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종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일심'이 있고,
그 '일심' 위에서 다양한 '업(業) 현상'이 인연 조화에 따라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또 생기는 일이 쉼 없이 계속된다.
법성종의 교학에서는 바로 이런 연기의 소산인 '업 현상'에 휘둘리지 말고
'일심'을 몸소 체험하여,
그 '일심'에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기능'과 '지혜롭고 정화하는 기능'을 꾸밈없이 사용하면서,
태어나는 세상마다 형편껏 자신의 '업 현상'을 소멸시키고, 더 나아가
'긴 생명의 길' 속에서
마침내는 한 점의 '업 현상'조차도 소멸시켜, 마침내
'일심' 그 자체와 하나가 되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윤회에 들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법성종에서는 이런 형이상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인간 행위의 당위성을 추론한다.
화엄의 초조로 추앙되는 두순 법사가
종교적인 실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은 여러 연구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법계관문(法界觀門)》을 두순 법사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알았던
당나라의 화엄조사들은
《법계관문》에 각종 주석을 내어 '수행의 방법'과 '교상(敎相)의 해석(解釋)'에 관한 이론을 정비했고,
다른 한편으로 《40 화엄경》의 끝 부분에 붙어 있는
〈보현행원품〉의 주석 및 그에 따르는 수행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두순 법사가 제시한
화엄의 '관행(觀行)'과 '보현행(普賢行)'은 역대의 화엄조사들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그들의 교학과 수행의 근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역대 화엄조사들의 수행은 그 후 각종 법요의식(法要儀式)과 결합되어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정착한다.
그렇게 한 대표적인 화엄 조사 중의 한 분이 진수 사문(晉水 沙門) 정원(淨源, 1011~1088년) 법사이다.
고려의 대각 국사 의천 법사가 스승으로 섬긴 분이 바로 이 분이다.
정원 법사는 《화엄보현행원수증의(華嚴普賢行願修證儀)(No.1472本)》(1권)에서
'단좌사유(端坐思惟)' 개념을 빌어서
법성철학의 수행론을 둘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오비로법계(悟毘盧法界, 비로법계를 깨닫는 것)'이고,
둘째는 '수보현행해(修普賢行海,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2종의 수행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원 법사에 의하면, '비로법계'란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일진무애법계(一眞無碍法界)' 혹은 '일심(一心)'이라고 한다.
이 '일심'은 성인과 법부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진심(眞心)'이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진심'은 경전마다 다른 용어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내용에는 전혀 차별이 없다.
그러면 '비로법계(毘盧法界)를 깨닫다.'라는 말에서
'깨닫다'의 말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순(隨順)한다' 또는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무심(無心)'해야 한다.
'무심'해야 '일심'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모든 생명체[衆生]가 항상 '일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상한 '업 현상'에 휘둘리는 이유는
인간 지식의 원초적인 순환 구조에 기인한다.
이런 원초적인 구조를 자각하지 못하고, 또 그런 원초적인 구조에 휘말리는 현상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법성종에서는, 인간들에게 저마다 시간을 한정하지 말고 쉼 없이 무명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생에, 그렇게 하기를 세세생생에 하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필자의 다른 논문에서 논증했듯이, 종밀은 '돈오점수'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위의 말대로 '비로법계(毘盧法界)'를 깨치기만 하면, 그 속에 무수한 지혜와 공덕이 들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무시이래로 윤회하면서 쌓여온 어리석음에 물들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저들은 이렇게 답한다.
자기에게 본래 간직되어 있는 '비로법계'와 하나가 되어[稱合],
자기 속에 본래부터 바다처럼 무량하게 구비되어 있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라고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보현의 행원을 실천하는가?
정원 법사에 따르면 '관행(觀行)'을 하라고 한다.
'관행'이란 '관(觀)을 행하는 수행'을 말하는데,
그 구체적인 조목으로 정원 법사는
'제망무진관(帝網無盡觀)'과 '무장애법계관(無障碍法界觀)'을 수행법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 '제망무진관(帝網無盡觀)'의 수행 방법으로 정원 법사는
〈보현행원품〉의 열 가지 행원(行願)을 들고 있다.
즉, (1)첫째는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라. (2)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라.
(3)셋째는 부처님께 공양하라. (4)넷째는 자신의 업장 참회하라. (5)다섯째는 남의 공덕을 덩달아 기뻐하라.
(6)여섯째는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라. (7)일곱째는 부처님이 오래 계시기를 간청하라.
(8)여덟째는 부처님을 기준 삼아 배워라. (9)아홉째는 중생을 섬겨라. (10)열째는 중생에게 되돌려줘라.
이 10종의 행원을 정원 법사는 다섯 영역으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다섯이란 첫째 예경문(禮敬門), 둘째 공양문(供養門), 셋째 참회문(懺悔門),
넷째 발원문(發願門), 다섯째 지송문(持誦門)이다.
이것이 법성종의 윤리학적 측면이다.
둘째, '무장애법계관(無障碍法界觀)'에 대해서 정원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장애법계관'이란
이를테면 일체의 염법(染法)과 정법(正法) 자체가 모두 '무장애법계'의 마음이라고
묵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능히 관하는 지혜도 역시 모두 법계의 마음이라고
묵상하는 것이다.
'무장애법계관'을 수행함이란,
'일심'이 원인이 되어서 관찰하는 주체도 생기고,
'일심'이 원인이 되어서 관찰되는 대상인 법(法)도 생긴다고,
그렇게 '관(觀)'하는 수행이다.
'의식 주체'는 물론 의식의 재료거리가 되고 있는 '법(法)'도
모두가 '진심(眞心)'이 운동하는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관(觀)'하고,
또 마음속으로 묵상하되 무수하게 많은 3보 앞에
내 한 몸을 무수하게 분신하여
그들 앞에 앞앞이 나아간다고 '관(觀)' 하면서,
그들에게 예배하고 공양 올리고 참회하고 발원하고
명호를 염송하라는 것이다.
이상이 '보현행해(普賢行海);
바다처럼 무한한 공덕이 갖추어진 보현보살의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자기에게 본래 간직되어 있는
'비로법계(毘盧法界)'와 하나가 되어[稱合],
자기 속에 본래부터 바다처럼 무량하게 구비되어 있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계간 불교평론 2014년 봄 제16권 제1호 통권 57호
불교평론 학술상 수상 기념 강연
법성종 현양의 의의 / 신규탁에서 발췌
원효스님이 정원법사보다 수승하시고
지금 우리에게 쉽게 가슴에 와닿게 법문해주시는
정목스님께 참으로 감사드릴 뿐입니다.
일체경계 본래일심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 '일심'은 성인과 법부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진심(眞心)'이다. -->???
일심은 중생심이다.
중생심에는 ----체, 상, 용이 있다.
체는 ---일심의 근원이며, 진심, 진여, 불성, 여래장이라고 한다.
상은---범부의 마음으로 보는 염상 / 부처의 마음으로 보는 여래장성공덕상----이 있다.
원효는 일심을 진심이라 하지 않았다.
일심은 중생심(중생의 마음)이니 ------진심이 아니라------>진심(청정심) + 번뇌심(분별심)이다.
'일심은 적멸이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일심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원효사상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를 통째로 알기 어렵다.
나무아미타불
'무장애법계관'이란 이를테면 일체의 염법(染法)과 정법(淨法) 자체가 모두 '무장애법계'의 마음이라고 묵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능히 관하는 지혜도 역시 모두 법계의 마음이라고 묵상하는 것이다.
-->위의 마음은 일심이다.-->그렇다면--->일심은 진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논문은 모순이 많다.
나무아미타불
"일심은 중생심"(중생의 마음)이니 ----- 진심이 아니라 -----> 진심(청정심) + 번뇌심(분별심)이다.
'일심은 적멸이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일심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무장애법계관'이란 일체의 염법(染法)과 정법(正法) 자체가 '무장애법계'의 마음 ---> 위의 마음은 일심이다.
--->그렇다면--->일심은 진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심은 중생심": (진심 + 번뇌심 = 청정심 + 분별심)이다.
"일심의 근원은 중생심성": (진심,진여,불성,여래장)이라고 한다.
스님의 바른 가르침에 귀명합니다.
일심.광명.화신.아미타!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불교는 관념과 상식과 지식이 아닙니다.
감득 증득~ 깨달음 은 필수적이고 깨달아서 일심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철 히 발견하는 '경계'와 "계합"
정목스님의 "견명성오도" 스님의 "보리수" 나무가 역사적인 이시대에~
일대사 불가사의 한 인연 입니다.
특히 원효스님의 "논서"는 원효스님의 경계가 되어봐야지
원효스님의 논서를 해설과 번역 을 할수가있다는 사실~ 이시대에원효~ "선지식" 정목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심 광명 화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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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 광명 화신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합니다.
제대로 알고 바르게 알게 일깨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 아미타파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정목스님께 감사한 순간 행복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명쾌한 정목스님의 해설로 시원해 졌습니다..
감사합니다...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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