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과 사위
노름판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없고 아래위도 없다.
하기야 상대방 주머니 속의 돈을 제 주머니로 가져다넣을 생각만 하니 칼을 안 들었을 뿐
도둑 심보에 다름 아니다.
청풍 주막 구석방 노름판에서 오늘도 멱살잡이하는 건 젊은 허우대 박대근과 늙은 황 생원이다.
“야 이 자식아, 골패 똑바로 돌려.”
“이 영감탱이가 또 지랄이네.”
장돌뱅이 두 사람은 평소에는 항상 붙어다니는 아삼륙이지만 노름판에서는 안면몰수다.
큰 덩치로 단옷날 황소도 탄 씨름꾼 박대근과 늙고 왜소한 황 생원은 둘 다 소장수다.
소장수 삼십년의 황 생원은 소를 볼 줄 알지만 박대근은 초짜다.
소장수가 소를 잘못 사면 팔지를 못한다.
박대근은 소를 살 때는 그 큰 덩치에 “아재∼ 이리 좀 와보이소” 하며
들병이가 선비를 끌어들이듯 황 생원 소매를 당긴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간 황 생원은 첫눈에 고개를 젓는다.
국밥집에서 탁배기 한잔을 젖힌 박대근이 묻는다.
“아재, 그 소는 와 안돼요?”
“콧잔등이 바짝 마른 놈은 성깔이 있는 놈이여.” 국밥 술값 계산은 박대근이 했다.
성깔 있는 놈은 우시장에서도 뿔을 들이대 팔아먹을 수가 없다.
이렇게 좋은 사이도 주막에서 술에 취하고 나면 아재고 나발이고 없다.
황 생원의 끈질긴 구애 끝에 마침내 안방으로 들어갔지만 주모의 헛기침 소리가 연달아 나더니만
황 생원이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토끼야 토끼” 주모가 구시렁거리더니 통시에서 나오는 박대근을 낚아챘다.
이튿날 아침상에 대근이 밥 속에는 삶은 달걀이 두개나 들어 있었다.
문경장에서 산 암소 한마리를 좋은 값으로 상주장에서 팔아치운 박대근이 황 생원을 찾았더니
집이 상주 함창이라 집에 가겠다고 해서 박대근이 닭을 한마리 사서 안겼다.
“자네도 우리 집에 가서 자게. 행랑방이 비었으니.”
대근이는 파장에 닭을 또 한마리 샀다. 십여리 남짓 걸어서 황 생원 집에 따라갔다.
닭백숙에 집에서 담가놓은 매실주를 마시다 박대근은 깜짝 놀랐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가? 땅 위의 처녀인가?
이튿날 아침, 황 생원이 상주장에서 산 황소를 몰고 점촌장으로 가려고 이른 아침을 먹는데
박대근은 기침을 해대더니 고뿔 기운이 있다며 행랑방에서 일어나지를 않는 것이다.
황 생원이 떠나고 난 후에 부스스 일어난 대근이 “형수님, 이 행랑방 제게 주십시오.
한달 월세 서른냥 드릴 테니.” 황 생원 마누라 막실댁은 서른냥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선불로 석달 치 하고도 열냥을 더 보태 백냥을 받은 막실댁이 대근이 귀를 당겨
“황 생원한테는 말하지 마시요잉” 하더니 딸 도화와 같이 어지러운 행랑방을 치운다.
대근이는 제집을 향해 부리나케 걸었다.
이튿날 아침, 이불을 짊어진 대근이 행랑방에 들어왔다.
황 생원은 깜짝 놀랐지만 대근이 윗옷을 벗어젖히고 외양간을 깨끗이 치우는 걸 보고는 빙긋이 웃었다.
먼 곳 장에 갈 때 소여물을 지고 가는 것도 대근이 몫이다.
장돌뱅이들은 한달에 한번 집에 들어오면 다행이다.
황 생원과 달리 대근이는 집에 올 때 고기 한근이나 고등어 한손이라도 사 들고 왔다.
그렇게 한해가 넘어갔다.
설 대목장을 봐서 집안이 바쁜데 도화가 드러누웠다.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붓고 베개는 젖었다. 헛구역질을 했다.
화들짝 놀란 어미가 털썩 주저앉고 황 생원은 낫을 빼 들고 행랑방으로 달려갔다.
박대근이 눈을 껌뻑이며 “장인어른, 제 목을 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해보세요.”
얼핏 생각해도 살인할 일은 아니다.
“대근아, 내 얘기 한번 들어봐라. 우리가 막말에 멱살잡이한 것은 그렇다 치고,
청풍 주막 주모를 나도 안고 너도 안았으니 우리 두 사람은 동서잖아 이자식아∼,
어떻게 장인과 사위가 될 수 있냐.”
박대근이 망설임 없이 “그 문제는 간단해요. 둘이서 입만 꿰매면 됩니다요.”
황 생원이 쩝쩝 입맛만 다셨다.
대근이와 도화는춘삼월에 혼례식을 올리고 세달 후에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대근이는 집에서 데릴사위처럼 열심히 일하고 장에 가서는 황 생원의 호위무사다.
폭설이 쌓이거나 장마 때는 집에서 둘이 또 골패로 판을 벌여 옥신각신하고
주막에서 술에 취하면 옛 버릇대로 놀았다더라.
첫댓글 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