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사상 (思想)
임병식rbs1144@daum.net
(1)
돌은 인체로 말하면 뼈요, 건축물로 말하면 골격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핵심을 이룬다. 그렇지만 어디에나 있고 지표면을 조금만 걷어내면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귀한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절대로 하찮게 취급할 것은 아니다.
그런 돌이 있기에 지형의 틀을 이루고 강토를 지키고 보존시킨다. 호미곶이란 지명이 말해주듯 우리나라는 호랑이의 꼬리로터 백두대간의 척추까지 온전히 바위가 떠 받들어 웅혼한 기상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 강토는 대단히 견고한 석질의 돌들이 존재한다. 화강암, 편마암, 현무암, 퇴적암, 사암, 규암, 역암 등이 잘 버무려져 강철 같은 근골을 이루고 있다.
바위의 역사는 실로 지구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45억 년 전, 까마득한 옛날에 지구 밑바닥 맨틀에서 끓어오른 마그마가 임계점을 넘어 분출했다가 마침내 식어서 바위가 되었다. 그런 만큼 바위는 이 지구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바위는 어디에나 우뚝 우뚝 서있다. 그렇지만 보기에 아무렇게나 서 있는 듯해도 그렇지는 않다. 나름대로 적절히 하중을 유지하며 균형을 잡고 있다. 그 모습들을 보노라면 그렇게 서있을 수밖에 없는 형상들이다.
바위는 세상을 압도하지만 믿음을 준다. 해서 사람들은 일찍이 바위를 은신처 삼아 살면서 정령이 있다고 믿어 기복신앙(祈福信仰)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는 얼마나 탁월한 혜안인가. 주위를 둘러보아 바위만한 불멸의 물질이 없고 크기는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그것도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약하고 무른 부분은 풍화작용에 의해서 갈라지고 떨어져 나가 차차로 모래를 만들어 내고 마침내는 흙을 만들어서 오늘날에는 식물을 키워내는 토양이 되었음이다.
그 효용성은 대저 얼마나 큰 것인가. 아니 그것까지 더듬어 보지 않아도 이 세상에 바위 말고 과연 제자리를 굳게 지키며 있는 것이 또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1,700여 년 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나, 동시대의 유물인 신라의 순수비도 그래서 오늘날 까지도 온전하지 않는가. 그것을 생각하면 저 옛날 청동기 인들이 그 무거운 바위를 한사코 옮겨와 무덤을 지은 것을 얼마나 탁월한 발상인지 혀가 내둘리게 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일찍이 바위를 집안으로 들여와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소위 강소성에서 출토되는 태호석이라고 하는 구멍 숭숭 뚫린 큰 바위를 들여와 석가산을 만들어 놓고 경배를 왔다. 이는 바위가 전래적으로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영원성에다 불변성까지 갖추어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2)
수석문화는 본래 중국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구명이 숭숭 뚫린 태호석 같은 기기묘묘한 돌들이 모아서 집안에 석가산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곳에 경배를 하고 살았다. 돌 본연의 불변성에다 미의식을 가미된 것이다. 그러다가 북송시대 미불은 이것을 한 차원 높여 예술품으로 승격시켰다.
투(透).준(皴).수(瘦).수(秀)라고 하여 구멍 뚫리고 주름이 잡히며 준수하고 피리한 것을 수석의 조건으로 달았다. 그것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건너왔다. 그렇지만 감상하는 돌은 그럴지라도 우리민족이 돌을 가까이 한 것은 훨씬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청동기 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고인돌로 무덤을 조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의 효용가치를 알아보고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광개토왕비가 그러하고 신라의 순수비가 그러하다.
중국에서 애석의 붐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서도 돌을 애석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고려 말 문익점선생은 돌을 가까이 하고
김시습선생은 촌석을 아끼고 지니고 다녔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조면호 선생은 돌을 모아 시를 짓고 정조임금과 헌종임금은 애석생활을 했으며 선비들을 중심으로 수석이 하나의 문화로 꽃을 피워다.
여기에는 추사 김정희와 황산 김유근선생이 빠지지 않는다. 이런 분들의 발자취가 있어 오늘날 수석문화는 활짝 꽃 피우게 되었다. 이분들이 정신문화를 한 단계 올려 놓여 놓았음은 두말 것이 없다. 그럼 면에서 그 업적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발에 차이고 그러다가 자칫 골재로 사라질 번 한 것을 찾아내어 예술로 승화 시켰으니 얼마나 깊은 혜안이 있었음인가. 선인들의 이러한 안목이 애석의 맥은 잇게 하여 정신적 유산으로 남았음이다.
(3)
돌은 무심히 보면 한갓 무생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돌 자체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보여주는 모습은 마음에 다가오는 그렇지 않다. 진중한 형상은 무한한 신뢰의 모습을 보여주며 느낌을 전해준다. 해서 유치환시인 같은 이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처럼 까닥 않는데 (이하 생략)”하고 애소(哀訴)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인간 세상은 아무리 가슴에 절절히 맹서를 새기며 살지라도 여건과 이해에 따라서는 하루아침에 여반장으로 태도를 바뀌기도 한다. 상황이 그렇다는 편리한 변명으로 변심하며 넘어가 버린다. 그런 면에서 보면 돌은 한결같기가 태산 같아서 능히 신의의 대상으로 삼을만 하다.
해서 나는 일찍이 그 본성을 알아보고 수석에 빠져들어 스프레이에 물을 담아서는 뿌리면서 그 물기가 가실 때까지 들여다보기를 즐긴다. 이때는 눈으로는 돌을 보고 마음으로는 깊은 심지를 읽는다. 그런 수석을 바라보면 수많은 변화가 읽힌다. 채광에 의해 돌갗이 변화하면서 여러 가지 느낌을 줌과 동시에, 인생, 신의, 도리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변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한다. 이때는 묵언의 자세가 되며 머리 속에서는 사색의 문을 열리어 빠져든다.
그런 때면 내가 어김없이 떠올리는 건 인연이다. '이 돌이 어찌 내게 와서 마주하게 되었을까. 나는 지금 이 돌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골똘해지면 한 두 시간쯤은 금방 지나가고 만다.
나는 수석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탐석을 나가서 배낭을 메고 강가를 누비던 때를 떠올리길 좋아한다. 널브러진 수만 수억 개의 돌들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했다는 사실에서 깊은 인연을 느낀다.
수반위에 올려 진 수석을 감상하노라면 생각은 수억 년을 거슬러 오른다. 그러다가 '옳지'하고 문득 깨달음을 올 때도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선인들이 이런 맛 때문에 애석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공감을 해보는 것이다. 그것은 불변의 의지와 광대무변한 천지에서 내게 다가와 인연을 맺었다는 특별함이 주는 특별한 감상이다.
그 느낌을 가지고 살기에 나는 집에서 따로 수석 감상을 하는 이외, 항상 조그만 촌석(寸石) 하나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돌의 마음을 읽는다. 이 정도면 돌이 지닌 사상의 힘이 아닐까.(2007)
첫댓글 2024.동산문학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