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마지막 간이역의 추억 [화랑대역]
“간이역”이라는 말은 참으로 서정적이다. "간이역"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박함, 순수함, 외로움 같은 낭만적인 정서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중년들은 어릴 적 떠나 온 고향역의 풍경을 그리워하고 젊은 층들은 떠들썩한 MT라도 가면서 접했던 고즈넉한 시골역에서 간이역을 본다.
감성은 사전적인 의미를 압도하는지 간이역에 대한 낭만적인 심상에 대해 새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오히려 그런 서정적인 해석에 동참하며 함께 누리려 한다 - 간이역에서 낭만과 휴식을 찾는 것이다.
서울이라는 우리나라 최대 도시에도 그런 간이역이 있다. 다름 아닌 경춘선의 화랑대역이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이라는 행정구역 명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오래된 건물과 아담한 대합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기찻길이 숨어 있다.
‘화랑대’는 본래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이다. 화랑대역 또한 원래 1939년에 ‘태릉역’으로 시작되었지만 바로 옆에 자리잡은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을 따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외부인의 출입이 쉽지 않은 군사시설과 조선왕릉인 태릉이 인접해 있어서 화랑대역은 옛모습을 유지하면서 아름다운 풍광 또한 함께 간직할 수 있었다.
현재 경춘선 열차는 상하행 합쳐 하루 7회만 멈추기 때문에 기차로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서울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을 이용해 약 10분 정도 발품을 팔면 쉽게 화랑대역에 닿을 수 있다.
지하철 화랑대역에서 경춘선 화랑대역으로 이어지는 길부터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수십년은 족히 되었을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8차선 도로에 쉴 새 없이 자동차가 다님에도 울창한 가로수 덕분에 마치 숲길이나 공원 산책을 하는 느낌이다. 보도 바로 옆 가로수 아래에는 단선의 경춘선 기찻길이 나란히 간다. 워낙 좁은 공간에 길과 바짝 붙어 있어 공원의 놀이기차 시설이 아닌가 싶을 정도지만 이곳에는 ‘진짜 기차’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시간당 두 번씩 지나다닌다.
육군사관학교 정문 옆 한적한 공터처럼 보이는 곳이 바로 화랑대역이다. 비대칭의 뾰족한 지붕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처마나 대합실의 나무의자에서 만만치 않은 연륜을 읽을 수 있다. 전혀 서울시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이 역 주변에 펼쳐져 그 자체가 별천지가 된다. 이렇게 잘 보존된 역사와 빼어난 풍광 덕분에 화랑대역은 2006년 등록문화재(제300호)로 지정되었다. 간이역이지만 국가적인 보물로 인정받은 것이다.
적어도 수도권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경춘선은 누구나 추억 한두가지 떠올릴만한 ‘낭만철도’의 대명사다. 대성리, 청평, 강촌을 지나 춘천으로 이어지는 북한강변 기찻길은 대학생들의 전통의 MT명소이자 수많은 청춘들의 여행길로 지금도 주말이면 인파로 북적인다. 그런 경춘선도 워낙 낙후되어 스피드가 중요한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대 혁신을 맞고 있다. 바로 올해 말이면 복선전철로 완전히 새로 태어날 예정이다.
문제는 경춘선 전철이 이곳 화랑대역을 지나지 않고 중앙선 망우역에서 퇴계원으로 이어지도록 건설된다는 점이다. 올해가 지나면 7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화랑대역에는 더 이상 기차가 멈추지도, 지나가지도 않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미 경춘선의 많은 역들이 새로운 역으로 바뀌었거나 올해가 지나면 사라질 운명이지만 화랑대역은 서울 도심의 마지막 간이역이라 더욱 그 의미가 각별하다.
그래서 화랑대역은 철도를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춘선에 추억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역무원들이 직접 나서 대합실을 꾸며 작고 소박하지만 알찬 문화의 장으로 꾸려나가고 있다. 꼭 기차를 타지 않아도, 그냥 간이역 구경만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잠시 쉬어갈 만한 자리를 마련했다. 매표구 옆 액자는 화랑대역에서 마지막으로 기차를 탈 수 있는 날까지 얼마 남았는지 매일 바뀌는 숫자로 알려준다.
대합실 원탁에는 방문객들을 위한 방명록과 함께 셀프서비스 형식으로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100원짜리 믹스에 불과하지만 어느 커피전문점의 고급 커피보다 더 그윽한 낭만의 향기가 느껴진다. 때때로 철도동호인들이나 지역 예술인들이 방문해 소규모 음악공연, 사진전 같은 문화행사도 열린다. 우리나라 철도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독특한 간이역 문화공간이 이곳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화랑대역은 문화재로 지정된 덕분에 열차운행이 중단되더라도 온전히 보존될 것이다. 더 나아가 서울시에서도 이곳을 시민 산책을 위한 공원으로 가꿀 예정이라니 철거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될 일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역에는 기차가 지나가야 제 맛이다.
낭만철도, 강변철도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싣고 청량리, 성북을 지나 비로소 서울을 벗어나는 것을 실감하는 곳이 바로 화랑대역이다. 그렇게 화랑대역을 즐길 수 있는 날도 불과 100일이 채 안 남았다. 이곳에서 매순간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소중한 추억이 되고 잊지 못할 여행의 일부가 된다. 사라지는 과정이기에 더욱 애틋하면서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늑한 플라타너스 숲에 안겨보는 것도,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간이역을 산책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기왕이면 한적한 주말 오후, 하루 일곱번 서는 경춘선 기차에서 내려 화랑대역을 밟아 볼 일이다. 바로 나 자신이 이 작은 간이역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잊지 못할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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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권익 원문보기 글쓴이: 국민권익
첫댓글 대학 1학년을 공릉동에서 보냈습니다. 그 주변의 불암산과 경관들이 참으로 아름다웠고 특히 5월은 아주 좋은 계절이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화랑대 역은 두어번 갔던 기억이 나는데 주변이 변해서 잘 몰라보겠습니다. 옛날을 생각나게 해주는 사진들이라 참 흥미롭습니다. 인생은 덧없이 흘러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