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모습은 대체로 200년마다 바뀐다고 한다. 나무와 풀들이 자라서 무성하다가 번개나 자연발화로 불타서 민둥산이 되었다가 산에는 다시 나무들이 들어선다. 산은 원래 푸른 곳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산의 나무를 벌목하거나 없애기 때문에 산은 황폐해지는것이다.
맹자(孟子)는 일찍이 사람은 원래 착하고 선하게 태어난 존재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선설을 우산의 나무[孟子集註 告子章句上 牛山之木]로서 설명하였다.
孟子曰牛山之木 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 伐之 可以爲美乎 是其日夜之所息 雨露之所潤 非無萌蘖之生焉 牛羊 又從而牧之 是以 若彼濯濯也 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 雖存乎人者 豈無仁義之心哉 其所以放其良心者亦猶斧斤之於木也 旦旦而伐之 可以爲美乎 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 則其旦晝之所爲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人見其禽獸也 而以爲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故 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
孔子曰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집주해설] 맹자께서 말하였다. 우산(제나라 동남쪽에 있던 산)의 나무들이 일찍이 아름다웠으나 큰 나라의 교외에 있었기 때문에 도끼와 자귀가 늘 그 나무들을 베니,어찌 전과 같이 아름다울 수가 있었겠는가. 나무들이 밤낮없이 자라나고 비와 이슬이 내려서 새싹은 늘 돋아나고 있건마는,소와 양을 끌어다가 먹이기 때문에 민둥산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민둥산을 보고 일찍이 나무가 없었다고 하지마는,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本性)이겠는가.
비록 사람에게 보존된 것인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는가. 자기의 양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도끼로 나무를 베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매일 도끼로 찍어 내는데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가 있겠는가. 수목도 밤낮으로 자라고, 아침 공기를 흡수하여 기운이 깨끗해질 때는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그 본능이 사람과 비슷하여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나무는 낮에 찍히어 그 깨끗한 기운이 눌리어 없어지게 된다. 이 잃어버리게 하는 일을 거듭하게 되면 밤사이에 길러지는 맑은 기운(夜氣)을 보존할 수 없게 된다. 밤 사이에 길러졌던 맑은 기운을 보존할 수 없게 되면 짐승과 다름이 없게 된다. 사람들은 그 짐승과 같은 자를 보고서 그에게는 본래부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바탕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사람이 가진 본래의 성정(性情)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그 기름을 얻으면 사물마다 자라지 않을것이 없고, 만일 그 기름을 잃으면 사물마다 사라지지 않을것이 없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잃어서 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한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말함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사람의 심성(心性)은 하늘이 부여한것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것인데 맹자는 이것을 선(善)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사람이 누구나 남의 불행을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고 이로부터 4단(四端)과 4덕(四德)을 이끌어낸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실마리이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실마리이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실마리이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선한 성을 타고 나지만 외물(外物)에 의해서 혹은 어떤 영향에 의해서 모두가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본성(本性)에 차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의 실마리를 한껏 배양하고 확충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고 이것을 군자(君子.지배자)와 소인(小人.피지배자)을 구분하는 근거로 삼았다. 즉 군자는 그것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반면 소인은 보존하지 못하고 상실한다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