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 후 마지막 주일)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출24:12~18; 벧후1:16~21; 마태17:1~9
오늘은 주현 시기 마지막 주일이자 주님변모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따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 변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오늘 읽은 제1독서 출애굽기 24장에서는,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시내광야에 도착한 후에, 하나님의 현존을 뵙기 위해 하나님이 계신 산(시내산)에 올라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주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머무르고,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덮었으며,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의 영광이 산꼭대기에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모세는 구름 가운데를 지나, 산 위에 올라가서, 밤낮 40일을 그 산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두 말씀 속에 비슷한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지요. 산에 오름, 변모, 영광, 빛/불, 구름 등. 얘기가 너무 신비스러워서 우리 삶과는 아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립니다. 특히 요즘 같은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공포스럽긴 하지만, 오히려 확진, 폐쇄, 격리, 방역 같은 단어가 훨씬 현실적입니다.
지난 주 초만 해도 어느 정도 잡히는 것 같았던 코로나19가 주 후반부터 다시 갑자기 기승을 하면서, 우리나라 전체를 혼돈과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민낯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시스템 전체가 갑자기 마비되는 것 같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서로 얼마나 깊이 연루되고 얽혀 있는 존재들인지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전통적으로 주현시기를 끝내고 사순절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주님께서 변화산상에서 변모하신 것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위기상황으로 몰린 우리의 현실 앞에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변화산상의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우리와는 거의 무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요즘처럼 위기상황을 맞고 있지 않았더라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바쁜 현실 속에서 이런 변모의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베드로후서를 썼던 저자도 비슷한 경우에 처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늦게 나온 책이라고 생각되는데, 주후 2세기 초 쯤에 쓰여진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는,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 실제로 본 것을 증언했던 사도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소위 사도시대가 끝나고 교부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주후 90~140년 쯤). 사도들은 예언자들이 메시야의 오심에 관해서 예언한 것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런 깊은 체험들이 매우 신비적이고 고백적인 언어로 증언되기는 했지만, 예수님에게 깊이 감화되었던 사도들은 이런 신비적이고 고백적인 언어를 통해 예수님을 증언하면서 그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시대 후에 교부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신비적이고 경험적이고 고백적인 언어들은 점차 교리적이고 교훈적인 언어로 바뀌게 됩니다. 생생한 영적경험 자체보다 그것을 교리화 하거나 도덕적 권면을 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거기에다 거짓 선생이나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진리를 흐르게 하고 핵심을 왜곡시키는 일이 일어나자, 더욱 기독교 신앙을 교리적으로 변증하려는 일이 일어났겠지요. 이것이 교부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생했던 체험(가령 예수부활 경험)은 어떤 고정된(나중에는 진부한) 언어 속에 갇혀 버리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후서 1장 본문에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던 즈음에 어떤 산(다볼산)에 올라가서 변모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그는 제자 셋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셨는데, 그의 모습이 변화되어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고, 베드로가 놀라서 여기에 초막을 짓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예수님 세례 때 들렸던 말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나오는 단어나 이야기 구조는 사실 아주 깊은, 혹은 아주 높은 영적 경험을 하는 이야기 속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갔다(높이 고양되었다, 깊은 수준에 들었다는 말이지요), 빛으로 변모되었다, 과거의 영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혹은 빛이나 구름, 영광과 같은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심오한 영적 경험이 실제 어떤 것인지,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잘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이 경험했던 이런 심오한 영적 경험은, 그분이 엄청나게 고양되어 육신의 한계를 넘어 신적인 자리에까지 올랐음을 말해주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이야기이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베드로후서의 말씀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의심하는 거짓 예언자와 거짓 선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지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위엄(재림의 위엄)을 우리가 이미 눈으로 본 적이 있다, 그 거룩한 산에서 들은 소리가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그런 우리의 경험보다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직접 본 그런 경험이 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무슨 말입니까? 새벽 동이 트기 직전에 동쪽 하늘에 가장 밝은 별, 샛별이 떠오르지요? 이는 이제 날이 밝는다는 표지입니다. “여러분을 가리는 모든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들이 다 제거되어 분명히 하나님의 빛/하나님의 현존을 바라볼 때까지,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 확실한 구원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이 부여하신 당신의 온전함을 더 깊이 경험하기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낫습니다, 하는 겁니다.
지금은 혼란스럽고 아직 어두운 시간인 겁니다. 재림의 약속도 희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분명한 약속, 1:4절 아주 위대한 약속,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약속들이 희미합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모릅니다. 그래서 뭐가 뭔지 모를 때가 있고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라고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권고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구약성경의 핵심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으로 좁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벧후1:4)일 수도 있겠지요.
이런 약속들이 아직은 분명하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둠 속에서 등불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겁니다. 등불의 목적은 어두운 데서 빛을 내는 것입니다. 해가 뜨고 낮이 되면 등불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어두운 시간에 이 예언의 말씀을 등불 삼아 한걸음씩 나아가라는 겁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께서 켜 놓으신 등불이 있습니다. 희미하지만 그 빛은 여러분 깊은 곳에서 비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말씀을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 반복해서 몸과 마음에 새기는 것, 그 빛/말씀에 의지해서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혼란스런 어두운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우리 안에 켜진 등불이 무엇인지, 우리가 받은 말씀이 무엇인지, 내 안에서 들리는 사랑의 음성이 무엇인지,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단순하게 그 말씀, 그 음성에 의지해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