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 :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벧후1:5-7)
2027.7.2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예전에 어느 체육고등학교에서 기독교 동아리 예배를 드릴 때, 운동하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교실 게시판에 “노 페인 노 게인(No Pain, No Gain)”이라는 글씨를 크게 써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보통 ‘고난(희생) 없는 영광은 없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말이다. 모든 일에는 고난이라는 댓가지불이 필요하다.
금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양궁이 전 종목 석권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양궁선수들이 한국에서 연습할 때, AI 인공지능 양궁로봇을 설치하고, 로봇과 대결하면서 훈련을 했다고 한다(사진). 그런데 그러한 훈련과정에 엄청난 고난과 절제가 요구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인생에게도 동일하다. 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서 승리(점수 ,금메달, 성공, 풍년 등)를 얻을 수 없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고, 비바람이 더 풍성한 바다를 만들 듯이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해 고통이라는 댓가지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에 합당한 절제가 요구된다.
신앙적으로는 어떨까? 신앙적으로는 더욱더 믿음의 절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경기장에서 천국을 향해 달려가는 선수들과 같고, 복음전파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삶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선수에 비유하면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이를 위해 자신도 날마다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했다(고전9:24-27).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4-27)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지식(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고 강조했다.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여기서 쓰인 절제(앵크라테이아)는 “안으로 향하는 힘” 또는 ”자제력“을 뜻한다. 사도 베드로가 이처럼 절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아도, 절제가 없으면 신비주의나 이단에 빠지기 쉽고, 그 행실이 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사회나 교회를 막론하고 절제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절제 없는 분노는 한 순간에 배우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절벽으로 밀어넣기도 한다. 심지어 공동체(교회, 국가 등)를 분열시키는 폭력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인격과 영적성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제에 대해 함께 나누고 기도하고자 한다.
1. 무엇을 절제할 것인?(What)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가? 절제가 필요한 행실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시간에 무엇을 절제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절제하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뱀의 미혹에 넘어간 것도 자신을 드러내고(높아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창세기3장).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려는 마음을 교만이라고 하고, 실제로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하나님이 되려고) 실제 행동으로 시도한 것이 죄이다. 이처럼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나가고,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척”을 하게 된다(아는 척, 있는 척, 똑똑한 척, 고상한 척 등).
지금도 마귀 사탄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도록 미혹한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투고 신경전을 벌이는 대부분의 원인은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부터 비롯된다. 내가 드러나야 하는데, 남이 드러나니까 마음이 불편해 진다. 그래서 불편해진 마음의 틈 사이로 시기와 질투가 안개처럼(옛날 연탄가스가 스며들듯이)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2. 왜 절제해야 하는가?(Why)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해야 할까? 내가 드러나면, 내가 드러난 만큼 하나님은 가려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적인 절제란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육신에서부터 승천하시기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다.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절제이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맡겨주신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육체적인 소욕들을 절제해야 한다(육체적인 일에 대한 것은 갈5:19-21을 보라). 성도들의 삶의 목적은 항상 사람(나, 우리)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기독교는 자아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곧 자아성취이기도 하다.
3. 언제까지 절제해야 하는가?(When) -
그러면 우리들은 언제까지 절제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명확하다. 예수님처럼, 죽기까지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심장이 멎는 그 날까지, 천국에 도착 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복음을 위해 절제해야 한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복음을 위해 더 낮아지고 낮아져서, 죽기까지 복종하고 절제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간적인 뜻을 절제하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마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혈기를 자극하는 대적자들의 말에 대응하는 것을 끝까지 절제하셨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결국은 인류구원의 대업을 완성하셨다(마27:40-42).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0-42)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기록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4. 어떻게 절제할 수 있는가?(How)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절제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강조했다(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은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말씀의 저자이기 때문이다(딤후3;16). 그렇기에 만약 우리들이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힘쓴다면(읽고, 듣고, 배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힘씀), 그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절제의 삶이 된다.
이처럼 우리들이 성령을 따라서 행해야할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성도들)은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성도라는 존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다(갈2:20, 갈5:24-26). 그렇기에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 맞다(갈5:24-2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4-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지역 주민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들이 세상이라는 경기장에서 마지막 승리자들이 되기 원한다면, 먼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모든 일에 절제하기를 더욱 힘써야 한다. 특히 나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힘쓰자. 이를 위해 성령을 따라 행하기를 힘쓰자. 이것이 지식에 절제를 더하기를 힘쓰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