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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의 생명
혼은 사람의 자각(自覺)이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성을 느끼는 이것이 바로 혼이다. 혼은 우리 인격이 자리 잡고 있는 기관이며 우리 인격에 포함된 모든 것, 곧 우리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다. 우리의 지력(智力), 생각, 사상, 자극에 대한 반응, 판단력, 의지 등은 혼의 각 기능들이다 인격에 내포된 모든 것이 다 혼에 속한다. '마음'은 인간의 참 '나'를 대표하기 때문에 성경은 자주 '마음'과 '혼'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혼은 우리의 마음이고 우리의 '참 나'이다. 성경은 또한 사람에게 혼만 있는 것처럼 사람을 '혼'이라고 칭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장 5절의 '사람'이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혼'이다. 성경에 '혼'을 사람으로 대신한 곳이 셀 수 없이 많다. 이것은 혼이 바로 인격과 인격 안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떤가를 알려면 그의 인격이 어떤가를 보아야 한다. 사람의 존재와 특성과 생명 등은 모두 혼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의 혼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혼에는 혼의 지력과 애정과 의지와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뿐 아니라 혼 생명도 있다. 이 생명은 인간의 생명, 곧 사람의 타고난 생명이다. 성경에는 혼을 생명과 통용하여 혼을 생명으로 번역한 곳이 많다. 예를 들면 레위기 17장 11절의 '생명'과 계시록 12장 11절의 '생명'은 원문에서 다 혼이라는 단어이다. 이렇게 쓴 이유는 원문에서 혼과 혼 생명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 안에 포함된 모든 요소는 혼 생명 안에 포함된 모든 요소이기도 하다. 지력과 애정과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들을 포함한 이 혼 생명이 바로 사람의 타고난 생명이다.
혼과 육신의 혼합
먼저 우리는 혼과 육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는 우리 죄의 본성이고(이것은 육체의 정욕을 가리킴) 혼은 우리의 생명이다. 우리의 새 생명과 새 본성을 말할 때 우리는 생명과 본성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생명과 본성은 구별된다. 생명은 비교적 본성보다 큰 것이다. 모든 생명에는 그 생명 나름대로의 본성이 있다. 본성은 바로 생명의 자연적 원칙이요, 생명의 취향과 애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생명은 혼이었고 우리의 본성은 육체였다. 우리는 혼을 따라 살았으며, 생명의 취향과 애호도 역시 육체를 좇아 육체대로 행했다. 더 분명히 말해서 사람의 행함을 결정해 주는 것은 육체이고, 그 결정대로 행하도록 능력을 주는 것은 혼이다. 육체는 뜻을 내는 죄의 본성이고, 혼은 능력을 제공하는 생명이다. 육체는 비평하고 결의하며 혼은 집행한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상태이다.
믿는 이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생명을 그에게 넣어주셔서 그의 영을 살리신다. 이 새 생명은 그분의 본성과 함께 온다. 이로써 믿는 이는 두 생명 - 영과 혼의 생명 - 과 두 본성 - 육체와 하나님의 본성 - 을 소요하게 된다.
옛 본성과 새 본성, 이 둘은 서로 합하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연합할 수도 없다. 새 것과 옛 것은 날로 싸워서 서로 온 존재를 다스리려고 한다. 이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 아이이며 육신에 속한 자이다. 이때 그는 이때까지와는 달리 승패가 교차됨으로써 고통을 겪는다. 나중에 그가 십자가의 구원을 알고 그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이 죄의 본성을 이길 수 있게 되고 육체가 죽은 것처럼 잠잠하여 육체에 의해 해를 받지 않는다. 그의 육체 - 죄의 본성 - 가 못 박혔기 때문에 그는 죄를 이길 능력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롬 6:14)는 약속을 체험하게 된다.
이처럼 믿는 이는 죄가 그들의 발아래 있고 육체의 정과 욕심이 그들을 사로잡을 수 없는 경지에 들어선다. 이때 믿는 이는 자신이 온전히 신령해졌다고 착각한다. 그는 자기와 동시에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죄에 매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해 하며 자신은 완전한 경지에 곧 영적 생명의 최고봉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신령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지로 그는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고 또 거리도 멀다. 이러한 단계에 있는 믿는 이들은 혼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혼에 속한 그리스도인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십자가의 역사로 믿는 이의 육체 - 죄 된 본성 - 는 이미 못 박혔으나 그의 혼 생명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범죄가 육체에서 나오고, 혼은 그것의 명령을 다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혼은 아담에게서 유전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더러운 것이 아닐지라도 아담의 타락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이것은 타고난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과는 다른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더러운 육체는 이미 죽었지만 그의 혼은 여전히 그의 삶의 능력이다. 비록 그의 죄의 본성은 못 박혔을지라도 자아의 생명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혼에 속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죄의 본성(육체)은 못 박혔지만 혼은 여전히 사람의 삶의 능력이다. 이제 하나님의 본성이 죄의 본성(육체)을 대치하였기 때문에 그의 모든 취향과 애호와 주장은 다 선하고 전과 같이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 새 본성을 집행하는 주장과 애호는 이전의 혼 생명과 다를 바가 없다.
이 혼 생명에는 생각과 감정과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과 의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기관들(생각 등을 가리킴)은 사람이 날 때부터 있다. 그러므로 혼생명으로 영의 주장을 집행하는 것은 타고난(세상적인 힘) 힘으로 초자연적인(하나님에 속한) 선을 이루려는 것과 다름없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자아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믿는 이의 상태로는 이미 죄를 이겼지만(부정적인 면), 의를 행하는 것(긍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직 어리다. 그러므로 이때의 위험은 자기 속에 있는 영의 생명(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발전시켜서 이 영의 생명의 능력으로 새 본성의 모든 명령을 집행하려 하지 않는 데 있다. 사실상 이때 그의 영적 생명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어린아이 상태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본성 안에 있는 그분의 모든 미덕을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이들은 타고난, 혼에 속한 능력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분의 요구 조건을 이행하려고 한다. 이러한 행함과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의 혼합이다. 이것은 하늘의 소원을 땅에 속한 능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이러한 행함은 여전히 영에 속한 것이 아닌 혼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혼의 체험이 다 악하고 더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육체(죄에 대한 본성 방면의 육체를 가리킴)에서 비롯된 것은 다 더러운 것이고 죄에 속한 것이나 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혼 생명은 원래 가지고 있는, 우리를 산 생물이 되게 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죄스러운 본성(육체)에 떨어질 때 그 행함과 생각이 다 죄악에 속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 출생 할 때 가지고 있던 것들 - 선량함과 인내와 사랑과 온유 등이 있다. 이 선한 미덕은 생명과 더불어 온 것이며 혼 생명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은 육체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미덕들을 나타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육체가 그렇게 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본래의 선한 미덕들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많이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인의 육체가 못 박힌 후에 따르는 또 하나의 위험은 바로 혼 생명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새 본성의 뜻을 행하려는 데 있다. 이것이 평소 우리가 말한 자아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그것이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어떤 미덕들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야기된다. 믿는 이는 '자아를 사용하는' 그 방법이 효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이제 영적 생명의 성장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혼의 힘으로 행한 것이므로 비록 그것이 좋다 할지라도 여전히 혼에 속한 것이다.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분별하는 법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아주 길다. 그러나 여기서는 간단히 말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거듭날 때 속에 두 생명(혼의 생명과 영의 생명)과 이 두 생명의 두 본성(육체와 하나님의 본성)을 가졌다. 또한 우리는 이 두 본성 중 하나인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다른 하나인 하나님의 본성에게 온 존재를 다시를 권한이 주어졌음을 보았다. 이로써 두 본성에 관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영의 생명과 혼의 생명이 우리 안에 동시에 살고 있다. 영의 생명 그 자체는 아주 강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혼의 생명이 오랫동안 운행하여 온 존재를 다스려왔기 때문에, 사람이 기꺼이 혼 생명의 부인하고 영의 생명이 그 안에 운행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의 영적 생명은 결코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곧 그의 영 안에 성령께서 운행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자기 영 안에 인격을 가지고 계신 성령께서 거하시게 하고, 성령께서 주신 생명이 그의 모든 행함의 능력이 되게 하는 사람이다. 그가 생활하는 원칙은 더 이상 생각과 감정의 지배와 영향을 받지 않고, 견고하게 영 안에 사는 것이다.
반면, 혼적인 그리스도인은 그 반대이다. 비록 그에게 영적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영적 생명에서 얻은 생명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혼을 그 생명으로 취하고 생각의 자극에 의해 지배받거나 영향을 받는다.
완전히 혼에 속한 사람
성경은 혼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을 했다. 성경 말씀은 사람의 체험과 자주 일치된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은, "육(원문에서는 혼임)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한 '혼에 속한 사람'들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혼에 속한 사람들의 결함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비록 여기서는 거듭나지 않은 혼에 속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지만 거듭난 혼에 속한 믿는 이들도 체험에서는 그들과 같다. 혼에 속한 사람들은 혼의 다스림을 받아 혼이 영을 억압한다. 이들은 영에 속한 사람과 상반된다. 비록 이러한 사람들은 비상한 지력을 갖고 있어서 놀라운 이상(理想)과 이론을 이루는 사상을 구사해 낼 수 잇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일에 대해서 그들은 조금도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혼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비록 한두 마디를 안다 하더라도 책에서 얻은 지식이나 머리로 얻은 것일 뿐이다. 그 사람 자신은 성령을 통해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분별하는 능력 -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 - 조차도 없다! 그들의 지식은 다른 사람의 말을 기억해 낸 것이거나 자신이 추리해 낸 것이다. 그들은 직접 성령에게서 계시를 얻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 사람의 사상과 얼마나 다른지!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지력과 이성을 만능이라고 생각한다. 두뇌로써 세상의 모든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이것은 헛된 것들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들 생각 속에 있는 지력으로 어떤 이해를 얻기 위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깊은 것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신다.
야고보서 3장 15절은 혼에 속한 어떤 지혜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이러한 혼적인 지혜는 혼에 속한 믿는 이들에게서 나온 것이요, 혼 안에 지력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고 해석한다. 믿는 이들은 거듭난 후 그들의 새로운 지식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대해 가졌던 그들의 이해가 아주 어리석었다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시의 영'을 자신들 안에 주셔서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도록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한다. 이럴 때 믿는 이들은 대부분 어리석고 조급해서 부지런히 자기 두뇌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오랫동안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지혜는 혼의 힘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혼에 속한다. 이 혼에 속한 지혜의 기능은 대부분 사람을 비평하고 판단하는 근거이기 때문에 사도는 혼에 속한 지혜는 사람의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약 3:14)이 있게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영에 속한 지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 3:17). 영 안에 있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는 그 동기에 있어서 부정하게 품은 마음이 없이 깨끗하고, 실천에 있어서 분쟁하는 일이 없이 화평하다. 이 지혜는 성질에 있어서 관용하고 양순하며 자비로우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편벽과 거짓이 없으며, 그 결과에 있어서는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이것은 혼에 속한 것과 얼마나 다른지! 많은 종파들과 분열, 분파들을 산출하는 데 원인이 되었던 논쟁들이 '진리를 위해 증언한다'는 명목 하에서 발전되었다! 혼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을 과장하여 분열을 조장하고,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사분오열되게 만든다.
유다도 이러한 간증을 했다.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원문은 혼임)에 속한 자며,"(유 19) 유다의 이 말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을 짓는 일은 혼에 속한 믿는 이들 가운데에도 더러 있다. 혼에 속한 믿는 이들의 특징은 바로 그들이 자주 당을 짓고 분쟁하는 일을 주동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신앙이 같지 않다는 말이다. 영에 속한 믿는 이들과 혼에 속한 믿는 이들이 차이가 있는데, 전자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 해서 자신을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과 분리하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할 때 즉시 다른 사람을 거절한다.
영과 혼이 혼합된 믿는이의 특징
영과 혼이 혼합된 믿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상에서 말한 혼에 속한 사람들은 완전히 혼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어떤 믿는 이들은 그들보다 좀 진보적이다. 그들은 이미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육체를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좇아 행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미 영적인 생활의 귀함을 들었고(한 두 차례) 영적 생명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십자가와 성령의 더 깊은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고난 생명(혼)이 그들의 삶의 능력을 공급해 주기를 바라며산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혼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 속해 있는 믿는 일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사가 가득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사와 '삼층천' 같은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굉장히 높게 보고(이것이 그들 마음 깊이 감추어져 있음) 자신을 비할 데 없는 신령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영과 혼이 혼합되어 있는 혼에 속한 사람인 줄은 모른다.
영과 혼이 혼합된 믿는 이들은 지식에서는 영에 속하나 실재에서는 혼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부류의 믿는 이는 영과 혼이 하나로 혼합되어 그의 혼은 육체(죄의 본성)에서 분리되었으나 그의 영은 아직도 혼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과거 그가 육체에 속할 때 그의 혼이 육체와 긴밀이 연합되었듯이(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그 생명의 본성임) 이제 그의 영은 그의 혼과 연합되었다(하나는 주장을 내고 하나는 능력을 냄). 본래 몸은 혼의 외곽이고 혼은 영의 외곽이었다. 우리는 혼이 영적 외곽으로서 영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영이 자주 혼의 영향을 받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혼은 생각과 감정과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기능과 의지 등을 포함한다. 영은 혼 안에 메몰 된 것처럼 혼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자주 생각과 자극의 영향을 받는다. 거듭난 사람은 본래 영 안에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있다. 그러나 영과 혼이 아직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영 안의 평강과 안정을 잃어버린다. 혼은 때때로 기쁨이 충만하여 영에 기쁨을 주는 것처럼 영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때 믿는 이는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시 자극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한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자주 이러한 체험을 갖는다.
이러한 부류에 있는 믿는 이의 아주 일반적인 특징은 바로 영과 혼이 분리된다는 가르침을 듣고서 그들의 영의 위치를 알고자 하여 힘을 다해 찾아보지만 영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아직 영 안에서 참된 체험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이 자기의 영이고, 무엇이 자기의 혼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게다가 영과 혼이 긴밀히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에(영과 혼을 구분할 수 없음) 자신의 혼적인 체험 - 즐거움과 이상(理想)과 마음의 불탐 등 - 을 더할 수 없는 영적인 체험으로 착각한다. 사실 영적인 체험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 혼으로 영을 대신하여 스스로 이러한 해를 입는가?
그러한 믿는 이는 혼 생명의 능력으로 새 본성의 원함을 이행하고 있다. 이러한 혼 생명은 아직 처리되지 않은 생명이기 때문에 자신이 혼 생명을 위해 일하고 활동하게 된다. 혼 생명의 능력이 의를 행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는 육체에서 나지 아니한 모든 것을 다 신령한 것으로 여긴다(왜냐하면 믿는 이가 육체만 거절하면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임). 그렇기 때문에 혼 생명은 자유로이 일할 자유와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와 죄를 이기려는 믿는 이는 많지만 자아의 생명 곧 혼 생명을 이기려는 믿는 이는 적음을 본다.
혼에 포함된 항목들은 적지 않으나 혼에 속한 믿는 이의 대부분은 그의 생각과 감정에 지배를 받는다. 의지도 지배하는 요소이나 이것은 생각과 감정보다 심하지는 않다. 우리가 혼을 다스릴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작용하게 된다. 이 단게에 있는 믿는 이들은 대개 그들의 생각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지식을 사랑하고 진리 추구를 좋아한다. 그들은 음미할 가치가 있는 사상을 좋아하며, 그들이 아는 것을 그들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더 많이 알려고 한다. 그들은 또한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주님의 임재에 대한 느낌과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추구한다. 일단 그들 마음속에 뜨거운 불이 불타면 그들은 천리 길을 가고 영적 노정에서 앞으로 돌진한다(이것은 외적 표현을 가리킴). 그 반면에 이러한 느낌이 없거나 답답할 때는 전진하지 못한다. 그들은 좋은 느낌을 갖기 원하고, 그 마음속에 느끼는 좋고 나쁨이 그들의 외적인 '영'의 상태를 결정한다. 또한 그들은 의지의 영향을 받아 빌립보서 2장 13절의 약속을 그들에게 성취시킬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의지를 모든 일의 시작과 끝으로 생각한다. 그들 대부분이 뜻을 세우고 규칙을 정하며 계획을 세우지만, 이것들은 그들에게 속박만 줄 뿐 영적 생명의 참된 성장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가장 가련한 일은 믿는 이들이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교만하여 자신들의 체험을 제일이라고 고집하고 자신들의 그러한 지식을 다 영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풍성을 과장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삼층천의 체험을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하여 이러한 느낌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 속에 불타고 즐거우며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이것을 더할 수 없이 높은 영적인 생활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외적인 일들로 분란해지고 평강을 잃으며, 그들의 모든 행위 속에 많은 간계와 조작된 계획이 있고 안팎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눈을 열어 주셔서 그들을 위해 남겨둔 충만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실 때 비로소 그들은 그들의 혼에 속한 부분을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기 때문에 이 단계까지 인도되기도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경우, 믿는 이가 그 입을 열어 영적 생명과 체험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것의 십중팔구는 다 자신 - 자기의 기쁨과 영광 - 을 위한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영적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은 많은 훈련과 채찍질을 통해 믿는 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했고 그분의 은사를 남용했으며 자기를 높였는지를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그가 자아를 높인 것 - 자아를 중심 삼은 것 - 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하시고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고 한탄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혼 생명을 의지하면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착각이었음을 보여주신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심판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혼 생명을 재해 달라고 성령께 간구하고 되고, 영과 혼의 완전한 분리를 갈망하게 된다. 일단 우리가 성령께 일할 여지를 드린다면 그분은 반드시 일하신다. 이렇게 될 때 믿는 이는 영과 혼이 혼합된 상태에서 완전한 영적 생명 안으로 옮겨진다.
영과 혼의 분리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 12절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 이 구절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체험에서 어떻게 영과 혼을 분리하는지 가르쳐준다. 영과 혼의 분리는 단지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가질 수 있고 또 반드시 가져야 하는 체험이다. 히브리서 4장에서 성령은 주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 공 대제사장과 믿는 이들과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말한다. 이어서 13절은 "지으신 것이 아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령은 믿는 이들의 영과 혼에 대하여 주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하시는가를 보여 준다. 여기서 성령은 믿는 이를 제단 위의 희생물로 비유했다.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 제단 위에 묶어 놓아야 했고, 그런 다음에 제사장이 와서 예리한 칼로 그 희생물을 잡았으며, 또한 그 칼로 희생물을 둘로 쪼개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였다. 본래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벌거벗은 것처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찔러 쪼갠 후에야 제사장은 비로소 희생물을 불사르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성령은 이 그림으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행하시는 주 예수님의 일과 주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체험을 설명한다.
과거에 희생물이 제사장의 칼에 찔려 쪼개짐으로 반으로 나누어져 관절과 골수가 숨김없이 드러났듯이, 오늘날 믿는 이들도 그들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혼과 영이 분리될 수 있다. 그둘의 혼이 더 이상 영을 다스릴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를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인지,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인지 아무 혼란과 섞임 없이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과거에 제사장은 칼로 희생물을 찔러 쪼갰지만, 오늘날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들의 혼과 영을 분리하신다. 과거에 제사장의 칼은 예리하여 희생물을 둘로 쪼갤 수 잇었고 관절과 골수와 같이 견고히 연결된 곳도 찔러 쪼갰다. 그러나 이제는 주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칼보다 예리하기 때문에 사람 속의 가장 밀착된 영과 혼도 분명하게 분리할 수 있다.
조심스럽게 성경의 이 단락의 가르침을 다룬 후에 우리는 믿는 이의 영과 혼이 분리되는 것은 십자가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희생물을 제단 위에 놓아야만 제사장은 칼로 의생물을 둘로 쪼갤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구약의 제단은 바로 신약의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만일 믿는 이가 십자가의 기초 위에 와서 주님과 함께 죽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대제사장께서 하나님의 예리한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혼과 영을 분리하여 주시기를 바랄 수 없다. 제단 위에 놓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쪼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반드시 십자가로 갈 때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혼과 영을 분리하는 주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이 이행 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므로 영과 혼이 분리되는 체험을 얻고자 하는 믿는 이는 마땅히 골고다에 오르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아무런 미련 없이 그들 자신을 제단 위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예리한 검으로 우리의 영과 혼을 찔러 쪼개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을 신뢰해야 한다. 제단 위에 놓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그분께 드리고자 하는 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칼로 쪼개는 일은 대제사장의 일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행해애 할 조건을 수행하고 그 외의 것들을 충성되고 신실하신 우리 대제사장께 맡겨야 한다. 합당한 때에 그분은 필히 우리에게 온전한 영적 체험을 주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지를 보기로 하자.
십자가로 오라
마태복음 10장 38절에서 주 예수님은,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혼 생명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혼 생명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원문 참조)라고 말씀하신다. 이 성경 구절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혼 생명을 잃어버리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여기서 말한 혼 생명은 자연히 사람의 타고난 생명, 곧 우리를 산 생명울 되게 하는 유기적인 생명을 가리킨다. 이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영의 생명과 구분된다. 이 생명은 모태에서 날 때 우리가 가져온 생명이며, 우리가 거듭날 때 받은 영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영의 생명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신성하고 초자연적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없는 생명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이러한 혼 생명을 잃어버리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이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혼 생명 안에는 사랑과 감정과 의지 등이 있다. 여기서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 생명은 자연히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 예수님은 특히 사랑의 부분을 강조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바로 앞 구절들에서 주 예수님은 원수는 바로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을 인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집 식구의 뜻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인하여 가장 친숙한 사람들과 불화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힘이다. 혼 생명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따르기 좋아하며 그들의 뜻을 따라 행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기쁠 때, 우리의 마음도 그와 함께 기뻐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서 주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주님을 거역하지 말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의 뜻이 가람의 뜻과 상충될 때는 비록 그 사람이 우리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가장 괴롭고 싫을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고난 받는 것만이 아닌 못 박히는 곳으로 가는 것임을 기억하라. 십자가를 지는 목적과 궁극적인 결과는 바로 못 박혀 죽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이러한 부름은 우리의 타고난 사랑을 제거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그분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누가복음 14장 26절과 27절에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혼 생명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미워하다'의 뜻은 혼 생명에서 나온 자기의 사랑에 대해 믿는 이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집 식구들 곧 자기 친척, 친구, 연인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결코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연인이라서 혹은 그들이 우리의 아내,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타고난 사랑은 혼 생명에서 나온 것이다. 주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인 모든 사랑을 제거하고자 하신다. 주님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데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지 말고 그분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라는 데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 뜻은 우리가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 결코 그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당신의 부모, 처자,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타고난 이러한 사랑은 마땅히 멈추어져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주 안에서 우리와 새로운 관계가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만 그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 손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일에 있어서 주님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마땅히 주님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우리의 원수라도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집의 가장 친근한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혼 생명이 필히 죽음을 거쳐야 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에 대해 순종하고 타고난 애정을 거절할 때, 믿는 이들은 이 타고난 사랑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과 고통은 사랑에 있어서 혼 생명을 잃어버리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혼 생명이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지고 그 본래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 믿는 이의 혼 생명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처리받는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이의 마음에 부으심으로써 그의 모든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이 되게 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혼 생명을 미워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고 이 생명이 인간적인 사랑에 대해 자유로이 활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본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라고 요구하신다. 주님의 요구는 본래 우리의 뜻과 완전히 상반된다. 본래 사랑했던 것을 지금은 미워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미워해야 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그 기관인 우리의 혼 생명까지 미워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십자가이다. 만일 우리가 진실하게 이렇게 십자가를 진다면 우리의 대제사장은 사랑에 있어서 우리의 혼과 영을 완전히 분리시킬 기회를 얻으실 수 있고, 이로써 혼에 속한 어떤 것이 우리영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되어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의 식구들을 대하신 것처럼 우리의 영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마태복음 16장 24절부터 26절까지에서 주 예수님은 또 혼 생명과 십자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혼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구절에서 우리 주님은 또 다시 혼 생명을 잃어버리도록, 혼 생명을 십자가에 넘기도록 그분의 성도들을 십자가로 부르고 계신다. 겉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한 것은 마태복음 10장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마태복음 10장이 강조한 것은 혼 생명의 사랑의 부분이고, 16장이 강조한 것은 혼 생명의 '자아'의 부분이다. 문맥상 우리는 이때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장차 십자가에서 받을 고난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주님을 간절히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께 "주여, 당신을 불쌍히 여기소서"(마 16:22, 원문 참조)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선생님이 육체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설령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일지라도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의 말은, 주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행하는 것이겠지만 그분 자신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당신 자신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주여 당신 자신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이러한 생각은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그분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만 십자가에 가야 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는 너희들도 내 제자가 되려면 십자가로 가야 한다. 나의 길이 어떠하면 너희의 길도 그렇다. 너희들은 나만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의 제자 된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내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십자가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처럼, 너희도 너희 혼 생명을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행하라는 것을 지켜 행해야 한다."베드로는 주님께 "왜 그렇게 당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었지만, 주님은 "너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는 대가가 요구된다. 육체는 이에 대해 떨지 않을 수 없다. 혼 생명이 우리 안에서 깊이 다스리고 있을 때 우리는 겨로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와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잃어버리라고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혼 생명은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 혼 생명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므로 매번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도록 십자가의 좁은 길을 선택할 때마다 혼 생명은 해를 입게 된다. 이것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주님께서 완전하고 순전하게 우리 속에서 주가 되길 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이 구절들 앞의 상황을 주의한다면 더욱 이 혼생명의 사악함을 깨달을 것이다. 이 말을 한 때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깨달은 후였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들이 따르고 있던 비천한 예수님이 바로 영생이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해 주신 후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계시를 얻은 후, 그는 즉시 혼 생명의 다스림을 받고 그의 선생님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기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자연적인 계시와 놀라운 지식도 혼 생명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막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도리어 지식이 높아지고 체험이 많아질수록 그들의 혼 생명은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이 감춰져 있어서 제거하기가 더욱 어렵다. 만일 혼 생명이 십자가로 처리되지 않았다면, 그 혼 생명은 잃어버린바 되지 않고 종일 사람 속에 있을 것이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고난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십자가를 보고 물러나는 마음은 모두 혼 생명의 표현들이다. 혼 생명의 최종 목적은 그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다. 혼 생명은 자기를 손상시키는 일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그분의 부르심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혼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우리 앞에 높인 모든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연민하는 마음을 조금도 갖지 말며,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라는 주님의 부으심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개인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주님은 십자가를 우리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가 바로 그분께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때이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기 원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안에 들어와 능히 우리 혼 생명을 못 박는다. 매번의 십자가를 짊어짐은 우리의 혼 생명을 못박는다. 십자가 주위를 맴도는 것은 바로 우리의 혼 생명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혼 생명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 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단번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복음에는 '날마다'(눅 9;23)라는 단어가 십자가를 지라는 문구 앞에 추가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죽음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죄에 대해 우리가 죽는 것은 이미 이루어졌고 완성된 사실로써 우리가 다만 시인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혼 생명의 죽음은 또 다른 방면의 일이다. 이것은 온전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날마다 성취하고 날마다 체험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죽지 않는다거나 또는 서서히 죽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혼 생명에 대해 죽는 것과 죄에 대해 죽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다. 죄에 대해 죽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것이고, 그분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은 것이다. 그러나 혼 생명에 대해 죽는 것은 이미 성취된 일이 아니고, 우리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함으로 죽기로 뜻을 정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함으로 죽기로 뜻을 정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날마다 주님의 뜻을 좇아 행해야 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혼 생명의 능력을 잃어버려야 한다.
누가복음 17장 32절과 33절에서 이와 흡사한 주님의 말씀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말씀하신 것은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것이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여기서 주님의 혼 생명은 마땅히 잃어버려야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말씀은 특히 성도들이 재물을 아까워 하는 마음에 중점이 있다. 주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녀가 위급할 때에 자기 재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돔으로 되돌아 가지도 않았고, 한 걸음도 뒷걸음하지 않았고 다만 뒤를 한 번 돌아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한 번 돌아본 이것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바가 얼마나 많은지! 한 번 뒤를 돌아 본 이것이 그녀의 마음속의 아주 길고 긴 이야기를 말해 준다.
성도들은 겉으로는 세상을 버리고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속으로는 주님을 위해 잃어 버린 것들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혼 생명의 일이다. 주님께 헌신한 성도는 다시 세상적인 길을 가고 주님을 위해 버린 것을 다시 추구할 정도로 퇴보하지는 않을 것이다. 버린 것을 아까워 하는 마음은 그가 십자가 위에 있는 세상의 위치를 아직 분명히 보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혼 생명의 활동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가 버릴 것과 이미 버린 것들을 마음속으로 아까워 하게 한다.
성도가 정말로 혼 생명을 잃어버릴 때 그의 마음은 세상 어떤 일에도 요동하지 않는다. 혼 생명은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것들을 아까워 한다. 성도가 진정 혼 생명을 죽음에 넘겼을 때만 비로소 그는 요동치 않고, 주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준행할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기능을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주님과 함께 죽는 체험 - 죄에 대하여 죽을 뿐 아니라 혼 생명을 죽음에 넘김 - 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산상수훈을 지킬 수 없을 것이며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십자가의 역사를 깊이 통과하지 않고, 믿는 이가 혼 생명 안에서 겉으로 산상수훈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면, 그의 안팎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혼 생명을 잃은 성도는 사람들이 그의 속옷을 요구할 때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겉옷까지도 줄 수 있다. 혼을 죽음에 넘긴 사람은 바로 세상의 것들에서 끊어진 성도이다.
영적 생명을 얻는 조건은 바로 무언가 잃는 것이다. 잃을 때만이 진정으로 우리는 얻을 수 있다. 영적 세계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얻었느냐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더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우리는 더 많이 잃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얻은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측량할 것이 아니라 '잃는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측량해야 한다. 우리의 참된 분량은 우리가 부어낸 포도주의 분량이지 결코 우리에게 남아 있는 분량에 달려 있지 않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잃는 자가 남에게 줄 것이 제일 많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세상 재물을 얻고자 하는 열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혼 생명은 아직 십자가 위에 있지도 않고 십자가의 역사를 통과하지도 않은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34절은 한 무리의 믿는 이들이 그들이 산업이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빼앗기는 것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당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역사로 인한 결과이다. 그들의 소유물에 대한 믿는 이의 태도가 그들의 혼 생명이 살아있는지, 이미 죽음에 넘겨졌는지를 증명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 영과 혼이 분리되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도록 앙망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이 진정 세상적인 모든 것에서 끊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더 이상 롯의 처와 같은 마음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세상 재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영적 생명을 얻는 한 가지 조건이다. 성령께서 하늘의 샐재와 완전한 영적 생명을 계시해줄 때 비로소 성도는 세상 모든 것들을 멸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3장에서의 바울의 체험은 바로 이것이다. 처음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다음엔 그가 이러한 결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완전한 생명이다. 많은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혼 생명이 얼마나 강한지를 모른다. 오직 물질적인 방면에서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혼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많은 때 혼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재물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적게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진실로 혼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의 시금석이다.
음식과 생활을 지나치게 주의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깊은 십자가의 역사를 그들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만이 그들의 영이, 혼으로 둘러싸이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벗고 아무 장애 없이 하나님 안에 살 수 있게 된다. 무릇 세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혼 생명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요, 십자가의 역사를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장 24절과 25절에서 주 예수님은 또 다시 혼 생명의 문제를 언급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혼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혼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원문 참조).
이 말씀을 하신 후 주 예수님은 이 두 구절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이 장(章)의 말씀은 주 예수님의 일생의 황금기를 기록한다. 나사로가 이미 부활했고 유대인 중에 나사로로 인하여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헬라인들도 그분을 만나러 왔다. 바로 이때 그분은 예루살렘에 들어가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기에는 이때 십자가가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았고, 주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지 않아도 모든 사람을 그분께로 이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 외에는 사람을 구원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셨다. 겉으로 볼 때 그분의 역사가 가장 형통할 때이지만 그분은 자기가 죽지 아니하면 결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없으며 오직 죽어야만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 수 있고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여기서 주님은 십자가의 공과를 우리에게 분명히 설명해 주고 계신다. 그분은 그분 자신을 한 알의 밀로 비유하여, 만일 땅에 떨여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모든 열매 맺는 조건, 곧 그분께서 죽지 아니하면 결코 열매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죽음 외에는 열매 맺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주 예수님께서 어떠하셨는가에 대한 연구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우리의 혼 생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아는 데 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말한 밀은 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나 25절에서 주님은 이러한 죽음을 거치고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시고 그분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에게 밀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하셨다. 밀알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혼 생명 또한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여기서 주 예수님께서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일하고 열매 맺는 결과에 관한 문제이다. 비록 믿는 이들의 혼 생명이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그 능력은 열매 맺는 일을 해낼 수 없다. 모든 천부적인 재능과 은사와 지식과 지혜와 혼 생명에서 나온 능력으로는 결코 믿는 이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주 예수님게서 죽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주 예수님은 혼 생명의 능력이 좋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서 열매 맺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혼 생명을 영생 곧 영의 생명과 비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분께서, 혼 생명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혼 생명이 자기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성도들에게 특별히 자기 혼 생명을 '미워하는' 태도를 붙잡으라고 하셨다. 이 미워함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혼 생명을 죽음에 넘기는 것을 실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미워하는 것)로 혼생명을 대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도들이 영원한 손실을 당하게 될 것이다. 혼 생명이 우리 안에서 다스리게 된다면 혼 생명은 영원히 영을 지배하게 되고 더 이상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신성한 생명을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영과 혼의 혼합은 영적으로 순수할 때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이렇듯 자기 사랑은 혼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자기 사랑을 죽음에 넘기지 않는다면 매일매일 우리의 영적 생명은 혼 생명의 영향을 받아 순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혼 생명을 죽음에 넘기도록 십자가로 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보았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우리 자신을 제단 위에 올려 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대제사장은 그분의 예리한 칼로 우리의 영과 혼을 분리하실 수 없다. 우리가 십자가의 역사를 허락할 때 비로소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수 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그분은 죽으실 때 "자기 혼 생명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셨다"(사 53:12, 원문 참조). 그러나 그분은 자기 영을 하나님께 의탁하셨다(눅 23:46, 원문 참조). 과거 그분께서 행하셨던 일은 오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다. 혼 생명은 마땅히 죽음에 넘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 혼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 의탁한다면 머지않아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 안에서 완전히 신령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 십자가를 통해 혼 생명을 죽음에 넘긴다면 우리의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과 혼을 분리해 주실 것이다. 제단 위에 엎드려지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지만 예리한 칼로 우리의 영과 혼을 쪼개는 것은 우리 대제사장인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넘긴다면 우리의 대제사장은 필히 그분의 직분을 이행하여 우리의 영과 혼을 분리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분께서 일하실 수 있는 조건을 이행했다면 그분은 적절한 때에 우리의 영과 혼을 분리하신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로 와서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우리의 영과 혼을 분리하시도록 하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을 보기로 하자.
혼과 영을 분리시키는 대책
앞에서 우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일하신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제 우리는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혼과 영을 분리하시는지를 볼 것이다.
(1) 영과 혼의 분리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라
이러한 인식이 없을 때 이에 대한 필요성도 갖지 못한다. 믿는 이는 영과 혼이 혼합된 생명의 가증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 안에 혼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히 신령하고 높고 깊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과 혼이 혼합된 생명은 손실된 생명임을 알아야 한다.
(2) 분리되도록 구하라
이러한 필요성을 알 뿐 아니라 또한 마음속에서 분리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진심으로 혼합된 영과 혼을 분리하여 주시도록 구해야 한다.
(3) 전적으로 항복하라
믿는 이들 가운데 영과 혼이 분리되는 체험을 갖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전일하게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제단 위에 놓을 필요가 있다. 체험적으로 영과 혼이 분리될 때까지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효능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죽음을 본받고자 하는 원함을 온전히 가져야 한다. 분리되는 체험을 갖기 전에는 자신의 의지를 끊임없이 하나님 편에 두고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분리되기를 원해야 한다. 영과 혼이 분리될 때까지, 대제사장의 손을 멈추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4) 로마서 16장 11절에 서 있으라
믿는 이는 영과 혼이 분리되는 체험을 추구할 때에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영과 혼의 분리는 죄에 대해 이미 죽은 우리의 태도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매일매일 로마서 6장 11절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을 진정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의지로는 전일하게 "죄가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는"(롬 6:12)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혼 생명이 몸을 통하여 죄를 범하지 않게 할 수 있다.
(5)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라
믿는 이는 마땅히 기도와 묵상으로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당신의 혼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정결케 되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깊은 속을 찔러 쪼개시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혼 생명이 자연히 활동할 수 없게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 말한바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라"(원문 참조) 는 뜻이다.
(6)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
우리의 영과 혼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환경의 필요에 따라 십자가를 지도록 요구하신다. 믿는 이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죄와 자아를 이기는 체험을 자주 갖고 한순간도 육체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령은 은밀한 가운데 그의 혼과 영을 분리해 주실 것이다.
(7) 영을 좇아 행하라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은 우리가 보호받는 조건이자 또한 영과 혼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조건이다. 믿는 이는 마땅히 범사에 영을 좇아 행함으로 영에서 나온 것과 혼에서 나온 것을 분별해야 하고, 또한 영에서 나온 것은 따르고 혼에서 나온 것은 거절하도록 결심해야 한다. 자신의 영의 모든 일을 알기 위해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배우라.
이상의 것들은 믿는 이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조건들이다. 성령은 우리의 동역을 필요로 하신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행한다면 주님은 그분께서 해야 할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 편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했다며, 우리의 대제사장은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예리한 칼로 우리의 영과 혼을 분리하실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감정적인 것과 느낌과 생각에 속한 것과 타고난 능력에 속한 것들이 이차적으로 영에서 분리되어 조금도 혼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믿는 이의 영은 비로소 삼층천으로 올려지고, 주님과 한 영이 되는 체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믿는 이는 주님께 쓰임 받을 것이고, 많은 열매들을 맺는 그분의 생명의 통로들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평강이 넘치는 영의 생명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