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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이미 15. 쩌런이라는 차이나타운 1의 글에서 짜땀 대성당(Nhà Thờ Cha Tam)을 소개하면서 그와 그의 동생 응오 딩 뉴(Ngô Đình Nhu, 1924~1963)가 이 성당에 있다가 한밤에 암살을 당할 뻔하고 사이공 중심지로 돌아가는 길에 살해당했다고 말 한 바 있다. 맞다. 그는 그렇게 죽었다. 그의 암살 계획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사실 1961년 무렵은 남베트남으로서는 호기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면서부터 베트남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적극적인 미국의 개입과 결의는 남베트남 국민과 남베트남군을 고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군들은 본격적으로 남베트남군 장교들에게 대 게릴라전 교육을 실시하면서 베트콩(남베트남에 침투해 있는 인민해방전선) 전술에 대응하는 훈련을 강화하고 헬기, M113 APC(Armored Personnal Carroer, 병력수송 장갑차) 등의 신 장비를 보급하였다. 전장에서 새로운 장비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헬기를 보는 베트콩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데 급급하였다. 무장 헬기의 공중사격에는 엄폐를 취할 수도 없었고 신속한 공중기동으로 어느 틈엔가 자기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APC의 효과도 마찬가지였다. 야지에서의 신속한 기동력은 베트콩을 압도하였다. 마치 토끼몰이 식으로 베트콩들을 추격하면서 사격을 가하였다.
남베트남군의 사기가 점점 진작되기 시작하자 남베트남군과 농부들 간의 신뢰관계도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베트콩들의 귀순자도 1961년도에 비하여 3배로 늘어났다. 디엠이 내정을 개혁하고 전 국민과 군대가 일치단결하여 나간다면 승리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정치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디엠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가는 가운데 1960년 11월 11일 공수부대 지휘관을 역임했던 부옹 반 동(Vuong Van Dong) 대령이 쿠데타를 기도하였다. 동 대령이 독립궁을 포위하자 디엠은 협상하자고 시간을 끌면서 은밀히 사이공 근교에 있는 7사단장 트란 티엔 키엠(Tran Thien Khiem)에 지시하여 쿠데타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 이후 디엠은 쿠데타의 불안에 싸이게 되었고 명망 있는 장군들을 의심하였다. 그러던 중 1962년 2월 22일 두 공군 조종사가 디엠 권력의 상징인 독립궁(통일궁 이른 전 이름)을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시 한 번 디엠에 대한 군부의 불신이 노출되었고 단결된 남베트남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디엠에게는 공산주의와 대결에서 승리하는 문제는 뒷전이었고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대로 군부는 분열시켜 통치해야 했고 하급 장교의 임명으로부터 군사 작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통제하여야만 했다.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군부의 실권을 줄 수가 없었다. 4명의 군단장은 직접 통제해야 했고 지역 사령관인 군단장이나 사단장도 지역 내에 있는 성장(省長, 중령, 대령의 현역 장교)을 지휘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결과 촉망받는 장군들이 주요 보직에서 거세되었다. 반 민 장군은 제네바 협정 이후 사이공 지역 담당 지휘관이었다. 그는 디엠의 권력투쟁 기간에 디엠의 반대세력을 제압하는데 수훈을 세워 1957년에 소장으로 진급되었던 인물이다. 당시 남베트남군 참모총장인 레 반 티(Le Van Ty) 장군의 다음 서열이었다. 두옹 반 민은 군과 국민에게 인기가 있었고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되자 특히 고 딘 누가 싫어하기 시작하였다. 남베트남 내에는 두 사람의 영웅은 필요 없었다. 민을 실권이 있는 지위에 둘 수는 없었다. 육군 야전사령부를 민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실권은 없었고 고작해야 1군단, 2군단 지역 부대검열이나 지도방문을 나가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직책이었다.
그리고 민 다음으로 명망 있는 제1군단장이었던 트란 반 돈(Tran Van Don) 장군, 그 역시 지휘권이나 책임은 없고 예하부대 지도방문이 유일한 할 일이었던 육군사령부에 임명을 했다. 또 하나의 명망 있는 장군인 레 반 킴(Le Van Kim)은 동 대령의 쿠데타 기도 시 육사교장이었으나 쿠데타에 연루되었다 하여 체포되어 조사받은 적이 있었다. 결국 민, 돈, 킴의 세 장군은 1963년 11월 1일 쿠데타의 3주역이 된다.
이렇다보니 장교들 간에는 전투보직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성장, 군수, 군수지원 부대 등의 직책이 인기 있는 보직이었다. 유능하고 성실한 장교보다 야심이 강하고 부패한 장교들이 득세할 수 있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보다 못한 미국이 디엠의 동생 고 딘 누를 제거하려 했지만 그는 미국의 압력에 미국을 제외하고 하노이와 직접 협상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역으로 놓았다. 이러한 디엠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하는 반정부 운동을 주도한 계층은 불교도들이었다.
하찮은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1963년 4월 디엠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종교 행사에는 남베트남 국기를 제일 높게 게양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디엠의 형 뚝(Thuc)의 주교 취임 25주년 행사에서는 제대로 지켜졌다. 그러나 후에(Hue)의 초파일 행사에서 불교도들은 종교행사까지도 간섭한다고 하여 불교기만을 게양하였다. 부(副)성장이 국기 게양을 강력히 종용하자 불교도들은 데모로 맞섰다. 최루탄으로 진압이 실패하자 발포를 하여 9명이 죽고 14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불교도들은 불만이 많았다. 인구의 15%밖에 되지 않는 가톨릭 교도들이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장교도 반 이상이 카톨릭 신자였다. 고위 공직자들이 계속해서 가톨릭으로 전향하였다. 디엠의 강경정책에 대한 불만과 함께 응어리가 져 있었다.
전 불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관련자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당국은 이를 거절하고 사상자가 생긴 것은 베트콩들이 수류탄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5월 30일부터 사이공과 후에를 포함한 주요도시에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학생들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6월 11일 사이공에서 틱 쾅 둑(Thich Quand Duc) 승려가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하였다. 미 신문기자가 이 극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보도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여기에 이 사건을 “승려들의 바비큐”라고 표현한 마담 누의 표현까지 곁들였다. 그의 남편 고 딘 누는 “승려들이 바비큐를 더 만들기를 원하면 휘발유는 기꺼이 공급해 주겠다.”고 한술 더 떴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6명의 승려와 1명의 수녀가 더 분신자살을 하였다.
틱 쾅 둑 승려의 분신 모습
계속되는 데모의 뿌리를 뽑으려고 누의 비밀경찰은 8월 21일 전국의 유명사찰을 수색하여 1,400여 명의 승려를 체포하였다. 이제는 대학생들 차례였다. 사이공 대학은 휴교조치 되었다. 전 사찰을 군이 점령하고 미국 기자들도 검열을 받지 않고는 기사 송고가 불가능해졌다. 결국 1963년 11월 1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이 정권은 붕괴되고 디엠과 누 형제는 사살되고 말았다. 지도자는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트란 반 돈(Tran Van Don), 레 반 킴(Le Van Kim) 장군들이었고 당시 5사단장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 대령과 공군의 C-47 수송 비행단장 구엔 카오 키(Nguyen Cao Ky) 중령도 쿠데타에 참여하였다.
케네디 정부조차도 디엠의 불교도 탄압을 완화하도록 요청하였고 1963년 9월 케네디는 지엠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었다. 미국의 지지를 확인한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미국의 국외추방 요구에도 불구하고 지엠은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즈엉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 취임하여 남베트남의 국가원수가 된다. 3주 후인 11월 22일 케네디가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암살되면서 미국의 대통령 직은 부통령 존슨이 떠맡게 되었다. 미국의 간섭을 피하려했던 민 장군은 중립화를 꾀했지만, 미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기반이 약했던 민 군부에서는 1964년 1월 30일 새로운 쿠데타가 일어나 응우옌 카인(Nguyen Khan)이 수상이 되었다. 1963년 12월 하노이 정부(북베트남)은 하노이 정부군의 남부 침투와 미군에 대한 직접 공격 등을 의결했다. 미국이 타격을 입으면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미국은 오히려 직접 베트남 문제를 떠맡는다. 바로 이것이 유명한 기로 1964년 8월 초 발생한 통킹만 사건이다.
이후 베트남 전쟁은 확대된다. 이 통킹 만에 대해서는 나중 따로 다루기로 한다. 아무튼 고 딘 디엠 정권이 붕괴된 후 혼미를 거듭하던 남베트남 정국은 1965년 6월 19일 명목적인 국가원수에 구엔 반 티우(Nguyem Van Thieu), 실권을 행사하는 수상에 구엔 카오 키(Nguyen Cao ky) 체제로 안정을 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남 베트남인들에게 키 수상은 인기가 없었다. 그 당시에 불교도들과 대학생들은 자기들이 디엠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자기들은 참여도 못하고 도외시된데 대한 불만으로 어떤 계기를 노리고 있었고 후에(Hue)와 다낭(Da Nang)에서 그들은 산발적인 소요를 일으켰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67년 9월 3일에 남베트남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티우와 키가 경합하였으나 키는 국민들에게 너무나 인기가 없었고 미국 측도 티우를 지지하여 티우가 대통령, 키가 부통령으로 입후보하였다. 대통령후보는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베트콩들의 방해공작으로 49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204명이 부상하기는 하였지만 투표율은 83%였고 티우가 35%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북폭은 물론 베트콩 지역에도 폭격을 중지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조건 없이 협상을 하겠다고 주장하였던 트롱 딘 쥬(Truong Dinh Dzu)가 의외로 17%를 득표하여 2위를 하였다.
트롱 딘 쥬는 공산주의자란 혐의로 결국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미국에서 야단이었다. 미 의회의원들이 방문하여 면담하고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덕분에 그는 자유스러운 형무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훗날 남베트남이 패망한 뒤 쥬는 미국에서 북베트남의 정보원으로 활동하다가 미국 수사기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스파이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은 지겹도록 계속 이어졌다. 월남 패망이 목전으로 닥친 1975년 4월,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전 국민의 힘을 결집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남베트남의 운명을 타개해 나가야 할 대통령 티우(Thieu)의 입장은 완전히 사면초가였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지역으로 계속 이동을 하면서 포위망을 죄어오고 있는 것과 같이 사면에서 티우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선전대로 두엉(또는 즈엉) 반 민(Duong Van Minh)이 집권하면 북베트남과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모두 생각하였다. 4월 18일에는 티우의 사임을 재촉하는 여러 가지 사건이 터졌다. 미 상원 외교 소위원회는 4월 11일 포드(Ford) 대통령이 의회에 요청하였던 7.22억 달러의 긴급추가 군사원조를 부결시켰고 미 국무부도 지금까지 남 베트남인에게 심리적 타격을 고려하여 유보했던 철수작전을 개시하도록 지시하였다. 티우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4월 21일 12:00 티우는 후옹(Huong) 부통령과 전 수상 키엠(Khiem)을 불러 헌법절차대로 후옹 부통령에게 대통령 직을 인계하고 사임할 것을 통고하였다. 그러나 티우는 민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하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대통령 직을 승계한 후옹에 대한 모두의 인식은 병약하고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인물은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옹의 생각은 달랐다. 민에게 인계하라는 성화를 외면하고 민에게 수상으로 입각하도록 교섭하였다. 민이 응할 리 만무한 일이었다. 4월 25일 키(Ky)는 탄손누트에서 지지 군중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이는 자기에게 대통령 직이 오지 않은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그리고 그도 떠나갔다.
후옹이 승계하자 북베트남의 태도는 한 술 더 떴다. 후옹은 티우의 일당이며 반동분자로서 후옹과는 어떤 협상도 있을 수 없으며 후옹과 티우 일당은 모두 물러나고 미국은 24시간 내에 전부 철수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소련, 프랑스, 임시혁명정부를 통하여 민이라면 협상 가능성이 있다고 계속 연막을 쳤다. 그런데 이미 사이공 공격을 시작한 북베트남의 방송은 사이공 정부와 그 군대를 철저히 섬멸하라고 말하고 있었고 합동군사반의 북베트남 측 대표는 협상전망 물음에 “우리 군대는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4월 27일 오전에 후옹은 사임을 결심하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19:30에 국방장관 돈, 비엔, 경제장관 하오가 현 상황을 보고한 후 두엉 반 민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민의 취임식은 4월 28일 17:00에 거행되었다. 취임연설에서 민은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고 말하고 즉각 휴전을 제의하였다. 취임식이 끝나자 탄손누트 공항에 북베트남군 항공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제 남베트남의 마지막 추태는 끝이 났다. 더 이상 추태를 부릴 수도 없었고 이제 제각기 살길을 찾아 남아있기로 하는 사람은 남고 남베트남을 떠날 사람은 미국에 매달려야 했다.
두엉 반 민은 4월 30일 남베트남 최후의 날 9시 30분 다음의 메시지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한다. “ 본인은 동포들을 대표해, 우리 베트남인들의 화해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 불필요한 유혈을 막기 위해 민족의 화합을 제의한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전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침착하게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나는 또 혁명군 전사들에게 사격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질서 있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이곳에서 임시 혁명정부를 기다릴 것이다.” 그 이후 우리가 익히 본 풍경이 펼쳐졌다. 오전 11시 정각. 북베트남군의 탱크 부대가 대통령궁 정문을 짓부수며 진입했다. 그 탱크가 지금도 통일 궁에 있는 것이다.
디엠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쥐었지만 북베트남과의 투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미국의 노여움을 사 정권을 잃은 바 있던 남베트남 최후의 대통령 두엉 반 민은 일어서서 북베트남군을 맞는다. 대개 역사는 승장을 기억하고, 승리의 순간을 기록한다. 하지만 항상 패장은 있었고 패망의 순간도 그에 따라붙는다. 그리고 때로는 빛나는 승리보다는 현명한 패배가 희생을 줄이고 이후 역사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항복 선언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기자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 없소. 인명을 구해야 하오.”라고 비통하게 토로하던 거한 (남베트남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180센티미터를 넘는 장신이었음) 두엉 반 민의 그날은 인생 가장 참혹한 날이었지만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날이기도 했다.
군사전문가인 두엉 반 민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그의 보좌관이었던 응우옌 흐 한 준장 역시 눈앞에 닥칠 결과를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밤새 짐을 꾸리고, 패망 당일 아침에는 미 대사관에서 함께 떠나자고 했지만 그는 대통령궁을 지킨다. 어쨌든 두엉 반 민 대통령과 응우옌 흐 한 준장은 패자였고, 역사는 승자를 중심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진실이 아주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이 그 긴 시간의 전쟁과 대립, 파괴를 딛고 빠르게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책임 있는 패자들의 공로가 깃들어 있다. 오늘날 베트남이 경제수도 사이공을 거점으로 다시 도약하게 된 것은 최소한의, 어쩌면 최대한의 책임감으로 사이공을 파괴와 의미 없는 유혈 참극, 상호 증오로부터 지켜냈던 이들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바로 이 점을 환기시키며 베트남의 반성과 새로운 도약을 요청하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보 반 끼엣 전 총리이다. 그는 미국과의 전쟁 시기에 사이공의 공산당 서기장을 맡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던 지도적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정부에 진출하여 1992년부터 98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이 기간에 그는 ‘도이머이(쇄신)’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바닥을 치고 있던 베트남의 경제를 일으켜 세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베트남 전 승전 기념일을 맞아 언론을 상대로 한 제일성은 ‘반성’의 필요성이었다.‘우리는 승전에 도취되었던 자만에 대한 대가를 그동안 충분히 치렀다. 이제는 제3세력을 포함하여 조국을 위해 싸웠던 모든 세력을 껴안고 다시 도약을 모색하여야 한다.’그가 말한 제3세력은 두엉 반 민 대통령과 응우옌 흐 한 준장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의 이 말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두엉 반 민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접수할 당시에 그들이 남겼던 유명한 어록이 있다. ‘우리가 이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이 진 것도 아니다. 우리 민족이 외세를 이긴 것이다.’ 보 반 끼엣 전 총리는 바로 이 정신으로 차분히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고 딘 디엠 정권하에서 육군소장으로 폭력단 토벌 등에서 공을 세웠고 반(反) 고 딘 디엠 세력을 규합한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1964년 장군 구엔 칸이 주도하는 쿠데타에 의해서 퇴진했던 그는 남베트남 최후의 대통령으로서 그로서는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
그 후 그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베트남의 자택에서 연금생활을 하다 1983년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말년을 보냈다. 2001년 사망한 후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 휘티어 로즈 힐 공원묘지에 안치되었다. 통일궁 옥상에 있는 언제고 뜰 수 있었을 헬리콥터가 인상적이다. 통일 궁에서 시내로 곧게 뻗은 레주언 거리. 그는 베트남 통일 이후 1대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역사는 승자에게 길이 남을 이름을 남겨준 것이다. 통일 궁에 얽힌 정치 비사는 정치가의 포퓰리즘과 민중들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이 결합할 때 어떤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을 선동하거나, 민중에 끌려 다니며 이들의 무절제한 요구에 영합하려는 지도자가 많을 경우 국가는 쇠락 할 수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