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부재가 보여주는 불편한 진실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강한
메시지
내 영혼을 소설에 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나의 문학 공부의 첫 시작은 소설이었다. 나는 청소년 시절 소설 쓰기로 오랜 세월 동안
습작기를 보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소설과 함께 아동소설, 청소년소설, 동화 등 서사구조가 확실한 글들을 써왔다. 간헐적으로는 여타 장르의 글
영역도 기웃거렸지만 주로 서사 짙은 허구의 세계를 빚어내는 데 힘썼다. 소설과 동화는 모두 서사구조가 확실해야 하고, 조직력이 있어야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이다. 진실보다 오히려 더 감동적인 허구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글의 유형이 바로 동화요, 소설이다. 물론 소재 선택이나
주제 설정, 또는 표현상의 특성과 함께 읽는 대상이 어린이와 성인이라는 측면 때문에 차별화되어야 하겠지만 문학이라는 본질적 속성은 다르지
않다. 나는 요즈음 들어 부쩍 내 영혼을 소설에 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충일되어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좋은 소설을 꼭 한 편은 써보고
싶었다. 소설 쓰기에 대한 습작기의 향수가 강하게 되살아나고 있어서가 아닌가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청소년 시절에 읽은 몇 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문학의 길을 걷자고 다짐하면서 시작한 창작의 길을 부단하게 걸어왔다. 앞으로도 이 길을 내 삶의 축으로 삼아 걸어가고 싶다.
그래서 난 소설 쓰기가 ‘나를 나답게, 나의 문학을 나의 문학답게’ 지탱해 주는 지렛대의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포인트」의 작가 최상규 교수님을 떠올린다. 대학 재학시절 나를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주신 스승이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마냥 그이가 그립다. 그이를 떠올리며 앞으로도 나는 동화와 함께 소설을 쓰는 일에
불을 지피고 싶다. 그 마음을 담아 작품 몇 편을 선정하여 『익명의 섬에 서다』 라는 이름으로 첫 소설집을 내놓는다. 소설집 『익명의 섬에
서다』 안에는 순교자의 삶 등 상실감을 안고 현대를 살아가는 여러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유형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의 펼쳐짐이, 아직은 소설로서는 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을까봐 두렵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들의 지지를 받고 싶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끝으로 소설집 『익명의 섬에 서다』를 출간해준 청어출판사 대표 이영철 소설가와 서평을 써준 김현진 소설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소설을 더욱 잘 쓰라고 상을 준 『호서문학』에게도 감사한다. 아울러 글쓰기에만 평생 동안 골똘하고 있는 나를 묵묵히 바라봐주고 있는
아내 이기순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서평>
*순수를 향한 명상의 미묘한 울림
김현진(한국문인협회·한국소설가협회 이사)
김영훈 동화작가가 첫 단편소설집 『익명의 섬에 서다』를 내놓았다. 김영훈은 문단경력 30년이
넘는 아동문학가로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그런 그가 이번에 새로운 장르인 단편소설집을 낸 것은 평소 지칠 줄 모르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용기의 결과로 격려와 축하를 받아 마땅하다. 소설집 『익명의 섬에 서다』에는 표제작 포함,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설을 찬찬히 읽다 보면,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동화적 요소가 다분한 ‘별’과 ‘유년’이라는 플롯이 만들어내는 ‘순수와 명상의 어울림이
주는 미묘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은 삶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통에 대한 위안을 성인이나 철학자들의 관념적 아포리즘에
의존하지 않고, 일관되게 유년 시절의 실체적 경험론에 의해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면서 희망을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별’로 상징되는
‘유년’이라는 서정적 공간이 절박한 현실을 회피해 찾아가는 어른들의 도피처가 아니라, 그 시공간 자체가 영역을 뛰어넘어 어른들의 현실 세계로
들어와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있어서 특정 시․공간적 배경이 한 작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작품의 플롯을 통해 독특한 이미지를 창조하고, 작품성을 미학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이는 우연이나 일과성이 아닌 오랜
습작 과정이 낳은 한 작가의 개성으로 이미 자리매김 되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동화적 요소가 서정적 관념으로 머물지 않고, 서사의 구체적인
바탕이 되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아우라는 김영훈 작가만의 소설 세계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이런 김영훈의 작품세계를 염두에 두고 소설집 『익명의
섬에 서다』를 읽으면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된 주제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벗어던질 수 없는 사랑의 굴레, 부모의 자식 걱정 -「내 아들의 통과의례」, 「전화벨
두 번 울리다」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일반적인 사랑과 달리 부모의 자식 사랑은 무조건 주는 사랑이다. 자식이
반항하면 반항할수록, 잘못되면 잘못될수록, 멀리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더욱 짙어지고 애절해지는 사랑이 부모의 자식 사랑이다. 그 지고지순함은
종교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부모 마음은 늘 슬프고 애달프다. 「내 아들의 통과의례」와 「전화벨 두 번 울리다」는 이런 부모의 애처로운 사랑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내 아들의 통과의례」에서는 오토바이 폭주족 아들을 둔 아버지의 고통과 불안 심리를 아프게
그리고 있다. 삐뚤어진 자식의 행동을 보면서 아픔을 꾹꾹 눌러 참는 아버지의 비통함이 언제 어떻게 터져버릴지 몰라 독자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속이 말갛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팽창한 고무풍선이 탱자나무 가시에 걸려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목까지 차오른 슬픔과 괴로움을 끝까지
토하지 않고 ‘유년 시절’ 자신이 꿈꾸던 하늘의 ‘별’과 등치시키면서 영원히 사랑스러운 자식으로 보듬는 아버지의 지순한 애정이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20년 전이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다. 가랑잎이 뜨락에 뒹굴던 가을밤, 내 아이는
우리 둘에게 별빛이 되어 희망으로 내려왔다. 아들은 나의 분신이었다. 그를 맞던 날, 그 아이에게만은 나의 눈물겹도록 아린 상처와 외로움을 결코
전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본문 중에서
「전화벨 두 번 울리다」에서도 부모의 자식 사랑은 여실히 드러난다. 가출한 사춘기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심정이 읽는 사람의 명치끝을 시계 초침처럼 매 순간 콕콕 찌르고 지나간다. 특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사라서 느끼는 어머니의 자괴감은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딸의 소재를 알리는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 쓰러져 혼절해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그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일단 교회로 나오세요.’ 환청이
들려온다. 김 집사의 말이 들린다. ‘오, 하나님…….’ 아무래도 다음 주에는 교회에 나가 무릎을 꿇어야 할 것 같다. 저만큼 멀리
남편도 있다. 내가 기둥처럼 믿고 의지하고 있는 병훈이도 보인다. 청소부의 비질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의식은 점점 더 가물거리고 있다. -본문
중에서
*소통 부재의 단절이 가져온 현대인의 고독 -「익명의 섬에 서다」, 「도토리
깍지」
이 두 작품은 격리와 소통단절로 인해 겪게 되는 현대인의 고독이 주제이다. 특히 표제작인
「익명의 섬에 서다」는 작품의 플롯이 특이해 유난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소통 부재로 남편과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한 한 여자가 역설적으로
자신은 남편과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행복한 여자라고 착각하는 이야기로, 가볍게 읽기에는 조금 난해한 작품이다. 서사의 흐름과 표현기법이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일 뿐만 아니라, 안개 속에 가려진 산골짝처럼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내밀한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주인공이 자처한 소통 부재의 벽은 곳곳에 늘여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일출이 지속되는 동안 그 해오름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남편이
실종되었는지 내가 남편으로부터 잠적이 되었는지를 계속 꼼꼼히 따져보기로 한다. 판단이 서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도 없어 내 판단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도 없다. -본문 중에서
「도토리 깍지」는 이별하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깨닫는다는 한 사내의 이야기로, 앞의
「익명의 섬에 서다」와 달리 서사와 구성이 단순해 쉽게 읽힌다. ‘유년 시절’ 헛간 도토리 깍지 더미에서 부둥켜안고 뒹굴며 놀던 여자이자
소꿉친구가 점점 커가면서 남자에게 애정을 느끼고 몇 차례 눈짓을 보냈지만 남자는 그때마다 소통하지 않고 무반응으로 넘겨버린다. 그러다 성인이 된
어느 날, 여자가 결혼 청첩장을 들고 이별을 고하러 오자 남자는 그때야 불현듯 강렬한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여자는 이제
결혼을 앞둔 몸이다. 여자의 약혼자에 대한 질투심, 스스로 차단했던 소통 부재에 대한 자괴심, 자신의 감정조차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 등으로 인한 심적 갈등은 치통이 되어 남자를 괴롭힌다. 그러나 남자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여자를 버스에 태워 보낸다. 그러고 이번에는
갈등과의 단절을 꿈꾼다. 소통 부재에 따른 고통을 상징하는 치통 알레고리가 작품의 신선도를 한껏 높인 작품이다.
어느새 버스는 시야에서 멀어진다. 공허하다. 다시 치통이 온다. 이를 뽑아버리고 싶다.
이를 뺀 후, 텅 빈 입안의 공허를 맛보고 싶다. -작품 끝부분에서
*우익과 좌익, 보수와 진보의 시대적 갈등 -「화해론」, 「바람이 스쳐 가는
길목」
「화해론」은 우리 민족 최대 비극인 6·25부터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우익과
좌익의 대물림 갈등을 3대인 화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역사의 핏물 흔적이다. 우익인 남 참봉의 아들은 좌익인 화자의 큰할아버지를 마을 동구
밖 느티나무 밑에서 개 패듯 팬 후 당국에 고발했고, 끝내 옥고로 숨지게 했다. 이후 시대가 바뀌자 화자의 할아버지가 한때 시냇가에서 함께 멱을
감았던 ‘유년 시절’의 동무인 남 참봉의 아들을 무참하게 개 패듯이 패서 시뻘건 피가 시냇물처럼 흐르게 했다. 그리고 그런 이념 갈등은 화자의
가슴에 원죄가 되어 응어리진다.
그 아픈 아버지의 유년을, 내가 원죄로 안고 있어 지금도 그 원죄는 내 핏줄로 흐르고
있다. 그 몽둥이를 들었던 이의 아들의 아들이 나니까. -본문 중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의 선대 인물들의 화석화된 이념은 마치 플라톤의 동굴 우화를
반증하는 듯하다.
「화해론」이 좌익과 우익의 갈등 이야기라면, 「바람이 스쳐 가는 길목」은 보수적인 아버지와
진보적인 아들과의 갈등을 그린 이야기이다. 백부에 의해 평범한 필부로 길든 화자와 의식화된 아들 사이의 이념적 갈등은 곧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탈선한 보수와 박제된 진보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평범하게 살면서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여기는 화자는
자유와 민족자존이라는 이념으로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 투쟁에 나서는 대학생 아들을 간곡히 만류한다.
“얘야, 수현아, 우리 평범하게 살자. 우리가 살았던 흔적이란 것은 결국 땅속에 묻히게
마련이다. 이름을 남긴다는 게 무어냐? 의미를 창출한다는 것이 무어냐?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어냐? 모두가 허허로울 뿐이다. 넌 전도서 첫 장
첫 절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잖니? 모든 게 허무할 뿐이란다. 우리 보통 사람이 되어 보통사람이 누리는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자. 네 아비처럼
말이다. 그게 제일 큰 행복이야. 그게 이승에서의 삶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야.” -본문 중에서
그러나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만류에 단호한 의지로 돌아선다.
“아닙니다. 전 아닙니다. 비록 사소한 삶이라 해도 일단은 체제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합니다. 그리고 외세에도 초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우리의 사유의 세계를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진정한 의미를 창출해야 합니다.” -본문 중에서
*신앙과 어우러진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의 현장 -「달섬에 닻을 내린 배」,
「우리의 산타클로스」
소설 「달섬에 닻을 내린 배」와 「우리의 산타클로스」는 신앙심과 함께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을 소년의 눈으로 그려낸 청소년소설로, 김영훈 작가 특유의 순수함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사방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천주를 믿으며 고기를 잡고 사는 평화로운 섬, 달섬. 그러나 이 섬에는 백여 년 전만 하여도 달섬댁과
그의 아들 용구만 사는 외로운 섬이었다. 그런 버려진 섬에 서양선교사가 커다란 배를 타고 와 닻을 내리면서 제일 먼저 달섬댁 모자가 천주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에스텔과 요셉이 된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서양귀신이라며 천주교를 배척하던 시절. 달섬댁 모자는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게
되고, 이후 순교자로 추앙받게 된다. 모자의 순교를 기리는 성당이 언덕 위에 건립되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 지금과 같은 평화로운 섬이
되는 과정을 천진한 아이들의 눈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이제 정말 어둠은 우리를 삼키고 있었고 별들만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돌과 바위를
부셔댈 듯 파도소리만이 아주 가깝게 들리면서 수녀님의 이야기를 한층 돋궈주는 효과음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영혼은 이미 수녀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하나하나 모두가 아예 테레사 수녀님이 말하는 그 에스텔 님 이야기의 속의 인물, 아니 주인공으로 변해
동일시되어 가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우리의 산타클로스」 또한 소설 속에서 청소년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산타클로스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어른들에게 베풂과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즉, 이 소설을 읽을 때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작품이 비단 소년들이
우리의 산타클로스인 두리 벙어리를 맞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화자인 아들의 어머니를 통해 천주교 신자로서의 진정한 신앙과
구원의식을 함께 다루고 있다는 데까지 확장했다는 점이다.
“천주님은 그를 통해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를
보여주시려는 거야. 아주 낮은 자세로 낮은 곳으로 임하는 아기 예수를……. 우리도 그걸 배워야지. 욱아, 우리보다 더 가난한 자, 그리고 몸이
성치 못한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살면서 서로 사랑하는 걸 그에게서 배우자꾸나.” -본문 중에서
*복원해야 할 공동체, 함께 사는 이상향 -「오르라의 왕초」
「오르라의 왕초」에서 화자는 함께 행복한 삶을 가꾸는 공동체 ‘오르라’를 운영하는 사장을
왕초라 부르며 숭배한다. 그러나 왕초는 공동체를 해산하게 되고 수하들을 자립하게 한 후에, 화자와 함께 참새 사육으로 사업을 성공해 많은 돈을
번다. 화자는 그런 왕초한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이 곧 현실에서의 왕초의 참모습으로 알고 사업에 열중한다. 그러나 왕초는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다시 옛 공동체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참새사육장을 화자한테 맡기고 떠난다. 기실 왕초는 어린 시절 꿈꾸던 자신의 ‘별’을 찾기
위해 공동체를 운영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별을 찾기보다 별을 찾는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떠난다. 그런 왕초를 모르고
한때 이기심에 빠져 오해했던 화자는 비로소 새로운 눈으로 왕초를 숭배하게 된다.
“그들이 마음 놓고 유년 시절의 별을 바라볼 수 있는, 한가하고도 청정한 지역으로 갈
때가 되었단 말이지. 이제 자주 이곳을 비울 수밖에 없으니 내 자리를 맡게나. 그래, 김 상무 자네가 사장이 되어 영묵이와 함께 지켜줘야
하겠어. 세상이 잘살게 된 것 같지만 우리의 손이 필요한 이들이 많아. 지금 이렇게 내가 떠날 수 있는 것은 다 김 상무가 열심히 일해준
덕이지만…….” -본문 중에서
이상으로 김영훈 작품집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을 주제별로 대략 훑어보았다. 어른들의
눈에 동화적 요소는 얼핏 유치하게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유치함에 어른들은 감탄한다. 유치함이 곧 순수 그 자체이고, 순수가 곧 유치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김영훈은 이런 어른들의 감정을 마술사처럼 다루고 있다. 김영훈 작가는 이번 작품집으로 아동문학가로서 뿐만 아니라
소설가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문학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열정이 이루어낸 또 하나의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기회에 김영훈
소설을 읽게 되어 기쁘다.
*제13회 호서문학상 심사평
*양쪽 날을 잡고 선 올곧은 문학정신
이진우(소설가·대전대학교 명예교수)
올해의 호서문학상 선정 모임은 출발부터 아주 색다른 합의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유사한
상들이 연출하고 있는 상식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소(親疎)나 고정관념에 치우치지 말고, ‘상’이라는 절차의
격려를 통해 당사자의 작품 활동에 기를 불어넣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자는 합의가 아주 명료하게 매듭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몇몇
분의 작가․시인․평론가․수필가 이름과 추천 작품을 놓고 의견을 나누던 중 ‘김영훈’ 선생의 성함에 당도하자 문득 논의가 멈추어졌고, 자연스럽게
올해의 수상자로는 이 분이 적합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런데 이번 심사에서 벌어진 특이한 일 중의 하나는, 심사위원 다섯 중
5인이 모두 김영훈 선생이 동화작가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단지 그간의 발표한 작품에만 염두에 두고
집중적으로 심사에 임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수상자가 환갑을 넘긴 대전 시내 일선 초등학교의 현직 교장 선생님이며, 수십 년간 작품 활동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현재 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의 아동문학 월평을 담당하고 있으며, 늦은 나이에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는 등, 문학과
학문까지 전 방위적 정통파라는 점에서 비로소 안도할 정도로 엄정했던 것이다. 김영훈 선생은 아동문학분과 소속이지만 이미 『호서문학』에
단편소설 「오르라의 왕초」, 『문학시대』에 단편소설 「아들의 통과의례」 등을 발표하여 근래 문학정신의 가열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 준 바가 있다.
오랜 교육 경력을 쌓은 끝에 마침내 일선 학교장의 지위에 오른 이들의 특징은 현실 안주의 휴지(休止) 성향을 보이건만, 그는
달랐다. 그뿐만 아니라 김영훈 선생은 1983년 『아동문예』를 통해 등단했고, 그 이후 아동문학에 정진해 온 것이 사실이다. 『꿈을 파는
가게』, 『솔뫼마을에 부는 바람』 등을 비롯한 『꿀벌이 들려 준 동화』까지 10권이 넘는 작품집을 간행했으며,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과 대전․충남
아동문학회장 등 관련 단체의 일에도 헌신적이었고, 해강아동문학상, 한국아동문학작가상, 대전시문화상 등 많은 상을 받아 문학인으로서의 위상을
든든하게 축조해왔다. 그러나 수상자가 아동문학과 함께 소설에서도 내공을 분출하는 것은, 결코 심심파적의 여기(餘技)가 아니었다. 수상자는
일찍이 1968년 공주교대 문학상에서 소설부문으로 당선했던 전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단편소설의 명편인 「포인트」의 작가 최상규
선생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문학청년으로서의 저력이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작가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미 의욕적인 단편소설을 「오르라의 왕초」,
「내 아들의 통과의례」 등을 발표하고, 이번에 수상작으로 다시 단편소설 「화해론」을 수록하는 것만으로도, 지치지 않는 문학정신의 올곧은 기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우리 심사위원들은 올해의 수상자인 김영훈 선생이 아동문학과 소설
창작의 양안(兩岸)을 함께 걸어온 의욕을 치하함과 함께 장차 문학적 도정에 응원을 보낸다는 데에 기쁜 마음으로 의견을 모았다. 수상자가 앞으로
아동문학과 소설 부문 양쪽에서 더욱 심화된 진경을 이루시기를 진심으로 기원을 드린다.
<심사위원: 최송석, 김용재, 정상순, 홍순갑, 이진우(글)>
*작가 후기
*이 소설집을 펴내며 「포인트」의 작가 최상규를 잠시 말한다
내가 소설가 최상규를 만난 것은 퍽 오래전이었다. 그러니까 1967년 대학 시절에
공주교육대학교에서 ‘소설가 최상규’를 은사님으로 만났다. 그 만남은 청년 시절을 소설 습작을 하면서 문학 공부에 열중했던 당시, 나에게 다가온
큰 기쁨이었다. 최상규 소설가는 그때 대학에서 영어 교육과에 재직하고 계셨다. 학생들에게 대학에서 문학교육이 아닌 영어강독을
담당하셨다. 그 당시에 공주교육대학교에는 평론가 박철희, 수필가 원종린, 시인 한상각 등 젊은 나이에 문학적으로 자기 세계를 펼치기 시작한
교수님들이 재직하고 계셔서 나는 그분들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최상규 소설가를 은사로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가 최상규를, 그의 작품을 통해 자주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의 최상규 교수님에
대한 첫인상은 드라이했다. 짧고, 긴박한 그의 문장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깡마른 편이었고, 감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었다. 그가 내
작품을 우연한 기회에 읽고 나서 “글이 좋구먼, 내 문체를 닮고 싶은 거야? 쓰면 될 것 같아.” 라고 건조한 한마디를 던지셨다. 나는 최
교수님의 칭찬과 격려에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가 최상규는 그 무렵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한 작가였다. 그 상은 등단 신인이 아닌
기성작가에게 주는 대단한 것이었는데 이미 최상규 소설가는 그 상을 받은 작가였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인지 잘 모르지만 나는 대학에서 공모하는
문예작품 소설 공모 부문에서 소설 「도토리 깍지」가 최 교수님 심사로 당선되는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난 아주 이따금
최상규 교수님을 뵐 수 있었는데 뵐 때마다 식사하자고 하면 두세 번을 사양하다가 응하셨다. 그분은 언제나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과 중국
고량주(속칭 빼갈) 한 병만을 고집하셨다. 그러나 나와 최 교수님과의 인연은 한동안 끊어졌다. 그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계속 끈이
연결되었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더욱 열심히 소설에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내가 소설가 최상규 교수님을 다시 만난 것은 대전으로
근무처를 옮긴 80년대 초반이었다. 이미 내가 아동소설로 문단에 얼굴을 내민 후였다. 공주교대를 떠난 최상규 은사님은 당시에 대전 변두리인
학하리에 거주하고 계셨다. 사모님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사택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때 최 교수님은 목원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독자에게 아부하지 않는 창작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최상규 소설가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아부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나는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인사를 드린 후, 최상규 은사님께 동화를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으셨다. 그러고는 짧게, 아주 짧게 한마디 하셨다. “그래? 동화는 한 편의 시(詩)지.”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때 그 말 속에 어떤 뜻이
함유된 건지 알 수 없어 한동안 멍하니 먼 산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스스로 결심했다. 다시 소설을 써보자고……. 그 후, 최상규
교수님은 병을 얻어 결국 1994년에 만으로 육십을 살다가 세상을 뜨셨다. 지나친 음주 때문에 간이 안 좋아지셨다고 했다. 나는 슬프게
을지병원에서 마지막 임종을 했다. 영정사진을 확대하느라 사진관에 들리기도 하면서 슬프게 은사님을 떠나보내 드렸다. 한국 문학사에 남을 좋은
작품을 쓰셨던 「포인트」의 작가는 그렇게 애석하게도 우리 곁을 떠나 영면하셨다. 그 후로도 나는 여전히 동화와 아동소설, 청소년소설을
썼지만 원고를 탈고할 때마다 “그래? 동화는 한 편의 시(詩)지.” 하던 최 교수님의 말씀과 함께 그분이 짓던 미소가 하얗게 떠올랐다. 그때마다
나는 간간이 소설을 썼다. 그리고 지면에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오르라의 왕초」, 「내 아들의 통과의례」, 「바람이 스쳐 가는 길목」
등이었다. 그러던 차에 소설 「화해론」으로 2008년에는 제13회 호서문학상을 받게 된다. 지금도 소설로 문학을 시작한 향수 때문에,
그리고 최 교수님의 하얀 미소 때문에 제한된 지면이지만 많이 부족한 소설을 더러 발표하고 있다. 지금 나는 소설 속에 나의 영혼을 담아내고
싶다. 이 순간도 소설을 더욱 열심히 써야 하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한 번 소설가 최상규 은사님의 명복을 빈다. 또한, 그분의 문학정신을 그리고
‘하얀 미소’를 가슴 속에 품어 본다. 이번에 첫 소설집을 청어출판사에서 간행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의 일환이다. 그런 중에도 참으로 고마운
것은 최근 문을 연 시립 대전문학관 상설관에 최상규 소설가가 살아오신 흔적이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전 출신의 정훈 시인, 한성기 시인,
박용래 시인, 권선근 소설가와 함께 자료가 전시되고 있어 최상규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유족인 안명숙 사모님께서 간직했던 유품인 최상규 소설가에
관한 전 자료와 천 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 자료를 대전문학관에 기증해 주신 것이다. 최상규 작가 자신에게나 그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 모두에게
정말,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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