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경 북한산과 도봉산의 디테일을 담은 사진들에 이어지는 글로서,
같은 시기 관악산, 소요산, 남한산성 등 경기도의 산과 계곡들의 디테일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사진 한장이 백마디의 말보다 좋은 경우가 있는데요.
그때 그 시절로 고고싱해 볼까요.
한편, 시사상식인데요.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은 어디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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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1970년경 관악산 사진.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구도에다 가급적 사람을 피해서 사진을 찍는다.
이럴 경우 자료로서 가치는 거의 없다.
물론 있긴 있습니다. 지금은 저 바위의 세로 틈새에 쓰레기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
책에는 같은 구도의 사진이 또한장 있는데...

바로 이사진이다.
빨간 베레모에다 점퍼 그리고 군화로 정장을 한 중년의 남자가 불을 떼고 있다.
밥과 국을 끓이고 있는게 확실하다.
놀라워라.
당시 등산 문화를 드러내는 데에 이 사진보다 더 정확한게 어디에 있을까.
이 사진을 공유^^하고 싶어서 책의 손상을 감수하고 스캔을 뜨게 된 셈이다.
당시에는 계곡 어디라 할 것 없이 나무를 주어 밥을 하고 미리 재어간 고기를 돌구이 해서 먹었다.
그러니라고 연기가 자욱할 정도였다.
한켠에서는 술에 취해 나이, 성별 불문하고 춤을 추었고...
우리는 산에서 저렇게 '신나게' 맘껏 놀았다.
사진은 이런 걸 담고, 이렇게 찍어야 한다고 본다.
제대로 된 '등산' 사진집 한 권 없는 우리나라를 읽으시려면 --> 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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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진설명 ' 관악산의 등산객들. 관악산의 정상은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 장관을 이룬다.
유독 정상 부근에만 이렇게 기암이 흘립해 있는 점이 관악산의 특징이기도 하다.
바위 끝마다 등산객들이 극성스럽게 기어올라가 있다.
말그대로 바위 침봉에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올라가 있다.
관악산 정상을 가본 이라면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이다.

*사진출처
바로 여기.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설령 오른다 하더라도 산행객들이 내려오라는 성화에 시달려 있을 수도 없을 것 같다.

그시절 삼막사의 모습.
지금하고 얼마나 바뀌었을까?

당시 관악산의 꽃이라고 해도 좋을 안양 유원지.
푸울장도 있고 호텔과 음식점 그리고 각종 오락시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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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도서관.
이렇게 생겼구나.

1970년경 이화여대 정문 앞.
양장점, 다방 다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생겼구나.

뚝섬유원지.
유원지도 있고 경마장도 있던 시절 이야기.
보트에는 '수영장 봉은사 청수장'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 광고판 일 것 같다.
봉은사쪽도 당시까지만 해도 근교 명승지였는데, 청수장이라는 식당 겸 여관이 있고.
그곳에는 계곡물을 막아서 수영장을 만들었다는 뜻이 되겠다.

소요산 자재암. 나도 한때 저 시절에 소요산을 올랐던 적이 있다.
1935년 소요산 산행기를 통해 소요산 산행의 일면을 보시려면 ---> 여기를

그리고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산행지인 소요산. 내원암.
초여름 신록에 화사한 옷들이 눈부시다.
어랏...소요산은 자재암이고, 내원암은 아마 수락산을 말할텐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가본지 하도 오래되어 모르겠다
.
같은 건물.
어랏...'소요산 내원암'이라고 하면서 오래된 건물도 볼만 하거니와...라고 적고 있다.
알다시피 소요산 자재암은 6.25때 불타버려 그 이후에 세워졌다. 따라서 소요산은 아니되시겠다.

소요산 입구를 보시라.
그시절 얼마나 번성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았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소요산 뺏지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시려면 ---> 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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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한산성으로 고고.

지금 이곳은 남한산성 남문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곳 같은데...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드라이버길은 일제때 놓여졌고,
그시절부터 인기많았던 근교 드라이버지 또는 소풍지였다.
생각해보라 산 높이 올라 쇄락해가는 왕궁을 마주한다는 건 묘한 센티멘탈을 주었을 것이다.

남한산성 동문.
좌측의 밭은 아마 복원되었을 것 같다.

역시 동문인데...
좌측에 있는 밭이 도로로 바뀐 것 같다. 그 사이에 또 이렇게 바뀌었구만.

춘궁리 보물 제12호 5층석탑.
석탑 주위의 밭을 가는 아버지와 아들.
저시절은 저래도 아마 되었을 것이고(?). 밭을 가꾸면서 탑을 손상시키지 않아서 고마울 뿐이다.

남한산성 북문.
지금은 문루가 건축되어 있다.

그리고 영춘정. 영춘정은 '이승만 박사의 장수를 송축하는 뜻으로 세웠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이승만과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은 바로....
「평소 남한산성에 관심이 지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5월, 남한산성을 가장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심지어 그 다음해엔 자신의 탄생 80회를 기념하는 ‘이승만 박사 송수탑(頌壽塔)’까지 이곳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애정이 지나친 게 독이었는지 4·19 혁명 후에 송수탑의 철거와 함께 남한산성에 내려졌던 국립공원 지정이 취소되었다. 국립공원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이다. 이후 1971년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 신청되어 있다. 」-여행스케치 기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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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온천.
좌측은 온천탕이고 우측은 온천호텔이었다고 한다.
그시절 우리는 이렇게 해서 온천을 즐겼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협궤열차였던 수여선(수원-여주)을 타고
수원쪽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이천쪽- 신륵사. 세종대왕릉 등등 -으로 많이들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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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호수.
일제시대때 만들어진 인공 호수.
호수가 많은 일본이 그리워 만들었다던가...

가평 운악산 현등사라고 한다.
탑신에 배낭을 내려놓고 걸터 앉아도 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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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 유원지이군요.

'교통이 편리한 청평 유원지의 돛단배'라고 하는데, 좀 분위기가 다른 게 느껴집니다.
외국인이 운영했던 청평 유원지를 보시려면--->여기를

마니산 첨성단.
저위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었던 시절.

강화내성.
내성에 바로 붙어 상가가 쭈욱 이어져 있는 걸 알 수 있다.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본다.
그 시절 강화도는 이렇게 인기 절정이었다는 것.

강화교와 참성단. 이렇게 생겼었네...

남이섬.

사진 설명" 남이섬 방갈로. 서울 근교의 유원지로 알려진 이곳의 아담한 방갈로.
정서적인 강가에 세워져 있어 이곳에 묵으며 자주 강에 뛰어들어 찬물에 몸을 씻기가 편리하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이 고장 유일의 보물이라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보면,.

오른쪽 어깨에 동자불이 하나 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저때는 저래도 되었던^^ 시절.
물론 지금은 어깨에서 내려와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보물에 저러면 안되지....
첫댓글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이 최초의 국립공원이었다가 취소된 것 처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도립공원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는
우리의 문화재입니다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셨다니 퍽이나 다행입니다
초겨울 감기 조심히시고
코로나 무사 무탈하시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주 오래전 사진들을 볼수 있었고요,
이승만 前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그렇게도 좋아 했었군요?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 관리 잘 하시길~``
초겨울 감기 조심하시고
코로나도 조심하세요
좋은 하루 열어가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