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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산 노고단 산행기
얼마전 고교동창생 총무를 맡고 있는 정록친구로부터 올해 모임을 8월12일저녘부터 13일오전까지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갖는다는 연락이 왔다. 매년 8월 중순을 기해 갖어온 동창들의 모임을 가진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다. 처음 모임을 가질때는 아중리, 사선대 등 전주 인근의 알려진 유원지 등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전주로부터 거리도 더 멀고 식당이나 숙소등 시설도 조금 더 좋은 곳을 택하는 느낌이 들었다.
동창 모임에서는 늘 고교시절 그 때 기분으로 만나게 되지만 모인 해가 거듭되는 동안 친구들의 상황도 점차 달라져왔다. 각자의 얼굴에서 서로가 문득 연륜이 쌓인 얼굴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 오래전 한둘씩 따라오던 자식들은 어느때무터 따라나서기 싫다고 하는지 점차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친구와 부인들은 점차 더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모임이 있는 지리산 달궁계곡으로 향하는 길에 무주를 들러 일을 보고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서 남원향 차표를 끊고 보니 차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후 5시 40분차를 타기 위해 1시간 20분을 꼼짝 없이 기다려야 하게 되었다.
지루하게 기다리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차가 승차장으로 들어섰다. 들어온 차를 보니 추자장 저쪽에서 일행을 태운채 차 시간에 맞춰 머무르던 차였다. 출발한 버스가 무주 장수를 거쳐 남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중간 중간 봉화산, 아영 등 익히 아는 지명이 눈에 띠었다. 몇해 전 벅찬 기분으로 걸었던 대간길이 이어지는 지명들이어서 다시금 그 때의 여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들에는 벼가 벌써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무더위라고 하지만 이제 아침 저녘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 이제 여름이 끝나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세월은 그렇게 쉼 없이 흘러간다.
7시 30분경 남원에 도착했다. 전주에서 버스를 타고 들른적이 몇 번 있었는데, 오늘은 경로가 달라서인지 남원에 들어서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터미널에 내려 다시 인월행 버스로 갈아타려고 그곳으로 가는 시외버스 편을 물어보니 끊기고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로 건너편의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 곳으로 가 버스 운행 안내 표지판을 보았으나 파악이 어렵게 되어 있었다. 지나는 택시를 세워 요금을 물어보니 4만원이라고 해서 포기하고 다시 버스를 기다리니 인월행 버스가 들어왔다.
차에 올라타며 다시 행선지를 확인했다. 일행이 많지 않았다. 옆에 앉은 배낭차림의 젋은이에게 지리산 가느냐고 물으니 둘레길을 걸으러 왔다고 했다. 오늘 숙박을 하고 내일 아침 인월에서 시작되는 3구간을 걸으려는데 거리는 19km 정도 된다고 했다. 버스가 어둠 속에 산세 사이로 난 외길을 지나갔다.
8시 15분경 인월에 도착했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달궁 계곡으로 갈 참이었다. 택시 승강장을 찾아가며 가로를 돌아보니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택시를 타고 달궁 게곡으로 행했다. 가는 길에 근래 많이 내린 비로 무너져 내린 도로의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급히 복구하여 그나마 다니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깊은 어둠이 적막감을 자아냈다. 어느 첩첩산중 계곡가의 외딴 건물로 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가면서 기사와 예기를 나누었다. 그가 지나온 흥망사 등, 자신의 삶을 예기했다.
가다보니 불빛이 도시 가로를 밝히듯이 훤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이 번화한 관광지 같았다. 기사분이 거의 다 왔다고 해서 기대가 조금 깨지는 느낌이었다. 차가 친구가 알려준 지리산 식당 앞에 멈춰섰다. 안에 있던 친구와 친구 가족들이 내가 내리는 것을 보고 유리창 너머로 인사를 건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박수로 맞아주었다. 내가 늦은 터여서 식사가 얼추 끝나가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영교 부인 등이 음식을 정성껏 챙겨 주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재영이는 향기나는 마가목 담금술을 권해 주고받았다. 잠시 후 친구들이 밖으로 나가며 식사를 마치고 나오라고 했다. 잠시 후 형량친구가 부인과 함께 도착해서 다시 한번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었다.
식사를 하고 나가보니 발코니처럼 식당 밖에 설치한 평상에 앉아 있었다. 평상에 앉으니 영출친구가 평상에 놓인 바구니에서 복숭아와 자두를 한 개씩 꺼내 건네주었다. 깜깜한 밤이어서 가게의 전등불이 더 휘황하게 빛나보였다. 친구들이 지난 예기들을 하는 동안 망중한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앞쪽으로 지나는 길 너머에서 세찬 개울물 소리가 들렸다. 근래 쏟아진 폭우로 흘러내리는 물이 많을 것 같았다. 전등불이 닿지 않는 앞쪽 산세는 검은 윤곽만을 드러내며 침잠한 모습이었다. 어둠이 깊어가는 가운데 주변의 산세가 검은 실루엣으로 보였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도 마찬가지로 짙푸러졌을 녹음빛깔은 알 수 없고 검은 물체로만 보였다. 하지만 높다랗게 지나는 산능성이 위로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팽팽하진 달이 구름 사이로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밝은 빛 때문에 밤 풍경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양수가 나를 돌아보며 스케치 안하느냐고 했다. 그 친구 아들은 오래전 오늘처럼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모임을 가졌을때 만났던 나를 기억하고 가끔 내가 그림 그리던 예기를 했었다고 했다. 나도 현재 군에 복무중인 그 아들이 오래전 아직 어렸을 적에 아중리 등에서 보았던 맑고 착해 보인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 때를 생각하며 안에 들어가 스케치북을 갖고 나와 밤풍경을 그렸다. 검게 보이는 산세와 어두운 밤하늘 등을 표현하다보니 전체적으로 검고 어둡게 그려졌다. 스케치를 마치고 보니 나름대로 내가 느끼고 있는 그 시각 풍경이 담겨져 있었다. 자연의 품에 와 그 생생한 체취가 담긴 밤풍경을 남기게 된 것이 기뻤다. 가까이 앉아 있던 친구들이 내가 그린 그림을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주자 “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기를 나누던 친구들이 오래전 모임 때 에피소드 등을 예기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잠시후부터 ‘그림놀이’를 할 분위기였다. 2층 발코니에서 몇몇 친구들이 방을 어떻게 쓰는 것인지 예기하는 소리가 들려 그 쪽으로 갔다.
2층으로 가서 방에 가방을 두고 개울가로 나갔다. 개울 뚝에 걸쳐 놓은 녹슨 철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물가 가까이 있는 바위로 가려 했으나 바닥에 얕게 물이 흐르고 있어 디딜곳이 마땅치 않았다. 물이 없는 것을 살피고 지나 바위로 건너뛰듯 올라섰다. 평상에서 들리던 세찬 물소리를 자아내던 물살이 빠르게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달빛에 밝아진 하늘이 맑은 개울물과 흰 바위들에 반사되어 주변 사물들을 어렴풋이 분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산세와 계곡의 구도가 잘 어우러져 보이는 바위에 걸터앉아 조용히 그 장소의 느낌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보니 크게 피어난 뭉개구름 사이로 달과 별이 보였다. 그렇게 산과 물 달과 별 등 대자연을 이루고 있는 사물들의 느낌을 접하는 시간이 귀하게 느껴졌다. 내가 도시에서 살면서 접하는 빌딩숲의 삭막한 풍경이나 자동차 달리는 소리 등 각종 소음에서 벗어나 온몸으로 자연의 기운을 접하는 시간이었다.
계곡물이 흘러 내려오는 위쪽을 바라보니 멀리 지나가는 산자락과 그 위로 트인 하늘이 보였다. 바로 앞으로 시선을 옮기자 깊고 큰 물살이 마치 지반이 무너져내리듯 큰 기세로 흘러가고 있었다. 근래 많은 비가 내려 수량이 많아졌겠지만, 평시에도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물이 다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달궁계곡
2011. 8. 12
백두대간이 끝맺음하며
또아리를 튼
굽은 등줄기 사이로
깊게 난 심원의 계곡
올려보면 산자락 끝이
하늘에 닿아 있고
펼쳐 바라보면
아득히 첩첩한 산세
뭉개구름 떠가다 한바탕 비를 쏟고
이산 저산 봉우리 사이마다
초목에 맺힌 물방울 모여들어
이루어온 맑은 물줄기
살바람에 흥이 나서
내달리다 에두르다 지나가는 먼 길에
파란 하늘빛, 힌구름, 영롱한 햇살 반사된 녹음...
계곡에 비춘 온갖 것과 예기 나누며
세월 아랑곳 않고
쉬임없이 흐른다.
‘산수화’ 라는 말이 있듯이 선조들은 산과 물을 가장 중요한 우주의 구성 요소로 보았다. 솟아난 산이 있기에 계곡이 생기고 땅에서 증발한 수분이 응축되어 비로 내려오는 순환 현상이 바로 자연의 생명력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인의 하나이다.
문득 아까 내가 타고 온 택시 기사분이 “이 곳 달궁게공의 물이 맑고 차가워 발을 담그고 있으면 금새 시려 나오게 된다”고 한 말이 떠올라 양말을 벗고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보니 역시 금새 발이 시려왔다.
아까 평상에서 밤풍경을 그리던 흥이 남아서 다시 갖고 온 스케치북을 펼치고 계곡 풍경을 그렸다. 그림이 잘 되고 안 되고는 중요치 않고 그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느낌이었다.
따로 피서 일정이 없는 내게 여름밤 계곡에서 느끼는 시원한 기분은 그야말로 피서로써도 가장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낯처럼 따갑지도 않고 반팔 차림에 적당한 온도에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기분을 더 시원하게 느껴지게 했다. 그리고 그 곳에 머무는 동안 일상에서 찌든 건조한 감각들이 떨어져 나가고 자연의 생생한 숨결로 내 몸의 생명력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얼추 스케치를 하고 도로로 올라서다 보니 아까 앉았던 평상에서 친구들이 ‘그림놀이’의 즐거움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동창들 중 몇몇이 주요 맴버를 이루는데 모임의 추억 가운데는 그 때 벌어진 일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특히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 종종 그 시각에 있었던 일들이 야사처럼 즐거운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그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하는 친구는 정곤이다. 누가 싹쓸이를 했다거나 가리를 했다거나 어떤 친구가 끼면 광파는 재미가 쏠쏠해진다거나 그의 구수한 입담에 주위 친구들이 거들며 즐겁게 아침 밥상머리 예기 꽃을 피우게 된다.
발코니에서 잠시 메모를 하는데 영출이가 올라왔다. 그가 먼저 들어가 샤워를 했다. 나는 아까 샤워를 마쳐서 바로 자리를 잡고 잠에 들었다. 새벽녘에 되어 친구들이 밤샘(?)을 하고 방으로 들어서며 두런두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불을 켜지 않은채 더듬더듬 대충 빈 자리를 잡아 누웠다. 영교친구는 눞자마자 코를 골았는데 방이 들썩 기릴 듯 했다. 양수는 친구들 사이로 비집고 자리를 잡았다.
눈을 뜨니 문 밖에서 밝은 햇살이 느껴졌다. 밖이 훤해지자 친구들이 하나들 일어났다. 녹음에 반사된 아침 햇살이 영롱하고 고왔다. 올 여름 계속된 비 때문에 이런 밝은 햇살을 보는 것 자체가 귀한 느낌이어서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세수를 하고 다시 개울가로 나가니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영롱한 햇살이 숲에 닿아 아름답고 생기 있는 표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스케치를 하고 다리를 건너 맞은편 산책로를 돌아오자 건너편에서 어서 식사하라고 손짓을 했다.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서니 식탁 앞에 일행이 채근채근 채워 앉아 있었다. 뒤에 들어온 몇몇이 빈 밥상에 앉았지만 주인이 찬이 많이 나갔다며 시큰둥하여 빨리 차려주지 않았다.
총무인 정록이가 식사를 하면서 오늘 일정을 예기했다. 노고단에 올라갔다가 그 후 점심을 먹으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창밖을 보니 먹장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니 한두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지나가는 비일거라며 그냥 예정대로 노고단을 가기로 했다. 예전에는 하루밤을 지나고 아침이 되면 모임이 파해지는 분위기였는데 돌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이런 시간을 여유롭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마음들이 되어 있는것 같았다.
나도 산을 좋아하니 노고단으로 가는 일정이 마음에 들었다. 친구들 차에 함께 타고 성삼재를 향해 올라갔다. 비교적 완만하지만 경사가 급하고 휘어가는 곳도 있었다. 친구들은 그 길을 잘 알고 있는 듯 했지만 나는 그 길을 처음 가보는 상황이었다. 점차 정상부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가다보니 고개너머로 주차장 등이 가까이 보였다. 그 곳이 바로 성삼재였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앞쪽 주차장이 가득차서 저 너머로 가라고 안내해주었다.
나는 이 곳으로 들어서면서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성삼재 하면 내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몇 년전 홀로 백두대간 종주길을 나섰을 때이다. 부안 격포에 있는 조각가 김오성 화백이 문광부 지원을 받아 화장실을 짓게 되어 설계를 했는데, 건물을 지을 사람에게 설명을 하러 들렀다가 전주로 나와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구례서 내렸다. 그 때 구례역에 내린 사람들 거의다 지리산 산행에 나선 사람들이었는데 배낭과 등산화 등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마치 군대 병력을 후송하는 행차 같은 분위기였다.
구레역 광장으로 나오는 동안 자연스레 주변 사람 4명이 합승을 하여 함께 타고 올라가게 되었다. 성삼재로 올라오는 차창 밖으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보였다. 내가 함께 탄 사람들에게 “밤길을 걷다보면 저 초롱한 별빛에 취할 것 같다”고 하자 한 여자분이 “자신의 주변을 걷는 사람들은 내 미모에 취할거다”고 했다.
30분쯤 후 성삼재에 내려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데 올라온 사람들 모두 노고단으로 향하고 나만 홀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홀로 나선 산행이었지만 그렇게 많이 올라온 사람들이 다 반대방향으로 떠나고 나만 홀로 밤 숲길을 들어서게 된 것에 왈칵 외롭고 설운 감정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다행히 다음날 오후에 매요리에서 예정된 구간을 마치게 되었다.
일행이 모여 지리산 노고단 지킴터 입구로 들어섰다. 거기서 지도를 얻으려니 산행지도는 없고 대피소 지도만 있다면서 직원이 내어 주다 내가 양복 복장을 한 때문인지 나에게 인사말을 건냈다.
지리산은 상행 백두대간 산행길의 첫머리가 된다. 나는 2007년 8월에 중산리에서 올라와 1박2일 일정으로 이곳 성삼재로 내려 왔었다. 그 때 기억에 노고단 산장이나 노고단 정상까지는 매우 완만해서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안개가 짙게 끼었다. 언덕 부근에서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것이 좋았던 기억이 있지만 오늘 날씨 상황으로는 그런 조망을 전혀 기대 할 수 없었다.
완만하게 닦아 놓은 순환로를 오르다보니 개울이 나타났다. 전에 이 곳을 지나갈 때 그 개울에서 잠시 땀을 훔친 기억이 났다. 거기서 우측 돌 계단길로 들어섰다. 약간 가파른 그 길을 한동안 오르니 다시 도로가 나왔다. 거기서 성샘재까지 약 2.1km, 노고단 정상까지는 1.1km 정도였다.
노고단 대피소 앞에 다가섰다. 옆에 있는 다른 등산객에게 오늘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으니 연하천까지 간다고 했다. 그렇게 호쾌한 발걸음으로 나선 이들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우측 화장실에 들러 대피소를 지나 노고단 언덕으로 올랐다. 구름이 더 짙어져 있었다.
돌탑에 다가가니 성노, 영출친구가 먼저 와 았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노고단 방향으로 들어서는 입구로 다가가자 직원이 지키고 있으면서 노고단 출입은 매시각 정해진 시간에만 함께 모여 갈 수 있다고 했다. 시간을 보니 10시 20분이었는데 11시까지 기다려 올라갈 시간이 없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탑으로 가니 다른 친구들이 와 있었다. 그 사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노고단에 오르지 않고 내려간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나오다 보니 사람들이 노고단 정상 가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도 빠른 걸음으로 다녀올 생각을 하고 들어섰다. 가는 도중 안개가 짙게 끼어 주변 풍광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걷고 있는 데크길 주변의 원추리 등의 야생화가 축축히 물기를 머금고 있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노고단 정상에 도착했다. 지금은 성삼재까지 차도로 올라와 마치 가까운 주변을 돌아보는 것 같지만,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그야말로 지리산 정상에 닿는 벅찬 느낌이었을 것 같았다. 지리산(智異山)의 명칭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1967년 12월 국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는데 총면적이 약472km²로서 전라도와 전라남도, 경상도 등의 3개도에 걸쳐 있는 광활한 산지이다.
천왕봉 쪽 조망을 담은 사진이 표지판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안개까 짙어 아무것도 바라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노고단 정상에 오른 것 만으로도 지리산의 기운을 받아가게 될 것 같았다. 결가부좌를 하고 명상을 하고 계신분도 있었다.
그 옆에서는 많은 수의 일행이 자리를 펴고 앉아 즐겁게 예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일행중 한분이 막걸리를 한 잔 권해 받아 마셨다. 그 분이 옆 동료를 가리키며 직접 생산하는 술인데 맛이 참 좋다고 했다. 종이컵에 가득 따라 준 술을 들이키니 과연 맛이 좋았다. 그 중 고향에 사시는 분도 있어서 더욱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분들이 사진을 찍고 가자고 했다. 내가 고마움의 표시를 할 찬스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찍어주었다.
노고단
2011. 8. 13
구름이 모이면
천상(天上)이 되고
구름 걷히면
속세의 산정(山頂)
태고적
땅의 숨결뿐
쉴 그늘도 없건만
그 품에 들어선 사람들마다
기운을 되찾고
어진 성품으로 돌아간다.
일행이 노고단을 들르지 않고 바로 내려간 터라 혹시 기다리는 상황이 될까봐 마음이 급해져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대피소를 지나 아까 올라왔던 길로 한참을 되돌아 나오는데 일행이 보이지 않아 더 빨리 걸었다. 다시 한참을 걷다보니 일행의 후미가 보여 안도가 되었다.
다시 아까 탔던 차들에 나누어 타고 식당으로 행했다. 당초 남원의 토속 음식으로 유명한 추어탕을 먹으러 가기로 했었는데 친구들이 인월로 나가 어탕을 먹자고 해서 그리 가기로 했다.
어제 저녘 깜깜한 밤에 보지 못한채 올라왔던 주변 모습이 펼쳐보였다. 우리가 머문 달궁 계곡은 지리산의 깊고 깊은 지역이었다. 아까 노고단에 올랐을때 북쪽 방향으로 장쾌하게 펼쳐보인 산세와 깊은 계곡 지점이었다. 논란이 되었던 지리산 관통도로가 아니라면 깊고 험한 산세의 품으로 험난함을 각오하고 찾아 들어와야만 했을 곳 같았다.
함께 타고 가는 정록친구가 지리산을 여러차레 다녀가서 곳곳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면서 이곳 저곳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한참을 내려와 피아골과 달궁게곡이 갈라지는 곳을 지나쳤다. 거기서 인월로 가는길에 한참동안 피아골 게곡 옆을 지나게 되었다.
피아골이라는 이름에는 어딘지 아픔이 베어나는 듯 느껴진다. 세상 인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지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고달픈 삶에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고 지리산 토벌 작전때 이 근방에서 치열한 공방을 치르며 희생자가 많았다고 들은 기억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았다.
단풍 산행코스로도 유명한 피아골은 6.25전쟁때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피로 물들은 계곡이라해서 그리 불린다고 알려져 있으나 식용피를 제배하던 피밭골이라는 명칭이 전해져 피아골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도 힘들어 졌지만 항암, 미백, 항산화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시 각광 받고 있다고 한다.
훤한 낯에 보니 폭우 피해로 도로가 크게 망가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모두 제대로 복구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가는 길에 백장암 옆을 지났다. 실상사 부속 암자인데 그 곳 10층 석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희귀한 탑이다. 지리산 IC에서 들어온 길목에 위치하는데 전에 직접 차를 몰고 와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인월은 바로 그 지리산 IC에서 들어올 때 지났던 마을이었다. 인월 시내를 지나는 동안 거리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마침 장이 선 날이었다. 그야말로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차창밖으로 파는 물건들을 바라보니 고추, 호박, 과일 등 주로 농가에서 직접 가꾼 농산물들이었다
식당에 도착해 상차림을 기다리다 보니 등산복 차림을 한 손님들이 간긴히 들어왔다. 이 곳이 지리산 둘레길 구간이어서 그 길을 걸으러 온 손님들인 것 같았다. 차려온 어탕은 붕어로 만든 탕 요리였다. 전국 어디서나 흔히 사는 물고기인데 요즘은 귀해진 느낌이다.
식사를 마친 후 커피를 한잔 뽑아들고 밖으로 나와 주식이와 잠시 예기를 나누다 보니 저쪽에서 서둘러 돌아가려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전주에서 서울가는 고속버스를 탈 요량으로 회장을 맞고 있는 재영이 차를 타고 전주로 나왔다.
익산에서 순천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생겨 그 도로를 타고 동전주 IC로 나오니 국도로 오가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단축된 것 같았다.
전주역을 거쳐 6지구 앞을 지났다. 바로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고향이었다. 전주지역 내에 있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시골 같은 곳이었던 그 곳이 고교시절 도시 시가지의 일부로 변모되어 고향의 자취를 다 잃게 되고 말았다.
그 곳에 1979년 20세때 내가 처음 설계해 지은 우리 집이 있었다. 나의 첫 작품인 것이다. 오래만에 그것을 다시 볼 요량으로 근처에서 내려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동네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거의 다 단층 건물이었는데 새로 지은 5층 건물들이 열지어 서 있었다. 사업적 판단에 의해 근래 유행하는 고시원 등으로 다시 짓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집을 찾으며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부수고 이미 다른 건물을 지어 놓은 것 같았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다시 내 삶의 체취가 담긴 하나가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고향은 내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런데 때때로 추억이 깃든 흔적들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되기도 한다.
지리산 산세에 머물다 온 고교 동창생들이 지난 세월 서로의 마음을 아는, 고향과 비슷한 의미로 느껴진다.
(201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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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름 휴가철에 지리산행은 지리산 뜻 그대로 스트레스로 찌든 머리가 지혜롭고 깨끗해 질수 있을것 같습니다! 자세하고, 생생한 숨결의 글이 마치 내가 지리산행을 다녀온 느낌입니다 !
폭우 피해 없으셨는지요? 직적 가 보았던 곳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과 감각이 점차 희미해져서인지, 가보면 매번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지리산에 들다보면 그 시간 나는 데로 다시 오고픈 감정이 생깁니다... 졸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간겅하고 즐거운 산행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