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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爲大韓獨立而死하니 死何恨이리오.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으니 죽음이 어찌 한스럽겠는가.
韓國痛史(한국통사)
1915년 박은식(朴殷植 : 1859~1925)이
민족주의사관의 입장에서
한국 근대사를 종합적으로 저술한 역사책.
1책(3편 114장).
저자의 다른 저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와 함께
한국 근대사를 근대 역사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민족주체적 입장으로 정리한 근대 민족사학의 이정표적 저작이다.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저자는 태백광노(太白狂奴)라는 가명을 썼다.
저자는 양명학과 다산학(茶山學)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1863년 고종 즉위부터 1910년 한일합병까지를 다룬 〈한말비록 韓末秘錄〉(4권)을 저술했다.
이어 저자는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동명성왕실기〉 등 민족 영웅들의 전기를 집필하는 한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 책은 1914년 상하이[上海]에서 완성되었는데,
구성은 범례, 목록, 서(序), 서언(緖言), 삽화, 본문 제1~3편, 결론, 후서,
발(跋)의 체재를 갖추고 있다.
서술 범위는
1863년 고종의 즉위 및 흥선대원군의 집권기부터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의
사건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했고,
주요사건들에는 저자의 의견을 덧붙였다.
내용은
우선 서언에서 국가와 역사와의 관계를 가시적 '형'(形)과 불가시적 '신'(神)으로 파악하고,
비록 국가의 멸망으로 '형'은 훼손되었다 해도
국혼(國魂)인 '신'이 존속하면
'형'도 때가 되서 부활할 것이며,
국사(國史)를 존재시키는 것이 국혼을 존재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책의 서술 목적을 밝히고 있다.
제1편은 1장에서
우리나라 지리의 대강을 설명하고,
2장에서
단군신화부터 부족국가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고종 즉위 전까지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제2편은 모두 51장으로
대원군의 잡정부터 아관파천이 대한제국 성립 이전까지를 다루었다.
그중 제일 먼저 대원군의 집정부터 실각까지의 주요시책,
외국과의 전쟁 등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대원군이 내정에서 정치상의 대혁명을 이루었으나,
세계정세에 어두워 중흥의 기운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이어 민씨정권을 다루면서
자주적 근대화의 실력을 가진 뒤 문호개방을 해야 했다고 평가하고,
그 실패의 결과로써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음을 비판했다.
'갑오농민전쟁'을 폭동으로 다루면서도
그 책임이 봉건정부에 있음을 언급했고,
갑오개혁을 자주적 개혁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명성황후학살사건과 의병운동, 국내 정세 등을 다루었는데,
특히 아관파천에 대해
친러파의 사욕을 위한 것으로 비판했다.
제3편은 모두 61장으로
1898년 대한제국의 성립부터 1911년 105인 사건까지를 다루고 있다.
대한제국기 독립협회의 활동에 대해서 그 정신이 가장 옳았다고 평가하면서도
지식의 바탕이 유치하고 조급하여 개혁에 실패한 것으로 평가했다.
다음으로 열강의 이권쟁탈전과 횡포를 통탄하고,
일제의 기만적인 한국 침략상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이어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과
항일의병·애국계몽운동·의열투쟁 활동상을 언급하면서
영국·미국은 우리 나라를 이용하여 일제의 환심을 산 데 불과하다면서
서구 열강의 기만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이어서는 한일합병에 이르는 과정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사실들을 서술했다.
이 책은
한국 근대사를 일제의 침략과정을 폭로한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목적의식적으로 서술하면서도
역사사실을 중심으로 장(章)을 나누고 그 내용을 서술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가로서 저자의 논평을 덧붙이는 한편,
사실이 유래하게 된 선행 사실을 거론하고
그결과로 일어난 사실을 서술하는 등
인과관계의 면에서 역사를 분석·비판·종합해가는
근대 역사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저작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했기 때문에
저자의 역사관과 한말의 사건들이 생생하게 드러나면서
국권 상실에 대한 깊은 반성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이후에 간행된 〈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국권회복,
독립운동의 전모가 생생하게 포착되고 있다.
초판본은 현재 거의 찾아볼 수 없고,
1946년 삼천각(三千閣)에서 재간행했다.
이후 1975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간행한 〈박은식전서〉(전3권) 중
상권에 초판본이 영인·수록되었다.
朴殷植(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주자학자로서 출발해 개화자강론자·애국계몽사상가·학자·언론인·독립투사로,
민족이 처한 조건의 변동에 따라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발전시키면서
전생애를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바쳤다.
본관은 밀양.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岩·白巖·白菴)·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 아버지는 서당훈장 용호(用浩)이며, 어머니는 노씨(盧氏)이다.
할아버지인 종록(宗錄)의 대에 이르러 역농(力農)으로 치산(治産)했다.
1868년(고종 5) 아버지의 서당에 입학해 1875년까지 정통 주자하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 주자의 영정(影幀)을 방에 모셔놓고
매일 아침 절을 드릴 만큼 주자를 존졍하고 숭배했다.
아버지가 시부(詩賦) 등 과거 공부를 시켰으나,
17세 때 과거공부 이외에 어찌 경세지학(經世之學)이 없겠는가 하고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기 또래의 청년들을 사귀었다.
1877년 아버지 상을 당한 뒤
1879년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혼인하고
평안남도 삼등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1880년 경기도 광주로 가서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에게 고문(古文)의 학(學)을 배우고,
정약용의 정치·경제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는데
이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2년 7월 서울에서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時務策)을 지어 바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평안남도 영변 산중에서 질박한 생활을 하면서 오직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
1884년 태천의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박문일은
17세기초 관서지방의 명유(名儒)였던 선우협(鮮于浹)의 학풍을 이은 학자로,
박문일 형제와의 사제관계는 일생을 통해 돈독히 지속되었다.
1885년 향시에서 특선(特選)으로 뽑히고,
1888년 민영준(閔泳駿)의 추천으로 숭인전참봉(崇仁殿參奉)이 되었다.
1892년 민병석(閔丙奭)의 추천으로
동명왕릉참봉(東明王陵參奉)으로 자리를 옮겨 황해도 중화군에 거주했다.
이 시기에 주자학을 깊이 연구해 유학자로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농민전쟁은 동비(東匪)들의 반란이고,
갑오개혁은 사설(邪說)이라는 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아
벼슬을 그만두고 강원도 원주군 주천으로 옮겨 은거했다.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이 붕괴된 1896년 2월 이후 상경한 뒤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에 충격을 받고
동서 각국의 신서적을 우연히 읽어본 다음
세계의 대세와 시국(時局)의 정형(情形)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변통경신(變通更新)해야 나라와 백성을 보전할 수 있다고 깨달아
위정척사파 유학자로부터 개화자강파 사상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무렵 노·장·양·묵·신·한(老莊楊墨申韓)의 학설과
불교·기독교의 교리를 섭렵하게 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11월 17일 진신(晉紳)들이 참가하는 만민공동회에서
문교부문의 일을 하는 한편 민족사 연구와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898년 9월 장지연(張志淵)·남궁억(南宮檍)·유근(柳瑾) 등이 창간한
〈황성신문〉으로 개제(改題)해 간행하자 장지연과 함께 주필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후
1900년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經學院)의 강사가 되어 경학을 강의하고,
관립한성사범학교(官立漢城師範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이무렵 개화자강사상으로 전환하던 시기의 글을 모은 〈겸곡문고 謙谷文稿〉와
교육 및 종교 문제를 논한 〈학규신론 學規新論〉을 저술·간행했다.
당시 그의 사상은
동도서기론적(東道西器論的) 요소가 짙어
신학문 중에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은 배워야 하지만
공자·맹자의 서(書)는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교교육을 전국적으로 더 보급할 것을 주장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황성신문〉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국민들에게 자주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다가
한때 일본헌병대에 구금되었다.
1904년 7월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주필이 되어
대한제국정부의 취약성과 일제의 잔혹함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일제가 무력위협으로 체결한 조약의 진상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을사조약 규탄으로 정간되었던 〈황성신문〉이
1906년 2월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물러나자 〈황성신문〉이 주필로 자리를 옮겨
191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주필로서 활동했다.
을사조약 이후 그는 급속히 동도서기론적 요소를 떨쳐버리고
변법적 개화자강사상가로 전환했다.
이제부터라도 전민족이 분발해서 급속히 근대적 실력을 배양해
국권회복의 장기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보고
국권회복 역량을 기르기 위한 각 부분의 대대적 개혁을 주창하고,
전 민족에게 "회개적(悔改的) 사상과 분발적(奮發的) 기상"을 가지고
국권회복을 위해 "고심혈성(苦心血誠)으로 배양실력"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부터는 자기 학문의 뿌리였던 구학문을 공공연히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위정척사사상과 유림(儒林)을 공격하고 신학문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서양의 사회진화론·계몽사상·과학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정약용과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을 높이 평가했으며,
중국의 경우는 량치차오[梁啓超]의 주장이 중국을 구하는 방책이라고 이를 소개했다.
유교에 대해서도
제왕(帝王)의 편에만 서고 민중을 등한시한 지리한만(支離汗漫)한 주자학이 아니라
간이직절(簡易直截)한 양명학(陽明學)으로 개혁해 새로운 시대의 신학문에 적용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상 전환을 겪으면서
1906년 이후 광범위한 부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3월 장지연·윤효정·윤치호 등이 대한자강회를 창립하자
가입해 활동하면서 〈대한자강회월보〉에 많은 애국계몽 논설들을 발표했다.
10월에는 신석하(申錫廈)·김달하(金達河)·김병도(金秉燾) 등과
함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해
평의원(評議員)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서우 西友〉의 주필을 맡아 국민을 계몽했다.
이당시 계몽사상의 교육을 위해 학교설립과 함께
사범(師範) 양성이 긴급함을 절감하고
1907년 1월 서우학회 산하에 사범속성과(師範速成科) 야학교(夜學校)를 설립해
25~40세의 청년들을 모집하고 애국적 교사들을 양성했다.
1907년 2월 지석영 등이 국문연구회를 조직하자
주시경·양기탁·유일선(柳一宣)·이종일(李鍾一) 등과 함께 연구원으로 참가해,
전국민교육·의무교육 실시와 이를 위한 한글전용 교육을 주장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이동휘 등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창단하자
여기에 가입해 주로 교육·출판 부문에서 활동했다.
1908년 1월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가 이준·이동휘 등이 조직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되어
서북학회(西北學會)로 창립되자
기관지인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직접 잡지를 편집하고 다수의 애국계몽 논설을 게재했다.
또한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와 오성학교를 설립해 교장이 되었다.
일제가 친일유교단체인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내세워
유림계 전체를 친일화하려 하자
1909년 9월 이범규(李範圭)·장지연 등과 함께
대동사상과 양명학에 입각해 유교를 개혁함으로써 유림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동원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교(大東敎)를 창시했다.
1909년 제왕 중심의 지배자 철학인 유교를 공자의 대동주의와 맹자의 민본주의로 환원시켜
민중 중심의 유교로 개신해야 하며, 유교도 불교·기독교처럼
전도 특히 민중의 교화에 힘을 써,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으로 후진을 가르쳐야 한다는
〈유교구신론 儒敎求新論〉을 지었으며,
1910년에는 양명학으로 유교를 개혁하기 위해 〈왕양명실기 王陽明實記〉를 저술했다.
또한 민족 고전을 간행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유근·최남선 등과 함께 광문회(光文會)를 조직했다.
한편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하면서도 의병전쟁을 비판하지 않고
'연무제진'(聯武齊進)이라 해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연계(聯繫)해 나란히 전진시킬 것을 주장했다.
당시의 의병운동을 최고의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과 백성들을 한국의 인물로 소개해
간접적으로 의병운동을 지지하고 고취했다.
그는 한일합병과 동시에 여러 언론기관이 문을 닫고 모든 국사 서적이 압수되자
"국체(國體)는 수망(雖亡)이나 국혼(國魂)이 불멸(不滅)하면 부활(復活)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국사책(國史冊)마저 분멸(焚滅)하니 통탄불이(痛嘆不已)라",
"일언일자(一言一字)의 자유가 없으니 오로지 해외로 나가서 사천년 문헌을 모아
편찬하는 것이 오족(吾族)의 국혼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하며 망명을 계획했다.
1911년 3월 부인 연안이씨가 병으로 죽은 뒤,
4월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 환인현(桓仁縣) 흥도천(興道川)으로 가서
대종교(大倧敎) 신도로서 후에 제3대 교주를 지낸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 대종교 신도가 되고
직접 만주 고토(故土)의 고대사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한국고대사와 관련된 〈동명성왕실기〉·〈발해태조건국지〉·〈몽견금태조 夢見金太祖〉·
〈명림답부전〉·〈연개소문전〉·〈대동고대사론〉 등을 저술했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1912년 3월부터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인 지사를 만나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했다.
이해 7월 상하이에서 신규식(申圭植)·홍명희(洪命熹) 등과 함께
교민의 상조단체인 동제사(同齊社)를 조직해
총재로 추대되고,
교민자제의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했다.
1914년 5월 중국인 친우들의 요청으로
홍콩의 잡지 〈향강 香江〉의 주간을 맡았으나,
4호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폐간되었다.
다시 상하이로 가서 캉
유웨이[康有爲]의 부탁으로 〈국시일보 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으나,
이 신문도 곧 폐간되고 말았다.
이때 대원군 집정에서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도입해 저술한 〈한국통사 韓國痛史〉를 완성했다.
〈한국통사〉는
해외의 한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 독립운동을 고취했으며
국내에도 비밀리에 보급되었다.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이상설(李相卨)·신규식(申圭植)·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단체로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취지서(趣旨書)와 규칙을 만들었으며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후 다시 상하이에서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1918년 러시아령 교민들의 요청으로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쌍성자(雙城子)에 머물며
〈한족공보 韓族公報〉의 주간이 되었으나,
곧 폐간되자 러시아령에 머물면서
〈발해사〉와 〈금사 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 李儁傳〉을 썼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자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 그 지도자가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조직된 지 불과 수개월 만에 단원이 수천 명이 되었고,
대표 5인을 서울에 파견해
강우규(姜宇奎)의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 폭탄투하사건,
이발(李發)의 자결사건 등을 일으켰다.
1919년 8월 상하이로 돌아온 뒤에는
원로로서
뒤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지원하면서,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의
한민족의 독립투쟁사를
시작해 1920년 12월 간행했다.
〈한국통사〉가
한국인들에게 '지통심'(知痛心)을 자각케 해
구국의 정신을 결정(結晶)해 내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지통심을 혈투로 전환시켜
실전(實戰)과 행동을 직접적으로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뒤에도 임정을 적극 후원하면서,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뒤에서 신한청년단의 기관지인 〈신한청년보〉의 주간과
〈사민보 四民報〉·〈구국일보 救國日報〉의 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상하이 거류민단의 활동을 지도했다.
상해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사실 등을 비롯해
사상·운동노선·지방색 등의 여러 문제들로 내부 분열이 격화되기 시작하자,
1921년 2월 독립운동노선의 통일과 임시정부의 개조에 의한 강화를 목적으로
원세훈(元世勳) 등 13명과 함께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내고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 제의는 베이징[北京]의 박용만·신숙·신채호 등의 북경군사통일회와
만주 및 러시아령의 독립운동가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어,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파·개조파·중립파·임정고수파 등으로 분열되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자,
〈독립신문〉을 지속하기 위해 1924년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4년 6월 임시정부 의정원이 이승만대통령유고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하자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이를 수락했다.
1925년 3월 21일 임시정부 분쟁의 원인이었던
위임통치청원과 구미위원부 자금의 자의적 사용, 한인사회 파쟁 선동 등의 책임을 물어
임시대통령 이승만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3월 23일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고,
24일 의정원에서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3월 30일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신설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책임제로 바꾼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했고,
개정된 신헌법 하에서 7월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천해 선출하게 한다음,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병석을 지키고 있던 안공근(安恭根)에게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해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疏)의 별이 없어야 된다"는
동포에게 드리는 유촉(遺囑)을 남겼다.
1925년 11월 1일 67세를 일기로 죽자,
11월 4일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이 치러졌으며,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공동묘지 600번지에 안치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대표적 저작인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역사적 사실의 발달과정을
인과관계의 면에서 분석·비판·종합해가는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통해
일제의 침략과정을 폭로한 것으로
국민들이
이 책을 읽고 민족정신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서술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가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국교·국학·국어·국문·국사 등
내면적·정신적인 혼(魂)과
전곡(錢穀)·졸승(卒乘)·성지(城池)·선함(船艦)·기계(機械) 등
외형적·물질적인 백(魄)이 필요한데,
혼이 따르지 아니하면
백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민족이나 국가의 혼은
특히 그 나라의 역사에 담기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가 존재하는 것에는
국혼이 존재하고
국사가 존속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고유의 종교·역사·언문·풍속 등 국혼이 멸하지 않으면
비록 한때 열강에 병합되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 민족은 인재의 배출, 문물의 제작에서 다른 민족보다 훨씬 뛰어나며,
한국 문화는 일본보다 선진의 위치에 있으며,
한국의 국혼은 강해 결코 일본에게 동화될 수 없다고 했다.
독립투쟁,
특히 거족적인 3·1운동을 통해
이러한 확신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당시 일제는 대륙침략 정책으로
중국민족과 러시아 국민, 세계 민의(民意)의 적(敵)이 되어 있으므로
일제의 패망과 함께
우리 민족의 광복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예견했다.
요컨대
박은식은 민족사를 통해서 민족혼을 진작하고,
이 민족혼의 유지 속에 민족의 독립을 전취하려 한 것이었다.
첫댓글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몰랐던 사실들에 대하여 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