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풍월(風月)
임병식 rbs1144@daum.net
무엇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익힌 짧은 지식을 풍월(風月)이라고 한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는 속담의 뜻풀이를 비추어 볼 때 어떤 것이 보기에 신통방통할지라도 그 수준이 지극히 어쭙잖은 정도를 나타내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생각해 볼 적에 바로 내가 그 서당 개가 아닌가 싶다. 쥐뿔도 남다른 것이 없으면서 제법 아는 체 풍월 읊듯이 글을 써 왔으니 말이다. 생각하면 가당찮고 우습기도 한 것이다.
그런 푼수에 여전히 글 쓰는 걸 멈추지 않는 건 워낙에 문학에 대한 높은 관심 이외, 조금은 남다른 기억력 때문이지만, 이제는 그 촉도 나이 들어가니 시원찮아 졌다.
암튼 서설은 그렇고, 우선 풍월하면, 떠오르는 분이 역학자 충무산인(忠武山人) 백우(白羽) 김봉준(金奉俊) 선생이다. 당대에 대단했던 분인데 전에 당신이 ‘風月’이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충남 서산 분으로 예전에 지상파 방송국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여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막내아우가 문하생으로 들어가 수제자가 되었다.
나중, 아우는 수년 동안 수학한 끝에 당신으로부터 자기와 동급이라는 의미의 ‘여백(余白)’이란 아호를 하사받았다. 나는 그런 아우와 종종 통화를 하며 어디서 들어보기 어려운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엊그제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의 이치가 결혼 초기에는 아내가 남편을 이길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차차로 전세가 바뀌어 가는데 그것은 자식을 통해서 변한다는 것이다.
즉, 여자에게는 자식이 무기이면서 후원자가 되어 차차 자식이 성장하면서 지위가 역전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역학으로서 설명이 되는데, 자식은 어려서는 힘이 없지만 커 갈수록 아비를 이기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아비는 자식이 어렸을 적부터 존중하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에게도 적용이 되는데 가진 자는 없는 사람에게 베풀며 도와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얼핏 손해를 보는 듯해도 결과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으로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는 수단이 되는 행위라고는 것이다. 역학적으로 불(火)은 금(金)을 극하고 금은 목(木)을 극하며 목(木)은 토(土)를 극하고 토는 수(水)를 극하는데 이는 순리로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는 것이다. 수긍 가는 점이 없지 않다.
이것이 풍월이라면 내가 글 쓰는 세계에 기웃거리며 얻어들은 것들도 그런 풍월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가십이나 에피소드인데, 평생 변방에 살면서 들은 게 얼마나 될까마는 놓치기 아까운 것이 몇 가지 있다.
전라도를 벗어난 이야기는 그 지역에 사는 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므로 건너뛰고 전라도 문인 몇 분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전라도에는 나와 동시대 소년기를 보낸 젊은 문청(文靑)이 있었다. 한 사람은 시와 소설을 쓰던 김만옥(金萬玉 1946년생)이고 다른 사람은 아동문학을 한 정채봉(丁采奉 1946)이다.
두 사람은 나와 갑장으로 김만옥은 조대부고 시절 지방지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일찍 문필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0대 초반에 파계승과 결혼하여 일찍 두 여식을 얻었다. 그런데 그런 딸아이에게 사과하나 변변히 사줄 수가 없어서 비관 자살을 해버리고 말았다. 불과 향년 스물여덟이었다.
그는 완도 청산도 출신으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런 형편에 덜렁 가정을 가졌으니 글을 써서 호구지책이 될 거라고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디 세상 살기가 그리 만만한가. ‘한오백년’ 노래 가사처럼 ‘동정심이 없어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의 수중에 몇십만 원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채봉은 자전적 수필에서도 나오지만 열여덟 살 어머니한테서 태어났다. 그런데 아버지는 일찍이 일본으로 들어가 버리고 어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의 문제는 어렸을 적부터 드러났다고 한다. 여수 문협의 산증인인 박보운 시인의 말에 따르면 여수문협 백일장에서 동시가 월등하여 바로 1등에 뽑혔다고 한다.
그도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는데, 군을 다녀온 뒤였다. 그래도 그는 대학을 마치고 잡지사에 취직하여 밥벌이했는데 김만옥은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전업 작가로 살다가 떠났다. 한편, 아쉬운 것은 정채봉은 순천에서 문학관도 지어서 기리고 있는데, 김만옥은 고향인 완도에서나 거주하던 광주에서나 아직 소식이 감감하다.
우체부 출신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작품 속에 기가 막히게 구사한 나주 출신 오유권 소설가는 원고료를 목숨같이 아낀 사람이었다. 동향 출신 김수봉 수필가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소설작법을 배우러 찾아가니 밥 사 먹으라고 장판 밑에다 감추어 둔 돈을 꺼내어 주는데 그 돈이 누렇게 변색되었더라고 한다.
그 이유는 모른다. 자린고비로 아껴온 버릇이거나 피땀 흘려 글을 써서 받은 돈이라 그렇게 보관했는지 알 길은 없다. 고흥 출신 송수권 시인은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두 가지 측면에서 기록을 세웠지 않았나 한다. 하나는 등단 시 응모작이 쓰레기통에 버려졌는데, 그것을 편집장이 주워서 보고는 예사로운 작품이 아니어서 등단시킨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서라벌예대를 나온 전문대 출신으로 국립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정 교수가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국내 최초는 아니다. 박상융 소설가의 작품도 워낙에 악필이어서 버려졌다가 구제된 경우이고, 어느 모 시인도 변변히 정규학력이 없다시피 하면서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는 송수권 시인을 생각하면 동병상련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가 세상을 뜨면서 하는 말이 ‘작품이 교과서에 하나 실린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어서이다. 이것은 나에게도 얼마나 자긍심을 높여주는 말인가. 글쓰기의 세계에서 크게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지만 나 또한 교과서에 글이 실렸으니 얼마나 힘이 되는 말인가.
나는 글을 쓰면서 우리 문단에 이상과 이제하(李祭夏), 윤후명 같은 천재들이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상의 천재성이야 ‘오감도’ 하나로 증명되고, 이제하는 고교 2년 때 쓴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시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윤후명 또한, 개명 이전에 윤상규란 이름으로 발표된 시 ‘나비’와 산문 ‘산역이 학원문학상을 타게 되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제하의 시는 서울 친구 유경환의 편지를 받고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못 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으로, 시와 소설, 희곡, 작사, 노래까지 한 사람이었다. 요즘 들어 그가 작사 작곡한 ‘모란동백’이 경연 프로에 자주 나오고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조영남 가수는 일찍이 그 노래를 자신의 장송곡으로 찜해놓았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이런 마당에 송수권의 <아내의 맨발>이라는 작품을 대하니 그 또한 그들과 버금가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장도 문장이지만 어린 시절 새엄마가 미워서 밖에 벗어놓은 꽃신을 식칼로 갈래갈래 찢어버렸다는 대목에서 윤상규가 학원문학상 작품에서 주인공이 하는 말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이 금이빨을 했더라. 그것을 파러 가자”라고 한 것과 데자뷔 되어 소름이 끼쳐오기 때문이다.
보통 아이, 보통 소년이 어디 감히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것을 결행할 수 있는 일인가. 그가 쓴 작품의 묘사 중에 커튼 너머 휠체어에 실려 간 아내의 맨발이 자꾸 생각남은 그가 특별히 돋보이게 한 그만의 문학적 장치가 아닌가 하여 생각을 오래 해보게 된다.
두서없이 떠오른 대로 언급했는데 나름으로 생각하기에 얼마간은 그런대로 들은풍월을 읊조리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2024)
첫댓글 문학인들에 대한 풍월 그들은 산전수전를 거쳐온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이고 천부적인 재능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학자 김봉준님으로 부터 전라도 문학인 김만옥, 정채봉, 윤후명, 송수권,
그리고 중앙 문단을 망라하여 이상, 이제하, 윤후명에 대한 풍월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신 것 같습니다.
풍월은 지식이고 정보이지 싶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일들을 가르쳐 주셨으니 말입니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풍월 고맙습니다.
청석님은 많은 문학인들이 그 토록 소원하는 교과서에 작품이 실렸으니 축하를 드립니다.
컴을 잘못 조작하는바람에 올려놓은 글이 날아가버려 다시 올렸습니다.
번거롭게 다시 댓들 달아주셔서 고맙고 송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