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머리에 앉아 가만히 돌 하나를 응시합니다. 수석을 하는 이들은 돌에 난 구멍을 ‘투(透)’라 부릅니다. 뚫려 있다는 것, 그리하여 안과 밖이 경계 없이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만사형통의 길조라며 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내 시선은 매끈하게 관통된 구멍 옆, 가다 멈춘 듯 옴폭 패인 또 하나의 구멍에 오래 머뭅니다.
이 단단한 검은 돌의 가슴에 누가 이런 흔적을 남겼을까요. 아마도 수만 년 전, 거친 물살 속에서 작은 모래알 하나가 돌의 살결에 박혔을 것입니다. 물길이 바뀔 때마다 그 모래알은 돌의 몸속에서 조금씩 자리를 넓혀갔을 터이고, 돌은 제 살을 내주며 그 움직임을 견뎌야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견고함을 허물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 구멍이 되어간다는 것은 돌에게도 통증이었을 것입니다.
완전히 뚫린 구멍은 이제 자유롭습니다. 그곳으로 바람은 저항 없이 지나가고, 빛은 막힘없이 드나듭니다. 비워냄으로써 비로소 세상을 통과시키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상태를 동경합니다. 마음이 쉽게 닿고, 말이 막히지 않으며, 삶의 문장들이 시원하게 풀려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더 오래 붙드는 것은 끝내 반대편에 닿지 못한 채 멈춰 선 저 미완의 구멍입니다. 그것은 실패한 소통일까요, 아니면 불통의 흔적일까요.
가만히 손가락을 넣어 그 깊이를 가늠해 봅니다. 어쩌면 돌은 제 몸을 관통하려던 무엇을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제 안에 남겨두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가게 하기보다 머물게 하기로, 통로가 되기보다 둥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 뚫리지 않았기에 그 안에는 어둠이 고이고, 눈물 한 방울이 머물 자리가 생기며, 끝내 하지 못한 말들이 웅크릴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 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가슴에는 여러 개의 ‘투’가 나 있습니다. 어떤 슬픔은 나를 관통해 지나가며 나를 조금 투명하게 만들었지만, 어떤 아픔은 여전히 한복판에 멈춰 굳은살처럼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구멍들을 부끄러워하며 감추려 합니다. 왜 더 흘려보내지 못했는지, 왜 여전히 품고 있는지 스스로를 나무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을 봅니다. 완전히 뚫린 구멍이 세상을 향한 눈이라면, 뚫리다 멈춘 구멍은 내 안을 들여다보는 눈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막힘없이 통과하는 삶은 오히려 쉽게 비어버릴 수 있습니다. 내 안을 거쳐 간 것들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다 뚫리지 않은 그 먹먹한 공간에 고여 있는 고통의 잔여물들이야말로, 나를 나이게 하는 무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내어준 가장 정직한 방 한 칸입니다.
이 돌은 묻고 있는 듯합니다. 소통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환대하기를 원하는지.
만사형통이란 모든 것이 시원하게 뚫리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린 곳으로는 세상과 손을 맞잡고, 막힌 곳으로는 제 안의 슬픔을 가만히 감싸 안는 일. 그 두 개의 구멍을 한 몸에 품은 채 제 자리를 지키는 것. 비바람에 깎이면서도 끝내 부서지지 않고, 제 안에 창 하나를 내어가는 이 돌의 인내야말로 형통에 가까운 얼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밤, 마음속 구멍 하나가 유난히 아릿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불편함을 서둘러 밀어내려 했겠지만, 이제는 다르게 머뭅니다. 그 구멍이 깊어질수록 더 많은 어둠을 품을 수 있고, 그 어둠의 바닥에서야 가장 낮은 빛이 드러난다는 것을, 그저 조금 받아들여 봅니다.
검은 수석의 매끄러운 살결 위에 손을 얹습니다. 뚫린 구멍으로 스며든 서늘한 바람이, 막힌 구멍에 고인 온기를 건드리는 듯합니다. 소통과 침묵, 빛과 어둠이 한 몸에 머물러 비로소 돌 하나가 온전해졌습니다. 내 삶의 구멍들도 이 돌처럼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조용히 깊어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은 창 하나 내어줄 수 있다면.
돌 속의 구멍은 비어 있는 자리가 아니라, 가장 밀도 높은 문장들이 오래 머물다 간 흔적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