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벗어나 횃불 든 초목
지금은 구름으로 잔뜩 뒤덮였어도 머잖아 마음에 들 만큼 푸른 하늘이 열릴 것이다. 아무리 다급해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고 잣대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깜냥껏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냥 지나쳤다고 후회하지 않는다. 더 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소 여유를 갖고 다소곳이 기다리며 희망을 되살리는 것이다.
비록 겨울을 나면서 텅 빈 나무로 죽은 듯이 몹시 힘겨웠더라도 이제 새봄이 오고 있다. 무기력했던 날을 털어내고 고이 간직했던 새싹 돋고 꽃을 피우면 무슨 나무라고 당당히 잊었던 제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며 환호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리다 보면 다시 뽐내면서 일어설 날 온다. 그런데 때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
갈 길이 먼데 머뭇머뭇하다가 언제 가려나. 너무 다급하게 여기지 마라. 너무 섭섭하다거나 서러워하지 마라. 능력껏 해야지 지나치게 치솟으려 용트림하지 마라. 그렇다고 한가로이 웃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날씨가 좋을 때 풀을 말려야 좋은 건초가 된다고 한다. 그래야 가축의 겨울 사료가 마련되어 안심된다. 힘이 있을 때 부지런히 가야 한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마음을 모아 하나하나 뜻을 이루며 가야 한다. 한꺼번에 몰아서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한낱 핑계일 수 있어 조심스럽다. 농부는 한 톨 쌀을 얻기 위해 88번이나 뿌리고 거둘 때까지 끊임없이 꾸준히 볏논에 드나들어야 한다. 그래서 한자로 쌀을 미(米)라고 한단다. 분명한 것은 할 수 없다가 아니라 자신감에 할 수 있다고 마음 굳게 먹는 것이다.
물론 오직 마음 하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행동 없이 단순히 마음뿐이면 공상으로 끝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함께 해야 비로소 제대로 일이 풀리면서 알차게 된다. 마음만 들떠서 서두르면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 마음은 저쪽 언덕에 올라가 보고 싶고 이쪽 들판도 내려가 보고 싶다. 언덕은 언덕대로 들판은 들판대로 같을 듯 다른 것이 많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깨끗한 물도 흐르다가 한곳에 오래 머물면 냄새가 난다. 그대로 방치하면 썩을 수밖에 없다. 요란스러운 바람도 닥치는 대로 밀치다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멈추면 더는 바람이 아니다. 웃는다고 되지 않듯 찡그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당장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준비해도 늦지 않다.
길은 두고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니기 위한 것으로 발길이 잦아지면 처음엔 낯설어도 갈수록 따스하다. 그러나 오래도록 텅 비워두면 왠지 쓸쓸하고 썰렁해 외롭기까지 하다. 길이 사람을 데리고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길을 이끌고 가고 온다. 길은 사람이 한꺼번에 많이 몰려든다고 힘들어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길은 끝내는 길로 통한다.
이 길은 어디에서 끝나고 다시 시작될지 지나치게 걱정할 것 없다. 길은 언제나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 집을 찾아간다. 적당한 곳에서 다른 길로 옮겨간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다. 사람만 다니는 길이 아니다. 바람이 약삭빠르게 길을 따라 내달렸을 것이다. 그동안 숱한 계절이 이 길을 따라서 떠나갔을 것이고 기다리고 있는 봄도 이 길을 따라서 오고 갔을 것이다.
길은 누가 오갔는지 일일이 기억에 담아두거나 직접 내색하지 않는다. 길은 혼자보다 오가는 사람이 있어 신바람이 나고 심심하지 않다. 그래도 이웃처럼 초목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주변에 싹 틔우고 꽃 피고 숱한 야생화도 한 몫을 거든다. 곳곳에서 열심히 준비한 듯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축제를 즐기고 있다. 굳이 누가 나서 어디라 떠들지 않아도 알고 있다.
초목의 꽃 잔치는 누가 앞장서 이래라저래라하지 않아도 눈치 빠르다. 몇 날 며칠 연습이 없어도 훌륭하다. 흙 속에 묻혀있고 딱딱한 껍질 속에 있지 싶은 새싹이나 꽃자리가 겨우내 아니 어떤 것은 지난여름부터 겨울을 이겨내고 맞을 이 봄날을 위해서 손꼽았나 보다. 모질은 겨울을 무사하게 넘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로쇠나무만 아니라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있다.
겨울은 모두 멈춘 것 같아도 초목은 암암리에 연초록 새싹은 물론 곱디고운 빛깔의 눈부신 꽃잎을 준비하였다. 옆에도 모를 만큼 비밀스레 감추고 온갖 고난을 꾹꾹 참고 견뎠다가 봄날이 오면서 모여서 약속이라도 한 양 일제히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더는 지독스러운 기억의 겨울에만 갇혀 지낼 수 없다. 하지만 울분은 감추면서 오로지 넘치는 기쁨만을 내놓았다.
해방을 외치듯 일제히 초록의 물결에 하얗고 노랗고 붉은 깃발의 꽃불을 들고 일어서면서 이제는 겨울 아닌 봄이라고 외쳐대는 것이다. 우리가 외쳤던 삼일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될 아주 의미 깊은 날이다. 저들 초목은 겨울에서 벗어나 따뜻한 봄을 갈망한다. 초록빛 물결에 불끈 꽃대를 세우면서 횃불을 들어 세상을 밝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