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다녀왔습니다.
꼬박 4일반을 걸어 오르고 다시 이틀반을 내려와야 하는
길고
힘든 길이었지만
디디어 가는 걸음만큼 덜어내고
또 다시 담아낼 수 있는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고
남은 시간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억에 남는 하루하루 였습니다.
그 기록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들..
Chapter I 아버지와 함께 걷다
아버지는 해방이 되던 해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셨다.
학자이셨던 할아버지 아래
어려웠던 경제환경속에서 10남매 중(고모분들은 일직 돌아가셨다고 들었고) 9째 아들에게 주어진(?)
혜택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밴드부에서 트렘펫을 부시고
전국체전에 충남대표로 출전 권투선수를 하실 정도로 활동적이던 아버지는
대신에 공부에 큰 관심을 가지셨던 것 같지도 않고 또한 집안에서 9째 아들에게 까지 그런
관심이 갔을것이라곤 당시 사정으로는 더더욱 생각되지 않는다.
평생을 공직에 계시면서 그 박봉으로 아들의 긴 유학생활까지 뒷바라지 해주신데에는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많지 않으셨나 싶다.
'1등이면 졌다. 2등이 되라.'라는 좌우명을 말씀하셨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케네디가의 가훈였었고
그만큼 부모님은 내가 구구단을 욀무렵부터 항상 '공부 공부'를 입에 달고 사셨고 난 그렇게 교육받았다.
왕복 세시간 시골길을 걸으며 학교를 다니셨다는
그 세대 아버지들이 흔히들 하시는 그 귀에 못이박이던 반복의 이야기들
그 '공부'라는 '기회'에 난 중압감을 느낄만큼 부담이 컷지만
작은 사고 하나 없이 아버지의 말을 잘 따라 '공부 잘 하는 아이'에서 '공부 잘 하는 소년'
그리고 '공부잘하는 청년'으로 자라왔다.
전인교육이라는 단어는 들어보지 못할만큼
발전의 기관차를 달려대던 80년대에 대부분의 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신 교육이라는 의미는 '기회'를 상징했었던 것 같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 발발 몇년전
제일 큰 아버지는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깃발을 세우던 대학총학생회장이셨고
당신의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사촌과 함께 월북하셨다.
들은바에 의하면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운동에 큰 기여를 하셨고 정치에 진출하셔서
꽤 고위직까지 오르셨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내가 철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이다.
덕분에 경찰직에 계시던 아버지는 연좌제라는 틀에 묶여
꽤나 불이익을 당하셨을것이라 미루어 짐작하고
아마 그에 대한 대안으로 대부분을 대공업무나 강력사건만을 다루는 일 등
다른사람들이 고되고 힘들어 기피하던 일들에만 자원하셨던 것 같다.
그것이 가족을 위하는 길이고 또한 당신 스스로가 도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셨듯 하다.
덕분에 아버지는 붉은 색만봐도 흥분하실 만큼 극우적 성향을 지니셨고
나는 자라오면서 그런 종류의 '부조리' 들에 대한 의견대립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였던것 같다.
나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라는 gift를 타고 났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감성 또한 다른 이성적인 사람들보다는
곱절로 발달했다고 생각했다.
색감을 느끼는 만큼 음감도 함께 느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도이치그라모폰의 노란색 레이블을 사모았고
고전에서 현대까지 문학에서 자연까지 내 감성을 채울 수 있는 것에는 언제나 열정을 쏟아부었다.
아버지와 나는 참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밴드기계를 가지고 계실만큼
그 연세에도 새로 장고를 배우시고 또 섹서폰을 새로 배우셔셔 공연무대에 서실만큼
태진아 현철 나훈아의 모든 앨범을 다 가지고 계실만큼
벽에 걸린 수많은 이발소그림(?)의 키치한 색감이 볼때마다 내 눈에 거슬릴만큼
난 아버지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안지 몇년 되지 않은 듯하다.
브란덴브르그 협주곡을 담은 크리스토포 호그우드의 원전음악앨범은
태진아 현철의 앨범과 같고
싸구려 유화로 덧칠된 '경치좋게 사진처럼 똑같이 그린 그림'은
마그리트의 그림이나 앙리 마티즈의 그림이나 같다.
새로운 식당을 가보시면 우리형제를 데리고 항상 다시 가시던
청계산, 봉천동, 영등포의 식당들은
내가 찬미하는 뉴욕의 르버나딘이나 다니엘 그리고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프렌취런더리와 같다.
드시지도 못하는 '양주'들을 그렇게 모으고 관심가지는 것은
내가 대학에서 와인을 가르칠만큼 그 향기에 빠지고 그 구조적 테이스트에 감탄하며 사는것과 같다.
몽산포에서 채석강으로
그 해변가 텐트앞에서 휘발류 버너를 펌핑하시던 모습이나
리빙쉘에 타프를 드리우고 개스등아래 와인잔을 돌리는 모습과 같으며
평생을 시장볼 줄 모르는 어머니를 만드신만큼 손수 장을 보시던 모습이나
이사가면 고깃집이며 어물전 단골부터 먼저 만들어야 맘이 편해지는 내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월남전 당시 백마부대에 자원해서 부산항에서 당시연애중이던 어머니 눈물을 한바가지 쏟게 만드신 그 사연이나
부모님 허락도 없이 UN 평화유지군에 자원하여 서아프리카로 떠나던 날 성남비행장
어머니 눈물을 부산항때 두곱절만큼이나 쏟아 내게 했던 모습 또한 같다.
안나프루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길고 길며
때론 지루하고 힘이 들기도 하다.
카메라의 반 이상을 채운 만년설의 그 장엄한 산들의 모습은
3000미터를 넘어서야 그제서 모습을 드러내고
꼬박 4일 반나절의 걷고 걷는
그 시간동안
거의 이틀이상은 그들이 살아왔고 또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생활속'을 함께 걸어야 한다.
장엄함과 감탄을 연발하는 경치만을 기대했던 나에게
그 삶과 시간의 길들은
어쩌면
더 깊고 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했고
더불어
내 무의식속
지난시간들에 대한
오래된 도서관서고 같은 기억에
마그리트의 창틀 가득한
오후밝은 빛을 비추어 주었던 길이 되었던 것 같다.

네팔 카투만두에서 포카라로

남태평양 수상비행기의 낭만
서아프리카 작전비행의 긴장
첫
히말라야 그 첫비행의 설레임..

비행기 창을 가득채우는
그 길고 거대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NAYA POOL(나야풀)에서 KIMCHE를 거쳐 GHANDRUK 그리고 CHOMRONG, BAMBOO, DEURALI(데우랄리)를 지나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마차푸차레
장엄하단 표현보다 보다 명확한 단어를 찾고 싶은..

나야풀 시작포인트
안나푸르나트레킹은 그들의 삶을 거쳐 들어간다.
어릴적 내 기억 조각속에도 어렴풋이 남아있는
그 모습들..
그 시간의 기억들을 걷다.

본격적인 트레킹의 시작포인트
이곳에서 기발급받은 트레킹퍼밋에 시작포인트 스탬프를 날인한다.
Annapurna Conservation Area는 네팔 제일의 관광경제자원답게 매우 잘 관리된다.

저탄소발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머리에 특별한 장식을 한 나귀는 무리중 '리더'역할을 하는 나귀이다.
항상 앞서 가기를 좋아하고
어릴적부터 무리 중간에 서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성향의 어린나귀는
결국 리더역할을 맡게 된다고 한다.
무리를 이끄는 짐에 대해
조금도 가볍게 짐을 지워지지 않음에도 앞으로 나아서려하는
리.더.의 역할

끝도 없이
때론 지리하게 펼쳐지는
그들의 산속 마을
그들이 살아 온 방식들
그들이 살아 갈 문화들

이방인에게는 평생 이야깃거리가 되는 길
어떤이에게는 왕복 네시간의 학교 가는 길
어떤이에게는 편도 네시간 쌀포대를 지는 고된 생활의 길
그들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의 모습

소녀

아이
히말라야의 하늘빛

목동
히말라야의 하늘길

디뎌가는 길

쉬어가는 길

Avalanche(눈사태)
묵묵히 걷다 들린 천둥소리
이때 가이드가 격양된 목소리
"Oh. See. That's huge Avalanche!"
실제 장면의 저 경사와 길이는 엄청나게 길고 거대하다.

잠시 후..
자연이 살아가는 그 숭고한 모습

첫 히말라야의 길
아버지와 함께 걷다..
- Chapter II 로 이어집니다 -
From KEVIN'S NOTE
해찬님 성큼 걸음으로 가시면 삼일이면 오르실 듯 ㅋ
개인적인 글이지만 맘열고 봐주시니 제가 더 즐겁습니다.
혹시나
하고 보는 케빈황님의 후기글
역시나

ㅎㅎ 부담백배되옵니다~
가만히 글을 읽어보면서 아버님의 삶과 케빈황님의 삶이 다르듯 같아보입니다. 그런 변화무쌍한 세월의 시간속에서 히말라야의 안나는 변화지 않고 묵묵히 자리잡고 있었겠지요. ㅎㅎ 그런 안나가 뭐라고 말해주었는지 궁금하고 궁금합니다. *^^*
안나와의 만남.. 며칠만 기둘리소 ㅎ
내 한번도 직접 뵌적은 없지만 언젠간 이런 대장정의 서사시를 일궈내실 케빈황님이란 사실을 진작에 알고있었씸더 ㅋㅋ쩝^^
윽수 캄사합니더~ ㅋ
와!!! 정말 멋지십니다.
가보시고 싶으시져?^^
생각나네요.덜커덩거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소 응가 냄새,산으로 들어가면 불을 피우는 불냄새가 코를 진동하지만,금새 익숙해져서 하나가 되죠...아침에 일어나서 마시는 따또바니 우유...벌써 그립네요 2년전 다녀온 ABC...
그런 길들이 주는 생각들이 Chapter I 을 시작하게된 인스피레이션 같습니다. 같은 경험이 주는 '공감'이 대단하군여^^
항상 여유있어보이는 글솜씨에 은은한 감동스토리까지...케빈황님에 후기는 항상 많은것을 "생각하라" 하네요^^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과 함께 열린만큼 내것이 된다는 말도 있더랍니다. 쇼니님의 넓은 시각이 '생각하는 여유'까지 함께 얻어가시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아버지가 경찰이셨으니 케빈황님 글에 자꾸 고개가 끄덕여집니다.수필집 한권 읽은 느낌입니다.
한권분량의 후기...기대합니다.^^
아.. 그러셨군여^^ 아마도 다른분들보다 조금은 더 제 개인적인 글을 더 공감하시지 않을까 십네요. 개인적인 글이 넘 길어지면 지루해 하실까 걱정입니다.
이토록 멋지게 성장하신 케빈 님 뒤엔 멋진 아버님이 계셨군요...어제 '엄마를 부탁해'공연을 봤더랍니다...부모님들은 자녀에게 가족에게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가시는데...우리들의 미래...계획에는 부모와의 계획이 없더라는 말...아주 백십분 와닿더라는...암튼 계실때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날 따스해지면 엄마 모시구 캠핑 가야겠어요ㅎㅎ
저두 그게 큰 숙제인데.. ㅎ 올해는 꼭 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보았습니다.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시간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즐거운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