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반지
정재은
나의 왼손 무명지에는 세공이 예쁘게 된 얄폿한 은반지 한 개가 끼어져 있다. 고무장갑 끼는 일이 싫어서 설거지, 빨래 등 집안일을 거의 맨손으로 하는 편이다. 가뜩이나 못생긴 데다 몹시 거칠기까지 한 내 손에 이 은반지는 과분하도록 사치한 물건일 수밖에 없겠다. 고무장갑 끼기 싫어하는 만큼이나 반지니 목걸이니 하는 따위의 장식품을 몸에 걸치기 싫어하는 나이지만, 어쩌면 이 반지만은 평생 동안 꽤 자주 내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를 누리게 해 줄 것 같다.
처음으로 내 소유의 반지가 생긴 것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면 소재지의 장터 한가운데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붕을 해 덮은 크고 어둑신하고, 그래서 조금 무섬증을 일게 하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 옆에 은방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어린 손주 하나만 데리고 살며, 무명 앞치마를 두르고, 늘 또닥또닥 은반지를 만들고 있었다. 도톰한 복숭아 모양의 한가운데에다 빨간색, 파란색으로 태극 모양을 꼭 박은 어린애들 반지가 제일 예뻤었다. 내 또래의 여아들 사이에서는 이 반지를 지닌 것이 대단한 자랑이어서, 시새워 부모님을 졸라 사서 끼고는 야시랑을 떨기도 했다. 여의치 못해 얻어 끼지 못한 아이들은 샘을 내며 입을 삐죽이기도 하고 더러는 우는 아이도 있었다. 할머니께서 사 주신 이 반지를 나는 저고리 고름에 끼워 매어서 앞에 차고 다녔다. 반지가 닳거나 빨갛고 파란 색이 더러 떨어져 나가기도 하기 때문에 아끼느라고 그리 했었다.
다음으로 내 반지를 끼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재학생들이 졸업 선물로 충주여중 배지 모양을 한 은반지를 만들어 졸업생들에게 한 개씩 끼워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6·25 직후의 가난 속에서 만들어진 이 반지는 너무 얇고 가늘어 그냥 끼고만 있어도 모양이 이리저리 일그러지더니 채 일 년도 못 넘기고 부러지면서 못 쓰게 되었다. 손이 조이는 듯 거북해서 반지 끼는 일이 반갑지 않았던 나는 이 못 쓰게 된 반지를 별로 서운해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나는 약혼반지, 결혼반지를 갖게 되었다. 반지말고도 팔찌니 목걸이니 하는 것들이 꽤 딸려 왔었다. 본래 게으른 탓인지 그것도 천성인지 나는 여전히 이것들을 몸에 걸치는 일이 달갑지 아니했다. 무슨 모임이 있을 때 권에 못 이겨 몇 가지 걸치고 나갔다 돌아오면 옷도 벗기 전 서둘러 이것들부터 풀어서 경대 서랍에 넣어 버리곤 했다. 그러고 나면 마치 사슬에서 풀려난 것처럼 개운하고 홀가분하였다.
“여자가 너무 무신경해도 매력 없는 법이야.”
하고 타박하던 남편도 시간이 흐르자 꾸밈새가 아름다운 친구 부인들 틈에서 아무 치장 없이 초라한 나를 천성이 그렇거니 흘려 보아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덧 나의 차림새에 아주 관심이 없어져서 무슨 기념일이나 내 생일이 돌아와도 실반지 한 개 사다 주는 법 없이 되어 버렸다. 몸치장할 줄은 몰라도 샘은 있었던지 나는 내가 자초한 이 무관심을 조금 서운해하였다.
내 나이 30대 후반쯤, 나는 어쩔 수 없이 반지를 자주 끼고 있어야 했다. 막내딸 아이가 열심히 반지를 사 나르는 것이었다. 소풍 갈 때 준 돈, 용돈으로 준 돈을 빈줄러서 사 오는 것이었다. 다른 애들 엄마는 다 반지를 껴서 손이 예쁜데 엄마만 반지가 없어 손이 미워 보인다는 게 반지를 사 나르는 이유였다. 반지를 사는 곳은 거의가 등하굣길에 있는 육교 위의 노점이었다. 일이백 원을 주고 사 오는 이 반지는 얇은 양철에 금물을 입히고 조잡한 모양으로 어린애들 눈 홀리기에나 좋을 듯이 만들어져 있어, 끼고 있으면 옆 손가락을 꼭꼭 찌르기도 했다. 일하는 데 성가셔서 빼놓으면 막내는 눈 끝이 샐쭉해지며,
“엄마, 내가 사 준 반지 왜 빼 버렸어?” 하고 싫은 내색을 지었다. 막내의 눈에는 다른 애들 엄마가 낀 귀금속 반지와 육교 위 노점에서 산 반지 사이에 어떤 차이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경대에는 실반지, 노란 알 박힌 것, 파란 알 박힌 것, 납작하게 조각한 것 등 여러 개의 반지가 굴러다녔고, 나는 손가락에까지 벌겋게 녹물이 묻는 반지를 끼고도 거침없이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였다. 막내 아이의 철없는 정성이 반지를 타고 나의 심장 속에 사랑으로 녹아들어 체면치레 중히 여기는 어른의 허영벽마저 스러지게 했나 보다. 나는 내 경대 서랍에 한 개 한 개 모여지는 이 반지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반기게 되었다. 그러나 막내가 조금 자라면서 어느 사이엔가 육교 위에서 산 반지는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신나게 반지를 사 나르던 버릇도 뚝 그치고 말았다. 내가 얼마나 허전하고 서운하였는지 막내는 눈치도 채지 못했을 것이다.
며칠 전 나는 작은 소포와 함께 이런 편지를 받았다.
“언니, 금년이 언니 오빠의 은혼의 해로군요. 축하합니다. 덩둘한 오빠가 고작 외식이나 한 번 시켜 드릴까, 반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실 것 같아 주제넘은 선물을 보냅니다. 혹 오빠께서도 사 주시거든 양손에 하나씩 끼고 다니세요….”
아들 하나만 데리고 조촐히 살아가는 나의 시누이. 복스러운 용모, 덕성스러운 마음씨. 누구의 작희로 그다지 외로운 영혼의 별을 타고나게 되었을까. 자신은 영원히 끼어 볼 수 없게 된 은혼의 반지. 오빠 올케의 은혼의 반지를 고르며 어지럽기만 했을 시누이의 심사를 내가 어찌 갈피 잡아 짐작해낼 수 있으랴.
세공이 예쁘고 얄폿한 은반지를 손가락에 끼며 나는 너그럽지만도, 온화하지만도 못했을 나의 젊은 날을 몹시 민망해한다. 두서넛의 시누이 시동생들을 데리고도 속상해 못살겠다고 푸념하는 친구들을 더러 본 적이 있다. 일곱 명의 시누이 시동생들을 거느리고도 그들 때문에 크게 속 썩어 본 적이 없는 내게 과남한 인복人福에 감사할 줄 알라고 일러 주듯 이 글을 쓰는 전깃불 밑에서 반지는 더욱 따뜻하게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