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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30일
주일오전예배
사사기7:1-8
나팔, 항아리, 횃불
이론적 무신론자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인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선택하고 결정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무신론자들을 가리켜 실제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우리주변에 종종 이런 실천적 무실론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이런 상황을 우리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럼에도 너무 쉽게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전쟁을 해야 하는데 그 전쟁이 얼마나 심각하고 힘든 전쟁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육신과 탐욕이 바알의 잔치를 볼 때 바알의 잔치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에서 현실적으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삶의 중심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신까지도 조종하면서 나의 행복을 확보하려고 하는 생각이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행복주의라고 부르는데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기독교적으로 체색되고 미화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재가를 받지 않은 것이라면 포기해야합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행복이 있습니까? 끝까지 붙들고 있는 행복이 하나님께 재가를 받은 것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내 안에 부패한 욕심,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 이런 것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부패한 욕심인데 이 욕심이 우리 안에 있는데다가 밖으로는 바알의 부패한 잔치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우리의 부패한 욕심에 호소해서 바알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부축이면 우리에게는 감당해 낼 힘 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바알의 잔치에서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 지를 기도온의 이야기로 풀어보겠습니다.
대강 타협하면서도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저는 기드온과 300용사를 통해서 가나안의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고 과연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미디안이 대군을 거느리고 처들어 올 때 이스라엘백성들을 모았습니다. 사사기7:1 ‘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기도온이 불러 모은 장소가 ‘하롯’입니다. ‘하롯’이라는 뜻은 ‘두려움, 떨림’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모인 자가 너무 많아서 두려워 떠는 자들은 길르앗 산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두려워 떠는’ 이라는 단어가 ‘하랏’인데 하롯의 동사가 ‘하랏’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3만2천이 모였는데 두렵고 떨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그 지명을 ‘하롯’이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두려웠습니까? 본문에는 기록이 없지만 미디안 군사가 13만 5천명입니다. 이스라엘은 3만2천 그러니까 1/4입니다. 게다가 미딘안 군대는 낙타부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디안인들이 주전12세기 때 낙타를 잡아다가 길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낙타부대를 만든 것인데) 낙타가 꽤 높습니다. 낙타를 타고 위에서 활을 쏜다든지 창을 던지면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 당시 미디안 군대가 거느리고 있던 낙타부대가 막강한 부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숫자와 그리고 낙타부대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스라엘이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어 끌어 모은 지원병, 자원병에 불과했거든요. 물론 이스라엘의 전쟁은 여호와가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공무원시험이라든지, 취업이 보통이 아닙니다. 숫자적으로 경쟁률이 치열하지요. 구멍가게 앞에 대형마트가 들어와 보세요. 저희교회 안명숙집사님 지금 청주에 계신데, 구명가계 앞에 큰 동네마트가 들어오니까 굉장히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직장에서도 진급하는 문제 사업적으로도 계속 경쟁업체가 생기는 문제 등, 오늘날 현실을 보면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이들은 미디안 군대 13만5천명의 거대숫자와 낙타부대 앞에, 이스라엘 군사 3만2천 가운데에 이만 이천 명이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사실 두려워 떠는 병사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났습니다. 그나마 기드온이 나팔을 불 때 3만2천명이 자원해서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것 만해도 어떻게 보면 천만 당인데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립니다.
7:2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에 비해 1/4밖에 되지 않은데 숫자가 많다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드온아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숫자를 줄여라’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일입니까? 3만2천 가지고도 상대가 안 되는 숫자 아닙니까? 기드온은 완벽주의자지요.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큰 용사여’그랬습니다. 그 당시 큰 용사라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은 좀생이 기드온에게 찾아와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힘으로 미디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라’그러니까 기드온이 뭐라고 말합니까? 만일 말씀하시는 분이 주시라면 내가 순종할 테니까 주되신 표를 보여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제사드릴 것을 가져오라 해서 바위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올려놓은 제물에 불이 나서 다 태워서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됩니다. 그 후에도 기드온은 양털뭉치를 내어 놓고 양털뭉치에는 물이 있고 마당에는 이슬이 없게 해 달라, 양털뭉치에는 물이 없게 하고 마당에는 이슬이 있게 해 달라 이런 시험을 하게 되고 다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하나님말씀에 순종한 것 아닙니까? 의심이 이로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인데 삼만 이천에서 이만 이천을 보내라고요. 7: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까? 두려움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다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만 명의 군사만 남았습니다. 70%가 줄었지요. 그런데 통계학적으로 보면 일 만명으로 승리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스볼론과 납달리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철병거의 구백성의 군대를 거느린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격파했기 때문에 일만 명의 군대로 전쟁을 해 볼만 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계획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일만 명은 많다는 것이지요. 4절을 보십시오.
이제 미디안의 군대에 비하면 1/13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숫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더 줄여야 된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의 틈을 완전히 제거하고 계시는데 냉혹하게 제거하고 계십니다. 기드온은 군대의 숫자도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없이 막강한 미디안 군대와 싸우게 한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4절의 말씀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가라하면 가고, 가지 말라 하면 안 가야된다는 말입니다. 13만 5천 앞에 하나님의 명령에 그러니까 숫자를 줄이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의 현장에서 이것을 적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 이 보다 더 큰 사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보면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라’그러면 나누어 봅시다. 13만 5천명을 천명으로 나누면 135명입니다. 하나님이 내어주시면 한 명이 천명을 두 사람이 만 명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사사시대에 소를 몰든 농부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육백 명을 때려 죽였습니다. 나귀턱뼈로 삼손을 블레셋 인들 천명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13만5천을 죽이는데 일만 명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삶 가운데서 이 같은 일이 있을 때 군대를 줄이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도움은 구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으라는 이 같은 명령은 현실가운데서는 정말 지키기 힘든 내용입니다.
이제 일만 명을 줄이기 위해 물가로 데려 갔는데 거기서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는 자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를 구별했더니 300명과 9,700명이 나누어졌는데 핥는자 300명만 남긴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일만 명이 많다고 했는데 9700명가지고 싸우라고 했겠습니까? 당연히 300명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13만5천을 상대로 삼만 이천 이스라엘군대를 300명으로 축소한 것입니다. 물론 전쟁의 승리는 숫자로만이 안 된다는 것을 기드온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장난이 아닙니다. 전쟁에서는 피가 튀기고 살점이 달라가는 그야말로 아우성의 현장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300명의 숫자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많이 의기소침하고 용기를 잃고 낙심했을 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고 갑니다. 의구심과 두려움은 내제되어 있을 줄 모릅니다. 그러나 담대히 가지요. 300명으로 전쟁을 준비하는데 무엇으로 준비합니까? 나팔, 항아리, 횃불을 가지고 300명의 용사가 전쟁의 현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기를 내려놓아라, 내가 곧 무기다’ 그리고 방패 내려놓아라, 내가 너희 방패가 되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완전 무장해제 시킨 것입니다. 3만1700명을 돌려보내고 300명 남겨 놓고 이 300백명도 이제 무장해제 시키고 나팔, 항아리, 횃불 전쟁에서는 아무소용이 없어 보이는 것만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승리가 이루어지는 과거사의 기록이기에 이런 사건이 있었나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이 일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야기로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것입니다.
지금 미디안 군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2절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병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이 정도면 아마 기드온은 그 날 밤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제 ‘미디안과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전쟁할 분위가가 아니었습니다.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전쟁의 현장에 투입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불안해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부하인 부라를 데리고 미디안 진영 근처에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는데 꿈 이야기입니다. 보리떡 한 덩이가 미디안진영에 굴려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장막이 쓰러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꿈 해몽을 어떻게 하느냐 이게 기드온의 칼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들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세 대로 나누어 쳐들어가는 것이지요. 100명씩 세 대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13만5천을 포위하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서 나팔 불고 항아리 깨고 횃불을 들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함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미디안 군사가 놀라 좌중질환이 일어나서 서로 죽이는 것입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성경에는 이런 유의 말씀이 많으니까 그러느니 할 것 같습니다마는 이 일이 우리의 현장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보십시오. 횃불을 들고 항아리를 깨고 나팔을 불어서 13만5천명을 죽인 이 사건을 경험한 사시시대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우리가 이런 느낌을 못 느끼면 세상에서의 전쟁에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향해 가나안에 가서 전쟁을 해라 요새와 빗장을 걸고 성벽을 쌓고 살아가는 가나안과 같은 세상에 들어가서 승리하라고 요구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무기가 무엇입니까? 학벌 아닙니다. 돈 아니에요. 권력, 외모 아닙니다. 그런 것 의지하지 말고 나만 의지하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들어준 무기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전도, 기도, 말씀, 충성, 헌신, 사랑 이런 것은 세상전쟁에서 아무 쓸모없는 것 아닙니까? 돈이 있어야하고 권력이 있어야하는데 그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무기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3000년 전에 미디안과 300명을 거느리고 싸워 이긴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이 세상에서 가나안 전쟁이 얼마나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입니다 오퍼상을 하는 한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제대로 법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사업을 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렇게 사업을 했는데 수입의 70%가 사라지더랍니다. 30%만 가지고 2-3년을 버틴 것입니다. 이 분은 구역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대로 사업을 하면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사업이 잘 될 줄 알았는데 30%의 수입으로 사업을 하려고 하니까 월말이 되면 자살할 충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밑에 구역원식구가 있는데 현장소장이랍니다. 이 현장 소장이 구역장을 보고 감동을 해서 나도 월급만 받고 현장에서 주는 음성돈은 절대로 안 받겠다 해서 구역식구들에게 간증을 했습니다. 이제 구역장을 묶여서 절대로 포기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현장에 나가서 싸우는 가나안 전쟁은 이 구역장이 이야기하는 월말만 되면 자살 충동을 느끼는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믿지 않는 세상, 즉 가나안 세상에 들어가서 하나님말씀대로 기업을 한다든지 사업한다든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기드온 용사가 희한한 무기를 가지고 전쟁하겠다고 덤비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가나안전쟁을 치루고 있다면 희한하기 거지 없는 나팔과 횃불과 항아리같은 무기가 왜 놀라운 효력이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 같은 희한한 무기를 사용해 보지 않은 사람은 실질적으로 이 무기가 얼마나 위력이 있는 무기인지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 듣고 중보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왜 의미가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무기를 가지고 전쟁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희한한 무기를 가지고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우리의 가나안전쟁은 이 세상과의 전쟁입니다. 세상은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가 있고, 이 세상 사람들이 있고, 우리 안에 부패한 욕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우리의 부패한 욕심에 요소해서 이방사람들을 따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삼 겹줄로 걸쳐져 있는 적들입니다. 이 삼 겹의 적과 전쟁을 하려고 할 때 우리가 부패한 육체와의 전쟁을 치러야합니다. 이 부패한 육체와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인지를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모릅니다. 예를 들어 살을 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욕심을 빼는 것은 정말 심각한 전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학벌로 절대 못 이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욕심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부패와의 전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무엇인가 무기력해 보이지만 바울이 우리에게 이야기했던 이것만이 유일한 무기입니다. 엡6:13절‘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진리, 믿음, 말씀과 간구 중보와 감사 이것이 전쟁의 도구로 이야기하고 있는 이 같은 것은 우리가 보면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기드온의 무기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일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전쟁과 가나안의 전쟁을 경시하고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도와 예배는 공허한 형식입니다. 실질적으로 영적전쟁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은 필요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지요. 그러기에 기도와 예배가 자꾸 허식이 되면서 의미가 빠지고 내용이 빠지면서 형식주의로 빠지고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바알의 잔치를 보고는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설교를 들으면 그 설교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해도 안 되지만 얼마나 어리석고 공허한 이야기로 들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교회에서 함께 기도하고 사랑으로 그를 품어내는 그런 항아리와 횃불같은 것으로 한 사람을 세우고 양육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전쟁(세상에서 전쟁)이란 우리 안에 부패한 욕심이 세상풍속을 쫓아가도록 만드는 전쟁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을 조작해서 나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는 이 전쟁이 매일 있는 것입니다. 이게 심각한 전쟁입니다. 300명용사가 13만5천의 용사와 싸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전쟁은 우스꽝스럽게 보여도 횃불과 항아리와 나팔은 미디안 군대를 격파하는 효과적인 무기였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기도는 항아리가 깨어지는 소리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외치는 나팔소리는 세상의 쾌락소리에 묻혀서 들리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횃불은 태양처럼 찬란한 것이 아니라 내 앞길만 겨우 보이는 작은 빛인 줄 모릅니다. 그러기에 어떤 때에는 굉장히 한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은 연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종교행사처럼 느끼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볼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무장해제수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가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요한기자가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 길은 믿음의 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무장해제 시킨 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무기가 있습니다. 말씀, 중보, 기도, 찬양, 봉사, 헌신 외소해 보기기 쉬운 이런 무기를 가지고 우리 앞에 있는 세상과 전쟁을 치른다면 바알의 유혹의 제사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부패한 욕심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저희교회가 가정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구역예배와 같은 내용입니다마는 온 가족이 함께 몇 가정이 모여 소그룹으로 드리는 형식의 예배입니다. 이 가정교회예배에 전 교인이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에 대한 유익은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제는 지금 가정이 자꾸 획일화되면서 이기적이 되고 그것이 또한 개인적인 부패한 욕심으로 자꾸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라 가정이 깨어지거나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 아이들이 올바른 인격과 긍정적자아상을 가지고 성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교회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이것이 어쩌면 항아리, 횃불, 나팔일수 있습니다. 가정교회예배가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가정교회로 말미암아 현재와 미래지향적인 축복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규장의 설립자인 여운학 장로는 다섯 자녀를 목사, 의사, 박사, 사장으로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그가 자랑하는 자녀를 가장 잘 키우는 비법은 바로 ‘가정예배’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가정이 치열한 영적싸움터라는 사실은 부부이혼율과 자살과 낙태는 늘어만 가고 출산율은 반대로 줄어드는 오늘날 가정이 처한 현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적싸움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도 온가족이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사단에 대적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필요한 일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가정예배를 통해 우리는 삶이 예배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위해 희생함으로 서로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가정명령을 따르는데 실패해서 부부사이에 갈등이 현실화되었을 때, 가정예배를 통해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부부의 회복이 자녀와의 회복으로 이어지고 이웃과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가정교회예배를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올 한 해는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여 전체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가정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승리하는 복된 새 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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