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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낙동산악회 20기-01구간)
□ 때 : 2025. 03. 02(일)
□ 곳 : 주촌리~수정봉~여원재~고남산~유치재~매요마을(16.5km-‘낙동’)
□ 낙동산악회
□ 참여 : 모두 20명 안팎
□ 날씨 : 흐림
□ 길 : 푸석돌 길
□ 걷는 데 걸린 시간 : 2025. 03. 02(일) 09:26~16:16(6시간 50분, 쉰 시간 포함)
□ 일러두기
□ 나온 데[출처]
○ 낙동산악회 제공 자료⇒‘낙동’으로 적음
○ 「서래야」 푯말⇒‘「서래야」’로 적음
○ 지도⇒‘지도’ 로 적음
○ 푯돌에 적힌 산 높이⇒‘푯돌’로 적음
○ 푯말에 적힌 산 높이⇒‘푯말’로 적음
□ 간추린 발자취(글쓴이 기준이므로 각자 다를 수 있음)
○ 09:26 전북 남웒시 운봉읍 주촌리 나섬.
○ 09:35 「노치 경로당」
○ 09:37 「노치샘」(해발 550m)
○ 10:00 덕운봉(748,0m-‘서래야’)
○ 10:18 수정봉(804.7m-‘푯돌’)
○ 10:50 「입망치」(해발 545m)
○ 12:02 「여원재」(해발 480m) 찻길
○ 12:15~12:30 「장교 버스 정류소」, 점심
○ 13:40~13:47 고남산(846.5m-‘푯말’), 머묾
○ 13:49~14:39 고남산(846.4m-‘푯돌’) 푯돌, 머묾
○ 15:22 「유치재」
○ 15:32~15:43 턱, 머묾.
○ 16:12 시멘트 고개.
○ 16:16 매요마을, 산행 끝.
길 앞쪽에 수정봉이 보인다
노치샘
먼지버섯
고인돌
고남산이 보인다
고남산 푯돌은 고남신 조금 아래에 있다
겨울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 줄거리(글쓴이 기준이므로 각자 다를 수 있음)
2025. 03. 02(일) 07:00쯤 000 역을 떠난 버스는 2시간 10분쯤 뒤 전북 낰원시 운봉읍 주촌리에 닿았다.(09:10)
차에서 밖을 내다보았더니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둘레 산 여기저기에 눈이 많이 있었다.
대간 길에 눈이 제법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작은 각반[스패츠]를 신었다.
사갈[슈타이크아이젠, 아이젠]은 신지 않았다.
한데 모여 사진을 찍은 다음 주촌리를 나서(09:26) 9분쯤 뒤 「주촌 경로당」 앞을 지나고(09:35), 2분쯤 뒤 「노치샘」(해발 550m)에 닿았다.(09::37)
「노치샘」은 “원래 고려시대 절터로 고승이 도술로 판 샘”으로 “바위에서 나오는 생수는 물맛이 뛰어나 염병(장티푸스) 같은 돌림병이 심하게 돌던 때도 이 물을 마신 사람은 신기하게 병에 걸리지 않고 병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한다.《여기까지 푯말에서 따옴》
“노치마을은 덕음산, 지리산, 만복대 등의 산줄기의 높은 곳에 갈대가 많아 갈재라고 하다가 ‘갈대 노(蘆)’ 자를 사용하여 한자식 표기인 노치리가 되었다” 한다.《여기까지 푯말에서 따옴》
「노치샘」에서 23분쯤 뒤 「덕운봉」(748.0m-‘서래야’)에 닿았다;(10:00)
‘덕운봉’은 지도에는 없는 봉우리로, ‘서래야’ 라는 분은 백두대간 몇몇 봉우리에 지도에 없는 봉우리 이름을 지어(?) 붙여 놓온 것이 제법 있다. 지금도 그 푯말이 얼마나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덕운봉」 푯말이 있는 곳에서 8분쯤 뒤 수정봉(804.7m-‘푯돌’)에 닿았다.(10:18)
노치마을에서 1.7km이고, 여원재까지는 4.4km 거리이다.
수정봉(804.7,m)은 “운봉읍 행정리의 이백면 양기리 경계에 있는 산, 산 중턱에 수정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나뉜다” 한다.《푯말에서 따옴》
옛날에 수정봉 일대에 성이 있었다 한다.
산 군데군데 눈이 조금 있었으나 사갈은 신지 않았다.
수정봉에서 32분쯤 뒤 네거리 잘루목, 작은 고개인 「입망치」에 닿았다.(10:50)
길 푯말에 따르면, 입망치에서 지나온 수정봉에서 1.3km, 여원재까지는 3.1km 거리이다.
「입망치」에서 1시간 10분쯤 뒤 「여원재」(해발 480m) 옆 찻길에 닿았다.(12:02)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조금 왔다 갔다 했다.
길가에 서 있던 버스에 사갈, 옷가지 몇 점을 내려놓고 길을 나섰다.
물건 몇 점을 내려놓고 「여원재「 못 미친 곳에서 ‘장교리’와 ‘권포리’ 쪽으로 난 아스팔트 찻길을 따라 나섰다.
백두대간 길을 몇 번 걸었으면서 여원재에서 제대로 된 길을 따르지 않고, 순간적으로 착각하여 엉뚱한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장교리 찻길로 들어선 뒤 10분쯤 걷다가 「장교 버스 정류장」에 들어가 점심밥을 먹었다.(12:15)
점심밥을 먹고 길을 나서(12:30) 8분쯤 뒤 \∥ 찻길에서 왼쪽 산으로 들어섰다.(12:38)
산으로 들어선 뒤 17분쯤 뒤 왼쪽 산등성(이)에서 이어진 백두대간 길에 들어섰다.(12:55)
백두대간 길에 들어선 뒤 17분쯤 뒤 길 푯말(↑고남산 750m, ↓여원재 4510m) 있는 곳에 닿았다.
네오 대장 님과 대원 한 사람을 만났다.
백두대간 길에 들어선 뒤 45분쯤 뒤 고남산(846.5m-‘푯말’)에 닿았다.(13:40)
고남산 오르기 전 가파른 플라스틱 널빤지 계단 2개를 거쳐 오른다.
고남산 꼭대기는 좁고, 전파 송신 안테나와 산불 초소와 고남산 푯말 따위가 있다.
“고남산(846.5m)은 전라북도 남원시 응봉읍과 산동면의 경계에 있는 산”
“백두대간 주맥의 분수계로 고남산의 물줄기는 동쪽의 낙동강과 북서쪽의 섬진강으로 합류된다”
“위치상 옛날부터 전쟁의 요충지로 고려 말인 1380년(우왕 6)에 인월면에 본진을 둔 왜장 아지발도에 맞선 이성계가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당도하여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산신제를 올리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여기까지 푯말에서 따옴》
고남산에 머물러도 대원들이 오지 않아 7분쯤 뒤 고남산을 나서(13:47) 2분쯤 뒤 고남산 푯돌이 있는 곳에 닿았다.(13:49)
꽤 머물렀더니 고남산 꼭대기에 오른 대원들 말이 들렸다.
여러 대원들이 고남산 푯돌이 있는 곳에 당도하여 사진도 찍고, 과일 따위를 먹고 머물렀다.
50분쯤 머문 뒤 고남산 푯돌 있는 곳을 나서(14:39) 산길[임도]로 내려섰다가 산으로, 산에서 산길[임도]을 넘나들었다.
고남산 푯돌을 나서(14:39) 43분쯤 뒤 길 푯말(↑매요마을 2710m, ↓고남산 2270m)이 있는 「유치재」에 닿았다.(15:22)
「유치재」에서 10분쯤 뒤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닿아(15:32) 과일, 빵, 물 따위를 들며 머물렀다.
11분쯤 머문 뒤 산등성(이)을 나서(15:43) 33분쯤 뒤 매요마을에 닿아(16::16), 산행을 마쳤다.
20기 백두대간 힘찬 발걸음을 기획한 김정호 대장 님.
앞에서 길잡이 노릇을 한 네오 대장 님, 중간과 뒤를 책임진 심민철 대장 님, 권재구 대장 님과 대원 여러분 수고하셨다.
□ 그밖에
◎ 흘러가는 생각을 잠깐 붙들고...
1. 역사 현장을 걷다
우리가 무심코 걸은 백두대간 길.
산등성(이)과 마을, 들길 따위 여러 곳에 옛 우리 조상들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나아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땀을 쏟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쳤을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가야국 사이, 백제와 신라가 한 치의 땅도 더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을 그곳.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쳐들어오는 왜구를 맞아 관군과 민병대들이 피를 흘렸을 백두대간 일대.
나는 비가 내릴까 봐 며칠 전부터 걱정했다.
비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잔뜩 움츠러들어 겨울옷을 입어 땀깨나 흘렸다.
수정봉, 고남산에 눈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각반까지 차고 걸었다.
역사란 무엇인가?
나는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는가?
온갖 엉뚱한 주장들이 난무하는 오늘을 살면서 훗날 우리 후손들이 우리들이 영위한 오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따위 여러 상념에 빠져들었다.
2. 솔가리
이번 길에 소나무가 많아, 길 일대에 솔가리가 양탄자처럼 널려 있었다.
‘솔가리’는 솔잎이 가을에 누렇게 변한 뒤 가을과 겨울 사이 땅으로 떨어진 솔잎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 솔가리는 산에서 긁어다 밥 끓일 때, 또는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
땔감이 귀하던 시절 훌륭한 땔감이었고, 어른, 아이까지 나서 솔가리를 긁어 집으로 날랐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솔가리를 비롯한 땔감은 주로 아버지, 형님 몫이었고, 막내아들인 나는 험한(?) 일을 시키지 않은 편이라 다른 아이들처럼 나무하러 산에 많이 다니지 않았다.
나를 굳이 솔가리 따위를 긁어오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은 막내아들을 귀하게 여기기도 했겠지만, 어린 내가 해오는 땔감이 아버지께서 해 오실 양에 견줘 턱없이 보잘것없었을 것이라 굳이 어린 나를 시키지 않은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집에서 나무하러 산에 가는 것을 말렸지만, 동네 다른 형님뻘 되는 사람들과 내 또래 아이들과 같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더러 땔감을 해 오고, 솔가리를 긁어 오기는 했다.
부모형제로부터 듬뿍 받은 사랑에 나는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고 살았다.
자식을 키우고, 손자들이 나서 커가는 모습을 보며 자식 사랑이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3, 솔밭을 걸으면서 떠올랐던 식물
시골에서 자랄 때 채 1정보가 되지 않았던 작은 규모 우리 갓-산을 이르는 말-이 있었다.
우리 산에는 소나무가 주를 이뤘고, 노간주나무, 오리나무, 참나무, 진달래, 춘란, 당삽주[창출], 도라지 따위가 많았다.
꼭 시골 우리 갓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3월 중순이 지나면 진달래가 피고, 춘란이 온 땅을 점령하다시피 했던 시골 우리 갓.
춘란 꽃을 우리는 ‘꿩밥’이라 불렀다.
꿩이 춘란 꽃을 좋아해 잘 먹어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춘란 꽃은 특유의 향기가 있어 좋았다.
아이들은 춘란 향기에 취해 꿩이 먹을 주식(?)인 춘란 꽃잎을 많이 따먹었다.
진달래 꽃잎도 따먹었다.
1970년대 이후 난, 춘란 따위가 인기를 끌자 내 고향에 있던 춘란, 석란 따위는 전국에서 몰려든 ‘난초 수집가’들의 무분별한 채취에 거의 멸종되다시피 수난을 겪고 지금은 그 명맥이라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 구간.
솔밭이 주를 이루고 노간주나무, 오리나무, 졸참나무 따위가 있었다.
3월이 되어 봄이라고 하지만 겨울 때를 벗지 못한 시기라 봄꽃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돋아 시든 비비추 잎만 보였다.
하기야 소나무가 주를 이루는 솔밭에는 다른 풀이 잘 자라지 못한다.
송진 성분 따위가 다른 풀이나 나무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모양이다.
4. 먼지버섯
3월 1일 비가 내린 뒤라 대간 길에 먼지버섯 3개를 보았다.
먼지버섯은 비 내린 뒤 잠깐 보였다가 햇볕이 나면 보기 어렵다.
아마 햇살이 비치면 먼지처럼 사라지는 모양이다.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고(?), 특이하게 생긴 버섯으로, 먹을 수도 없다.
◎ 이 구간에 있었던 나무(더 많은 종류가 있었을 것이나, 내가 아는 것만 기록함)
○ 녹나뭇과 갈래 : 감태나무, 비목나무, 새앙나무[아구사리, 생강나무, 단향매(檀香梅)]
○ 단풍나뭇과 갈래 : 단풍나무
○ 두릅나뭇과 갈래 : 두릅나무[참두릅, 총목(楤木)]
○ 때죽나뭇과 갈래 : 때죽나무
○ 물푸레나뭇과 갈래 : 쇠물푸레나무[쇠물푸레]
○ 소나뭇과 갈래 : 리기다소나무[미국삼엽송, 아메리카소나무], 소나무
○ 옻나뭇과 갈래 : 옻나무
○ 운향과 갈래 : 초피나무[제피나무]]
○ 자작나뭇과 갈래 : 서어나무, 오리나무
○ 장미과 갈래 : 국수나무, 산딸기나무[산딸기]
○ 진달랫과 갈래 : 진달래[진달래꽃, 진달래나무, 두견, 두견화, 산척촉]
○ 참나뭇과 갈래 : 밤나무, 졸참나무
○ 측백나뭇과 갈래 : 노간주나무
○ 콩과 갈래 : 싸리(나무), 아까시나무
◎ 이 구간에 있었던 덩굴성 떨기나무
○ 백합과 갈래 : 청미래덩굴
◎ 이 구간에 있었던 풀
○ 백합과 갈래 : 비비추
○ 양치식물 고사릿과 갈래 : 고사리
◎ 이 구간에 있었던 버섯
○ 담자균류 번지버섯과 갈래 : 먼지버섯
□ 새 : 매 공격을 받아 목숨을 빼앗긴 것으로 보이는 멧비둘기로 추정되는 새 털만 널려 있었다. 이것을 약육강식, ‘자연의 질서’ 라고 하는지...
※ 다른 사진은 아래 제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blog.naver.com/angol-jong
첫댓글 또
한번의 대간길을 나서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저 역시 한번더 걸을 계획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
한번은 마무리 한 후 걸어야
민폐가 아닐 것이란 생각이
앞선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철저한 건강관리 습관. 후배들의 진정한 본보기이십니다.
마음이 급해(?) 두 가지를 같이 거머쥐려는 욕심으로 나섰습니다.
뒤죽박죽 헝클어진 것 보다 깨끗하게 단락을 짓고 다음 단계를 도모하는 것도 좋습니다.
든든하고 발 빠른 승승장구 님 빈자리가 커 보였습니다.
식사 시간에 좌중을 휘어잡는 유쾌한 목소리가 아쉬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역사를 쓰고 계시니까, 역사란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ㅋ
저는 산에 가면 대원들 따라가기만 하는 발걸음만 바쁩니다 그런데 한길님의 역사에는 그곳의 내밀한 속살들이 보여 복기하는데 참 도움이 되었습니다 20기 산행도 반복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잡다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 말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칭찬해 주셔서 과분합니다.
어느 산등성(이)에서, 구비에서 자락에서 무쏘꿈 님의 호쾌하고 장쾌한 웃음과 철학을 함축하면서도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을까 귀를 쫑긋해 보았습니다.
다음 길에서는 그런 즐거움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기 출발을 축하드립니다.
진부령까지 무사 완주 하시길바랍니다.
정맥하는날과 같은날이라 함산 못해 아쉽네요~~~
축지법을 하는 것 같은 덤박골... 님!
시원한 발걸음이 눈에 선합니다.
정맥 길 안전하게 산행하시고, 산에서 뵐 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구간을 시작으로
한여름엔 어찌 걸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한길님과 대장님들은
긴 세월을 어찌 견디어 오셨을까도 생각했답니다.
견딜 일만 있었다면 힘들었겠지만
더 행복한 일들이 많았기에
지금까지 산행을 이어가시지 않을까로
생각이 귀결되었습니다.
곧 새순돋고
오만가지 야생화가 피어오르면
발걸음은 둥실둥실 떠오를 것입니다.
잊어버린 나무와 꽃들의 이름을 배우면서
함께 걷는 날을 기다립니다.
솔갈비 아래
봄이 오는 소리가 아주 웅성웅성하였던
고남산 구간이었습니다.
지난 날 산 욕심이 많아 산 하나를 오르면 미리 지도를 살펴 옆에 다른 봉우리 찾아 오르곤 했는데,
정화산, 조항산을 한꺼번에 가는 산악회가 있어, 얼씨구 참가했던 데가 낙동산악회, 백두대간 길이었습니다.
대원들을 따라 걷고, 어딘가에서는 앞서기도 하면서 백두대간 길 별것 아니다 건방진 생각을 하고
그 뒤로 따라 나선 백두대간 길.
산을 차츰 알아가고 조선시대 신경준이 만든 산경표, 1대간, 1정간,13정맥 따위
우리나라 산세 공부도 하면서 차츰 산에 더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저 산이 좋아 나섰고, 뒤에는 좋은 분들을 만나 산행에 즐거움을 더하고,
외람된 말이지만 내 발걸음에 인생의 의미를 담는 흉내도 내면서 비틀거리면서 걷습니다.
느린 발걸음이지만 좋은 벗들을 만나 인생 공부 열심히 합니다.
늘 기운 넘치고 밝은 모습. 본받고자 노력합니다.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우리나라 아름다운 금수강산 대간길 풍관을 멋지게 담으시고,
언제나 대간길에 베어있는 역사와 구구절절 사연들까지 꼼꼼히 기록하시는 정성에
감동하게 됩니다. 추운 날씨에 강원도 대간길 긴 여정을 걸을 때는
걱정도 했었는데, 그것은 산행 초보자의 기우에 불과했고,
눈이 없는 대간길에서는 큰형님께서는 축지법까지 써시는 경지에 도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ㅎㅎ
많은 시간이 지나면, 저도 그런 경지에 이럴수 있을지.. 희망을 가지고서,
경험을 쌓아가며, 애써보겠습니다.
언제나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 산행때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만에 빠져 지도와 산세를 유심히 살피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찻길로 들어서 산등성(이)을 얼마쯤 건너뛰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름길로 들어선 꼴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이기를 잘 이용하지 않고, 감각과 엉터리 경험에 의존하여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실수를 깨닫고 다시 제대로 된 길로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모자라 그대로 걸었습니다.
마치 새치기한 찜찜한 기분이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실수투성이일 때가 많습니다.
실수에서 배우지 못하고, 허덕이면서 민망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