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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순보를 발간하도록 도와주었고 갑신정변의 설계자인 후쿠자와 유기치!
한국인들은 고려의 직지심체요절이 42행 성서 보다 78년 앞서 제작되었으니
고려의 금속활자술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보다 더
빠르다고 배우면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기술이라며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는 적절한 비교가 아니니..... 서양사에서는 구텐베르크를 “인쇄기의 발명가” 라고 하지 금속
활자의 발명가라고 하지않으며 금속활자는 인쇄기의 부품에 불과하다고 보는데, 그는 사람의
힘 만으로는 고품질의 인쇄를 대량으로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인쇄기” 라는 기계를 고안한 것입니다.
도장을 찍을때 색이 번지지 않으려면 인주를 조금만 써야 하고 돌출면에 골고루 묻어야 하며 힘을
더 넣어서 찍어야 하니, 도장의 모든 면에 힘을 균일하게 넣어 수초간 유지한 다음 깔끔하게
떼야 하는데.... 작은 글자가 조밀한 페이지를 사람 손으로 좋게 대량 인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니 개신교 출현과 종교개혁인데, 마르틴 루터의 연설문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퍼지면서 전 유럽으로 불길이 번져 개신교가 탄생했고, 성경이 독어, 영어등
자국어로 인쇄되면서 성당에서 신부님을 통해서만 들었던 하나님 말씀을 일반인들도 직접 접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 최초 신문은 한성순보 (漢城旬報) 니 1883년 10월 1일 통리아문 박문국 (統理衙門博文局) 에서
발행한 신문으로,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는 후쿠자와 유기치로 부터 국민계몽을 위한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듣고는 후쿠자와의 주선으로 금속 활자와 잉크, 종이 및 윤전기에 신문 제작을
도울 일본인 인쇄공을 데려오는데... 조선의 금속활자는 무용지물이라 신문을 찍을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존하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는 고려시대 1377년 직지심체요절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데, 1455년 구텐베르크의 활자 보다 빠릅니다만..... 구텐베르크는 싼 가격에
대량 인쇄흫 할수 있는 “인쇄기계와 인쇄술” 에, 금속활자에 적합한 유성바니스로
만든 인쇄용 잉크를 발명한 것으로 기억하며, 금속 활자는 인쇄기의 일개 부품으로 봅니다.
직지심체요절은 활자의 크기와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고, 부족한 글자를 나무 활자로 보충
하여 찍어 냈기에 인쇄상태가 조잡한 편입니다만..... 고려 주자본중 유일하게
전래되는 금속활자본으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라 가치는 높이 평가됩니다.
고려 금속활자는 활자 끼리 맞물리게 하는 기술이 미흡해 밀랍으로 두 활자를 붙여서 찍어내는
불완전한 방식이라 통째로 찍어내기 어려웠고 금속 주조 능력의 부족으로 글자 모양이
바르지 못하고 획의 굵기가 불안정했으며, 인쇄 중에 흔들림이 많아 글자가 번지거나
흐려졌으며..... 금속활자 한판 가지고 하루에 찍어낼수 있는 양은 “열장” 도 채 되지 못했습니다.
조선 들어 국가주도 개발로 금속 주조능력이 발전해 활자의 맞물림이 발전되었으나 하루에
“20장” 인쇄가 한계였으며.... 세종 시대에 갑인자가 개발되어 활자를 조립식으로
바꾸고 틈새를 대나무로 메꾸는등 크게 발전했음에도 하루에 “40장” 정도 인쇄가 한계였습니다.
금속활자는 구리·철·납등 금속이 사용되었는데 사각 기둥으로 글자가 뒤집어져서 튀어나게
새겨져 있으니, 금속활자를 만드는 방법은 고려 흥덕사의 밀납주조법과 조선시대
금속활자인 주물사주조법으로 나눌수 있으며 인쇄는 고착식을 거쳐 조립식으로 바뀝니다.
활자 배열이 끝나면 공간을 죽목 (竹木) 으로 메워 움직이지 않게하고 편편하게 고른후 먹솔로
활자면에 먹물을 골고루 정성 들여 칠한 다음에...... 종이를 올려 놓고는 헝겊뭉치로
누르는데, 조선시대 관(官) 의 인쇄에서 한 권에 한 자의 착오가 있으면 30대 곤장을 맞았습니다.
인출장은 한 권에 먹이 진하거나 희미한 글자 한 자가 있을 때 30대 매를 맞고 한 자가 더할 때마다 벌이
한 등을 더했으며 교서관은 다섯자 이상 틀렸을 때는 파직되었는데, 금속활자는 고려시대는 불경
몇십권을 찍고 조선시대는 한자로 책 한권을 만들면 “대학” 이나 “중용” 처럼 얇은 책도 논
서너마지기에 해당하는 2천만원 값이며 손으로 직접 쓰는 붓글씨인 필사 보다 느리고 비효율적 입니다.
인쇄 방법은 구텐베르크가 인쇄기와 자체 제작한 잉크로 엄청 빠른 속도로 싼 가격에 대량인쇄를 하는데 비해,
조선은 활자 위에 먹물을 바른후 종이를 위에 덮고 문지르는 탁본이었고, 종이가 흔들리거나 문지르는
강도가 잘못되거나 먹의 농도가 잘못되면 글자가 번지거나 흐려졌으니 인쇄본 유물은 망친 페이지가 많습니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궁중에서 장인들이 서너달 걸쳐 책 몇백권을 찍어내면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는 비효율
적인 방식이라.... 민간에서 대량인쇄를 할때는 금속활자가 아닌 “목판활자” 를 사용했으니, 신문 발행
에는 무용지물이라 일본에서 가져온 유럽식 금속활자가 장착된 구텐베르크 인쇄기로 신문을 발행한 것입니다.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받은 박영효는 고종에게 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신문 발간을 진언했으니 식자층
들이 신문을 읽게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1883년 2월 28일 고종은 한성부에서 맡아
신문을 간행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4월에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당하면서 신문 발간작업은 중지됩니다.
이후 통리아문의 김만식이 통리아문장정에 "동문학(同文學) 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신문보사를 개설한다." 는
규정에 신문 발간을 추진했고, 1883년 8월 고종은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해 신문을 발간하니 총재로
외아문독판 민영목, 부총재로 협판 김만식이 임명되어 신문 발간 실무책임자가 되었고 후쿠자와 유기치가
박영효에게 붙여준 일본 시사신보사 인쇄공 이노우에 가쿠고로도 다시 고용되어 신문 간행작업이 시작됩니다.
9월 20일 창간호를 내놓았으니 "조정에서 외국신문을 널리 번역하고 국내 사건도 실어서 나라 안에 배포할 것"
이라고 전제하고, "시세를 살펴 흐르지도 말고 빠지지도 말며 좋고 나쁜 것을 취사선택해 도리에 맞게
구해 바른 것을 잃지 않는다면, 박문국을 개설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취지를 달성하게 되는 것" 이라고 밝힙니다.
관아에 배포하니 관아에서는 1부당 동화(銅貨) 50문(文) 을 신문값으로 납부했는데, 18쪽 신문은 일반인도
30전이란 비싼 요금에 구독할수 있었으니 박문국에 직접 구독을 신청했으며, 1884년 12월 4일 박영효와
김옥균등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실패후 박문국 사옥과 인쇄시설이 불에 타 1년 만에 종간되었습니다.
《한성순보》는 짧은 기간 발간되었으나 최초 신문으로 외세에 경계의식과 자국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는
한편, 개화 문물과 지식을 국내에 소개해 나라의 개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1년 동안에
40여호가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위스키, 브랜디, 샴페인을 '유사길', '박란덕', '상백윤' 이라 언급했습니다.
한성순보 이후 1896년 4월 7일 서재필등 독립협회 (獨立協會) 의 기관지로 발간된게 독립신문
(獨立新聞) 인데,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창간과 발행 작업을 도왔고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4면 중 3면은 순국문, 1면은 영문으로 썼으며 필진은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등 입니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망명후 헨리 아펜젤러를 발행인으로 윤치호가 발행하다가 독립협회 해산시에 폐간되었는데
윤치호와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기치의 영향을 받은 친일파로 또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대학교에 보관중인
애국가 원본에서 보듯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하고 다음해 번역한 찬미가 14장에도 애국가 가사를 실었습니다.
한성순보에 금속활자와 인쇄기, 잉크와 종이에 기술자 이노우에까지 도와준 갑신정변의 설계자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복택유길) 는 개화기 선각자로 게이오대학의 설립자이자
만엔권 지폐에 나오는 인물로 1835년 나카쓰번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대명율 상유조례” 책을 구한날 아들이 태어났기로 글자를 따와 유키치로 붙여준 유학자 였습니다.
형 산노스케도 저명한 유학자로 효제충신 (孝悌忠信) 을 강조하였지만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도 집안 배경이
변변치 못해 인정받지 못하자.... 후쿠자와는 봉건제도는 물론이고 문벌사회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으니 2살때 부친을 여의고 어렵게 성장하며 "신분사회와 문벌제도는 부모의 원수였다" 고 회상했습니다.
8살때 성리학을 수학하고 14세때 쇼잔의 서실에 다니며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떼고 이어 사기,
춘추좌씨전, 노자, 장자를 섭렵하였으며 인문고전에 몰입한 이후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닦았지만 아무리 뛰어나도 신분의 벽을 넘어설수 없었으니 외삼촌은 그가 승려가 되길 바랬습니다.
18세때 1853년 나가사키로 건너가 네덜란드어학인 “란가쿠 (蘭學 난학)” 라는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던중 야마모토 무지로의 집을 방문했다가 포술(대포) 서적을 보고 매료
되었던 후쿠자와는..... 원전을 이해하기 위해 네델란드어를 공부해 난학 (蘭學) 을 배웠습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1854년에 전함을 이끌고 도쿄만에 나타나 대포로 막부를 굴복시킨 것을 보고 충격
으로 포술 (砲術) 을 공부했는데, 그가 번역한 책도 의학서나 축성서로 네델란드어 외에 화학
실험과 전기기기 조립등을 배웠으니 공부를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베개를 베고 잔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1858년 도쿄에서 네델란드어 난학숙 (蘭學塾) 을 열었는데 다음해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인
거류지 요코하마를 방문하니 영어 일색이라 영란사전을 구해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훗날
“몇년간 수영을 배워 헤엄칠수 있게되자 다시 나무타기를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노라 회상했습니다.
1860년 2월 네덜란드선 함장 키무라 셋츠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미국인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적인 사고에 당황하고 일본식 가치관이나 예의가 통하지 않는 서양사회에 적응하려 애를 썼으며
귀국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군주의 후손과 외손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국 국민들은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의 후손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대부분 모른다는 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으니 문화 충격인데, 미국 체류중 웹스터 큰 사전을 입수해 영일사전을
만드는데 참고했으며 일본어와 영어, 중국 광동어를 비교한 “화영통어 華英通語”를 집필했습니다.
1862년 1월 막부(幕府) 견외사절의 수행원에 임명되어 유럽에 파견된후 3차례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였으니 해외를 여행하면서 목격한 열차, 기관차, 기계 등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소개하고 일본에 도입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습니다.
“ 프랑스는 징병제라는데 영국은 아니라니 왜 나라마다 제도가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선거법은 어떤 법률에 기초해서 실행하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국회는 어떤 관공서 인지 물었더니 질문 받은 유럽인과 미국인은 그저 웃을 수밖에?
더 황당한건 당파가 둘로 나뉘어 정치 싸움질을 해댄다는 점이며..... 더 놀라운 것은 적인
상대방 의원과 함께 술 마시고 밥을 먹는다?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으니 “닷새고
열흘이고 걸려 간신히 납득” 했다며 첫 순방때 홍콩을 경유했는데 영국인이 “중국인들을
개나 고양이”와 다름없이 취급하는걸 보고 식민주의, 제국주의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번째 순방인 영국 런던에서 만국박람회를 시찰할때 증기 기관차, 전기장비, 활판 식자기
등을 유심히 관찰하였으며, 러시아를 방문하여 일본과 러시아간 사할린 국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문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육군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을 견학했습니다.
막부 여비 400냥으로 영어 설명서, 물리 설명서, 유럽 지도와 지리서를 사서 가져왔는데
유럽 여행길에 토지 거래계약서 작성등 문화적 차이에 놀라면서..... 일본
에서는 책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에는 흔한 것을 조사했습니다.
서양식 병원, 은행업무, 고리대금, 보험업무, 우편법, 징병 징집제도, 선거 제도와 의회 제도등을
살펴보았으니 사절단 경험으로 일본에 서구문물과 양학의 보급이 필요함을 통감
했으며 프랑스인 레온 로니와 친교를 맺고 아메리카와 동양민족학회의 정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서양문명의 유행은 막을 방도가 없으니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
하자” 고 말했으니“탈아입구(脫亞入毆)”인데,“근대화를 거부하는 중국과 조선은 서양이
압박하는 가운데 독립을 유지할 방법이 없으니 일본은 이런 이웃과 헤어져 서양 열강과 함께 움직이자.”
“우리는 마음속에서 부터 아시아의 미욱한 친구를 사절해야 한다” 라며 서구 문물을 일본이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했고“ 동양에는 유형의 것으로는 수리학, 무형의 것으로는
독립심 두가지가 없다. 인간만사는 수리를 빼놓고 논할수 없으며 독립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
1863년 귀국후“서양사정”을 집필했으며 막부 개혁과 이화학과 기계학을 배울 것을 강조하고
병원, 보험, 은행, 대부업, 우편, 징병제도를 역설했으니 영국, 프랑스, 미국등 정치, 사회,
경제, 역사, 지리, 문화 제도를 알기쉽게 묘사했고 서양문물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메이지유신 직전 일본은 반외세 감정이 팽배했으니,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그는
막부파로 부터 자객의 습격을 자주 받았으니 일본에서는 "서구 문물이 일본을 망친다"
는 괴담이 돌았고 그가 시나가와에 도착한 다음날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863년 3월 죠메이왕(천황)은 양이(洋夷) 들을 쫓아내 줄 것을 신사에 기원하였고 4월에는 조슈번
이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상선에 포격했으며, 1863년 4월 그가 길에서 낭인(浪人)
에게 피습을 당하던 무렵 영국 함대의 가고시마 포격으로 사쓰마번과 영국간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다음해 10월에는 막부 통역관으로 번역 업무를 맡았으며 저작물 수입으로 도쿄에 게이오
대학교를 설립하였고, 1867년 막부의 군함 수취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했는데
영어 사전과 미국 지도책을 사들여 탐독하고“서양여안내 (西洋旅案内)”를 저술했습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무진전쟁 내란이 발생하자 막부에서 퇴직하고 게이오 대학 교육활동에 전념하며
의회 제도의 도입과 입헌군주제 정부, 초등학교 보통교육을 주장했으며 국민의 교육향상과 여성의
권리보장등 계몽 강연활동을 하는중에 막부파와 체제 유지파들의 반대 혹은 피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869년 구마모토번의 요청으로 서양전술 서적 “양병명감(洋兵明鑑)” 을 번역했으며 입헌군주제,
개인의 자유, 의무교육, 여성 권리등 책을 100여권 집필했고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고 주장하였고 “학문의 권장” 의 서론에도 기술하였습니다.
메이지 신정부의 초빙을 사양하고 교육과 언론활동에만 전념하였으며 실학 (實學) 을 장려하고
부국강병을 주장해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1882년“시사신보” 를
창간해 남존여비가 극심해 남편이나 아버지의 소유물에 불과했던 여성의 지위 향상에 공헌합니다.
후쿠자와는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로 1860년대 부터 개항과 개화를 주장하고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를 역설했던 것이니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고 개화 청년양성에 주력했으며 또
복식부기의 개념과 보험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니 만엔권 지폐에 등장하는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게이오 대학을 설립했으니 학교에서는“후쿠자와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다른 교수나 교원에게는
선생님 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다고 하며, 또한 조선 개화기의 사상가 유길준(兪吉濬)
과 윤치호 (尹致昊) 등의 스승이자 김옥균과 박영효 등 한국 개화파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그는 시빌리제이션 (civilization) 이라는 개념을 도입해“문명개화”로 번역했으니 진보, 발전을 향한
보편적 활동이라 했는데, 시빌리제이션은 시민 (civilis) 에서 파생된 것으로 성 안에 사는
사람,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며, 일본이 문명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문명국과 어울리고
본받아야 한다면서 일본이 선도자가 되어 동양의 다른 국가들을 문명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문명국으로 발전할 능력이 되지 않는 국가, 민족이라면 버리고 일본만이라도 개화의 대열에
들어서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이때 그는 컬쳐 Culture 는 “단순한 문화” 의 개념으로 해석
하였고, 반면에 시빌리제이션 Civilization 은 “문화, 문명화된 사회”의 개념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1871년 폐번치현 (廢藩置縣), 1873년 지조개정 (地租改正) 등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해 설파했으니 그 근거로 국가, 천황(일왕)
아래에 만인의 평등론 이었는데 이러한 주장은 현대 일본의 평등사상의 시원이 되었습니다.
“서양 사정”에서 생명보험, 화재보험, 손해보험을 설명하며 미구에 닥칠 재난에 대비해 자금을
모아 두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그후 메이지 정부의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적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운동과 자유 민권 운동을 주도하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눈밖에 나게 됩니다.
1882년“시사신보”를 창간해 엄숙주의를 비판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인습
에 대한 비판 부터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현실주의, 사회진화론 등에 입각한 논조의
글을 싣고 청년 토론회를 주최해 수많은 자유주의적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을 양성했습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의 군국주의 헌법에 반대해 설득했으나 실패하자
히로부미 일파와 절교하였으니.... 이노우에가 대일본제국 헌법, 황실전범
교육칙어, 군인 칙유를 주도하자 후쿠자와파 학자들은 헌법 작성에서 탈퇴해 버립니다.
그는 서구의 liberal 혹은 liberalism 이라는 단어를 억압되지 않는 것, 자기 스스로 권리를 향유하고
누리는 것으로 보아“자유 ”라는 단어로 번역하였는데,“자유(自由)” 라는 한자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불교 용어를 참고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니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개념입니다!
서구문명의 수천개 단어는 중국과 일본에서 각기 따로 번역되었으니 Train 을 일본은 기차
(汽車) 중국은 화차 (火車)로, Car(Automobile) 는 일본은 자동차 (自動車)
중국은 기차(汽车) 로, Limited Company 와 the President of a Company 를
일본은 "주식회사와 사장" 으로 중국은 "유한공사와 총경리" 로 번역 내지 조어 (造語) 했습니다.
일본인들이 번역한 단어는 국회, 정부, 내각, 대통령, 경제, 사회, 신문,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방송, 개인, 자유, 낭만, 문화, 문명, 국어, 영어, 수학, 과학, 화학, 생물,
음악, 미술, 철학, 의사, 외과, 내과, 전기, 전자, 국민, 무전, 통신,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비행기, 군함, 잠수함, 자전거등 수천개인데 한국인은 현재까지도 빌려쓰고 있습니다.
1873년 11월 최익현의 상소로 흘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후 1875년 운양호
침입때 22명의 일본군 상륙에 450명이 지키는 성이 함락되고 처참하게 대패
당하자 다음해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고, 5년후 1881년 조선은 일본의 서구개화 문명을
배우겠다며 젊은 관료들로“신사유람단”을 파견했으니 후쿠자와등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후쿠자와는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등 방일 조선청년들에게 부국강병론
과 신분제도와 문벌특권층의 타파를 역설하며 "조선을 개혁" 할수 있다고
믿었으니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후쿠자와는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서 17만원 대출금을 얻도록 주선해 조선측이 배상금을 납부할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임오군란후 조선에서 청국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의 급진 개화파를 지원해 그들이 스스로 국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의 문명개화의 주역이라는 것이 조선에 알려
졌기에 방일 조선 청년들은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대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 것입니다.
1875년 “문명의 개략”이 조선에 입수되면서 그의 문명개화론은 조선 1880년대 개화사상에 큰영향을 끼쳤던
것이니 1882년 수신사 박영효는 도일 배에서 일본주재 영국 영사에게서 국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일본인 선장이 8괘는 너무 복잡하다는 말에... 4괘를 생략한 태극기를 고안해 고베의 여관 지붕에 게양합니다.
이때 박영효는 후쿠자와가 운영하는 시사신보 직원 이노우에를 대동해 귀국한 이듬해 한성순보가 발간
되는데 후쿠자와는 윤전기와 금속활자, 잉크에 종이까지 주선해 주었으며,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 윤웅렬의 부탁으로 농업학교나 기술학교로 갈뻔했던 윤치호를 도진샤로 진학하도록 주선합니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등은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면서 높은 식견에 탄복
하였으며 후쿠자와는 이들의 개혁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적극 후원하였으니.....
김옥균은 후쿠자와의 집에 4개월간 머물면서 그와 면담하며 조선 독립에 협력을 당부합니다.
후쿠자와는 조선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직전 상황과 흡사하고 소규모 무력 투쟁도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는 조선에서 개혁을 실시한다면 자유주의적인 영세 중립국으로 발돋움할수
있다고 보아 조선 개혁파 청년들을 지원하였으니 1884년 "갑신정변의 실제 설계자" 입니다!
조선인 개혁자들에게 조선 개혁운동을 지원, 자문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낙담하는데, 주역들을 일본으로 탈출시키고 거처를 제공했으며 김옥균은
반년간 후쿠자와 집에서 살았는데 김옥균의 딸을 낳은 일본 여인 마츠노 나카는 그의 하녀 였습니다.
갑신정변 당시 후쿠자와 유기치는 프랑스 공사의 함대에 일본 자유당의 민병대를 보내
김옥균 일파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후일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윤치호와는 서신을 주고 받으며 언론 경영에 대한 조언을 해
주었고, 유길준 에게는“문자지교” 라는 그의 저술을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하게 하였습니다.
1930년대 이후 윤치호는 최남선, 이광수, 유길준 처럼 친일파로 변절했으니 안익태와 더불어 애국가의
작곡가와 작사자가 모두 친일파이며, 선구자의 작곡가와 작사자 조두남과 윤해영도 그렇고,
1919년 3.1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최소한 과반수 이상은 변절했으며 장지연, 박영효,
이용구, 우범선, 최린, 노천명, 서정주, 모윤숙, 김동인, 주요한, 김동환, 김활란, 홍난파가 그러합니다.
후쿠자와는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뒤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혹독한 형벌과 연좌제를 보고 비분강개
하여 당일은 식음을 전폐하였다고 하며....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면서 대성통곡하였고
“조선독립당의 처형” 이란 글을 발표하는 한편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며 규탄했습니다.
1885년 3월 16일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에 가담한 일부 인사들과 그 유가족의 비참한 처우를
전해듣고 분개해서는 시사신보에 “탈아론” 을 발표하였으며..... 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 며 조선의 수구파 정부를 심하게 규탄하기도 했습니다.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군 정훈 교재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발행한 신문“시사신보”
였고 그는 중국인을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미개하다고 비난했으니, 그것이
그가 생각한 “문명” 이라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1898년 3월 22일의 사설에서는
과거의 심한 비난이 마음에 걸렸는지“지나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는 중국에 요구할 것은 "영토가 아니라 무역" 이라고 했으며 양국은 이를 통해 상호 이익을
도모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있다는 것으로, 일본인은 청일전쟁후
고조된 중국인 멸시를 삼가야 한다고 주문하고는 1897년 이후에는 메이지 유신의
국가사회주의적, 군국주의적 개혁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의 강연과 칼럼을 기고합니다.
1897년 9월 4일자의 시사신보 칼럼에서는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에 "종교 안에 다양한 종파가 있지만 그
차이는 보통차와 홍차의 차이 정도고, 두 차를 마셔도 큰 차이는 없다" 며 일부 종교의 독선을 비판
하기도 했으며.... 극심한 남존여비 사회인 일본에서“여성도 인간”이라는 견해를 주장하고 여성
참정권을 지지하는등 일본 여성의 기본권 향상 및 "여성도 국민" 이라는 인식을 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세계열강 대열에 오른걸 인생에서 보람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는데, 춘원 이광수는 후쿠자와 유기치를 평하면서“일본에 복을 주기 위해 하늘이
내린 위인” 이라고 극찬하였으니 후쿠자와는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대표적 계몽사상가
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최남선 이광수등 국내 개화파 지식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후쿠자와는 일본이 선도자가 되어 조선과 중국, 베트남의 개혁과 계몽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이상론에 따라
춘향전, 별주부전, 흥부전 등의 작품들을 일본에 소개했으니, 후쿠자와의 권고로 니카라이
도스이는 조선 소설 춘향전을 번역했고, 조선의 전설들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아사히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후쿠자와는 "조선국 개화를 유인하고 이끌어야 하며 그 인민은 완고하고 고리타분하므로
깨우치고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 진보를 도와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 지식인
들에게 사상적 지주가 되었으니..... 이동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최남선, 이광수등... 구한말 조선 지식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큰 스승 이었습니다.
유길준은“서유견문록” 서문에서 “ 남들이 이야기한 찌꺼기만을 주워 모았다” 고 적었으니, 그
남이란 바로 후쿠자와의 책인“서양사정” 을 말하는 것인데... 또 후쿠자와 유키치는 노년에
7심훈을 남겼으니 근현대 일본 대표적인 명언이자 마음을 닦는 잠언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1.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멋진 것은 일생을 바쳐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2.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인간으로서 교양이 없는 것이다.
3.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4.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타인의 생활을 부러워 하는 것이다.
5.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물에 애정을 갖는 것이다.
7.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거짓말" 을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