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운전을 그만두고서
집 가까운 예배당의 새벽기도회에 참여했습니다. 얼마만의 새벽기도 시간인지... 제 자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마음에 담아 기도하였습니다. 한국 교회와 이 사회와 나라를 생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출발을 하였다는 면에서 긍정적입니다. 좀 깊은 기도의 세계를 가진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며 매일 설교 평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강단에서의 설교자의 말이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본문이든지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를 바르게 전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의 말 곧 인간의 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대해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아멘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면에서 아주 취약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제 글이 나름대로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구별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신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명기의 장막절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신 16:13~17). 하나님을 뵈옵는 것과 그때에 반드시 예물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설교의 주 내용이었습니다. 전자와 관련하여서는 기도 생활을 강조하였고 후자와 관련하여서는 헌금 생활을 강조하였습니다. 헌금 생활에는 매 예배마다 헌금이 이루어지는 것이 원리라는 것과 주일 헌금, 십일조 헌금, 어떤 사역을 위한 예배 때에 액수는 적더라도 헌금을 하여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로부터 배워 몸에 밴 것과 요즘 교회 젊은이들이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하며 몸에 밴 십일조 생활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행해지는 아주 일반적인 설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설교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다르게 말하면 구약을 이런 식으로 문자적으로 오늘날에 연결시켜도 되는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먼저 본문 자체만 생각해 봅시다. 장막절은 지켜야 하는 대상이 나옵니다. 남자입니다. 성인인 남자입니다. 하나님을 뵙는 자리에 나와야 하는 대상에 여자와 어린아이는 제외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오늘날 그대로 연결시켜도 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것을 오늘날의 예배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로 확대하면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여자가 바지를 입으면 안 됩니다. 아내의 외도가 의심되면 쓴 물을 마시게 하여 외도했는지 안 했는지를 가려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구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말하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유대교입니다. 물론 앞에 언급한 내용이 문자적으로 교회에서 이야기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문자적으로 이야기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어떤 내용은 문자적으로 오늘날 연결시키고 어떤 내용은 문자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음에 있어서의 근거 문제가 대두됩니다. 설교자의 자기 생각에 꼴리는 대로.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해 온 전통대로. 물론 이 또한 온전히 옳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 전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약 해석의 원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약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프리즘을 통과시키고 그 결과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아 구약이 재해석되고 그 결과물을 말할 때에 그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의 랍비의 말일 뿐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지 랍비의 생각을 전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신학교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곳에서 구약을 읽는 바른 원리가 가르쳐지고 학생 때에 그것이 몸에 배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모든 구약을 읽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프리즘을 통과시키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형은 기독교인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유대교와 혼합된 기독교를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려서 유대교를 종식시키셨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유대교를 열심히 전파하고 있는 꼴입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안쓰러운 상황입니다. 언제쯤이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
신학교가 어떤 상황이든지 가장 최종적인 책임은 말씀사역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바른 해석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몸에 익히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그 결과물을 성도들에게 전하여야 합니다. 신자들도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에 대해 바른 반응을 하는 것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합니다. 역시나 바른 해석 원리를 배우고 바르게 반응하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말씀사역자가 바른 해석을 하도록 압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때에 최소한 유대교와 혼합된 기독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고백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그 날이 하루라도 속히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