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오반지가 목 졸려 치명한 곳
청주 읍청당은 현재 청주 제일교회(舊淸 州邑敎會) 자리에 있었다. 청주 제일교회는 1904년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본부에서 청주 선교지부 설립을 위한 거점 교회로 세웠다.
오반지(吳盤池, 1813~1866,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 포졸들에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어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으며,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한번은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갈 때, 형리들이 몽둥이로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솟아나자, 바오로는 대뜸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좋소. 하지만 관장의 명령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때리는 거요.”라고 항의하였다.
당시 옥에는 바오로와 함께 체포된 젊은이, 그리고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라는 교우가 있었다. 관장은 이들 세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만을 얻어 내려고 갖가지로 유혹하였지만, 바오로는 조금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관장은 어떠한 형벌과 유혹으로도 바오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가 사형 집행을 관장하는 관리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기 위해 종이를 갖다 주자, 그는 끝까지 “배교한다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바오로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병인치명사적》21권 49~50쪽, 류 베드로의 증언). 며느리 수산나의 증언에는 “2월 11일에 참수하여 죽으니 나이는 54세”라고 되어 있다(같은 책 21권 92쪽). 다른 증언에는 올가미(교수)로 죽었다고만 나오지 치명 장소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1866년 10월에 연풍 사람 추(秋)순옥 회장도 갖은 혹형을 감수하다가 이곳에서 기쁘게 치명 순교하였다.
▒ 읍청당터
이곳은 본래 청주 영장(營將)의 관사와 죄인들을 가두는 옥사가 있었던 장소로 조선 후기 천주교 대박해 때에 많은 교인들이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순교의 피눈물을 흘리던 역사적인 곳이다. 청주읍교회(청주 제일교회)는 개신교회로서, 천주교인들이 고문당하고 순교당한 바로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당시 동학 운동(1894∼1895) 때 관군 편을 들어 공을 세운 보부상 조합이 이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개신교회가 이 땅을 사들인 것이다. 1천 5백 평되는 넓은 대지를 확보한 교회는 1백 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방흥근의 집에서 모이던 청남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여학교인 청신학교(淸信學校)도 설립하였다. 후에 소민병원(蘇民病院)으로 발전하는 시약소(施藥所)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당유치원과 청주 남녀 성경 학원도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 청주 제일교회 100년
청주 제일교회는 1904년에 청주읍 교회로 세워졌다. 1900년 말부터 북장로회의 민노아 목사는 장로교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충청도 지방에 선교의 뜻을 두고 1904년 남문 밖에 여섯 개의 방을 가진 커다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김흥경의 처소 겸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전도한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열었다. 2004년 100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기념비 뒤쪽에는 이곳이 순교터임을 기록하고 있다.
▒ 망선루(望仙樓)
망선루는 현재 옛 청남학교의 자리인 청주시 남문로1가 청주 제일교회 내에 있다가 중앙 공원 내로 복원되어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1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서 깊은 문화재다. 이 건물은 고려 때 세워진 관아의 건물로, 청주 객관(客館)의 동쪽에 위치한 누각이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였다. 옆에맑은 연못이 있고 사방이 훤히 트였다고 하니 이러한 곳에 세워진 2층 누각은 주변의 정취가 수려하게 보였으리라 상상이 되며, 그렇기에 취경루란 이름이 붙여졌으리라 짐작된다. 14세기 후반,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난 갔다가 홍건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이곳 청주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1361년(공민왕 10년) 청주에서 문과(文科)와 감시(監試)를 치루고 방(榜)을 이 취경루에 내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순교자
◆ 순교자 오반지 바오로 (1813∼1866년) <하느님의 종 124위>
오반지(吳盤池)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이내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후 모진 형벌과 문초 후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사형 집행 전 그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66년 2월 11일(양력 3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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