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피리 / 하재열
한입 가득 살구 향이 번진다. 새콤달콤한 즙액이 아련한 기억 저편의 맛을 불러낸다. 고향 마을 채마밭 둔덕 살구나무 아래서 주워 먹던 바로 그 맛이다. 집 뒤의 공원 둘레길 살구나무에서 떨어진 거다. 세 개나 주워 길옆 수도꼭지 물에 씻어 쥐고는 걸으면서 입에 문다.
올핸 맛이 제맛이다. 아내에게 하나 가져다줄까 하다가 이전의 핀잔에 붙들려 마음만 내고 만다. 개도 다니는 길가 흙더미에 떨어진 걸 어떻게 입에 넣을 생각을 하느냐고 했다. 더구나 매연이며 미세먼지까지 잔뜩 묻어있을 텐데 하는 마뜩잖은 눈총에 머쓱해지고 말았다. 내 옛 추억도 함께 손에 쥐여 주려 했던 터였다.
아파트 단지를 만들 때 심어놓은 한 그루가 우람하게 컸다. 수 해 전부터 맺기 시작한 열매가 해거리하는지 올핸 유난히 탐스럽다. 해마다 6월 이때쯤이면 길 돌면서 살구 맛을 본다. 옆지기가 못마땅해하거나 말거나 또 줍는다. 천생 촌놈이다. 한번은 잠이 깬 새벽에 살구가 떠올라 많이 떨어졌으려니 싶어 나가보았다. 벌써 먼저 나온 이가 서넛이다. 모두 희끗희끗하다. 비로소 낮에도 살구에 손을 대는 젊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다. 몇 개 주워 들고도 높은 가지에 매달린 걸 털어내려 돌팔매질하는 이를 보고는 히득히득 서로 웃는다. 각자의 고향 살구를 따던 때의 일을 되새김하는 눈치다. 아련한 그 땅과 바람의 냄새를 기억해내려는 듯이.
이제는 모두 사다 먹는 살구만 살구인 줄 안다. 이러니 어찌 떨어져 실금이 가고 더러는 으깨진 살구를 주워 먹는 맛을 알랴. 흙이 묻고 그보다 더한 것이 묻어도 개울물에 쓱 헹구고는 입에 물던 그 맛을.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내는 그걸 어찌 알랴. 그건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늘 걱정을 붙인다. 산에 올라도 산딸기나 오디 하며 야생의 것을 스스럼없이 따먹는 날 보고는 배탈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한다. 가산산성 산발치 옛 집터의 살구나무에 해마다 끌린다. 고목이 된 채로도 여전히 살구를 떨구며 나 같은 시세에 처진 사람들을 붙든다.
태초에 사람의 입은 땅에 떨어진 과일도 주워 먹었던 거 아닌가. 그 원초적 욕망마저 소멸해가고 있는 거다. 어디서든 따라붙는 건강이란 시끄러운 말 때문이다. 떨어져 곰삭아 발에 채는 살구는 공원 청소부 아주머니의 아침나절 한 차례 비질에 쓸려가 버린다. 어제는 그런 내가 딱했던지 한껏 맛보라며 마트에서 한 바구니 사 와 내놓는다. 열매가 튼실하고 액즙도 많다. 무슨 신품종이라 써 붙였는데 맛이 괜찮긴 하지만 아무래도 옛 살구 맛과는 멀다. 살구가 익을 무렵 해걷이바람에 일렁이던 보리밭의 흔들림과 뙤약볕 보리까락의 까슬함이 배여 있지 않아 더 그렇다. 그러니 마음이 뜬다. 나에겐 속살만 맛있다고 다 살구가 아닌 것이다.
이제 피리는 안 만드느냐고 한다. 처음 살구씨로 웬 피리냐 했던 아내다. 살구는 복숭아처럼 과육이 씨앗에 붙지 않고 깨끗하게 분리된다. 한 번만 씻어 내고 두어 개 손에 쥐면 감촉이 살가워 간직해 두고 싶어진다. 지금도 내 책상 서랍엔 살구씨 서너 개가 달각인다. 살구씨에 피리 소리통 구멍을 내는 일은 힘이 든다. 워낙 여물어서이다. 더 뾰족한 쪽의 끝에 타원형의 구멍이 생길 때까지 보리밥 배가 푹 꺼지도록 갈아야 했다. 그 시절엔 우물의 에움돌이나 거친 시멘트 바닥에 문질러 내었다. 구멍이 나면 씨앗 속살을 탱자나무 가시나 바늘로 후벼 파내어 둥근 틈을 만들어야 울림통이 된다.
처음 길바닥 살구를 줍던 날, 옛 생각에 장난기가 돋아 피리를 만들어 봤다. 씨를 갈 마땅한 데도 없는지라 보도블록에 손목이 아프도록 문질러 겨우 구멍을 내었다. 근데 소리가 아니었다. 야쿠르트 빨대로 입바람을 이리저리 불어 넣었으나 허사였다. 날 듯하면서도 애태우는 헛바람만 돌뿐 “삘리 삐” 하는 옛 소리는 나지 않았다. 까까머리 때를 떠올리며 골똘히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대롱이 문제라는 생각을 해냈다. 깡마른 보릿대로 불어야 나는 소리인데 제격에 안 맞아 그런 건가 여겼다. 온통 사람뿐인 곳에서 보릿대를 어디서 구하랴. 소리 안 나는 걸 그렇게 핑계를 대고 살구피리 부는 일은 다시 옛 기억에만 쟁여두는 것이 되었다.
오늘도 투두둑 살구가 떨어져 내린다. 아이도, 청년도, 젊은 아낙들도 무심히 지나친다. 널브러져 있어도 뭔지도 모르는 눈치다. 때로 흰머리들만 떨어진 살구를 힐끗거리며 줍기도, 가지를 쳐다보며 욕심을 내기도 한다. 또 하나 주워든 나는 달짝지근한 옛 맛에 누런 보리밭에 내리꽂히던 햇살과 하늘 높이 울던 종달새 소리와 동무들과 만들어 불던 살구피리 소리를 떠올리며 걷는다.
버들피리로 봄 아지랑이를 마중하고, 보리피리로 봄 허기를 달래고 이어 힘에 부치는 끝머리 봄의 아련한 소리 하나, 살구피리 그 소리 아니었던가. 보릿고개 영양실조로 배불뚝이가 된 아이들이 고샅을 쏘다니며 악을 쓰는 듯한 소리였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소리 그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