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제 다시 만나리
친구가 아내의 유방암 첫 수술을 마친 후 의사 앞에 섰습니다. 일단 수술은 잘 됐다는 말에 목젖이 움찔거립니다. 의사가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어요. 유방암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면서.
착한 암, 비교적 착한 암, 그리고 나쁜 암이 있다고요. 흔히 말하는 유방암 완치율 80%는 통틀어 이르는 것이고 문제는 악성암의 경우인데 완치율이 잘해야 20%라고 합니다.
불행히도 그 나쁜 암이 친구 아내를 찾은 겁니다. 의사는 이제부터 중요한 게 마음 가짐이라면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봐라. 신앙을 지니셨다니 다행이네요. 병에 집착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후 부부는 양평 한강이 보이는 산 아래로 이사를 했습니다. 관료출신 선배가 전원주택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지요. 암투병을 위해 먼저 양지바른 이곳에 자리 잡은 암 선배 분이기도 합니다.
먹거리는 그분 도움을 많이 받고, 뒷집 총장 댁 사모님과 어울려 취미생활을 하고, 교회도 나가며 점차 안정을 찾는 모습을 보였지요. 감사한 것은 암에 대한 아내의 담담함이고 때로는 담대함입니다.
부부는 약속을 합니다. “의사 당부처럼 주위의 말에 혹하지 말자. 먹고 싶은 것 가리지 말고 잘 먹자. 좋은 공기 마시며 자연과 놀자. 기죽지 말고 웃으며 살자. 생사는 주님께 맡기자.“
100명쯤 모이는 교회에는 투병 환경을 찾아온 외지인들도 있고 화가, 시인, 도예가 등 재능이 다양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내는 이들과 교우하며 난도 치고 그림도 배우며 행복해했습니다.
계곡에서 길어온 생수를 먹고, 좋은 공기 마시며, 마음까지 즐거우니 암도 기를 숙이는 듯했죠. 조금씩 암을 극복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1년 반이 지났을 때입니다.
소화가 안 된다고 하더니, 지하철 계단을 한 번에 오르지 못합니다. 설마 하고 병원을 찾았는데, 암이 간에 전이되고 복수가 차 호흡이 힘들게 됨을 알았습니다. 첫날부터 2리터 물을 뽑았지요.
수술을 끝내고 퇴원해 조심스럽지만 잘 지냈습니다. 1년이 지났을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고 호소합니다. 이번에는 임파선에 암세포가 보였습니다. 아내는 세 번째 수술을 꿋꿋하게 받았습니다.
친구는 사업을 정리하고 오직 아내의 병시중에 올인을 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아내의 의지가 눈물겨웠지요.
처음 수술에서 1년 반, 그리고 1년, 다시 6개월이 지날 즈음, 몸이 중심을 못 잡고 걸음이 흔들렸습니다. 다시 입원할 수밖에요. 이번엔 암이 뇌로 번졌다는, 현대 의학의 한계를 듣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이 유난히 길고 쓸쓸했습니다. 둘 다 입을 다물고 물음도 답도 없는 정막만 낮게 깔립니다. 어떻게 아내에게 설명할까. 얽힌 실타래를 들고 친구의 머리가 혼란스러웠죠.
양수리의 암록 빛 강물을 응시하던 아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말해. 괜찮아. 놀라지 않을 게. 기적이란 게 있잖아? 의사도 처음 2년이라 했는데 나 지금 3년 넘게 살잖아.“
아내는 남편의 설명을 차분히 듣습니다. 부부는 1시간을 길 위에서 심연 깊이 깔아 둔 얘기를 나눕니다. 유가의 종손에게 시집와 고생만 시켰다고 남자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특히 종손에게 부여된 제사 문제가 신앙과 부딪치면서 갈등을 많이 겪게 한 일. 사업하는 남편을 만나 고생한 일. 돈 빌리러 여기저기 손 내밀고 궂은일만 한 아내가 고맙고 미안해섭니다.
며칠 후 아내가 남편을 앉혀놓고 정색을 하며 약속을 부탁합니다.
“나 호흡기 달고 그렇게 연명시키지 말아요.” “그건 그때 가 판단할일야. 벌써부터 왜 그래?“ 화를 내던 남편이 고개를 돌립니다.
같은 길의 끝을 바라보는 부부의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그날부터 아내를 편하게 하려고 호스피스 병원, 요양병원을 알아보다 친지의 도움으로 대학병원 한방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침 맞고 뜸 뜨고, 주사 맞고··· 이것이 아내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을 부릅니다.
“정신 이만할 때 말해 두려고.“
그동안 혼자서 떠날 준비를 한 모양입니다. 장손으로 집안일에 쓴 수입 지출 목록, 미진하게 남아 있는 일들, 부의금 축의금 오간 기록, 받을 돈과 줄 돈, 가계부에 다 정리해 놓았다고.
입원 소식을 듣고 문병객이 몰려옵니다. 교회, 본 교회, 각종 모임, 동창, 성격이 좋아 여기저기 쫓아다닌 탓에 하루에 수십 명이 다녀갑니다. 같은 병실엔 백댄서라는 두 청년이 옆 베드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원무과에서 보자고 해 갔더니 시끄러워 쉴 수 없다고 진정을한 모양입니다. 그 덕에 아내가 2인실로 옮기게 되었죠. 아내가 옆 자리 신경 쓰지 않아서 좋다고 반기기도 했는데….
병실을 옮기면서 통증이 잦아집니다. 진통제가 점차 단위를 높이더니 나중엔 마약 주사를 찾습니다. 얼마나 심하면 거부해온 약물을 스스로 청할까. 주사를 맞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2-3시간을 잡니다.
깨나면 다시 통증이 오고, 주사 맞고, 그 과정을 얼마나 반복해야 하나. 아내의 신음소리가 남편 가슴에 복수처럼 차오릅니다. 어느 날 물끄러미 창박을 바라보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데….
여보! 아내가 부릅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잠에서 깨난 아내가 해맑게 웃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기분이 좋네?” 놀라 묻는 남편을 빤히 보던 아내가 웃으며 말합니다.
“나 행복한 사람이야. 맞지?”
“뭐가, 행복한 데?”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났잖아. 그게 너무 감사해.”
아내 말에 진심이 담겼습니다.
“마음이 편해. 감사한 생각만 들어.”
"다행이네."
“당신이 너무 고맙다.”
남편 눈가가 촉촉해 집니다. 그 말이 마지막 유언일 줄은 몰랐죠.
아내가 떠난 지 6년 만에 친구와 양수리 카페 ‘수수’에서 뒷 얘기를 듣습니다. 총장 댁 사모님이 준 다육식물이 많았는데 아내가 무척 좋아했다고… 그래서 애착이 더 가 정성으로 키웠답니다. 열 개로 시작한 화분이 30개로 늘어 베란다를 채웠습니다.
“다육아 잘 잤어?” 아내를 보듯 대화하는 것이 기쁨이었다는 친구….
그런데 지난겨울을 지나면서 하나 둘 마르기 시작합니다.
“내 나름 정성을 기울였는데 하나씩 시들면서 죽어 가더라. 그러더니 열흘 전 마지막 화분까지 결국은 말라 버리더라.” 한동안 자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답니다. 그새 내 마음이 어떻게 된 걸까?
“그게 미안하더라. 몇 년 됐다고.
마음이 식은 것도 아닌데.
잊은 적 없는데. 정말 아닌데….”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