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당신과 나는 하나입니다.
연결성 - 일체성을 느낍니다.
신에 내맡김을 통해 겸손함을 배웁니다.
영적의도, 몰두, 헌신, 예배
그리고 신에 내맡김
이제 의식지도를 갖고 각 의식의 단계들과 이 단계들에 동반되는 감정, 세계관, 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교해보자. 의식의 맨아래에는 죄책감(30)이라는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있다. 이 장은 자기 혐오와 자기파괴의 세계다. 이 단계의 사람은 죄책감으로 사로잡혀 있으며 세계를 고통과 죄로 가득한 곳으로 본다. 이런 세상을 지배하는 신을 이들이 어떤 존재로 볼지 짐작이 될 것이다. 집단 무의식 속에 뿌리박혀 있는 죄책감으로 이들은 신을 인간의 궁극적인 파괴자로 본다. 지진이나 화산분출, 홍수, 역병같은 것으로 인간을 징벌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신이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은 이 안에서 고통을 받다가 지옥불속으로 영원히 내던져진다고 본다. 이것이야 말로 그럴법한 최악의 시나리오다.
희망없음과 에너지 상실의 단계인 무감정(50)의 장으로 올라가면 세상과 삶을 상대적으로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본다. 이로 인해 유명한 철학자 들 중에는 인간은 아무존재도 아니고, 신은 죽었으며, 이 세상은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한 이들도 있다. 이 단계에서는 신은 죽었거나 적어도 인간의 고통에 잔인할 정도로 무관심하다고 본다.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자각의 정도가 향상되면 슬픔(75)의 단계로 올라간다. 이 단계에서도 사람들은 세계와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다. 후회와 상실감, 의존심, 낙담 등의 감정에 빠진다. 슬픔의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이 세상이 슬픈곳이라고 생각한다. 노인을 보면 늙는다는 것의 슬픔을 생각하고 어린아이들을 보면 이 약하고 천진한 아이들이 살면서 겪게될 슬픈 일들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한다. 신문을 펼치고서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슬픈일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슬픔의 단계에 어울리는 신은 아마 그들을 무시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가치없는 존재라 느끼고 '난 벌레같은 인간이야'. 신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리가 없어.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 나를 무시하기만 할거야라고 말한다.
그럼 두려움(100)의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이들은 두려움의 창조자이자 소유자, 근원이다. 걱정과 근심, 공포, 낮은 자기존중감 탓에 세상을 무서운 곳으로 본다. 거리를 걸을때도 도처에서 위험을 감지한다. 신문도 불안한 마음으로 펼쳐들고 파산이나 살인같은 기사에 집중한다. 거리를 걸을때도 자동차 사고에 초점을 맞추며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처럼 겁에 질린 의식의 장에서는 신도 징벌을 일삼는 존재로 바라본다. 인간을 정말로 증오해서 끝없는 악몽같은 세계속으로 던져버리는 존재말이다. 그리고 이런 악몽의 창조자도 물론 복수와 응징을 일삼는 가혹한 처벌자 즉 신이라고 생각한다.
명치의 영역인 욕망(125)의 단계로 올라가면 갈망과 바람이 강해진다. 새미소사(도미니카 출신의 야구선수)를 달리게 만든 것도 이런 욕망이다. 하지만 욕망을 충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을 얻어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만장자도 500만달러를 갖고 있으면 600만달러를, 600만달러를 가지면 700만달러를 원한다. 이런 사람은 결코 끝에 다다르지 못한다. 이들의 욕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늙어서 일도 안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해도 피해망상증에 걸려 세상이 자신을 적대시한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행복은 125가 아닌 500의 단계에서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더욱 많은 것을 갖고 싶은 욕망과 갈망에 갇혀 있다. 그래서 세상을 좌절감을 안겨주는 곳으로 본다. 언제나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세상은 이것을 항상 뒤로 숨기는 것만 같다. 보석상의 진열장을 바라볼때면 이런 갈망이 튀어나와 보석들을 갖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이런 사람들은 결핍감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다. 보석을 가지면 만족감은 얻지만 행복을 느끼지는 못한다. 일시적인 만족감만 경험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신은 어떤 존재일까? 이들은 신이 있어도 자신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다. 자신은 자신대로 신은 신대로 아무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좌절감을 안겨주는 이 욕망의 세계에서는 격앙된 감정이 분노나 증오, 불만, 전쟁, 살인을 낳는다.
분노(150)에 휩싸인 사람의 과도한 팽창은 혈관의 돌출로 나타나며, 내면의 분노한 동물이 불쑥 올라와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경쟁적인 곳으로 본다. 누군가 자신의 가계 근처에 중고차 매장을 열면 상대가 자신의 가게를 망하게 할 것이라며 분개한다. 아직 화합의 세계로 나가지 못해서 근처에 중고차 매장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도처에서 더 많이 몰려들어 사업이 번창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화합은 커녕 경쟁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극단적이며 사람들에게 적대적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은 보복을 일삼는 존재이다. 처벙과 응징, 보복을 일삼는 존재로 신을 보는 것이다. 나는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는 신, 네게도 필히 복수를 하고 말리라. 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신을 자신에게 복수를 감행하려는 적으로 인식한다. 이런 분노의 에너지 장에서 어떻게 심신을 이완하고 모종의 자각에 이를 수 있겠는가?
분노에서 자부심의 단계(175)로 올라가면 부정과 오만, 경멸같은 부정적인 면이 나타난다. 의식속에서는 팽창의 과정이 일어난다.이런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신분을 중시하는 곳이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거리를 걸어도 그는 단순히 누군가의 차가 캐딜락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차의 연식과 모델까지 눈여겨본다. 나는 캐딜락에 여러 모델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캐디(캐딜락의 구어체표현)도 캐디(골프보조)를 가리키는 말인줄 알았다. 지금은 이름을 잃어버렸지만 캐딜락에도 여러모델이 있으며 등급도 다 다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날때 상대의 지위에 관심을 갖는다. 오 그는 어디어디 사장이야 나 그는 육체노동자에 지나지 않아라는 식으로 판단한다. 부가 이들에게 주는 것도 돈이 아니라 신분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볼까? 선택은 두가지일 것이다. 우선 부정과 지적인 오만으로 이들의 좌뇌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혹은 자신의 입장은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전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들은 회의주의나 심한 편견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내 종교관이 옳아. 그러니까 네가 틀린게 분명해"라는 생각은 모든 종교전쟁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자부심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대립적인 생각을 갖게 만든다. 또 자부심의 단계에 동반되는 불안은 사람을 방어적으로 만든다. 이 단계의 사람은 이기지 않으면 지는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용기의 단계(200)로 올라가면 처음으로 적절한 태도를 갖는다. 직시하고 이겨내고 해결할 수 있게되며 자신에 대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 덕분에 힘도 얻는다. 용기의 단계에서는 거리를 걸을때도 도전의식을 일깨우는 흥미진진한 기회의 세계를 본다. 성장과 배움, 팽창을 가능하게 해주는 짜릿한 세계에서 타인들의 성장을 지켜봐준다. 이 단계에서는 또 자신의 공간을 확장시키는데서 내적인 기쁨도 맛본다. 미합중국과 서부에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온갖 거대산업체들과 과학 기업체들이 생겨날 수있었던 것도 이 용기 덕분이었다. 용기는 우리를 달로 인도하기도 했다. 요컨대 이 단계에서는 성장과 팽창이 일어난다. 이런 의식단계의 신은 어떤 존재일까? 이 의식단계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마음을 갖는다. 자신이 답을 안다고 오만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복수심에 불타는 부정적인 태도에 동조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그런게 정말 있는지 궁금해. 개인적인 자기보다 더욱 큰 어떤 존재가 정말로 있는지 알고 싶어. 마음을 열고 이것에 대해 배워야겠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세상을 대할 때처럼 신이라는 의문을 즐거운 탐구의 존재로 받아들인다. 영적인 공부가 정말로 재미있는 일임을 깨닫고 공부를 통해 흥미롭고도 유익한 사실들을 발견한다.
다음의 중립단계(250)에서는 무집착을 경험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일자리를얻어도 좋고 그렇지 못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지배받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힘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세상도 더 이상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 사람이 내 삶에 머물러 준다면 정말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해도 함께 할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더이상 두려움속에 살지 않으며 어느정도 낙관성 속으로 진입했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시각도 낙관적이다. 이런 낙관적인 세상에서는 신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신이 있다면 좋은 일이야. 없어도 문제없어라고 여기면서 신에 대해서 온당한 태도를 견지한다. 신이 있다면 그는 공평한 존재일 거야.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렇지 않아도 문제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발성의 단계(310)에서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삶을 받아들인다. 나도 합류할 거야. 나도 동조할거야. 생각을 같이할 거야라고 말한다. 또 도움을 주려는 자발적인 의지와 분명한 행복감을 경험하고 세상을 호의적으로 본다. 거리낌없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세상도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걸을때도 사람들이 상냥할 것 같다고 느낀다. 할머니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 날씨 정말 좋네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아. 아침 내내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어. 정말 좋은 날씨야" 세상을 우호적인 곳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신도 희망을 주는 믿음직한 존재로 여긴다. 호의적인 세상의 신은 호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종교가 없어도 신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신을 안믿는 경우에도 호의적인 자세로 이렇게 말한다. "음 신이 있다면 할머니처럼 따뜻할 거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이유로 나를 지옥 불구덩이에 던져넣지는 않을거야.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낸 것은 그분이니까. 그분이 직접 손으로 나를 빚어냈으니까 그런 신이 어떻게 그럴수 있겠어?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왜 불행하게 만들겠어? 이렇게 신을 확고히 신뢰한다.
수용의 단계(350)으로 올라가면 자신이 가진 힘의 근원이 자신임을 인정한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행복의 창조자가 된다. 의식의 이런 변화로 스스로 적합한 존재라는 느낌과 자신감을 얻는다. 자연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화롭다. 거리를 걸을때도 모든 것들이 미묘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음을 확인한다. 모든 것들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본래의 자기로 존재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낀다. 노숙자 여인이 그 자리에 있는 것도 그녀 스스로 노숙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노숙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선택했다. 이런 시각덕분에 외부의 것들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세상이 조화를 표현하고 있음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조화로운 세상에서는 신도 자비롭고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한다. 수용의 결과로 우리를 휘두르던 감정들이 고요해지고 나면,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처럼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느낌들에 방해받지 않고 지속적인 능력과 분별력, 이성을 더욱 활발히 사용할 수 있는 길이 분명하게 보인다. 왜곡과 산만함에서 자유로워진 덕분에 400대의 의식수준에서 나타나는 추상적인 사고와 학술적인 연구같은 고차원저인 학습과 교육의 이점, 논리를 활용할 정도로 마음이 맑아진다. 이 단계는 증거와 입증을 중시하는 뉴턴식 패러다임에 기초한 과학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속해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레이트 북스"와 같은 책과 뉴턴, 아인슈타인, 프로이트같은 유명한 천재들도 이 400대에 존재한다.
400대의 의식단계에서는 전전두엽피질의 사용이 극대화되서 개인적인 힘이 현저하게 증가한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들은 전전두엽피질을 활용해서 거친 감정보다는 이성과 논리라는 도구로 두려움과 걱정, 불안을 다룬다. 세상도 덜 두려운 곳으로 여기고 아이처럼 거칠게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한층 성숙하고 고차원적인 차원에서 세상의 위험을 이해한다. 이로인해 우리의 마음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현실을 검증할 수 있는 능력과 균형에 이르기 위해 안전장치와 제한선을 발견한다.
이처럼 선한 의지와 이성적인 세계관 덕분에 내면의 불안은 줄어들고 두뇌의 생리작용과 목적도 변한다. 따라서 500의 의식단계에서 삶의 주요한 원리로 사랑이 등장한다. 자기도취적인 에고의 핵심에 지배받는 낮은 차원의 의식과는 대도적으로 이 단계에서는 타인들의 안녕과 관계를 가꾸는일이 가장 주요한 관심사로 떠오른다.
여기에서 더 진화하면 사랑은 이제 무조건적인 것(540)이 된다. 이로써 영적인 지복과 평화를 경험하는 더욱 고차원적인 영적단계(600)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인다. 이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속에서 더욱 위로 올라가면 생명을 부양하고 지지해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형태가 나타난다. 기꺼이 용서함에 따라 초기적인 드러남도 일어난다. 더불어 엔도르핀이 분비되면서 도처에서 사랑을 보기 시작한다. 자연속에서도 동물들의 세계속에서도 사랑을 목격한다.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어린아이 같은 자연스러운 사랑을 본다. 아이처럼 사랑가득한 마음이 모든 이들의 내면에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감응하는 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내면에는 아이같이 순진무구하고 따스한 마음이 살아있다. 이런 마음은 움직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냉혹한 살인자도 사랑이 깊은 사람앞에서는 무해한 인간이 된다. 반대로 두려움에 떠는 사람앞에서는 공격할 마음이 일어나 실제로 공격을 가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깊은 사람은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경험한다. 신도 필연적으로 그의 의식수준과 같은 모습을 띠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의 존재로 인식한다. 이런 진실의 경험이 기쁨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기쁨은 의식의 변형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우리를 자비속으로 인도한다. 자비로운 사람은 내면의 고요함 덕분에 모든 존재들이 완벽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또한 창조자의 무조건적 사랑이 만들어낸 일체성을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형태는 달라도 모든 생명들이 신성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자각속세어 지복과 무한한 평화를 느끼는 빛비춤과 깨달음의 상태속으로 들어간다. 이 상태에 들어가면 창조물들의 완전한 일체성으로 인해 신을 존재 자체의 핵심으로 자각한다.
산속에서 방울뱀을 마주보고 서있을때 우리 둘을 무한한 평화와 일체성속에 취한 듯 못박아 두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살아있음의 상태속에서 방울뱀과 나의 생명은 별개의 둘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나인 것 같았다. 일체성의 본질이 우리 둘을 통제해 주고, 둘인것처럼 보이는 방울뱀과 나를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 주고 있었다. 진실로 오로지 하나의 경험만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의 경험이 둘을 통해 경험되고 있었거나 둘이 서로 일체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할 수있다. 그러므로 공격할 생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경험의 에너지 장이 이미 상위단계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신적인 평화라고 말하는 느낌이 우리를 감싸주었다. 사실 감정에는 사랑과 두려움 두가지만 존재하며, 사랑 아래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전부 두려움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가르침도 있다. 도덕적 잘못에 대한 두려움이나 생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존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행복의 근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 등 온갖 형태의 두려움이 있다.
감정에는 정말로 두가지 표현밖에 없다. 사랑은 500에서 시작돼 무한히 자라나고 두려움은 100에서 시작돼 아래를 향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루려면 이런 내면의 두려움을 다룰 힘이 우리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가 두려움의 근원임을 깨달으며 이 두려움을 세상이나 신에게 투사시키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누구도 두려운 세상을 만들지 않았으며 두려운 세상같은 것은 없다. 두려운 세상은 우리안에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두려움 자체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사랑의 현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