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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菩薩의 十種陀羅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陀羅尼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聞持陀羅尼니 持一切法하야 不忘失故며 修行陀羅尼니 如實巧觀一切法故며 思惟陀羅尼니 了知一切諸法性故며 法光明陀羅尼니 照不思議諸佛法故며 三昧陀羅尼니 普於現在一切佛所하야 聽聞正法하야 心不亂故며 圓音陀羅尼니 解了不思議音聲語言故며 三世陀羅尼니 演說三世不可思議諸佛法故며 種種辯才陀羅尼니 演說無邊諸佛法故며 出生無礙耳陀羅尼니 不可說佛所說之法을 悉能聞故며 一切佛法陀羅尼니 安住如來力無畏故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欲得此法인댄 當勤修學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다라니가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들어서 지니는 다라니이니 온갖 법을 지니고 잊지 않는 연고며, 닦아 행하는 다라니이니 모든 법을 사실대로 교묘하게 관찰하는 연고며, 생각하는 다라니이니 일체 모든 법의 성품을 분명히 아는 연고이니라.
법의 광명다라이니 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을 비추는 연고며, 삼매다라니이니 널리 일체 부처님 계신 데 나타나서 바른 법을 들어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연고며, 원만한 음성다라니이니 부사의한 음성과 말을 이해하는 연고며, 세 세상 다라니이니 세 세상의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법을 연설하는 연고이니라.
갖가지 변재 다라니이니 그지없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연설하는 연고며, 걸림 없는 귀를 출생하는 다라니이니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의 말씀한 법을 모두 듣는 연고며, 일체 불법(佛法)다라니이니 여래의 힘과 두려움 없는 데 머무는 연고라,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배울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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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다라니(十種陀羅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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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다라니(有十種陀羅尼)하니 : 열 가지의 다라니가 있으니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앞서 무피염심을 알듯이 일단은 다라니를 알고 우리가 뜻을 잡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다라니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상스님이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라고 했다. 다라니는 무량무궁무진한 보배로구나, 다라니가 나오는 원천이 어디이기 때문에 그런가? 일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마음을 잘 쓰면, 전부 다 총명하게 쓰고 자비롭게 쓰면, 다 다라니가 되겠구나, 완벽하구나, 더이상 조작하고 꾸미고 만들어내고 생산되는 것이 아니구나, 생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무생이기 때문에 완벽하구나, 없어지지 않으니까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다라니구나’ 이렇게 아시면 된다.
그러니까 유통기한이 있는 것은 다라니가 될 수 없다.
보는 것도 완벽한 것은 무안이비설신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끝도 없이 계속 장엄할 수 있다. 비싼 건데 오늘 싸게 팔았다.
이것을 능지구경이라. 능히 지닐 수 있는 총지 완벽한 것을 이렇게 지닐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바라밀에 대해서 아주 수승한 해탈력, 개연성을 가진 것을 다라니라고 한다.
그럼 다라니는 일단은 잘 들어야 된다. 우선은 잘 들어야 되고, 그다음에 뜻을 잘 지녀야 되고, 그다음에 널리널리 그것을 활용해서 써야 된다.
다라니 중에 제일 좋은 다라니가 듣는 다라니다.
제가 잘 아는 선배 스님이 ‘중은 듣는 힘을 길러야 된다’라고 말씀하는 스님이 계신다.
여기서 화엄경을 배우는 것도 남의 말을 듣는다고 하는 것인데, 조금 전에 말했던 치문반 스님이 말을 듣겠는가 안 듣겠는가? 안 듣는다.
일반인들이 싸울 때도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면 남의 말을 절대 안 듣는다.
상대하고 둘이 싸울 때 어떻게 하느냐?
“쯧 가만히 있어 봐. 내 말 먼저, 내 얘기 듣고, 니가 얘기해.”
절대 남의 얘기를 안 듣는다.
그러니까 남이 얘기하려고 하면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얘기하고 있잖아. 시끄럽다.”
절대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아, 화가 많이 났구나’
그런데 어느 정도 비파사나가 되고 앉는 일이 사마타가 되어서 혜안이 있고 조금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얘기 들어봐라’ 소리하기 전에 “가만히 있어 봐. 내 이래 하고 싶은데 니가 좀 얘기해 봐. 내가 니 조언을 구한다.” 라고 한다.
이런 분은 교양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사업을 해도 백전백승이다.
‘남이 우야 됐든지 간에 난 내 고집대로 갈 거야’ 이런 사람은 백전백패 필패다.
여기서 무슨 힘을 기르는 것인가? 듣는 힘이다.
그래서 문지를 딱 1번으로 해놓았다.
안 들리는 사람은 십무진장품에 뭐가 안 된다고 했는가? 참회를 죽어도 안 한다고 하였다. 자기 양심도 안 돌아보고 남 체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신심을 가지고, 도덕성을 가지고, 자기를 돌아보고 남을 돌아보는 상태에서 그다음에 법문이 들린다. 법문이 들렸다 하면 그 사람은 뭘 하겠는가? 베풀어 준다.
말을 베풀어 주든지 정신을 베풀어 주든지 물질을 베풀어 주든지 뭐든 베풀어 주게 되어 있다.
베풀어 주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지혜를 가지고, 방편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뭘 해야 될지 꼭 그 하루하루 하는 일에 대해서도 일일이 적어놓지 않더라도 또렷하게 명확하게 기억을 한다. 양심을 속이지 않는다. 정직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법문이 또렷또렷하게 기억된 사람은 서서히 체화되어서 자기 것이 된다.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것, 절에서 참회를 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법문을 들으라는 것이다.
법문을 안 듣는 사람은 참회를 안 한 사람들이다.
청송교도소에 가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불경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것도 화엄경에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물건부터 먼저 줘라’라고 자세하게 써 놓았다.
물건을 충분히 줘라, 그랬다.
법문은 어떻게 설하느냐? ‘조금만, 알맞게’ 설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문을 많이 주면 그 사람은 죽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귀에 피가 난다. 귀가 따가워서 앉아 있지를 못한다. 안 들린다. 정말이다.
핸드폰을 보고 있든지 휴대폰을 보고 있든지, 같이 화엄경 강설에 와서도 엉뚱한 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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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문지다라니(所謂聞持陀羅尼)니 : 이른바 들어 지니는 다라니다. 듣고 지(持)하기까지, 문지가 될 때까지 그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다. 들릴 때까지, 그 앞에 뭐가 있어야 되는가? 자기 반성이 있어야 된다. 그다음에 들린다.
안으로 스며들어서, 완전히 그 향기, 부처님 향기가 문지가 됐다.
지일체법(持一切法)하야 : 지일체법한다. 들려서 박히면 가만히 있어도 향기가 저절로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수월하다.
그때부터는 자연수행이라고 한다. 무생법인이라고도 얘기한다. 자연하게 수행하게 되어 있다.
불망실고(不忘失故)며 :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그냥 써놓은 것이 아니다.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주 지혜롭게 된 사람이 잃어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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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다라니(修行陀羅尼)니 : 수행하는 다라니다. 네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앞에서는 잘 듣는 방법을 이야기해 놓고, 여기서 의지, 뜻을 잘 지니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실교관일체법고(如實巧觀一切法故)며 : 모든 법을 여실하게 진실되게 여실교관이라, 아주 교묘하게 기똥차게 관한다.
우리 눈에도 각막이 있고 망막이 있고 결막이 있고 수정체가 있고 홍체가 있듯이 아주 치밀하게, 교관한다.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하듯이 교묘하게 여실하게, 여실지 여실견 여실지견 사실대로 교묘하게 관찰해서 일체법을 쫙 다 뜯어서 관찰해 보면, 일체법을 조견하면, 오온이 개공이라.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어떤 법이라 하더라도 본래 없다.
사유다라니(思惟陀羅尼)니 : 생각하는 다라니이니
요지일체제법성고(了知一切諸法性故)며 : 여기에도 요지가 나왔다. 일체제법성을 요지한다.
일체제법성은 ‘본래 없다’ 이것을 응관법계성하라, 일체유심조니라.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 이것은 승혜보살의 게송이다.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를 묶어서 일러놨다.
무슨 품에 나오는가?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揭讚品)에 나온다.
무슨 보살이 그랬는가?
승혜보살(勝慧菩薩)이 했다.
모든 법의 성품이 어떻다는 것인가? 있지 않다. 본래무일물이다. 그다음에 모든 법이라고 하는 건 뭔가?
제법은 종연생한다. 녹야원 오비구에게 말했듯이 제법은 종연멸이다. 연진에 인연이 다하면 법도 다 한다.
능가경 기신론 같은 데는 그렇게 나온다.
심생즉 마음 한 생각이 일어나니까 종종법생하고 심멸즉 마음이 생각이 꺼져버리니까 사유가 꺼져버리니까 종종법멸한다. 모든 것은 생각 따라 일어났다 생각 따라 사라지니까 만법은 유식이다.
만법은 오직 의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없는 데 가기는 어디로 가는가?
법광명다라니(法光明陀羅尼)니 : 법의 광명다라니니
조부사의제불법고(照不思議諸佛法故)며 : 조부사의제불법고라, 말과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그 자리, 부사의 한 부처님의 법을 비추는 연고고
삼매다라니(三昧陀羅尼)니 : 삼매다라니니
보어현재일체불소(普於現在一切佛所)하야 : 보어현재,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청문정법(聽聞正法)하야 : 바른 법을 들어도
심불난고(心不亂故)며 : 심불난고니라.
정법이 확실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렵거나 어지럽지 않다. 그러나 갑자기 사자후를 들으면 여우, 족제비는 자기 아버지의 소리가 아니니까 막 놀랜다. 청문정법하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뇌가 찢어진다는 말이다. 사자후를 들으면, 불법을 들으면, 악독한 사람들은 뇌가 찢어져버린다는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그냥 솜에 물이 배이듯이 그냥 쑤욱 들어온다.
원음다라니(圓音陀羅尼)니 : 원음다라니니, 또렷한 음성, 옛날 우리 어릴 때는 원자를 ‘뚜렷한’ ‘뚜렷이’라고 새겼다. 항상 상(常)자를 새길 때는 ‘떳떳이’ 라고 새기고, 마땅할 응(應)자를 새길 때는 ‘뻑뻑이’라고 새겼다.
부사들을 ‘뻑뻑이 뚜렷이’ 요새 그렇게 새겼다가는 맞아 죽는다. 저도 습관적으로 ‘뚜렷이’ ‘뚜렷한 음성에’라고 둥글 원(圓)자를 ‘뚜렷하다’라고 해석하는데 강당에서는 전통적으로 그렇게 해석했다. 그런 것을 오랜만에 한번 짚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항상 상자를 떳떳하다라고 하는데, 떳떳하지 못하는 걸 뭐라 하는가? 덧없다 해서 무상하다 이렇게 얘기한다. 떳떳함이 없다. 무상하다.
응당할 응자를 ‘뻑뻑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아무리 어려도 소화가 안 되었다.
그냥 ‘마땅히’라고 하지 왜 자꾸 ‘뻑뻑이 뻑뻑이’ ‘강주스님이 자꾸 뻑뻑이라 새기는가?’
요즘은 그렇게 잘 안 새긴다.
입승스님이나 우리 어릴 때는 전부 ‘뻑뻑이 떳떳이 시로곰’ 해서 이상하게 많이 새겼다.
해료부사의음성어언고(解了不思議音聲語言故)며 : 해료, 앞에 요지나 똑같은 말이다. 부사의한 음성과 말을 이해하는 연고이고, 여기까지 잘 듣고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하나 펼쳐 나간다.
삼세다라니(三世陀羅尼)니 : 삼세다라니니
연설삼세불가사의제불법고(演說三世不可思議諸佛法故)며 : 삼세의 부사의한 부처님 법을 연설하는 연고며
종종변재다라니(種種辯才陀羅尼)니 : 종종변재다라니니, 이 부분하고 십무진장품하고도 비교해볼 수 있다.
다른 부분은 다른 부분대로 십회향품도 있지만 화엄경을 앞뒤로 살살 비교해 보면 굳이 참고서나 해설서를 빌리지 않더라도 화엄경 자체내에서 우리가 가야 될 수행의 길을 잘 제시해 준다.
예를 들자면 기신론 같은 경우는 진제삼장과 실차난타 번역이 있다. 이 두 번역만 비교해도 그 자체에서 해석되는 것이 많다.
화엄경 같은 경우도 입법계품 같은 경우 40화엄경 80화엄경 60화엄경 세 종류를 놓고 비교하다 보면 ‘아 60화엄경은 여기까지 번역했구나’ 하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가슴 만(卍)자를 본다면, 60화엄경에서는 입법계품에서 가슴 만자를 번역하지 않는다. 80화엄경에는 가슴 만자를 써놨다. 60화엄경에는 ‘아 만자를 덕자로 써놨구나’ 큰 덕(德)자 있잖은가. ‘덕자인데 이건 80화엄에서는 만자다’ 60화엄에는 이렇게 보고, 80화엄은 이렇게 보고 ‘40 화엄경에는 또 사라졌네. 절 만자가 없구나’ 60화엄경, 80화엄경을 똑같이 놓고 보면 그런 것들이 보인다.
여러분께서도 아마 그렇게 보시는 게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다른 강사들이 해석해 주는 것도 있지만 본인이 조금 더 세밀하게 다듬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금강경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우리가 금강경 6역본을 보는데, 구마라지바, 보리유지, 진제삼장, 달마급다, 현장법사, 의정스님의 본들이다.
‘아 현장법사는 이만큼 번역을 하셨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시아문 일시불’로 해서 ‘부처님께서 대중을 대면하고 앉아계셨다’ 이런 대목이 나오잖는가?
구마라지바 본은 대면이 아니고 그냥 ‘세존이 부좌이좌’하고 끝이다. 이걸 왜 생략했을까? 넣어놨을까?
현장조사는 거의 정확하게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인도식으로 옮겨놓고, 구마라지바는 중국의 식성에 맞춰서 살짝 줄여놓았다.
그래서 금강경 같은 경우, 다른 분의 해설을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그 원문만 가지고 비교해 봐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서 반야심경도 구마라지바가 번역한 것과 현장법사가 번역한 것은 조금씩 다르다.
우리는 현장법사 번역을 거의 많이 쓰잖는가?
반야심경 7역본을 가지고 딱 갖다 대놓으면 ‘아 이것은 누가 어떻게 줄였다 늘였다’ 가 나온다.
금강경도 현장법사는 선현기청이라고 해서 수보리를 선현(善現)이라고 번역했다. 달마급다는 선실(善實)이라, 열매 실자로 번역했다. 의정스님은 묘생(妙生)이라고 번역했고, 구마라지바는 수보리라고 번역했고, 보리유지도 수보리라 번역하고, 진제스님도 수보리라고 인도말 그대로 번역했다.
달마급다스님은 선실이다, 라고 했지만, 그걸 보고 현장스님은 양이 안 차서 선현이라고 했다. 현장스님의 선현을 보고도 양이 안 차니까 의정스님은 묘할 묘자 묘생(妙生)이다, 이렇게 수보리의 이름을 의역으로 번역해버렸다.
그런 것을 보고 우리는 ‘수보리라는 말이 이렇게 선실이다 선현이다 잘 나타났다. 참으로 진실되다, 참으로 잘 나타났다. 묘하게 생겼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진실된 것은 진공이구나 해공제일(解空第一)이구나’ 이렇게 유추할 수 있다.
‘아 진공의 묘이구나 묘생이구나’ 번역본만 비교해 보고서 이렇게 예를 들자면 답을 많이 찾을 수가 있다.
그분들은 다 훌륭한 삼장들이기 때문에 굳이 후대의 이 머리도 안 돌아가는 사람들이, 뻑뻑한 사람들이 냄새나는 입으로, 입에 침을 튀기면서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옛날 대장경에 있는 본 그대로 참고하는 게 낫다.
불교 연구는 이미 대장경 속에서 다 끝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확실히 끝나 있다. 더이상 박사 안 받아도 된다. 그걸 잘 찾아서 우리가 연구해서 다듬어서 보면 화엄경이든 다른 경전이든 얼마든지 경전속에 갈 길이 제시돼 있다. 문제는 한문이 딸리니까 그것이 아주 큰 문제다.
그런데 대장경에 나오는 한문은 한 6개월 정도만 공부하면 아무리 머리 나쁜 돌대가리라도 뚫을 수가 있다. 거짓말 아니고 딱 6개월이다.
6개월만 야무지게 보면 가능하다. 불교 경전 한문은 굉장히 쉽다. 6개월 해가지고 안 되는 분들은 ‘나는 돌대가리’이러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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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무변제불법고(演說無邊諸佛法故)며 :갖가지 그지없는 부처님의 법을 연설하는 연고이고
출생무애이다라니(出生無礙耳陀羅尼)니 : 출생무애이다라니, 여기 또 나온다. 걸림 없는 귀를 내는 다라니다. 무애이(無礙耳)는 걸림 없는 귀인데 우리는 오만 소리에 다 걸리잖는가. 달콤한 소리에 걸리고, 쓴소리에 걸리고, 얼마나 말을 안 들으면 여기 무애이(無礙耳)라고 거품을 물고 써놨겠는가.
불가설불소설지법(不可說佛所說之法)을 :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능문고(悉能聞故)며 : 모두 듣는 연고다. 유위의 귀로써 무위의 법을 들으려고 하니까 거기에 법이 들어갈 리 없다. 답답하다. 바늘구멍만큼도 귓구멍이 안 뚫려있다. 말 안 듣는다. 맨날 결석이나 하고 오늘 결석 되게 욕한다.
일체불법다라니(一切佛法陀羅尼)니 :일체의 모든 불법 다라니로
안주여래력무외고(安住如來力無畏故)라 : 여래의 힘과 두려움이 없는 데 머무는 연고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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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모든 보살이
욕득차법(欲得此法)인댄 : 이 법을 확실하게 증득하고자 하려거든
당근수학(當勤修學)이니라 : 당근 마땅히 뻑뻑이 부지런히 닦고 배울지니라.
(20) 菩薩의 十種佛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說十種佛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成正覺佛과 願佛과 業報佛과 住持佛과 涅槃佛과 法界佛과 心佛과 三昧佛과 本性佛과 隨樂佛이니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부처님을 말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정각(正覺)을 이루는 부처님과, 서원(誓願)의 부처님과, 업보(業報)의 부처님과, 머물러 지니는[住持] 부처님과, 열반한 부처님과, 법계(法界)인 부처님과, 마음 부처님과, 삼매 부처님과, 본성품 부처님과, 따라 즐기는 부처님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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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불(十種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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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의 부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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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설십종불(說十種佛)하나니 : 열 가지 부처님을 말하나니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이냐
소위성정각불(所謂成正覺佛)과 : 이른바 뭐니 뭐니 해도 성정각이 최고이지 않은가. 성정각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부처, 여기서 정각을 보이는 부처다, 시성정각이라고 보일 시(示)자를 쓰기도 하고 비로소 시(始)자를 쓰기도 한다. 보리신(菩提身)이다.
원불(願佛)과 : 원불과 서원의 부처님, 저 앞에서 나왔던 도솔천에 태어난다든지 그런 것과 똑같다.
업보불(業報佛)과 : 업보불과 업보의 부처님. 부처님의 업은 무엇인가? 우리가 미혹할 때, 좀 어두울 때는 무조건 뭘 해야 되는가? 바라밀행을 해야 된다.
보현행원품, 지금은 이세간품인데 전부 다 만행무궁이라고 한다. 만행을 업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업은 만행이다. 바라밀행이다.
도라고 하는 것은 32상 80종호가 바라밀행의 공덕으로 인해서 원만하게 체득된 것을 ‘업보’라고 한다.
그래 중생의 업보는 무엇인가?
못된 짓을 해서 과보를 받는 업보중생이라 흔히 이야기하잖는가. 또 여기 보신불 하는데 보신불이 업보불이다.
무슨 업을 지어서 보신이 됐는가? 바라밀의 행을 지었다.
부처님의 바라밀행이라고 하는 것이, 법성이 본래 없는데 지을 수 있느냐? 짓는 것은 아니다. 무작무위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이고 여기는 중생의 수준에 맞춰서 보여줘야 되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신 길을 업보불이라고 해놓았다.
주지불(住持佛)과 : 주지불과 주지는 딱 부처님인가 보다.
부처님은 자신이 항상 가지고 있는 가치가 있다.
부처님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치가 뭔가? 사리불이라고 한다. 주지사리. 사리를 부처님의 법력을 나타내는 상징에서 역지라고 한다. 역가지, 가지, 역지 하는 것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열반불(涅槃佛)과 : 열반불이라고 하는 것은 적멸을 보여서 중생을 교화한다, 화신불이라고 한다. 열반불, 보신불, 화신불 이렇게 변화해서 중생을 교화한다.
중생을 교화하려면 반드시 뭘 보여야 되는가? 열반의 모습이다. 그래서 부처님 열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장엄이라고 한다.
우리 어른스님이 17만 권, 18만 권 찍으셔서 보시하고 있는 성엄스님의 <108자재어>에 보면 그 대목이 나와서 인상 깊다.
어느날 (2014년), 법전 종정스님이 열반하셔서 해인사에서 어른스님이 불교방송과 인터뷰하실 때 “오늘 이렇게 큰스님 열반하신 데 대해서 스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니까 스님께서는 “이렇게 거룩하신 열반을 꼭 슬퍼할 일만은 아닙니다. 장엄불사입니다.”
저는 옆에 있다가 ‘저건 108자재어에 나온 이야기인데’ 했다.
<108자재어>에서 성엄스님이 그랬다.
열반도 장엄불사이고, 열반뿐만 아니라 팔상성도가 전부 장엄불사다.
내일모레가 부처님 탄신일이잖은가.
잘 아시겠지만 4월 8일 딱 잘라서, 보름달이 아니고 반달, 그러면 출가하신 날은 2월 8일 반달 상현달 그다음에 성불을 하신 날도 12월 8일 반달 뜨는 날이다. 그리고 열반하신 날은 2월 15일 보름이라고 기록을 해놨다.
법성게도 살펴보면 여기 글자들가운데 법(法)자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돌아가는데 하나 둘 셋 넷 열 다섯 개, 보름이다. 이쪽에 15개다.
여기서 하나 둘 셋.. 여덟 번째가 중간이다. 중간 글자가 무엇인가? 법(法)자다. 의법출생이라. 법자가 제일 중요하다.
법자 밑에는 뭐가 있겠는가? 구래부동명위불, 부처님이 제일 중앙에 있다. 그 위로 7자이고 밑으로 7자다. 법자를 중심으로 좌측으로 7자, 우측으로 7자 아주 치밀하게 해놓았다.
그래서 이 법성도는 천년부적이다.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돈이 된다. 흔히 돈오돈수라고 한다.
화엄일승을 돈오돈수라 한다.
법계불(法界佛)과 : 법계인 부처와, 법계불, 법계는 진짜이고 진짜는 무루다. 진무루계 진법계라 한다.
심불(心佛)과 : 마음부처는 무엇인가? 일체유심조 오직 마음을 의지해서 있는 까닭으로, 이렇게 된다. 마음을 조복 받는 것이 가장 수승한 것이다.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이닛고 하는 것이 있잖은가.
항복이 바로 증득이다.
주수항(住修降)이라고 하지 않는가.
신해행증(信解行證)하듯이 처음에 신(信)은 신심, 발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발심하면 주다. 응운하주(應云何住), 주(住)는 잘 버티는 것이다. 수행이 있어야 된다.
잘 이해했으면 수행을 해야 된다. 수행을 해서 항복을 받는다. 금강경에 보면 주수항 세 가지가 현장본에 다 나온다.
현장본에 보면 ‘어떻게 머무르고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항복 받습니까?’ 세 가지인데 구마라지바는 수행하는 걸 빼먹었다. 생략되어 있다.
금강경 본문에는 주수항으로 되어있다.
어떻게 내가 버티고 어떻게 닦고 어떻게 항복 받느냐? 구체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데 구마라지바는 수(修)자를 빼먹었다.
현장본에는 수(修)자가 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무착보살이 81개로써, 금강경을 18주를 가지고 설명할 때에, ‘불교의 수행은 신심이 앞에서 근본으로 딱 자리 잡고 있고, 그 뒤에는 주수항으로 간다. 해행증으로 간다’ 이런 말씀이다.
증(證)이라고 하는 것이 항복받았다, 조복받았다, 이런 뜻이다.
여기 심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완전히 조복 받은 상태다.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 그걸 뜻하는 것이다.
마음은 어떻게 조복 받는가?
스님들도 조금 어설퍼도 제 말씀을 한번 따라해 보자.
“자심항마(慈心降魔)”
(대중 : 자심항마)
자비로운 마음이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잖는가. 우리 화엄경에서는 청량국사가 자심항마라고 해놓았다.
‘마장을 어떻게 항복 받습니까?’
‘자비로운 마음이 있으면 마장을 항복 받는다’
자비로운 마음이 뭐냐? 삼매의 근본이 자비심이다.
탐진치가 많은 사람은 절대 삼매에 못 들어 간다. 설사 삼매에 들어가도 그 사람은 명예나 이익을 쫓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분들은 주로 옷을 빳빳하게 풀옵션으로 입는다. 삼매로 간 사람들은 잘 다리지도 않고 옷이 후줄근하다. 삼매는 옷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옷이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은 옷만 보면 금방 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추접스럽게 입지는 말자.
그다음에 나왔잖은가.
삼매불(三昧佛)과 : 삼매불.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심항마, 여러분들 내일모레 바쁜 데도 오셨기 때문에 오늘 비싼 것 몇 개 했다.
사실 내가 아껴놓고 안 내놓던 것이다. 너무 아까워서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한다.삼매불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태를 이야기하는가?
허공이 늘 요동치는 것 없이 삼매듯이, 항상 일정하고,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항상 일정하기 때문에 무량한 집착이 없기 때문에 복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삼매불이라 한다.
그럼 왜 복덕을 삼매불이라 하는가? 청량국사는 이렇게 해석해 놓았다.
‘반드시 삼매에 들어서 입정수가(入定授加) 가피를 받아야 된다’
9회차 설법까지 계속 그 논리로 나온다.
입정수가, 기정출정설법(起定出定說法) 많이 들어봤잖은가?
그럼 설법은 누가 할 수 있는가? 삼매에서 가피를 받은 사람이 설법을 할 수 있다.
삼매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야 된다. 부처님 가피를 어떻게 받는가?
신구의 삼업이 정삼업 진언이 된 사람이, 정삼업, 삼업이 정(靜)해진다. 조금 이따 보면 청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다.
삼업청정이다.
‘삼업이 청정해졌을 때 나와서 삼업에 대해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여줄 수가 있다’ 이렇게 나온다.
삼매라고 하는 것은 자비가 근본이 돼야 하고, 심불이라고 하는 것도 자비로운 마음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 자심항마다.
그런데 마구니 중에도 무식한 마구니는 항마진언을 못 알아듣는다고 한다. 마구니가 무식하면 항마진언을 해도 소용이 없다.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난감하다. 항마진언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른다니 그럴 때는 대방광불화엄경이 아니라 대강광불화엄경이다. 대강하는 것이다.
본성불(本性佛)과 : 본성불과 본래의 성품의 부처, 이것은 본성을 여지없이 알아서 대원경지(大圓鏡智)에 가서 친소가 딱 끊어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똑같다. 동일법신이다. 평등성지(平等性智) 이런 것을 확실히 깨쳤다.
수락불(隨樂佛)이니 : 수락불이라 남들의 즐거움을 따라서 같이 즐거워한다.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같이 좋아한다.
남이 좋아하면 그 자리에 언제든지 나타나 주는 것이다.
가자 하면 가고, 오자 하면 오고, 앉으라면 앉고, 서라 하면 선다. 그런데 말 안 듣는 사람은 앉으라 하면 서고, 청개구리 삼신도 아니고 맨날 오라 하면 안 오고, 시간만 되면 남 욕한다. 수락불이라고 하는 것, 흔히 좋은 데를 따라간다고 하는 것을 의생신(意生身)이라고 한다.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허공신 중생신 하잖는가. 의생 그때 뜻은 무슨 뜻인가?
불수자성수연성 인연 따라서, 수연(隨緣)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말로는 수동(隨動)이라고도 하고 그 움직임을 따라서 수염(隨染)이라고도 한다. 물들 염자 있잖은가.
수연 수동 수염 또 수상(隨相) 십회향품에 보면 수상이라고 한다. 상을 따라간다.
그런데 따라가도 따라가는 바는 없지만 그거 다 따라가기 때문에 거기서 일체유심조로 일어나는 법신을 뭐라고 하는가?
그 부처님을 의생신이다, 라고 한다.
시위십(是爲十)이니라 : 시위십이다.
십신은 이렇게 해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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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聞持陀羅尼...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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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