들이 눈을 뜬 채
깊은 바다로 새어 나간다
살아 남은 꿈들, 생존자는
일기예보 탑승 전 이미
3층 대출자 명단에 기록되어 있었다
수정분관 : 민주공원에 위치한 부산광역시립 중앙도서관의 분관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마음은 소풍을 간다
발길 닿는 어디나
뜨거웠던 삶을 내려 놓고
한번쯤은
지난 계절을 되돌아볼 일이다
채우지 못했던 삶의 기록들이
거리에 가득하고
그 여름 잔을 들어
한참을 쉬고 있을 때
그늘 아래 게으른 나태는
여름을 지나며
가을은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을은 지난 여름
빈잔 가득히 채워져
계절의 가장자리를 넘쳐 흐르고
비우고 또 비워내도
가슴엔 알 수 없는 빈 잔만 가득하다
가을이 오면
가슴 가득히 꽃 피우고 싶다
보도 블럭 틈으로
밟혀도 밟혀도
고개 내미는 이름 모를 꽃처럼
사람과 사람 틈에서
따듯한 가슴 맞대며
은은한 향기로
이 계절을 맞이하고 싶다
길의 축제
길 위로
여름에 걸치던 옷 가지
훌훌 털어낸다
앙상해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쏘아 올리는 폭죽
대지 위로 붉게 퍼지며
길의 축제가 열린다
삼삼오오 까치발로
총총총 바람을 쫓는다
엄마 찾는 병아리마냥
시끌시끌 야단이다
사람들의 탄성이
길 위로 바스락 거린다
한창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축제가 무르익어 간다
발밑으로 거리가 저물고
가로등이 불을 밝히는 시간
떠나온 이들이 돌아가며
마지막 나뭇잎을 꼬옥 붙들고 있다
얼음 불놀이
가을 숲길은
얼음 불놀이 중
불놀이 구경에
모두가 얼음
움직이는 사람
술래
웃지 않는 사람
술래
눈 감는 사람
술래
싱글벙글 즐거운
가을 나들이
지나던 아저씨
술래
우리는 찰칵! 소리에
모두가 얼음
자장가
매서운 한파가 꿀꺽 집을 삼키면
콜록콜록 아이의 창백한 기침소리
잠 못드는 어머니 따스한 품에 갇힌다
끊어질 듯 엮어내는 구성진 목소리
펄펄 끓는 몸살에 키(Key)를 낮췄다 높았다하며
어둠속 아이 길 잃을까 잠 길을 일러 준다
토닥토닥 혹여 잠들까 뜬눈으로 꾸벅꾸벅
걱정, 근심 음표를 달고 자정으로 깊어지면
어머니 젖은 눈가 오선지처럼 주름만 는다
운구를 하며
운구 행렬
움켜쥔 손마디로 전해오는 상여의 무게는
못지않게 치열했던 삶보다
지키고 선 이들의 걸음보다
문상 온 이들의 표정보다
가벼웠다
누구나 거처가야만 할 마지막 관문
울부짓는 이들에게서
첫 관문을 통과한 소리를 기억해 난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아이의 울음소리를 닮았다
운구를 해 보면
숨돌릴 틈 없던 생(生)이 시간을 감추고
넉넉히 숨을 고르게 된다
마지막 배웅 온 사람들
디디는 걸음마다 눈물 꽃 피어나고
밀어 내기만 하던 길이 허청거려도
허기진 속을 달래며
차가운 생(生)의 가장자리를 맴돈다
지나온 생(生)을 위해 예비된 좁은 공간
하얀 먼지로만 기억되지 않도록
마지막 관문에 다다르기 전
한번 쯤 뜨거운 불꽃을 삼켜 볼 일이다
수 필 (김수성)
요람의 문턱
2012년 입춘(立春)을 지나던 겨울이 우수(雨水)를 지나면서 한풀 꺽이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 수요일부터 비가 온다더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화요일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달 조금 더 지났을까. 걸렸던 감기가 멎을 줄을 모른다. 크게 한번 앓고 나서 나았으면 좋을 법도 하지만, 감기는 싫은 내색하는 내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찬바람 때문에 예민한 목감기는 그렇게 입춘(立春)을 지났고 우수(雨水)를 맞이한 것이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야 한 달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목감기도 봄의 기운에 밀려 내년 겨울을 기약하며 몸속에서 삭아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봄소식 가득한 첫 주말, 나른한 오후가 안방으로 느릿느릿 기어들어와 눈꺼풀 위에서 무게를 만든다. 일주일 묵혀둔 피로가 요람의 긴 터널로 미끄러지며 낮잠을 만들어 낸다. 지난 일들이 어제 일 같이 또렷이 기억이 났다.
인기척에 몸을 뒤척인다. 할머니는 매일 몸이 반응하는 이 시간대를 거스르지 않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새벽기도를 올린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반야심경이 귓가에 자장가처럼 들린다. 할머니도 그 소리에 정신을 곧잘 놓곤 한다. 고개가 천천히 내리막으로 가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자장가 소리. 반야심경은 심연으로 깊숙이 잠길 듯 하면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며 날이 새도록 이어져 간다.
그는 무심한 듯 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초등학교 시절 특별히 잘하는 거 없이 무던하던 내가 중학교 들어서며 할머니에게 늘 듣던 얘기가 친척 아무개는 공부를 잘해서 전교 1등씩 한다며 너도 열심히 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중학교 1학년 마지막 시험을 반에서 1등 하고나니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본인의 한자 이름까지 쓸 정도였으니 늦게나마 공부에 미련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내가 공부를 했으면 학교선생 정도는 했다.」
목소리에 똑부러지는 성격만큼이나 자신감이 베어 있었다.
그 시절 여자가 공부해서 무엇에 쓰냐며 공부를 시키지 않았고 아버지 몰래 야간학교를 몇 번 나가서 한글이랑 한자를 배웠다 했다. 그러다 일본으로 넘어가 17살에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갔으며 그 때부터 할머니의 고생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돈을 벌어 경남 남해 창선의 아버지에게 꼬박꼬박 돈을 붙여드리며 장남노릇을 톡톡히 하셨다. 일본에서는 한창 잘나가던 유리공장 기술자였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니 일본의 선진 기술을 쓸만한 곳이 아직 한국에는 없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취직할 곳이 없다는 핑계를 들어 등산으로 소일꺼리를 삼으셨다. 그래서 집안 가장노릇은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 음식솜씨가 맛깔난 덕에 머리에 다라이를 이고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음식을 팔았고 더러 가정부일로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고 했다. 그 부지런함 때문인지 나이가 들어 힘들어 하시면서도 집안에서는 늘 청소하시는 할머니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요란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어둠이 흔들린다.
「쿵! 쿵! 쿵!」
눈을 떠보니 주위는 한창 깊은 잠속. 손을 내밀어 방바닥에 팽개쳐진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는 깊은 잠속에 머물고 있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닫힌 대문을 열고 들어와 덜 깬 잠을 쫓아내 버렸다.
「할머니가 아무래도 돌아 가신거 같다.」
「뭐라고? 돌아가셨다고? 설마...」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어제 퇴근하면서 인사드릴 때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이 머리를 스쳤다.
「어제 밤부터 아프셨잖아. 혹시나 해서 아버지가 옆에서 같이 주무셨는데, 새벽에 요란한 트림 소리를 내고는 숨을 안 쉬더래. 급히 아버지가 인공호흡을 하고 그 사이 내가 구급차를 불렀어. 조금 전 할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가셨어.」
당황스런 마음에 온몸에 힘이 빠져 버렸다. 아무 일 없기를 내심 바랐지만, 빠르게 상황을 되짚어보니 돌아가신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아이 때문에 집에 있으라하고 어머니, 동생과 함께 병원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다급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서 10분 거리의 병원으로 내달릴 때 눈가에 눈물이 시야를 흐트렸다. 눈을 감고도 걷는 익숙한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제 일을 다시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퇴근 후 문 밖에서 인사를 드리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 나를 할머니가 애타게 찾고 있었다. 문을 열고 가까이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니 갑자기 두 손을 꼬옥 잡아 끄셨다. 생(生)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큰 손주 손 한번 잡아주고 떠나야겠다는 할머니의 마지막 배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입시를 마치고 발표를 기다릴 때였다. 사촌누나가 재수(再修)를 해서 같은 해 시험을 쳤고 발표일자가 같은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발표 날 할머니와 가족들 모두 같이 모여서 기다릴 즈음 사촌누나가 합격소식을 먼저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나를 꼬옥 안아주셨다. 합격한 건 그쪽이 아닌데 왜 거길 안아주느냐고 이상하게 여겼던 가족들이었다. 나도 그때는 왜 그러셨는지 몰랐었다.
나중에 나에게서도 합격소식을 듣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복(福)을 나에게 주고 싶었다고 하셨다. 합격 소식은 분명 나에게 전해 질 거라는 할머니의 굳은 믿음이 나를 안아 주신 것이었다. 어제의 일도 이런 마음에서 였을까.
사실은 몇 년 전부터 대학원, 직장 등을 핑계로 한집에 살면서도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할머니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작은 방에서 할머니와 둘이서 생활한 나로서는 혼자 방을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도 그렇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계속되는 큰 관심이 내겐 부담이고 간섭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는 그만 했으면 싶은 관심어린 잔소리가 변함 없으셨기 때문이다. 집에 있던 문턱을 밟을 때마다 「문턱 밟지마라」, 외출할 땐 항상「건널목 건널 때 차 조심해라」,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손발 꼭 씻어라」, 오늘 아침에 입은 옷인데도 가까이서 냄새 맡으시면서「옷에서 냄새나니 옷갈아 입어라」,「요즘 세상이 험하니 일찍 다녀라」, 대학시절 즐겨하는 술자리에서 술에 잔뜩 취해오면「술 먹더라도 요령껏 적당히 먹어라」는 관심이 잔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잔소리 때마다「Yes, Sir」라며 장난스럽고 퉁명스런 말대꾸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큰 손주는 나날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할머니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늘 젊어 보이며 깨끗이 몸단장하던 할머니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에서 케케묵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또 밤마다 몸이 아파서 냈던 소리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좀체 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둘이 자는 방에서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며 그냥 겁이 난 것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내 소원대로 방을 얻었고 늘 큰손주만 챙기시던 할머니 그림자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당시 모르실거라 여겼지만 내색하지 않았을 뿐 할머니도 이런 나를 알고 계셨으리라. 한번은 나를 불러놓은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나중에 네가 크면 생각날꺼다. 그때 그래서 할머니가 항상 그런 얘길 하셨구나하고 말이다.」
그러시면서 곧잘「청춘을~ 돌려다오~」라며 나이에 맞지 않은 고운 목소리로 흥얼흥얼 리듬을 타며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을 진학했고, 1학년을 채 마치기전에 공무원에 합격을 했다. 합격소식을 전해드린 순간, 부모님보다 할머니가 더 좋아하셨다. 그동안 한번 따듯하게 안아드리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보상해 드린 것 같았다.
여러 생각들이 오버랩되는 동안 어느새 성분도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하얀 천을 덮고 있는 누군가의 옆으로 안내를 받았고 눈앞에 하얀 천을 덮고 있는 사람이 할머니가 아닐까라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성분도병원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의 천주교 병원이었으나 지금은 남구 용호동으로 이전함
당직의사는 응급실 들어와서 조치한 사항들과 돌아가셨다는 얘길 시종일관 일상적인 말투로 읊조렸다. 그가 천을 들어 얼굴을 보여주자 이기적이었던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샘이 울컥하며 한없이 솟구쳐 올랐다. 커가면서 그에게 소홀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라 미동도 없이 굳어있는 그의 곁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이미 체온을 잃은 손을 힘주어 잡으며 할머니를 몇 번이고 불렀다.
밖에 마실 갔다 먹을거라도 있으면 먹지 않고 한사코 동생들 몰래 챙겨주셨던 당신. 본인 쓸 돈 아껴 꼬깃해진 천원짜리 용돈 한 푼 더 주려고 했던 그였다. 한없이 베풀기만 했던 그였기에 받기만하고 드리지 못한 사실이 더더욱 죄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부모님은 병원 측과 장례절차를 논의하는 동안 정신을 추슬러 아내에게 전화를 했고 직장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장례식을 위한 세부사항을 조율했고, 어머니는 친지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다들 정신없었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4, 5년 전부터 몇 번씩 있어 왔던 터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한 번의 응급조치 못한 채 그렇게 돌아가시게 만든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이런 상황에서 서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3일장을 무사히 마치며 49제를 해드렸고 할머니를 좋은 곳으로 보내드릴 수 있도록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한참을 그렇게 단잠을 잤나보다. 수정동산복도로의 긴 터널에서 나를 쑤욱 끄집어내는 아내의 손길을 느꼈다.
「정훈이 아빠, 일어나요. 낮잠을 그렇게 자다가 오늘밤 잠 못자면 낼 출근은 어쩔려구.」
「응, 일어나야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런 꿈속 할머니의 방문이 내게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반갑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가끔 보고 싶은 마음을 무의식이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꿈속 무의식이 할머니와 나 사이를 붙들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요즘 대부분의 신축 건물엔 문턱이 없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는 문턱이 있다. 요즘은 아이가 커갈수록 문턱을 밟는 횟수가 늘어난다. 그래서 항상 문턱 밟지 마라, 밟으면 복 나간다는 얘길 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어린 나에게 늘 해주시던 할머니 말씀이 떠올라 피식 웃곤 한다. 이제 아이를 하나 낳고 딱 그만큼의 위치에 있어보니 느끼는 것이다. 그가 왜 그런 얘길 했는지.
아내는 나를 흔들어 깨우기 무섭게 아이에게 다그친다. 문턱 밟지 말라며 엄마, 아빠 말 좀 들으란다. 복(福) 나간다며. 하지만 아이는 문턱을 밟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아랑곳 않는다.
낯익은 풍경에 피식 웃음이 나 정신을 차리고 앉는다. 우연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이전의 상황과 흡사한 때문인지 우두커니 문턱을 바라본다. 할머니가 늘 해주셨던 얘기에 고개가 숙여진다. 문턱 밟지 말라는 할머니 잔소리가 어느새 문턱에 까치발로 서 있는 아이의 귓가를 맴돌고 있다.
철모르던 그 때처럼 나가는 복(福)을 꼬옥 붙들고 장난 가득한 얼굴의 아이. 요람의 문턱에서 머뭇거리던 나에게 할머니는 어른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얘기들을 일러주고 있었다.
*진해 시영아파트(건축년도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