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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孝禮,전통文化 스크랩 [역사인물] 동방오현
새벽(看齋) 추천 0 조회 100 11.07.31 11: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방오현 <東方五賢 >



한훤당 김굉필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朝鮮前期)의 문신.성리학자(文臣. 性理學者)로서

자는 대유(大猶), 호는 한훤당(寒暄堂), 사옹(蓑翁). 관향은 서흥(瑞興).

단종(端宗)2년 한경 정릉 사제(漢京 貞陵洞 私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로서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소시에는 호방(豪放) 불기(不羈)하였으나 성장하면서 발분(發奮) 역학(力學)하였다.

점필재(점畢齋) 김종직문(金宗直門)에서 수업(受業)하면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자칭 소학동자(小學童子)라 하고 지난날의 허물을 깨달았다고 한다.

평생토록 소학(小學)을 독신(篤信)하여 삼십을 넘어서 경학(經學)을

섭렵(涉獵)하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성종 25년에 행의(行義)로써 천거(薦擧)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고,

연산군(燕山君) 2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다음해 형조좌랑(刑曺佐郞),

동 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남에

전사관(前史官) 탁영(濯瓔) 김일손(金馹孫), 소유(小游) 권오복(權五福) 등은

사사(賜死)되고 

이미 파계(他界)한 점필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한훤당(寒暄堂)도 점필재(점畢齋)의 문인으로 붕당(朋黨)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熙川)에  원방부처(遠方付處)로 유찬(流竄)되었다.

한훤당은 희천에 이르러서도 평시와 다름없이 학문연구와 후진강학(後進講學)에 전염(專念)하였다.


때마침 정암(靜庵)이 부친의 임소(任所)를 따라 어천(魚川)에 오게 되어

한훤당(寒暄堂)에게 수학하게 되니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정맥인

한훤당(寒暄堂)의 학문이 정암(靜庵)에게 전해졌다.

2년 뒤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고,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에 유적사사(留謫賜死)되었다.


그후 신원(伸寃)되어 중종 12년(1517)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고,

선조 10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광해군 2년에 일두(一두)·정암(靜庵)·회재(晦齋)·퇴계 (退溪)와 함께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로서는 경현록. 한훤당집. 가범(家範). 등이 있다.


                            


 

일두 정여창

1450(세종 32)∼1504(연산군 10)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자는 백욱(伯욱), 호는 일두(一두). 관향은 하동(河東).

세종32년 함양 덕곡리 개평(咸陽 德谷里 介坪)에서 태어났다.

함길도(咸吉道) 병마우후(兵馬虞候) 증 한성 좌부윤(贈漢城左府尹) 육을( 六乙)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친을 여이고 학업에 전념하여 한훤당(寒暄堂)과 함께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했으며,

경전(經典)을 공부하여 성리학(性理學)의 깊은 이치(理致)를 깨우쳐

역행천이(力行踐履)하여 명경독행(明經篤行)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성종 21년(14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뒤에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로 옮겨져서 동궁(東宮)을 보도하였으나

질시(嫉視)를 받아 안음(安陰)현감으로 외임(外任)되자

향리(鄕里)의 자제(子弟)들을 훈도하여 많은 제자를 키웠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좌(連坐)되어

경성으로 원찬(遠竄)되어 적소(謫所)에서 1504년 타계(他界)하였는데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중종 12년(1517) 정 포은(鄭圃隱)·김 한훤당(金寒暄堂)과 같이

동국(東國) 도학(道學)의 종(宗)으로 숭상(崇尙)되어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고,

뒤에 문헌(文獻)이라 시호(諡號)하였으며 문묘(文廟)에도 승무(陞무)되었다.


저서(著書)로 용학주소(庸學註疏)가 있었으나 사화(士禍) 때 불타 없어졌고

유집(遺集)이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찬(撰)한 문헌공 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한다.



정암 조광조

1482(성종 13)∼1519(중종 14)

조선(朝鮮) 중기의 문신 거유(文臣 巨儒)로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관향은 한양(漢陽).

개국공신(開國功臣) 온(溫)의 5세손으로 성종13년 한성부(漢成府)에서 태어났다. 


일직부터 학문에 뜻이 커서 과거(科擧)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

18세때 부친 원강(元綱)이 어천(魚川)찰방(察訪)으로 부임되었을 때

마침 한훤당 (寒暄堂 )이 희천(熙川)에 유찬(流竄)되어 있었기에 정암(靜庵)은

한훤당(寒暄堂)에게 종학(從學)하여 위학(爲學)의대방(大方)을 들었다.


그의 학문(學問)은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탐독(探讀)하고 경전(經典)을 연구하여

평거(平居)에도 관복(冠服)을 렴식(렴飾)하여 위의(威儀)가 정연(整然)하였으며,

출처(出處)와 제행(霽行)을 고훈(古訓)에 상고(詳考)하였다.


중종(中宗) 5년 진사과(進士科) 장원(壯元)에 들고

동 10년에 알성과(謁聖科)에 올라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제수(除授)되였다.

얼마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고 다시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차( 陞差)되었다.


중종은 유학(儒學)을 숭상(崇尙)하여 문치(文治)에 뜻을 기울였으므로

(靜庵)을 의중(倚重)하게 되니 정암 또한 감격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군덕(君德)을 향상시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實現)만이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중종의 특지(特旨)로써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면서,

일시에 많은 현사(賢士)를 발탁(拔擢)하여, 

적폐(積弊)를 개혁하고 선왕의 법도(法度)를 차츰 거행하려고 하였다.


선생은 현량과(賢良科)를 주청(奏請) 시행하여 학행겸비(學行兼備)의

현사(賢士)를 대거 등용(登用)케 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의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잘못 책록(策錄)된

인사들을 삭훈(削勳)하였다.

이에 격탁(激濁) 양청(揚淸)하는 신진사류(新進士類)와 훈구재상(勳舊 宰相)들이

감정이 대립(對立)하게 되었다.


이때 삭훈(削勳)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모함(謀陷)하여 사사(賜死)케하고

많은 사류(士類)가 함께 화(禍)를 당하였으니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그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에 시임 좌의정(左議政) 이명(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모두 신원(伸寃) 복권(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과 문정(文正)의 시호(諡號)가 내리고

문묘(文廟)에 종향되니 세칭(世稱)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했고 .

한훤당(寒暄堂).일두(一두).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를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회재 이언적

1491(성종 22)∼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관향은 여강(驪江).


성종 22년 경주 양좌촌(慶州 良佐村)에서 태어났다.

생원(生員)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이다.


연산(燕山) 8년에 구사재(舅四宰) 손중돈(孫仲暾)에게 취학(就學)하여

성리학을 익히고  늘 산사( 山寺)에 거처하면서  독서(讀書)에 열중(熱中)하였다.


중종(中宗) 9년(1514) 문과에 급제, 천관랑(天官郞)을 비롯한

인동현감(仁同 縣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밀양부사( 密陽府使) 등을 거쳐

동 25년(1530)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김안로(金安老)의 거용(擧用)에  극력 반대하다가 심언광(沈彦光) 등의

모략(謀略)으로 물러났다.

동 32년 김안로(金安老) 일파가 쫓겨난 뒤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과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하였다.


수천언(數千言)의 상소(上疏)를 올려 국가 대본(國家大本)과

정치 강령(政治綱領)을 논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가(特加)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과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고

인종(仁宗) 1년(1545)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 되었다.


이듬 해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사서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모함(謀陷)하여

강계(江界)에 천적(遷謫)되었다.

적소(謫所)에서 그의 절필(絶筆)인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29권을

집필중(執筆中) 완성하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써 타계(他界)하였는데,


1568년 선조 즉위시(宣祖 卽位時) 시임(時任) 좌의정 이명(左議政 李蓂)의

초계 주청(初啓奏請)으로 신원 복권(伸寃 復權)되어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다음 해 문원(文元)이라 증시(贈諡)되었다.


선조 6년,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제향되고,

광해군(光海君) 2년(1610)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그의 주리(主理) 학설은 퇴계(退溪)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28세 때에 선배학자(先輩學者)인 손숙동(孫叔暾)과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의

수삼차(數三次)에 걸친 무극(無極)·태극(太極)에 관하여 벌린 논쟁(論爭)에

뛰어 든 것은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大論爭)이라 한다.


후에 율곡(栗谷)은 선생을 한훤당(寒暄堂)·  일두(一두)· 정암(靜庵)과 함께 동방 사현(東方 四賢)으로 추모(追慕)하였다.


저서로서는 봉선잡의(奉先雜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진수팔규(進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 대학혹문(續 大學或問) 등이 있다.



퇴계 이황 先生

연산군 7년(1501)∼선조 3년(1571)

조선(朝鮮)의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자(字)는 경호(景浩).

호(號)는 퇴계(退溪) 또는 퇴도만은(退陶晩隱).

시호(諡號)는 문순공(文純公)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연산 7년 진사(進士) 식(埴)의 7자 1녀 중

끝으로 경상도 안동예안(安東 禮安) 온혜(溫惠)에서 출생하였다.


생후 7월에 부친을 여이고 숙부 우(호 松齋 ;生員·文科·戶曹參判; 靑海君)에게

수학(修學)하였으며, 

중종(中宗)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 교리(校理) 전한(典翰)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파직(罷職) 되었다가 다시 복직(復職)되었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곧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몰두(沒頭)하였다.


학문(學問)의 명성(名聲)이 높아지자 사방에서 학자(學者)들이 찾아와서

그의 학문을 배워 많은 석학(碩學)이 배출(輩出)되였다.                    


명종(明宗) 초에 단양과 풍기군수 등 지방관직을 거치고 이어

대사성(大司成), 부제학 (副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제학(大提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좌찬성(左贊成) 등 중요 관직을 차례로 제수(除授) 되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어, 대부분(전후 70여 차례) 사양(辭讓)하였다,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던 때(1550년) 

순흥(順興)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主享; 文正公 安珦 )에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을 하사(下賜) 받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까지 받아 첫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게 한 바 있다.


학문은 공맹학(孔孟學)을 바탕으로 하고

성리학(性理學) 특히, 정주학(程朱學)을 계승(繼承)하여

심화(深化)시킴으로서 조선유학(朝鮮儒學)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主張)하였으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왕에게 올렸다.

사후(死後)에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이 내려지는 한편

대신(大臣)의 예우에 따른 장례가 치러졌다.


광해(光海) 2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 40여 서원(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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