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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민경제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물가가 너무 오릅니다. 오늘의 가격이 어제의 가격이 아닙니다. 어서 빨리 정부에서 물가상승을 잡아, 서민경제를 지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가격 걱정없이, 마음 편하게 장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거리에 가지치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과연, 가지치기를 당한 가지들은 어디로 갈까요? 잘린 가지들이 어디선가 뿌리를 내리고 굳굳하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매년 2월이 되면, 아직도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서히 나무의 가느다란 가지에서 하루가 다르게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3월이 되면, 어느 새 잎이 피고, 파릇파릇하게 가지마다 물들어 갑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그런데, 가지들이 이렇게 새싹을 피우고, 파릇파릇해 지는 것은, 줄기인 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튼튼한 가지라도, 줄기에서 잘려지면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성도된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내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여행을 가서 호텔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호텔로 들어가야 쉴 수도 있고, 호텔 안에 있는 모든 시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호텔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누릴 때, 우리는 “호텔에 거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도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누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각 지역마다 좋은 호텔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호텔들을 안다는 것만으로, 그 호텔의 시설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곳에 투숙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용조 목사님은, “조금 힘들어도 하나님께 꼬옥 붙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믿으세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주님의 말씀, 진리, 복음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심으로, 언제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에, 아버지 하나님을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포도나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민할 것 없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스라엘”이고, 오늘날에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세상의 모든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본문의 농부는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왜 심었을까요? 조경수로 심었습니까?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땔감으로 밖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그러기에, 포도나무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과 소망”의 상징이 됩니다. 그러기에,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제거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에는 포도나무가 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칠 때, 포도나무와 농부의 관계를 비유로 사용하신 겁니다. 이스라엘은, 환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지만, 환난에서 벗어나 평안할 때는, 하나님에게 떨어져서 우상숭배를 했고, 외식적으로, 형식적으로만 살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참 포도가 아닌 들 포도와도 같았습니다. 농부가 과수원에 참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그것이 들 포도를 생산한다면, 가차없이 그 나무를 찍어서 땔감으로 사용할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대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은 실망이 매우 컸습니다. 그들은, 참 포도나무로서가 아니라, 들 포도나무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찍어버린 것이 아니라, 참 포도나무를 접붙여주었습니다. 접붙인 참 포도나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 53: 2을 보시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합니다. 비록, 외형적인 모습은 형편없었지만, 예수님은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름답게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심으로, 참 포도나무가 되신 것처럼, 성도된 우리도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히 11: 6을 보시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이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음을 믿는 겁니다.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받기 위해서는, 가지가 나무줄기에 붙어있듯,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알리기 위해서, 사도 요한은 요 20: 31절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항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며, 날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참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절을 보시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할 때, 모든 것이 형통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있고, 예수님 안에 우리가 성도로서 누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만 더 높은 곳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 대해, 빈정거리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성도의 모습이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세계사를 보면,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환난으로 몰고 갔습니다. 또, 성경을 불태워서 세상에 성경이 존재하지 않게 하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누릴 수도 없습니다. 은혜의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열매가 맺히고, 가지가 힘있게 뻗칠 수 있는 것은, 그 가지가 나무인 줄기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4절을 보시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형통의 길을 원하십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그들이 만나를 먹었고, 생수를 마셨고, 40년간 옷이 낡지도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안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포도나무 가지와 포도나무 줄기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의 저자이며, 스코틀랜드의 침례교 목회자였던 “오즈월드 체임버스”는,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환경을 바꾸지 말고 생각을 주님께 복종시키라고 했습니다. 곧, 직장에서 일을 할 때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나, 기도실에서 기도할 때에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나, 항상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강조하는 “거하라”는 말은, “머물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으로 인도된 자이기에, 그 안에 머물며 순종의 길을 걷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인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온 것은, 우리의 자력으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겁니다. 성 프란시스코나 칼빈, 루터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자신을 둠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하나님과 신비적 연합을 이룬 삶입니다. 본문에서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과 신비적 연합을 이루라는 겁니다. 이런 성도만이 본문이 말하는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공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형통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인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 것은,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우리의 깊은 내면적인 경건입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직장에서나 마트에서나 길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께 꼬옥 매달려 있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강조하는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요구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요구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이시고 우리는 진흙일 뿐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과 성도의 존재와 연합에 대해, 가장 쉽고 가장 정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약속대로 우리의 기도에 형통함이 있고, 우리의 삶에 기쁨과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달려가, 하나님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풍성한 복과 은혜 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