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희언자연 고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 孰爲此者 天地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숙위차자 천지 천지상불능구 이황어인호 故從事於道者 道者同於道 고종사어도자 도자동어도 德者同於德 失者同於失 덕자동어덕 실자동어실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동어도자 도역락득지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동어덕자 덕역락득지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동어실자 실역락득지 信不足焉 有不信焉 신부족언 유불신언 의역: 극히 드문 말이 자연의 이치다. 수시로 움직여 변화하는 것이 道의 본질이니 영원한 것은 없기에 집착해도 부질없다. 회오리바람도 아침 한때를 넘기지 못하고, 폭우도 종일 내리지 못한다. 누가 이런 이치에 따르는가? 하늘과 땅이다. 天地도 꾸준함을 유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임에랴! 따라서 道를 따르면 道와 하나 되며, 德을 따르면 덕과 하나 되며 失(道를 잃음)을 따르면 실과 하나 되는 것이다. 道를 따르기에 道도 역시 즐거이 함께 하며, 德을 따르기에 德도 역시 즐거이 함께하며, 잃음을 따르기에 잃음도 역시 즐거이 함께 한다. 믿음이 충분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
특별한 내용이 없어 보이지만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색다른 표현을 하고 있다. 道는 恒常의 진리와 같다는 주장이 대부분인데 道의 성질이 가변적인 것처럼 표현한다. 道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시공간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생각대로 삶이 결정된다. 양자물리학에서 주장하는 불확정성 원리와 유사하다.
丁-------壬-------癸
惡. 善-----------善. 惡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癸의 특징은 절대불변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丁의 色界를 탐하면 빠르게 색계에 물들고, 癸의 空界를 탐하면 빠르게 공계에 물든다. 그렇다고 丁은 반드시 惡이며, 癸는 반드시 善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有物混成으로 머리와 꼬리가 얼마나 빠르게 회전하는지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빠르게 바뀌기 때문이다. 분별하지만 않으면 선도 악도 없다. 좋은 일이라 생각했으나 나쁘고, 나쁜 일이라 생각했으나 좋다. 100억을 벌었으나 건강을 해치고 사망했다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누가 답할 것인가?
希言自然(희언자연)
극히 드문 말이 자연이라. 이 표현은 참 묘하다. 만약 自然希言이면 “자연은 극히 드물게 자신을 표현 한다”라고 해석하면 되는데 希言自然이다. 극히 드물게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각이나 의지를 밖으로 거의 표출하지 않는다. 옳다 그르다 말이 없다.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道의 본질이다.” 명암이 분명하지 않다.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고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
따라서 회오리바람도 아침 한때를 지나지 못하고, 폭우도 종일 내리지 않는다. 모든 현상은 절대로 지속하지 않는다. 자연의 이치는 수시로 변한다. 움직이고 변함이 본질이다. 老子의 황당한 주장이 느껴지는가? 불변의 진리는 없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움직이고 변하는 것이 진리다.
孰爲此者 天地(숙위차자 천지)
누가 이런 이치에 따르는가? 하늘과 땅이다. 道는 움직임과 변화를 본질로 천지를 만들었으니 천지도 또한 따라야 한다.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천지상불능구 이황어인호)
천지도 이처럼 꾸준함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임에랴! 하늘과 땅도 수시로 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니 인간이야 그 변덕이 오죽하겠는가? 수시로 바뀌고, 갈대처럼 흔들리는 행태가 자연스러운 것이라. 왜 老子는 이런 식으로 문장을 몰고 가는가?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 따라서 道를 따르면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 道와 하나 되며
德者同於德(덕자동어덕) 德을 따르면 덕과 하나 되며
失者同於失(실자동어실) 失을 따르면 실과 하나 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를 지배한다. 道로 만들어진 一의 성질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항상 균형을 유지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에도 만물의 체성에 동화된다. 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처럼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고 변하는 현상에 깃들어 따를 뿐이다. 모든 움직임과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인 존재다. 이런 표현은 오해하기 쉽다. 道는 불변의 진리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에서 그 뜻이 더욱 명확해진다.
同於道者 道亦樂得之(동어도자 도역락득지)
道를 따르면 도 또한 즐거이 함께하며
同於德者 德亦樂得之(동어덕자 덕역락득지)
德을 따르면 덕 또한 즐거이 함께하며
同於失者 失亦樂得之(동어실자 실역락득지)
잃음을 따르면 잃음도 또한 즐거이 함께한다.
“생각대로 이루어진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一은 잽싸게 우리 뇌를 지배한다. 돈을 생각하면 돈의 노예가 되며, 권력을 생각하면 권력의 노예가 된다. 道를 따르면 道는 기꺼이 나와 함께 하며, 德을 따르면 德은 기꺼이 나와 함께 하며, 失을 따르면 기꺼이 나와 함께한다. 失은 道의 본질을 벗어난 행동이나 생각이다.
信不足焉 有不信焉(신부족언 유불신언)
믿음이 충분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이 章에 어울리는 문장을 여기에 실어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神을 향해 날아간다. 그 神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친애하는 싱클레어, 우리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야. 그 神은 신이며 동시에 악마지.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아프락사스는 자네의 생각 그 어느 것도, 자네의 꿈 그 어느 것도 반대하지 않아.(1)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언젠가 흠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2) 이 神은 자네 곁을 떠날 거야.(3) 자네 곁을 떠나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 요리할 새로운 그릇을 찾아보겠지.(4) - 소설 데미안
(1)은 道德經 23章과 동일한 의미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된다. (2)는 분별이 없는 상태다. (3)은 더 이상 신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왜냐면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4)는 양면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뜻이다. 불안정한 심리를 가진 인간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공명조는 실크로드의 전설의 새 이름이다. 머리가 두 개 몸이 하나이다. 한편은 낮에, 한편은 밤에 일어나 언제나 서로 시기하고 으르렁대는 동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한편이 독을 먹여 같이 죽고 만다. 선과 악을 함께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과 갈등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