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일본 학자들은 평양 정백동에서 「夫租丞印(부조승인)」이라고 적힌 봉니(진흙 도장 자국)를 발견했습니다. [1]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942972)
일본 학자들의 주장:
그들은 이를 식리(식민지 행정)의 증거로 삼아, “거리가 먼 함흥 지역의 ‘부조현’ 관리가 평양(낙랑군 치소)까지 와서 보고를 올렸거나, 낙랑군의 행정력이 옥저 지역 깊숙이 미쳤다는 증거”라며 한사군의 한반도 지배를 부각하는 논리로 활용했습니다. 이때 이 글자는 의심 없이 ‘夫(남편 부)’로 판독되었습니다.
이후 1958년 북한 평양에서 똑같은 자형이 들어간 「부조예군(夫租薉君)」 은인이 발굴되면서 논쟁이 다시 불붙었습니다. 이때 한·중·일 고문자 학자들 사이에서 글자의 모양이 이상하다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夫(부)’가 아니라 ‘夭(요)’ 아닌가?:
도장에 새겨진 글자를 보면 첫 획이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일본 고문자학의 기여:
중국과 일본의 일부 서체·금석학 전문가들은 전한(前漢) 시대 목간(간독)이나 마왕퇴 한묘 출토 백서 등의 예서체 자형을 비교하며, "이 글자는 고대 서체상 ‘夫’가 아니라 ‘夭’ 또는 ‘宎(깊숙할 요)’의 약자로 보는 것이 문자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기술적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즉, 기록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는 고문자학적 근거를 제공한 셈입니다."
"부조(夫租)’가 아니라 ‘요조(夭租)’가 맞다고 처음 문제를 제기한 대표적인 일본 학자가 바로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지내굉, 1878~1952)입니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일제강점기 당시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지내며 이른바 ‘만선사관(만주·조선의 역사 통합주의)’을 정립한 대표적인 관학자이자 식민사학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사료 비판과 문헌 고증을 중시하는 실증주의 계열의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와 일본 학계가 이 문제를 제기한 학술적 맥락과 의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 평양 낙랑 무덤군에서 「夫租丞印(부조승인)」 봉니가 출토되었을 때 대다수 학자들은 『한서』 지리지의 기록대로 이를 ‘부조(夫租)’라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케우치 히로시는 당나라 시기 문헌인 『한원(翰苑)』 번이전(蕃夷傳)에 인용된 옛 『한서』 지리지 구절을 치밀하게 고증해 냈습니다.
그의 발견:
후대 문헌에는 ‘부조(夫租)’로 되어 있으나, 고형(古形)을 보존하고 있는 『한원』 내부 인용문에는 명백히 ‘요조(夭租)’로 표기되어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자형 분석:
전한(前漢) 시대의 거친 예서체나 나무·대나무에 쓰인 목간 자형을 볼 때, 윗부분이 삐쳐 있는 ‘夭(요)’ 자를 후대의 문헌 편찬자들이 지평선 모양의 ‘夫(부)’ 자로 착각하여 잘못 베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케우치 히로시가 던진 이 ‘요조 설’은 이후 고문자학의 발전과 함께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유물의 재판독:
1950년대 이후 북한 평양에서 발견된 「夫租薉君(부조예군)」 은인을 중국과 한국의 고문자학자들이 다시 정밀 분석한 결과, 이케우치의 지적대로 실제 도장에 새겨진 글자가 ‘夫’가 아니라 서체상 ‘夭’임이 완전히 증명되었습니다.
식민사학의 극복:
오늘날 한국 학계는 이케우치가 도출해 낸 ‘요조(夭租)’라는 자형 고증은 학술적으로 수용하되, 그가 주장했던 "낙랑군이 옥저 지역을 완전히 군현으로 직접 지배했다" 는 식민지적 해석은 배격합니다. 대신, 옥저라는 독자적 정치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나라의 명목상 행정 편제(요조현)와 외교적 타협(예군 도장 하사)이 이루어진 맥락으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夭租(요조) 설이 소수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다가, 한국에서는 이병도 夫租(부조) 설이 강하다 보니, 夭租(요조)라고 표현하는 글을 보기 힘들죠.
결론: 30년대 일본 학자 글이나 보는게, 10배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