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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솔바람동요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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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가고 오는 길
기차는 어둠을 뚫으며 계속 앞으로 덜컹덜컹 쇳소리를 내며 힘들게 질주하고 있었다. 질주 한다기 보다 있는 힘을 다 해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한 역에 겨우 도착 할 무렵이면 기차는 꽥- 긴 소리를 토해내며 잠시 멈추었다 다시 힘겹게 출발하곤 했다.
연기를 내 뿜으며 숨을 헐떡헐떡 있는 힘을 다 해 악을 쓰는 듯한 힘겨움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마을과 시가지를 지날 때 차창 밖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도시의 가로등 불빛과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택들의 불빛이 밤을 알려 주었다
통로에 주저앉아 승객이 졸고 있는 옆 좌석에, 배낭을 가슴으로 안고 겨우 등을 의지 한 채 그는 졸고 다시 깨고를 계속했다.
하행선 기차는 만원이었다.
좌석은 물론 입석도 비좁았다. 기차를 탈 수 있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는 스스로 위로를 삼았다.
집을 떠난 지 며칠이 되었는지 그는 기억되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것 같다’ 이 한가지만은 스스로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차는 어둠속에서 몇 번 섰다 다시 출발하고 출발했다 다시 멈춰 서면서 통로는 차츰 숨통이 터졌다.
승차하는 사람들 보다 하차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통로의 승객들 하나 둘 빈 좌석으로 옮겨갔다.
“여기 앉으세요.”
가느다란 여인의 목소리에 그는 무릎 사이에 묻었던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
가느다란 여인의 목소리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그가 기대어 몸을 의지한 옆 좌석의 여인과 눈과 마주 쳤다.
“여기 자리가 비었어요.”
여인 옆에 얼마 전 까지 앉아있던 승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 네... 자리가 비었네요...”
그는 여인이 앉은 의자를 잡고 일어났다. 움켜 안았던 배낭을 힘들게 치켜들어 좌석 위 빈 선반에 올려놓았다.
여인은 잠시 일어나며 차창 옆 의자로 갈 통로를 내 주었다.
“아..아닙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차창에 기대어 갈 수 있는 빈자리를 여인에게 권했다.
“아니에요.... 저는 다음 역에서 내려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여인은 더욱 바싹 의자에 등을 밀착시키며 길을 넓혀 주었다.
“아...네 ..고맙습니다”
차창에 기대앉은 그는 새삼 여인을 바라보았다.
“....”
여인은 말이 없었다.
여인이 입고 있는 평상시의 옷차림으로 보아 여행객은 아니듯 싶었다,
갑자기 그는 입을 열고 싶었다.
집을 떠난 이후 그는 대화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집을 떠난 이후 기차 역 매표원이외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지 못했다는 것보다 그 스스로 대화를 회피했다는 것이 바른 표현이었다.
그의 목적지는 애초 없었다.
배낭 속에 간단한 취사도구 몇 개와 침낭. 그리고 건전지로 켤 수 있는 전등과 몇 가지 옷이 전부였다.
“삼십 일 씩이나?”
“......”
그는 변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알겠네....다녀오게. 자네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네..... 그 동안 임시 직원을 쓰면 될테니..... 이곳 신경 쓰지 말고....”
한 달 휴가를 낼 때 사장은 그에게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장은 그의 사정이랄까, 심정을 이해 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면, 평상시 그의 회사에 대한 애사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다음 날 휴가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여보, 미안해. 나 바람 좀 씌고 올게.....”
배낭을 꾸리며 그는 아파트 응접실 벽에서 아침저녁 그를 내려다보고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걱정 말고 다녀와요.... 집은 내가 잘 보고 있을게요.... 조심해서.....”
언제나 방글방글 웃는 그녀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으로 그녀는,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 머물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밤낮을 동행했다.
십 여 년을 밥상에 마주 앉았던 다정함은, 십 여 년이 바람같이 스쳐간 텅 빈 응접실에도 가득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그를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여보, 식사는 제때 집에 와서 잘 해 드세요. 매식하지 말고요....”
“으응 그래, 알았어.... 오늘은 회식이 있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지?”
허공으로 사라지는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혼자 외롭겠다....미안해.”
그는 배낭을 한 쪽 어깨에 둘러메고 현관을 나서면서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걱정 말고 다녀와요. 집은 내가 잘 보고 있을 게요.”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그날따라 예전같이 않았다. 혼자 두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내 뱉는 소리와 가슴에 안고 있는 소리가 어쩐지 엇박자를 내고 있는 듯 했다.
집을 나서는 그는 조금은 마음이 무거웠다. 평상시에 느껴보지 못했던, 표현 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가슴속으로 엄습해 왔다.
‘그냥 포기할까?’
현관문을 나서며 그는 잠시 멈칫했다. 뒤 돌아 보았다. 그녀는 응접실 창문 속에서 그냥 그대로 웃고 있었다.
“미안! 내 잘 다녀올게!”
집을 나섰다. 제법 배낭이 무거웠다.
“저 잘 다녀올 게요!.”
언제부터인가 그의 귀에 익숙해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현관 문 밖에서 낭랑하게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으응, 그래 잘 다녀와. 내 식사 걱정은 하지 말고..”
그의 굵은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며 들려 다시 돌아왔다.
아이들 책가방 같은 예쁜 배낭을 메고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와의 마지막 인사였다.
생필품을 가득 넣은 가방을 힘겹게 들고 집을 나선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퇴근 무렵 병원의 급한 전화를 받고 달려 간 병원시체실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와의 마지막 말없는 대면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교통사고로 젊음을 묻고 핏줄 하나 남기지 않은 채그의 곁을 떠났다.
“다음 역에서 내리세요?”
여인의 얼굴이, 손을 흔들어 주던 아내의 얼굴과 오버랩 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옆 좌석에 앉아, 어둠이 스쳐가는 차창을 조용히 내다보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 그래요...저도 같이 내리면 안 될까요?”
“네?”
여인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저도 여기서 내리면......”
“네? 어다 까지 가시는데요?”
다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여인은 그를 응시했다.
“아.... 전,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저 아무 곳에서나 내리면 됩니다.”
“네?”
“그저 아무 곳에서나 내리고 또 다시 떠나고....”
“.....”
-꽤 액--- 꾀 액-
힘든 기적을 토해내며 기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창밖으로 불빛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인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잃어나며 텅 빈 큰 대나무 광주리를 선반에서 내렸다.
그는 놀란 듯 자리에서 급히 일어서며 그녀의 광주리를 받아 주면서 자신의 배낭을 내려 둘러매며 여인의 뒤를 따라 기차에서 내렸다.
“숙박 할 여관은 여기서 한 참 큰 길로 나가야해요.”
역사 출구를 나오자 그녀는 뒤따르는 그를 경계 하는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저요? 전 여관 같은 곳엔 안 갑니다. 조용한 어디 개울가를 찾아 텐트에서 하루 보내
면 됩니다. 가까운 이 부근 조용한 시냇가는 없어요?”
“네? 시냇가?”
앞 서 가던 여인이 멈칫 섰다.
“요즘, 춥지도 않고.... 지낼만합니다”.
“시냇가요?”
“네, 인가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조용해 좋으니까요.”
“여기서 가까운 시냇가는 없어요. 변두리로 한 참 나가야해요.”
“아, 그래요? 괜찮습니다. 방향만 가르켜 주세요.”
“....”
여인은 잠시 침묵으로 어둠속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곳까지 가시기 어려울 게에요....지금 이 시간에.... 저, 괜찮으시다면 누추하지만 저희 집에서 하루 쉬세요. 마침 빈 방이 하나 있어요.”
“네? 집에서요?.”
여인의 뜻밖의 소리에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엇인가 잘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래요. 이 시간에 멀리 갈 수도 없고.... 가시겠어요.?”
늦은 시간이라 여인은 조급한 듯 했다.
“아....아, 그래요... 그렇게 해 주시면 너무 감사하구요....그런데, 댁에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집에는 어머니와 둘 뿐이에요.”
여인은 앞장서 걸었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어머님이?”
“어머니는 걱정 마세요.... 언제나 적적해 하시니까... 반가와 하실 거예요.”
“네... 그러세요....”
여인의 뒤를 따랐다. 집단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듯한 여인의 집에 들어섰다.
본채와 조금 떨어져 있는 외 딴 방으로 안내되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한 조그마한 온 돌 방이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배낭을 풀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방에 불을 넣어야 해요.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방이라...”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여인은 방 문턱 아래 있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붙였다.
밥상은 간단했다.
집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지붕 아래서 먹는 식사였다.
“고맙습니다... 참, 미안하고요...이렇게 폐를 끼쳐서...밖에서 자도 될 텐데....”
빈 밥상이 나가고 잠시 후 귀가한 여인의 어머니를 찾아 고맙다는 인사를 나눈 그는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따뜻한 정을 느꼈다.
그녀를 잃어버린 후 처음으로 새삼 느껴오는 따뜻함이었다.
과일 접시를 들고 여인이 들어왔다.
“아...이거 미안해서....어서 들어오세요.”
“누추하지만 하루 정도는 쉴 수 있을 거예요.”
여인은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텃밭의 채소를 길러 재래시장에 내다 팔았고,자신은 두 역을 지나는 도시의 제사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차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서로 처음 만나는 처지여서 그런지 여인은 수줍음이 많았다.
‘그래.... 그녀도 그랬어....이 여인처럼...’
조금씩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그는 여인의 얼굴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여인은 출
가 할 나이가 지났을 것 같은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홀어머니를 두고 집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밤이 깊어 갈수록 그들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대화로 변해갔다.
“.....하하하, 그래서 마음이 답답해 집을 나서 이렇게 발 가는대로 흘러 다닙니다.”
“어머나.... 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집으로 모셨네요...미안해요.”
그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모두 듣고 난 여인은 그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 모르니 달방시에 오실 기회가 있으면 전화 주세요.”
그는 메모지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달방시 는 그가 살고 있는 도시였다.
“여기서 그곳까지 갈 일이 있겠어요?”
여인은 그가 건네주는 쪽지를 받아들고 방을 나갔다.
그는 자리에 누웠다.
야외 텐트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 느끼지 못한 피곤함이 몰려 왔다.
오랜만에 천정을 쳐다보는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집을 떠나간 이후 얼마동안은 멍하니 창문을 내다보는 습관으로 하루 생활을 시작했고 밤이면 천정을 쳐다보는 시간 보다 한 잔의 술로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그는 부모가 누군지 모르며 살아 온 자신과, 같은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와 가정이란 울타리를 새로 만들었을 때 비로서 삶의 깊은 뜻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오래가지 못했다.
모처럼 어렵게 갖은 고생을 하며 조그마한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그녀와 한 가정을 이루었다. 참으로 생애 처음 느껴보는 삶의 은혜였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를 떠나갔다.
어려운 삶에 한 가닥 힘이 되어보겠다고 생필품이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곳저곳 버스에 몸을 싣고 마을로 다녔다.
어느 날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고, 그녀는 그에게서 떠나갔다. 그에게 다가 온 것은 회사를 포기 할 만큼 심한 알콜이었다.
몇 번인가바다로 향했다.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던졌다. 그는 그 때마다 해변의 마을 사람들에게 엎여 나왔다.
“정신 다시 차리게..”
“간 사람은 이제 잊어야지.”
“힘을 내!”
그의 직장 동료들은 그에게 힘을 넣어주었다. 그는 답답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혼자 살고 있다는 현실에 죄의식을 그는 감당 할 수 없었다. 고아로 자라면서 가가가지 어려운 일을 격어야만 했던두 사람이 이렇게 다시 새로운 고비를 또 넘어야 하는지 그의 가슴 속에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를 보낸지 삼년.
그는 몇 번의 자살의 고비를 타의로 넘기면서 삼 년 만에 배낭 하나로 집을 나섰다.
혼자 살고 있다는 현실이 그는 삭막했다.
언제가 그녀가 방문을 열고 베시시 웃으며 안으로들어 설 것만 같은 그의 착각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지 않았다. 그저 오늘, 또 내일. 그리고 밤 과 낮 언제나 벽에 걸린 액자 속에서 베시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여보. 미안해 ... 내가 일을 시키지 말아야 했는데....-
그는 사진을 쳐다 볼 때마다 언제나 스스로의 자책으로 엄습 해 오는 안개가 무겁게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눈을 떴다.
격자무늬의 방문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여인의 출현이 두려웠다.
처음 기차 안에서 만난 여인이었고 낯 선 방에서 여인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하루 전 지나간 시간이 새삼 두렵게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여인의 얼굴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그녀의 얼굴로 눈앞을 어른거렸다.
그는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고 여인이 적어 준 전화 번호 쪽지를 수첩 속에 끼워 넣으며 밖으로 나왔다.
집 주변은 이른 새벽이라 고요 속에 묻혀 평화스러웠다.
‘신세 많이 지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혼자 중얼거리며 여인에게 인사를 보냈다.
다시 기차역을 찾았다.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아침 기차는 빈 좌석을 나란히 싣고 줄기차게 달렸다.
기차에서 버스로 고흥반도를 지나며 소록도를 향하는 <도량>2호에 올랐다.
배에는 몇 사람의 환자들이 손과 얼굴에 붕대를 감고 허수아비처럼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 저 사람들이구나!’
그들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곧 그들이 소록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란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낯 선 얼굴을 발견하고는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뿐이었다. 무관심, 그대로였다.
그들을 더 바라보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섬으로 시선을 옮겼다.
푸른 물결을 헤치며 그간 내린 곳은 몇 번인가 마음속에 다가 왔던 소록도였다.
출발 할 때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발 길 닿는 데로 한 바퀴 전국을 돌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결국 그는 녹동 항에서 <도량> 2호에 몸을 실었고, 손에 잡힐 듯 한 소록도에서 멈추었다.
사실 소록도는 갑자기 떠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잃고 난 이후 몇 번인가 스스로 바다로 뛰어 들고, 다시 땅을 밟을 때 마다 소록도는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병 환자들을 모두 잡아서 소록도로 보낸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돌아다닐 무렵이었고 아이들은 막연한 공포에 움츠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이들 간을 빼 먹는데.....손가락도 없고....얼굴이.....문둥병이래....-
어렸을 때 철부지 또래 친구들끼리 떠들며 무서워했던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났다. 그 때는 참 무서워했다. 차츰 철이 들면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문득문득 상상하곤 했고, 세월이 지났을 때그 소리들이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아원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지나간 일들이, 소록도에 모여 산다는 그들의 생활을 상상으로
머릿속에 은연중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옛날이야기 같은 소문은 아득히 멀어지며 사라져 갔지만, 그의 가슴 한 쪽 구석에는 그들의 생활이 상상 속에서 희뿌연 안개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배에서 내린 그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따라 갔다. 가끔 뒤를 힐끔힐끔 뒤 돌아 보며 그들은 하나 둘 자기들이 갈 길을 갔다.
무작정 길을 걸었다. 목적지가 없었다.
“저..... 물 한 모금 주시겠습니까?”
그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사내를 만난 것은 걷기 시작한지 한 참 후였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밭에서 한 중년 사내가 풀을 뽑고 있었다.
“....?”
그가 옆으로 다가서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갑을 낀 그의 손은 두 주먹뿐이었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주먹 사이에 닳아버린 호미가 끼어 있었고 땀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여기저기 일그러져 있었다.
“미안합니다. 물이 떨어져서.... 혹 물이 있을까 해서...”
“네에..... 저기 저 병에....”
밭둑에 놓인 물병을 턱으로 가르켰다.
소록도에 내려 첫 대화를 나눈 주민이었다.
“담배 한 대 피우시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꺼낸 준 담배 한 개 피를 두 주먹으로 받아 입에 물었고, 그가 붙여 주는 담뱃불을 입으로 빨아드리며 밭둑에 걸터앉았다.
그와의 대화는 한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어졌다. 그는 더 그의 작업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길을 걸었다.
“당신 같은 사람, 처음입니다. 모두 우릴 대하기 꺼려해요....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괴물을 보듯 희끗 희끗 살피며 걸음을 재촉하지요.... 나와 같은 환우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모두 열심히 일하며 치료받고 있어요.. 완치되어 도시로 나간 환우들도 많아요. 이곳에서 제 각각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며 채소도 기르면서 자립하고 있어요....좀 불편하고 섬 밖의 사람들과 이야길 나눌 수 없다는 외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
그는 자기를 스스로 <사랑의 동물원장> 이라고 했다. 같은 처지의 아내와 둘이 농사를 지으며 여러 마리 가축들을 기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이웃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땀이 촉촉이 솟아나는 일그러진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띤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밭 여기저기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한센 병 환자들의 모습들이 그의 시선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들며 지나갔다.
길을 따라 지나가는 곳마다 둘 또는 혼자 그들은 붉은 진흙 밭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또는 주먹손으로 밭을 가꾸고 있었다.
그들의 삶의 의지는 대단했다. 사회에서 쫓겨나 이곳에 모여 그들만의 생활을 이어 나가는 강한 생명력에 그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들은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일그러진 얼굴을 수건으로 감싸고 문드러진 두 손으로 의지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눈물겨운 현실이 사실로 그의 앞에서 전개되고 있었을 때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보리피리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보리피리 불며보리피리 불며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꽃 청산인환의 거리방랑의 기산하
고향 그리워어릴 때 그리며인간사 그리워눈물 위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피-ㄹ 닐니리.피-ㄹ 닐니리.피-ㄹ 닐니리.
반듯한 반석에 새겨진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를 몇 번이고 속으로 음미하며 22년 동안 문둥이로 생활 해 오며 그가 느껴야 했던 인간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알 듯 했다.
-나병은 날 수 있다-
그의 신념은 기다림과 실망 속에서도 결국 완치로 이끌어 냈다는 굳은 의지를 그는 가슴속에 품으며 한센 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집단 마을을 지나 소나무 숲이 우거진 야산 골짜기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사랑의 동물원장>이 자기 집에서 하룻밤 쉬어가라고 친절을 베풀어 주었지만, 그는 대답만 했을 뿐 그의 집을 찾지 않았다. 정상적인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어떤 심적 괴로움이라도 줄것만 같은 노파심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강제로 수용되어 갖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그들의 흔적은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밤새도록 그는 텐트 속에서 몸을 뒤치락거리며 소록도의 아침을 맞았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국립소록도 병원과 중앙공원을 둘러 그들의 흔적을 뒤로하고 녹동 항을 찾아 육지로 돌아오는 배를 탔다.
짧은 2박 3일이었다. 집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방황했지만, <소록도>의 짧은 시간은 그에게 긴 여정으로 가슴 깊이 자리 잡았다.
그들은 자연을 즐기는 행락객들이 아니었다. 병과 투쟁하면서 불편한 몸을 지탱하며 사회와 격리된 채 스스로의 삶을 <나병은 고칠 수 있다>는 강한 신념과 의지를 품고 살고 있었다.
삶의 포기는 그들에게는 먼 남의 얘기로 그냥 허공에 떠다니는 사치에 불과했다.
집으로 향하는 밤기차에 올랐다. 차창을 스쳐가는 불빛과 어둠이 반복되며 기차는 쇳소리를 계속 토해내며 어둠속을 질주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찾아 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자신이 지금까지 연약한 마음으로 현실도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한 구석에서 용틀임하며 솟구쳐 올랐다.
‘....두 손이 문들어 지고 얼굴이 일그러진 그들도 살려고.....’
깨알 같은 수첩의 글씨가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그의 시선 속으로 파고들었다.
斷種臺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데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스물다섯 한창 나이 때 ‘斷種手術, 을 당한 李東이란 청년의 <斷種臺>라는 눈물겨운 詩가 벽에 걸려있던 정황이 떠올랐다.
나무로 만든 기구위에 누워 생식을 중단시키는 강제 시술을 받아야 하는 그 젊은 나이의 청년은 피를 토하며 누구를 원망했을 것만 같은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나무판 수술대 위에 누워 강제 정관 수술을 통해 2세를 없애려는 그 비참함이 수첩 위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 그 때보다 지금은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냐? 그 고통 속에서도 그 젊은이는 살아남았겠지?-
그는 수첩을 접으며 자신의 삶이얼마나 허약했던가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돌아가자... 내가 이렇게 떠돌아다니며 내게 주어진 시간을 죽일 수 없다. 스스로를 이겨나가야 한다..... ’
-당신, 참 생각 잘 했어요! 이제나마 생각을 돌릴 수 있게 되니 다행이에요. 어서 집으로 돌아 와요. 당신 곁에는 내가 항상 같이하고 있잖아요!-
늘 그렇듯이 배시시 웃는 모습으로 그녀가 찾아왔다.
눈을 떴다. 기차는 어둠을 뚫고 계속 있는 힘을 다해 덜커덩 거렸고, 승객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잠에 빠져 있었다. 배시시 웃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역 마다 잠시 멈추었다 다시 출발하는 기차가 하룻밤을 거처 간 여인의 마을에 잠시 섰다.
희미한 불빛 속에 역 출입구로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빠져나갔다.
여인이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희미한 불빛에 들어난 여인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모습으로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잠시 내렸다 갈까? 아니.... 다음에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리지..... 아니, 지금 내려서 인사라도......’
-꾀-액- 꾀-액-
긴 쇳소리로 출발 신호를 토해내며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희미한 역사의 불빛이 멀어져 갔다.
‘.....’
기차가 지나간 다음 손 흔들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하며 눈을 감았다.
휴가를 얻어 집에서 나온 이후 귀가하는 지금까지의 긴 시간을 반추하면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잠결에 눈을 뜨게 한 것은 00역을 알리는 기차의 안내 방송이었다.
피곤함에서 깨어난 그는 배낭을 메고 마을로 빠지는 출구를 나왔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이제 왔어! 혼자 심심했지?”
“.....”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오늘따라 굳어있었다.
“으응?”
베시시 웃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참.. 이젠 내 그전처럼 세상 떠나 당신 곁으로 갈 엉뚱한 생각 안할게 신경 쓰지 말아요. 나 이번에 좋은 경험했어! 이젠 당신처럼 이를 악 물고 열심히 살아야지....”
혼자 중얼거리며 배낭 정리를 마칠 때 까지 그녀는 아무 소리 없었다.
“늦게 왔다고 화가 잔뜩 났구만...하하하”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그래요? 아하.... 그럼 그곳에 계셔요... 내가 나갈 테니까....”
열차 안에서 만나 하루 저녁을 신세 진 그 여인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놓고 응접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창문 속에 펼쳐져 있는 강물은 조용했다.
‘허어,,참...’
그녀를 처다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 있었다. 같이 살아오는 동안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얼음 같이 차가운 표정이었다.
“미안해 여보... 멀리서 왔다는데 나가보지 않을 수도 없고....이곳이 초행이래...”
-나가지 말까? 내가 괜히 전화번호를 알려 줬나? 아니, 모처럼 먼 곳에서 찾아 온 사람인데... 그럴 수도 없고...-
그는 한 동안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힐금 힐끔 곁 눈짓 하다간 다시 창문을 내다보았다.
-어서 다녀와요! 기다리겠어요-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녹아있었다.
“괜찮겠어?”
-멀리서 온 손님이잖아요. 당신이 그 집에서 하루 신세지고 온 것 다 알아요.-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잔물결을 일으키며 귓속을 맴돌아 들었다.
“그래요.... 멀리서 왔는데...내가 나가 봐야지 되겠지? 이곳이 초행이라는데.....”
-......-
그녀는 다시 말이 없었다.
외출복을 찾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택시를 잡으려 큰 길로 나섰다. 그러나 빈 택시는 나타나지 않았고 가끔 지나는 택시는 손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오늘 쉬는 날이라 바람 쐬러 왔어요.... 이곳엔 한 번도 와 본 일이 없어서 온 길에 전화 해 봤어요. 바쁘시면 안 나오셔도 괜찮아요. 몇 군데 구경하고 밤차로 내려가면 돼요.”
여인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맴돌며 다시 파고들었다.
하늘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과 너무나 흡사한 여인의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어떻게 하나?’
버스가 지나쳐 갔다.
빈 택시도 그의 앞을 지나쳐 갔지만, 그는 외출복 바지에 두 손을 넣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늦겠어요! 어서 택시라도 불러 타고 가 보아요... 멀리서 왔는데!”
뒤쪽 현관문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유달리 쨍 하고 크게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생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화가 났나? 만나러가지 말까?’
빈 택시가 그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그의 눈앞에소록도 <사랑의 동물> 원장이 일그러진 얼굴에 미소를 띠우면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왔다
그는 <사랑의 동물> 원장의뭉그러진 한 손을 잡고 아스팔트 도로 위에 쏟아져 내리는 한줄기 햇살을 부등켜안았다.
-어서 나가봐요. 기다리고 있잖아요!-
-어서 나가봐요. 기...기...기다리고 있잖아요!-
사진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차츰 차츰 커지고 있었다.
“괜찮아?”
그는 다시 한 번 뒤 돌아본다.*
-2019 <한국을 빛낸 文人> 발표작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입선.
<아동문학세상> 동화 당선. 통일문예 시 입선
불교동요대상 당선.건강수기 입선 <강원일보><동도신문> 중편소설. 꽁트.동화 연재
강릉문학상. 관동문학상. 불교동요대상. 아름다운 글 문학상. 한,중<옹달샘>아동문학상
<17회 세계문학상> <2021.국립국악원 창작동요대회> 우수상
<2021. 찬불동요제 > 본선진출; 대웅전에 모여서...전세준 작사 오세 균 작곡
< 2021> 한민족문화예술대전 우수상 수상
회고록. 콩트집.<비틀거리는 바다> 동화집5권. 동요작사집2권. 150여편 노랫말 작곡됨.
*jsj13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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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잘 계시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