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12월 13일 토요일]
《『대동야승』 中 趙慶男 著 『續雜錄 속잡록』
명 나라 침범에 봉림대군(鳳林大君)도 역시 참여하다》 (234)
<1638년 무인년 숭정(崇禎) 11년, 청(淸) 숭덕(崇德) 3년, 인조 16년>
○ 삼사(三司)에서 합계하기를, “김류(金瑬)와 윤방(尹昉)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소서.”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합계하기를, “전(前) 판서 조익(趙翼)은 나라의 중신으로서 처음부터 대가(大駕)에 호종(扈從)하지도 않고 해도(海島) 가운데 피해 들어가 있으면서 군부(君父)의 위급한 것을 보고도 길 가는 사람처럼 여겼으며, 섬에 출입하면서 스스로 자기 몸만 위하였습니다. 또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은 성을 나오던 날에 대가를 따라 말고삐를 잡지 않고 멀리 달아나서 영남좌도(嶺南左道) 지방에 가서 스스로 안전하기를 가만히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청컨대, 아울러 먼 곳으로 귀양보내소서.”하였다.
[첨언] 김상헌이 그렇게 처신해놓고도 난후에 북벌론을 주장하며 세력을 얻었다. 그리고는 외척이 되어 안동기씨 세도정치를 열었다.
○ 유림(柳琳)으로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삼고 5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심양(瀋陽)에 들여보냈으니, 이 병졸은 양서군(兩西軍)으로 초정(抄定)하였다.
○ 나주 목사(羅州牧使) 구봉서(具鳳瑞)로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삼았다.
○ 예관(禮官)을 각처에 나누어 보내서 전쟁에 죽은 장사들을 그 본가에 가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에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허완(許完)의 가속들이 광양(光陽) 땅에서 유랑하고 있었는데, 예조 낭관 김위(金瑋)가 명을 받들고 와서 제사를 지냈다.
○ 신구 출신(新舊出身)으로 심양 가는 파발(擺撥)을 세웠다. 전라도 출신은 15일에 여산(礪山)에서 호군(犒軍)하였는데, 다른 도에서도 다 그렇게 하였다.
○ 비변사에서 각 도에 장실(壯實)한 복마(卜馬)를 정하였는데, 전라도는 3백 필이고, 본부에는 18필이 복정(卜定)되었다. 크고 작은 여러 고을에 차례대로 나누어 정하였으니, 이는 5천 명의 병졸에 대한 군량과 기계를 실어서 운반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평양(平壤)까지 몰아 주고, 말 몰고 간 사람은 본고장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었다. 말 몰고 가는 사람을 심양까지 보내지 않고 다만 평양까지 가서 말을 교부하고 오게 한 것은 역시 삼남 지방의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특히 진념(軫念)하시는 뜻이라 한다. 복정한 이 수량은 각 고을에서 내놓을 도리가 없으므로, 향교의 유생들에게 자원하여 바치라 하고, 각 고을에서는 자원하여 바치라고 모집도 하였으나 하나도 자원자를 얻지 못하였다. 마침내 백성들의 토지 결수(結數)로 포목(布木)을 배정하여 거두어들이기로 하고 그 돈으로 지경 안에 합당한 말을 구할 수 있는 데 가서 보내기로 하였다.
○ 사과(司果) 유후성(柳後聖)이 심양에서 들아왔고, 사과 남현(南俔)은 그 아들이 볼모로 잡혀가 있으므로 심양에 들어갔다.
○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정문(呈文)에, “도내에 여역(癘疫)이 크게 퍼져서 주민으로 사망한 자는 그 수를 알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더욱이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아서 죽은 시체가 서로 베고 있듯이 깔려있습니다.”하였다. 이때 동지(同知) 목장흠(睦長欽)이 감사가 되었다.
○ 정랑(正郞)유영(柳穎)을 여제관(癘祭官)으로 정하고 함경도에 가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 8월 12일 진주사(陳奏使) 김영조(金榮祖)와 서장관(書狀官) 유염(柳淰)이 출발하였다.
○ 조정의 편당(偏黨)이 날로 심하여 헐뜯고, 모략하는 것이 못할 짓이 없으니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국가에 화를 끼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15일 전주 지방에 우박이 눈 내리는 듯하였다. 20일에는 밤이 지새도록 달무리가 지다. 25일에는 사시(巳時)와 오시(午時)에 햇무리가 지다. 양서 지방(兩西地方)의 5천 명 병졸이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흩어지고 어떤 자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자도 있었다. 유림(柳琳)이 다만 무과 출신(武科出身) 수천 명만 거느리고 의주에서 장계(狀啓)하기를, “군졸들은 심양으로 들어갈 리가 만무하고, 신도 역시 우리 땅에서 죽고 싶습니다.”하였다. 용골대(龍骨大)가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나와서 병마를 속히 들여보내라고 독촉이 심하니, 유림이 하는 수 없이 남은 병졸을 이끌고서 강을 건너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또 전(前) 병사(兵使) 이시영(李時英)으로 장수를 삼아서 국내에 남아 있는 무관 출신을 초발(抄發)하여 앞서 도망간 병졸의 수를 보충하고, 아직 차지 못한 수는 기한을 정하여 더 보내기로 하였다.
○ 이번에 청국 사람들이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침범하였는데, 여러 나라에서 볼모로 잡아온 사람을 뽑아서 장수로 삼았다. 우리나라 봉림대군(鳳林大君)도 역시 참여하게 되었다 한다.
○ 경기 지방과 호남 지방의 유민(流民)들이 거지가 되어 각 시골 촌락에 돌아다니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마치 지나간 계해(癸亥)년과 갑자(甲子)년의 기색과 같았다. 전라우도(全羅右道)에서는 3백여 명이 소와 말을 몰고 전주 부자 이도길(李道吉)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저렇게 죽으나 이렇게 죽으나 죽기는 같으니, 그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므로 감히 이렇게 하는 것이다.”하고, 창고문을 열어젖뜨리고 쌀과 곡식을 퍼내서 싣고 가면서 말하기를, “풍년이 오기를 기다려 갚겠다.”하니, 주인 이도길이 금하지 못하였다.
○ 큰비가 내려서 남한산성의 행영(行營)전우(殿宇)에 우레가 때렸다.
○ 박로(朴𥶇)가 심양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그를 불러 접견하였다.
○ 진주사(陳奏使) 홍보(洪靌) 등이 들어왔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