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8) 세례명 퍼즐 풀기
중국음으로 읽어야 원음과 비슷… 어감 좋고 예쁜 글자로 대체
- 「성년광익」 마이야본 1월 목차.
중국음으로 읽어야 풀리는 퍼즐
중국에서 쓰는 한자 이름은 중국 발음으로 읽어야 원어와 비슷해진다. 중국의 한자 이름이 조선으로 건너와 현지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앞글에 이어 세례명을 특정하지 못한 몇 가지 예들을 마저 살펴보겠다.
먼저 최조이(崔召史)의 세례명 이사발(二四發)은 엘리사벳(Elisabeth)을 가리킨다. 중국어 표기 의살백이(依撒伯爾)를 ‘이사보얼’로 읽는데, 줄여 읽으면 이사발로 들린다. 이사발을 중국음으로 읽을 경우 ‘얼쓰파’가 되어 영 딴말이 되고 만다. 흔히 이사벨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남판서 댁 여종 구월(九月)은 「추안급국안」에 박파투다(朴婆投多)로 나온다. 하지만 파투다가 세례명은 아니다. 성씨 박(朴)에다 파(婆)는 노파의 뜻이니, 세례명은 투다(投多)이다. 투다는 성녀 테오도라(Theodora)로 중국에서는 투다랄(投多辣) 또는 투다납(投多納)으로 쓰고, ‘토우도라’로 읽는다. 역시 앞쪽 두 글자만 따서 축약한 형태다.
성조이(成召史)의 세례명은 마달(馬達)이다. 중국음으로 읽어 ‘마아따’이다. 중국 표기는 마이대(瑪爾大)로 쓰고 ‘마얼따’로 읽는다. 동정 성녀 마르타(Martha)를 가리킨다.
유덕이의 세례명 갈오사(乫於沙)는 알기가 어렵다. 그나마 유사하기로는, 중국어로 기리사제납(基利斯弟納)이라 쓰는 성녀 크리스티나(Christina)의 첫 세 글자 ‘기리사’에서 유사한 음을 취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추안급국안」 1801년 3월 15일 주문모 공초 중에, 창동 사는 노파로 김오소랄(金吳蘇辣)이란 이름이 나온다. 오소랄은 ‘우스라’로 읽는데, 세례명 우르슬라(Ursula)에 가깝다. 다만 우르슬라 성녀는 「성년광익」에 나오지 않는 이름이다. 「성년광익」에 나오는 세례명으로 가장 근접한 것은 성녀 아셀라(Asella), 중국어 표기는 아슬랄(亞瑟辣), 즉 ‘아스라’이다. 우르슬라가 더 가깝다고 생각되지만 판단을 기다린다.
우아하게 바뀐 성녀들의 이름과 성녀 전기
같은 음의 한자를 쓰더라도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우아한 뜻을 지닌 글자를 끌어다 쓰는, 이른바 아화(雅化) 현상이 특히 여성의 세례명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은 흥미롭다. 서양 여성의 이름 끝에 자주 나오는 ‘나(na)’와 ‘아’가 중국어에서는 거의 ‘납(納)’과 ‘랄(辣)’ 또는 ‘아(亞)’로 쓰는데, 조선에서는 대부분 ‘라(羅)’나 ‘아(阿)’로 교체되는 특징이 있다.
김순이의 세례명 다슬라(多瑟羅) 또는 다슬아(多瑟阿)는 성녀 타르실라(Tharsilla)에 해당한다. 한자명은 대서랄(大西辣)이니, ‘다시라’로 읽는다. 대서랄을 버리고 같은 발음으로 된 다슬라라는 어감 좋고 예쁜 글자로 대체했다.
여종 윤복점(尹福占)의 세례명 윤아(閏阿)는 성녀 레지나(Regina)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유납(類納)이고 음으로는 ‘레이나’이다. 유납을 ‘유나’로 읽고, 이것을 다시 우리 음운에 맞춰 윤아(閏阿)로 표기한 것이다. 똑같은 원리로 김염이의 세례명 안아(按阿)는 조선식 표기이고, 중국 표기로는 아납(亞納)이다. 둘 다 성녀 안나(Anna)를 나타낸다.
궁녀 문영인의 세례명 비비한아(非非漢阿)는 성녀 비비아나(Bibiana)이고 중국어 표기는 피피아납(彼彼亞納)이다. 정순매는 앞서 ᄲᅡ을이라고 쓴 조혜의와는 달리, 발발아(發發阿) 또는 발발아(發發娥)를 택했다. 조도애의 세례명 안아다시아(安阿多時阿)는 중국명 아납대서아(亞納大西亞)로 성녀 아나스타시아(Anastasia)에 해당한다.
홍순희의 세례명 루시아(樓始阿)는 중국에서는 로제아(路濟亞)로 쓰고 루치아(Lucia)로 읽는다. 윤운혜는 루치아를 루재(樓哉)로 표기했는데, 중국음 ‘루짜이’로 읽지 않고, ‘루치아’를 빠르게 읽는 느낌으로 적은 것이다. 강경복의 세례명 선아(仙娥)도 루재의 경우와 비슷하다. 수산나(Susanna)를 이렇게 썼다. 중국에서는 소살납( 撒納)으로 쓰고 ‘수사나’로 읽는다. 김연이의 세례명 유아납(柳亞納)은 중국 이름 유리아납(儒里亞納)에서 한 글자는 바꾸고 한 글자를 줄였다. 성녀 율리아나(Juliana)를 가리킨다.
이렇듯 발음이 다른 중국 이름을 우리 한자음에 맞게 바꿀 때는 발음이 편안하고 우아한 의미를 담으려고 애썼다. 바꾸는데도 어느 정도 일정한 규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사학징의」 끝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에 성인 전기에 해당하는 책들이 보인다. 「성녀 간거다」, 「셩녀 더릐ᄉᆞ(聖女 데레사)」, 「셩녀 아기다(聖女 아가다)」, 「셩종도보(聖宗徒譜)」, 「성 안드레아[聖安德肋]」, 「셩녀 아ᄭᅡ다(聖女 아가다)」 등이다.
당시 여성 신자들에게 데레사, 아가다 성녀가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성녀 간거다는 「성년광익」에 없는 낯선 이름인데, 사학 매파로 이름이 높았던 정복혜의 세례명 간지대(干之臺)에 해당한다. 간지대는 성녀 칸디다(Candida)로, 같은 이름의 두 성녀가 있다. 성녀 칸디다에 대해서는 간지대 정복혜를 논의하는 별도의 글에서 따로 살피겠다.
- 「성년광익」 한글본 목차.
동일인명 이(異) 표기와 추정 오류의 예
같은 이름을 다르게 표기한 예는 여럿이 있다. 세례명 시몬(Simon)은 한자로 서만(西滿)으로 적고 ‘시먼’으로 읽는다. 김계완은 중국 표기를 따라 ‘서만’이라 했고, 황일광은 ‘심연(深淵)’으로 표기했다. 조선식 한자음으로 좋은 뜻을 취해 빌어쓴 것이다. 김계완은 김백심(金百深), 김심원(金深遠) 등의 별칭으로도 불렸다. 백심은 그의 자이고, 심원은 시몬을 조선식으로 고쳐 부른 명칭이다. 안토니오(Antonius)의 중국 표기는 원래 안당(安當)이지만, 홍익만은 안당(安堂)으로 고쳐 적어, 마치 별호처럼 보이게 했다.
홍재영의 세례명은 파라(玻羅), 즉 ‘보로’이다. 파라는 중국어 이름 파라대삭(玻羅大削)의 줄인 표현이니, 프로타시오(Protasius) 성인을 가리킨다. 네 글자 중 앞 두 글자만 취해 별호처럼 썼다. 손경욱의 세례명은 액로대삭(厄老大削)인데 앞쪽의 ‘ㅍ’이 묵음으로 처리되어 ‘으로타시아’로 읽는다. 같은 세례명 프로타시오의 이표기이다.
특이한 이름으로 유항검의 노비였던 전주 출신 낙선(樂善)의 세례명인 강량(姜良)이 있다. 두 글자 중 량(良)은 세례명 레오(Leo)에 해당한다. 순교자 정은(鄭溵)의 후손인 정규량(鄭奎良, 1882~1952) 신부의 세례명이 레오여서, 집안의 돌림자인 규자에 본인의 세례명을 얹어 이름을 지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강량의 강(姜)은 아마도 그의 성씨가 아니었을까 싶다. 강낙선 레오가 실제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통용되는 세례명이 잘못되어 고쳐야 할 것도 있다. 1801년 2월 13일 공초에서 정약용은 “권파서(權巴西) 형제는 아마도 권철신의 아들 권상문을 가리키는 듯하다”고 진술했다. 「추안급국안」 3월 15일 자 주문모의 공초에서는 권상문에 대해 말하면서 “남대문의 권가는 바로 파서략(巴西略)인데 현재 양근에 있습니다”라고 더 분명하게 짚어 말했다.
한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복자 권상문(權相問)의 세례명을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라고 했다. 세바스티아노의 중국어 표기는 파사제앙(巴斯弟)이다. 파서와는 ‘파(巴)’자만 일치한다. 중국어 표기 파서략(巴西略)은 바실리오(Basilius)이지 세바스티아노가 아니다. 권상문의 세례명은 세바스티아노가 아닌 바실리오가 분명하다. 달레의 기록보다 당시 주문모 신부와 정약용의 언급에 따르는 것이 맞다. 수정해야 한다.
달레의 기록에는 이런 종류의 오류가 적지 않다. 황일광의 세례명도 「사학징의」에서 본인의 입으로 심연(深淵) 즉 시몬이라 했는데, 달레는 알렉시오라 적고 있다. 또 윤운혜의 경우 「사학징의」에는 루치아[樓哉]라 했으나 1811년 신미년 백서에는 마르타(瑪爾大)라 했고, 홍낙민의 세례명도 황사영은 백서에서 바오로라고 했지만,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는 루카로 나온다.
김이우의 알려진 세례명은 바르나바(Barnaba)로, 이 또한 달레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사학징의」에서는 발라소(發羅所)로 표기했다. 바르나바는 중국에서는 파이납백(巴爾納伯)으로 쓰고 ‘빠얼나바’로 읽는다. 정광수의 세례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발라소는 어떻게 읽어도 바르나바로 연결 짓기가 어렵다. 불리사(弗理斯) 또는 불리사(弗利斯), 비리사(斐理斯) 등으로 표기되는 펠릭스(Felix)에 더 가깝다. 「사학징의」에 나오는 윤상득(尹尙得)의 세례명은 불리사(拂利斯)로 썼다. 발라소는 바르나바의 표기가 아니라 팰릭스의 조선식 이표기에 더 가깝다. 재고가 필요하다.
또 「성년광익」에 수록된 성인 성녀의 이름 중에는 다른 사람인데 이름 표기가 같은 예가 아주 많다. 이 경우 의도적으로 글자를 조금 바꿔서 사람을 구분하기도 한다. 이현 안토니오(Antonius)는 안돈(安頓)으로 표기했다. 홍익만은 안당(安堂)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안당(安當)으로 적거나, 안다니(安多尼)로 쓴다. 1월 17일의 주보 성인 안당(安當)은 은수자 안토니오이고, 6월 13일의 성 안다니(安多尼)는 현수자 성 안토니오이다. 베드로의 경우도 사도 베드로는 백다록(伯多祿)으로 적지만, 4월 29일의 주보인 순교 성인 베드로는 백다록(白多祿)으로 달리 표기했다. 앞서 나온 최필제의 세례명은 후자에서 취한 것일 듯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9) 간지대 정복혜와 성녀 칸디다
복자 정복혜 간지대, 같은 세례명 중국의 서 칸디다와 닮은꼴
- 마태오 리치, 탕약망, 서광계 등과 나란히 그려진 서 칸디다의 초상화와 그녀의 은제 십자가 문구.
간지대, 간거다, 칸디다
세례명을 살피다 보니 유독 「성년광익」에 없는 간지대(干之臺)란 이름이 궁금해진다. 간지대는 복자 정복혜(鄭福惠)의 세례명이다. 그녀는 1801년 2월에 붙들려와서 4월 2일에 처형되었다.
간지대는 대체 어디서 온 이름일까? 「성년광익」에도 없는 성녀 이름을 정복혜는 어떻게 자신의 세례명으로 쓸 수 있었을까? 「사학징의」에 따르면 그녀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이합규(李鴿逵)였다. 그녀는 1791년경 입교한 것으로 나온다. 또 「사학징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에 한신애의 집 땅속에서 파낸 서책 중에 「셩여 간거다」 1책이 들어있다. 한신애의 집에서 파낸 수많은 책들은 모두 정복혜 간지대가 가져와 맡겨둔 물건이었다.
간거다와 간지대는 동일 인명의 이(異)표기로 보인다. 간지대 또는 간거다란 이름의 성녀는 「성년광익」 365일에 날짜별로 정해둔 성인 성녀의 명단에 없다. 별도로 전하는 그녀의 전기가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정복혜는 「셩여 간거다」를 읽고 자신의 세례명으로 삼았을 것이다.
간지대는 성녀 칸디다(Candida)로, 중국어로는 감제대(甘第大), 또는 감제대(甘弟大)라 쓰고 읽기는 ‘칸디다’로 읽는다. 1811년 신미년 백서에도 ‘감제대(甘弟大) 복혜(福惠)’라고 적혀 있다. 간지대는 긴 장대를 가리키는 우리말이기도 해서, 음운조합이 다소 어색한 칸디다를 친숙한 우리말 어감으로 바꾼 표기다. 책 이름 속의 ‘간거다’ 또한 ‘디’에 해당하는 글자가 마땅치 않아 발음하기 좋게 교체되어 나타난 다른 표기로 볼 수 있다.
기록상 서양 성녀 칸디다는 적어도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서기 78년경 베드로 사도에 의해 치유의 은사를 받은 뒤 그의 제자가 되어 후에 로마 성문 밖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순교한 동정 성녀다. 또 한 사람은 성 에메리우스(Emerius)의 어머니인 성녀 칸디다로 에스파냐 북동부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수도원 근처에서 은수자로 살다가 선종한 여인이다.
- 라틴어로 간행된 백응리의 『서 칸디다 전기』와 책에 들어있는 그녀의 초상화 삽화.
중국 여인 서(徐) 칸디다
실제 정복혜가 어떤 칸디다를 지향으로 삼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의 칸디다가 더 있다. 중국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 마태오 리치와 교유하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서광계(徐光啓)의 손녀 서 칸디다(徐甘第大, 1607∼1680)로, 서양 선교사인 백응리(柏應理, Philippe Couplet, 1623∼1693)가 라틴어로 그녀의 전기를 남기면서, “고금에 짝할 이가 드물고, 중국 성교(聖敎)에서 유일무이한 여사(女士)”라고 칭송했던 여인이다. 그녀는 허씨 집안에 시집갔으므로 서양식 관습에 따라 남편의 성을 따서 허부인(許夫人)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성녀의 공식 칭호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미 당시 교회에서도 “경건한 정성으로 주님을 공경하며, 성덕(聖德)을 부지런히 닦았다(虔誠敬主, 勤修聖德)”는 평가를 얻어, 중국 천주교회와 유럽 교회에서 성인 이상의 기림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녀의 전기는 라틴어로 먼저 쓰여졌고, 이후 불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정작 중국어로 번역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운 신앙과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헌신적인 공헌 및 기여는 이미 중국 천주교회 내부에 널리 알려진 것이어서, 정 간지대가 지녔던 「셩녀 간거다」는 당시 중국 교회에서 불어 번역판을 보고 그녀의 사적을 간략하게 간추린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 불어판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고려주증(高麗主證)」이 간행된 것과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서 칸디다는 중국에서 천주교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서광계의 외아들 서기(徐驥)의 5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 고씨(顧氏)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익힌 뒤, 16세에 송강부(宋江府) 허씨 집안에 시집가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녀는 당시 교난(敎難)을 만나 고통 속에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어려운 살림에도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성당의 건립에도 기여해, 송강과 소주(蘇州) 인근 지역에 135개의 작은 성당이 세워지는 데 헌신했고, 근 400권에 달하는 천주교 교리 서적의 간행에도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 죽기 직전 상태에 놓인 신부들을 구출해 정성껏 치료해주고 빼앗긴 여행 경비까지 마련해준 일도 있었다. 당시 최악의 상황 속에 있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그녀는 구원의 천사 같은 존재였다. 이후 중국 천주교회사에서 그녀의 역할은 서양 신부들의 입과 기록을 통해 성인 이상의 존재로 각인되어, 각종 전기가 잇달아 출간되었다. 그녀는 중국에서보다 유럽 교회에 먼저 알려진 특이한 경우였다.
간지대가 소장했던 「셩녀 간거다」란 책 또한 그같은 전문(傳聞)을 수록한 소책자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그녀가 교회 서적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도 서 칸디다를 연상시킨다.
사학 매파 간지대
「사학징의」에서 정복혜를 ‘위항천파(委巷賤婆)’로 지칭한 것을 보면, 그녀의 신분이 낮았고, 나이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당시 교회 조직에서 서민 출신으로 가장 영향력이 막강했던 이합규를 통해 입교하였고, 그녀에게 간지대란 세례명을 내려준 것도 이합규였다. 그녀는 강완숙의 집과 예산군수를 지낸 조시종(趙時種)의 집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당시 서울 지역 천주교 조직의 중심부를 구성하던 이합규, 정광수, 김이우, 황사영 등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던 이른바 사학 매파였다. 특별히 조시종의 처 한신애 모녀와 가까웠고, 한신애의 요청으로 이합규와 정광수, 홍문갑 등을 그 집으로 데려가 그 집 비복들에게 전교하는 중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정광수의 처 윤운혜도 자신이 간지대와 몹시 가까웠다고 진술한 바 있다.
간지대는 온 집안이 천주교 신자였다. 오라비 정명복(鄭命福) 내외와 아들 윤석춘(尹碩春) 내외도 신자였다. 정명복 내외는 전농동에 살다가 1798년에 서소문으로 이사 왔고, 이들 또한 이합규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다. 정명복의 사위 김덕중(金德重)도 강완숙의 집을 들락거리며 강학에 열심이었다. 정명복은 배교하고 목숨을 구해 1801년 12월에 장성으로 귀양 갔다. 윤석춘의 처는 이기양의 아들이자 이총억의 동생인 이방억의 유모였다. 이 인연으로 간지대가 천주교 신자였던 그 집안을 자주 왕래할 수 있었다. 이총억과도 가까웠다.
간지대는 덕산(德山)의 교주인 송가(宋哥)와 친해, 그가 만든 천주교 서적을 들고 다니며 교인들에게 판매한 일도 있다. 그녀가 이 시기 교회에서 담당했던 주요한 일 중 하나는 천주교 교리서의 공급과 보급책의 역할이었다. 한신애의 집에서는 땅에 파묻어둔 26종의 교리서가 쏟아져 나왔다. 이 책은 모두 간지대가 검거의 위협을 느껴 한밤중에 가져가 땅에 묻어둔 것이었다.
간지대의 것으로 압수된 책의 목록을 보면 실제로 첨례에 필요한 기도서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수진일과(袖珍日課)」, 「미사(彌撒)」, 「성경일과(聖經日課)」 , 「셩경직ᄒᆡᆡ(聖經直解)」, 「성경광익(聖經廣益)」, 「셩경광익직 ᄒᆡ(聖經廣益直解)」, 「쥬년첨예쥬일(周年瞻禮主日)」 등이 쏟아져 나왔고, 「예미사규졍(與彌撒規程)」과 「오샹경규졍(五傷經規程)」 등의 책자도 모두 주일 미사 첨례에 필요한 각종 기도문과 독서 성경 및 의례와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이밖에 교리서로는 「교요셔론(敎要序論)」, 「주교은지(主敎恩旨)」, 「묵상(黙想)」, 「묵상지장(黙想指掌)」, 「고ᄒᆡ요리(告解要理)」 , 「셩교쳔셜(聖敎淺說)」, 「척죄정규(滌罪正規)」, 「삼문답 부십계(三問答 附十誡)」, 「요리문답(要理問答)」 등이 더 있다. 「묵상지장」의 경우 한문본과 한글본이 따로 있었다.
여기에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 일기로 보이는 「노능좌명일기老楞佐命日記」와 「셩녀 간거다」 같은 책은 성인전 계통의 책자이다. 또 여성 교육을 위한 「규잠(閨箴)」, 「규람(閨覽)」 등이 더 있다. 이들 중에는 미처 표지를 씌우지 못한 책자도 여럿 보인다. 그녀의 집은 정광수 윤운혜 부부가 이끌던 성물 공방과 연계된 거점이었던 듯하다.
특별히 그녀의 압수 물품 품목에 도상판(圖像板)과 도상 족자 3개가 눈길을 끈다. 도상판은 성화를 찍어내기 위해 원화를 새겨둔 목판을 말한다. 이를 통해 당시 성화의 제작이 목판에 새겨 찍어낸 뒤 채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 점도 소중하다. 함께 발견된 작은 주머니 6개에는 순교 성인의 모발과 나무 조각 및 성해(聖骸)와 관련된 가루 등이 들어 있어서, 당시 신자들에게 이 같은 물품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작 집주인인 한신애의 거처에서 압수된 것이 「성호경」 책과 사학 경전을 언문으로 베낀 책 1권뿐이었음을 본다면, 당시 간지대가 한신애의 집 마당에 묻어둔 자료의 범위가 얼마나 위력적인 것이었는지 알게 되고, 이를 통해 당시 교계 내 그녀의 위상에 대해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다만 「사학징의」에 실린 그녀의 공초는 뜻밖에 짧아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그녀가 특별한 진술과 배교를 거부하고 단호한 태도로 군더더기 없는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0) 사학 매파 3인방
사학 매파, 이집 저집 다니며 교리 가르치고 교회 허리 역할
- 옥에 갇힌 사학 매파 정복혜 간지대. 탁희성 화백 그림.
교회의 허리
「사학징의」의 공초 기록 속에서 사학(邪學) 매파(媒婆)로 일컬어진 사람이 셋 있다. 복자 정복혜 간지대(칸디다)와 복자 김연이 율리아나, 비녀 윤복점 레지나가 그들이다. 정복혜는 4월 2일에 처형되었고, 김연이는 5월 22일에 처형되었으며, 여종 윤복점은 배교로 목숨을 건져 5월 18일에 영해(寧海)로 유배 갔다.
「사학징의」 중 비녀 윤복점의 형추문목(刑推問目)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너는 본시 사학의 매파(媒婆)로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들락거리며 속여서 꾄 것이 이미 여러 해이고, 다닌 곳이 몇 군데나 되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사학 노파로 여러 곳을 두루 다닌 자로 간지대(干之臺)와 김연이(金連伊) 같은 이가 또한 많다.”
이로 보아 사학 매파는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여러 집을 들락거리며 포교하는 역할이었다. 윤복점뿐 아니라 당시 대표적인 사학 매파로 정복혜와 김연이가 소문이 났고, 그 밖에도 적잖은 사학 매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파(婆)는 일반적으로 40, 50대 중년 부인의 호칭이고, 60대를 넘어가면 노파라 했다. 매파란 사학을 매개하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그녀들은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포교 활동과 교리서 및 성물 보급, 그리고 연락책의 역할을 맡았다.
거점 역할을 한 강완숙이나 정광수의 부인 윤운혜를 두고는 매파란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신유박해 당시 41세였던 강완숙은 강파(姜婆)라고만 했지, 매파의 호칭을 붙이지는 않았다. 윤운혜는 자신의 공초에서 “간지대는 사학을 하는 매파”라고 했는데, 매파란 호칭은 지체가 낮은 여인에 한정되는 느낌이 있다. 또 같은 심부름을 해도 강완숙의 여종 소명이나 남판서댁 여종 구월(九月) 등 다른 여인들에게는 매파의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매파는 교리교육이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파는 지도자급과 개별 신자를 연결하는 중간 역할이었다. 그녀들은 교회의 허리를 든든히 받쳐주는 존재여서 교회 내의 비중이 결코 낮지 않았고, 교회 내부의 핵심 정보를 두루 꿰고 있었다.
세 사람 중 비녀 윤복점의 경우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 김연이와 정복혜는 형집행자 명단에만 한 차례씩 나오고, 누구인지 모른다고 썼다. 이들은 모두 주문모 신부에게 배워 세례를 받았고, 교회 일에 심부름꾼 노릇을 했으며, 추적받는 교우들을 피신시키고, 상본과 책을 비롯해 천주교 관련 물품을 숨겨둔 죄였다고만 적었다. 달레가 집필 당시 「사학징의」를 보지 못해 생긴 일이다.
세 사람의 신분은 정복혜와 김연이는 양인이었고, 윤복점은 사노비였다. 나이는 정복혜와 김연이가 대략 50, 60대였다면, 윤복점은 60대 후반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학징의」 중 윤복점 공초 기록의 제사(題辭)에 “나이가 이미 늙어 해독을 끼칠 날이 얼마 없다”는 언급이 남아 있어 그리 짐작해둔다. 윤복점은 사학 매파 중에 몰지각하고 안면이 가장 넓다는 평을 받았지만, 첫 공초부터 배교하겠다고 하면서 요긴한 정보를 술술 불었으므로, 사형을 면하고 귀양에 그쳤다.
- 궁녀들과 묵주신공을 바치고 있는 김연이 율리아나. 탁희성 화백 그림.
겹치는 동선과 폐궁 전담 김연이
세 사람의 동선을 보면 정복혜는 강완숙, 이합규, 한신애, 정광수, 이기양의 집과 접촉이 잦았다. 김연이는 강완숙, 한신애, 이기양의 집과 폐궁에 자주 출입했다고 했으니, 정복혜의 동선과 거의 일치한다. 여종 윤복점은 이윤하, 이가환, 박생원, 이기양, 한신애, 정재록, 남판서의 집안과 왕래가 잦았다고 진술했다. 정복혜는 산림동(山林洞)에 살았고, 김연이는 계동(桂洞) 용호영 안, 윤복점은 남대문 밖에 살았다.
세 사람 모두 강완숙, 한신애, 이기양의 집안을 공통적으로 출입했고, 그밖에 왕래한 집안의 면면으로 보아, 이들은 당시 교회 수뇌부나 명망가의 내실을 드나들면서 그 집안 부녀자들에게 교사로서 교리를 교육하고, 교회 소식 및 교리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정복혜에 대해서는 앞글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김연이와 비녀 윤복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공초에 따르면 김연이는 한신애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다. 형추문목에서 “너는 사학 중의 매파로 상하할 것 없이 종적이 두루 미쳐, 심지어 폐궁 나인과도 어지러이 수작하였다”고 했다. 그녀는 강완숙과 한신애, 그리고 이기양의 집을 빈번하게 출입했고, 정광수, 홍필주, 최필제, 이합규, 윤현, 김백심 등 당시 교회의 핵심 그룹들과 자주 왕래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 복인(福仁)과 함께 계동의 용호영 안쪽에 살았으므로 흔히 용호영 노파로 불렸다. 지금 계동 현대빌딩 인근이다.
김연이는 주로 강완숙의 지시를 받아 그때그때 기밀을 요하는 중요한 일을 처리했다. 김연이는 특별히 은언군 이인(李)의 부인 송 마리아와 은언군의 아들 이담(李湛)의 처 신 마리아가 살고 있던 양제궁(良宮)과 관련된 일을 전담했던 듯하다. 일종의 VIP 담당이었다. 공초 기록 중에 “폐궁과 교통하였고, 강완숙에게 소개하여 그로 하여금 주문모가 강론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라거나, “폐궁과 교통하여 이들로 하여금 전염되게 하였습니다”라고 한 진술로 보아, 은언군 부인과 며느리를 주문모 신부에게로 이끈 것은 김연이였다.
김연이는 수시로 폐궁을 들락거리면서 그곳 나인들이 만든 수놓은 베개를 찾아온다는 핑계로 연락을 취했고, 폐궁 나인 강경복, 서경의와 함께 강완숙의 집에서 사서를 강학한 일도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집전한 미사 첨례에도 그녀는 늘 참여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김연이의 딸 복인은 1800년 12월에 잠깐이지만 폐궁의 나인이 되어 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 등 교회 지도부에 의해 차세대 지도자로 낙점되어 주목받고 있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강완숙의 주선으로 용호영 안 김연이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강완숙의 지시에 따라 이합규와 김계완(김백심)이 잇따라 그 집으로 찾아왔다. 초기 며칠 간 교계 핵심 인물들에게 그녀가 은신처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녀는 1801년 5월 22일에 강완숙, 한신애, 최인철, 김현우, 강경복, 문영인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비녀 윤복점
윤복점(尹福占)은 성을 뗀 채 이름으로만 불렀고, 복금(卜今)으로도 불렸다. 그녀는 주동(鑄洞: 중구 주자동) 권생원 댁의 외거 노비였다. 권생원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세례명 윤아(閏阿)가 성녀 레지나를 가리킴은 앞선 글에서 말했다. 그는 남대문 밖 이통진(李通津) 댁 사랑채에 기거했다. 이후 남편을 잃은 그녀는 이동(履洞: 중구 을지로 3가 일대) 심진사 댁 행랑채로 거처를 옮겼다가, 1799년 남대문 내창(內倉) 앞에 사는 손만호(孫萬戶)의 첩에게서 서학을 처음 배웠다고 했다. 이는 죄를 가볍게 하려는 거짓말로 그녀의 입교는 그보다 훨씬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윤복점은 이후 강완숙의 집을 자주 왕래했고, 생계의 방편은 베갯모에 수를 놓아 그것을 팔아 마련했다. 그녀의 진술대로라면 남대문 밖 이통진의 집 사랑채에 살 때,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홍문갑의 집을 왕래하면서 수침(繡枕), 즉 수놓은 베개를 내다 팔아 먹거리가 여유롭게 되었다”고 했다. 베개를 팔기 위해 홍문갑의 집을 들락거릴 때, 강완숙이 서학을 믿으면 “죽은 뒤에 마땅히 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므로 그 말에 혹해 천주경을 익히게 되었다고 했다.
막상 그녀의 강론 장소는 서울 전역에 걸친 전방위적 규모였다. 한남동 이윤하의 집과 정동 이가환의 집, 이가환의 동서인 피난동 박생원 집, 확교 이기양의 집, 수구문 안 조시종의 집, 도저동 정재록의 집, 그리고 냉정동 남판서 집 외에도 대사동 홍문갑의 집, 사창동의 여염집, 아현의 황사영 집, 산림동 윤춘선 어미가 사는 집, 벽동 정광수의 집, 전동 홍익만의 집에 이르기까지 사학 매파 중 보폭이 가장 넓었다. 그것이 공초 기록에서 “안면이 넓고 종적이 비밀스럽기로는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된 이유다. 윤복점은 아녀자들에게 교리를 전달하는 능력이 대단히 특출했던 듯하다. 여기에 유모의 일로 이기양과 이가환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진술이 남은 것으로 보아, 윤복점은 이들 집안에 유모를 소개하거나 집안의 대소사와 관련된 일까지 챙기면서 이들의 깊은 신뢰를 얻었던 듯하다.
정복혜, 김연이, 윤복점은 맡았던 역할이 조금씩 달랐다. 정복혜는 교리서 보급 쪽에 비중이 있었고, 김연이는 폐궁 쪽 전담, 그리고 윤복점은 전 구역을 망라해 교리 교육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외에도 「사학징의」에는 사학 노파로 보이는 여성들의 존재가 여럿 더 포착된다. 냉정동 남판서 댁 여종 구월(九月)이나 동의(童義) 어미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구체적 기록이 남지 않아 아쉽다. 특별히 냉정동 남판서 댁은 「사학징의」에 여러 번 거명되었지만, 이제껏 그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겠다. 그 집안이 천주교 신자 집안이었는지, 아니면 여종 구월만 신앙을 가졌던 것인지조차 자료가 없어 더 살필 수가 없다. 정복혜와 김연이는 모녀가 함께 활동했다.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이 가족 단위로 움직였다. 그간 교회사 연구에서 기층에서 활동하다 이름 없이 스러진 하층민들의 신앙과 역할에 대해 조금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1) 주인이 세 번 바뀐 여종 영애
노비 매매 증서가 신원 보증서 역할… 비선 조직 연결하는 연락책
- 「사학징의」에 나오는 정약종의 여종 영애 관련 기사.
미심쩍은 여종
사학 죄인이 대역부도죄로 사형되면 그 집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국고로 귀속되어야 할 몰수 재산 중 돈이 될만한 것은 중간에 다 털어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다. 크게 한몫 잡는 일이어서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혈안들이 되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썼다. “정약종의 재산은 정부의 특별한 명령으로 모두 몰수되었다. 그의 적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집안이 복권되는 것을 영구히 막아, 복수를 할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한 것 같다.”
이 와중에 정약종의 여종이었던 영애(永愛)에 대한 처분 문제가 불거졌다. 「사학징의」를 보면 1801년 4월 22일 호조에서 형조로 공문을 보내왔다. 서부에서 여종 영애를 붙잡아 들였으니, 그녀에 대한 매매 내력을 조사해 알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정약종의 여종 영애를 관적(官籍)에 몰수해 관노로 삼기 위한 예비 조사였다.
얼마 후 광주판관(廣州判官)의 첩보가 올라왔다. “삼가 공문의 내용에 따라 여러모로 탐문해 알아보니, 정약종의 여종 영애는 본래 전라도 정읍현의 여자아이였다. 일찍 부모를 잃고 거두어 기른 어미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다. 정미년(1787)에 서울 도동(桃洞) 오선전(吳宣傳)의 집에 자매(自賣)하였고, 또 선혜청 서리인 조가(趙哥)에게 전매(轉賣)되었다. 을묘년(1795)에는 죄인 정약종이 돈 10냥을 조가에게 지급하고 사환으로 매득하였는데, 작년 8월에 영애가 7냥의 돈을 마련하여 지급하고는 속량(贖良) 되어 물러나기를 자원하므로 값을 감하여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한 것이 확실하다.”
주인 정약종이 한 해 전인 1800년 8월에 이미 그녀를 속량하여 양인이 되게 했으므로, 그녀를 관적에 몰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단이었다. 영애는 1787년에 정읍에서 고아 상태로 양어미를 따라 상경했다. 그녀는 도저동(桃渚洞) 오선전의 집에 자신을 스스로 팔아 그 집의 여종이 되었다. 이후 선혜청 서리 조가의 집에 다시 팔렸고, 1795년에 정약종이 다시 그녀를 10냥에 샀다. 그러고는 5년 뒤에 정약종은 산 값도 못 되는 고작 7냥에 그녀를 노비의 굴레에서 벗겨 주었다.
세 주인의 실체
여종 영애는 불과 13년의 짧은 기간 동안 주인이 세 번이나 뒤바뀌었고, 막판에는 원래 상태의 양민으로 돌아왔다.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형조에서는 “다만 그 여자가 세 차례나 전매되었고, 그 주인이 모두 사학에 관련된 자인 것은 내력이 수상하므로, 급하게 놓아 보내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이에 공문을 보냈으니, 공문이 가거든 즉시 위 영애를 관가 마당에 잡아다 놓고, 앞뒤의 내력과 사환으로 지낸 햇수, 속량을 허락받은 곡절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처분을 남겼다.
그녀를 샀던 세 사람이 모두 사학과 관련된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녀를 샀던 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이제 이들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먼저 영애의 첫 주인인 오선전이다. 선전관(宣傳官)은 무직승지(武職承旨)로 일컬어지는 무관직으로 왕의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직책이었다. 오선전은 「사학징의」에 실린 이재신(李在新)의 공초에 따르면 도저동에 사는 천주교인 정재록(丁載祿, 1734∼1819)의 사위였다. 나주 정씨 족보에서 정재록을 찾아보니, 사위의 이름은 동복 오씨로 오대진(吳大晋, 1762∼?)이었다. 다시 동복 오씨 족보로 확인하니 그는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을 지냈다고 분명하게 나온다. 내외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정재록은 나주 정씨로 정약종과는 먼 일족이다. 정재록은 50세 되던 1783년 식년시에 진사 3등 22위로 급제했다.
두 번째 주인은 선혜청 서리 조가(趙哥)다. 그는 또 누구인가? 「사학징의」 속 여러 죄인의 공초 기록을 교차 검토해 볼 때, 그 역시 도저동에 살고 있었다. 이합규의 외숙모인 정분이(鄭分伊)의 공초에 강완숙의 여종 소명(小明)이 “서소문 안 선혜청 서리 조가의 이모 집”으로 가겠다고 한 이야기가 나온다. 선혜청 서리 조가의 집이 서소문 안에 있었다고 했으니, 선혜청은 오늘날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7번 출구 옆에 있었고, 그가 살았던 도저동은 바로 근처 남대문로 5가 법정동 인근이었다.
조가의 이름은 조신행(趙愼行)이다. 이경도의 공초에 “도저동에 사는 조신행이 자주 찾아와 어지러이 강론하였다”는 자백이 있고,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도 공초에서 “도저동에 사는 조신행과 이재신 또한 모두 사학을 믿는 사람”이라 한 언급이 나온다. 정광수는 “자를 이수(而秀)라 하는 이름을 모르는 조가(趙哥)”를 언급했는데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제관득은 공초에서 간혹 황사영의 집에 가서 잘 때 한밤중에 왕래한 사람으로 “한쪽 눈이 먼 조신행, 우수현(牛首峴)의 조가(趙哥)”를 거명했다. 이로 보아 조신행은 도저동에 살았고, 한쪽 눈을 실명했으며, 자를 이수(而秀)라 하고 선혜청 서리 직분을 맡았던 인물임이 확인된다. 그 또한 부부뿐 아니라 이모까지 온 집안이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국청에 끌려가서 매를 맞다 죽어서 「사학징의」 「장폐죄인질(杖斃罪人秩)」에 명단이 올랐다.
영애의 세 번째 주인은 1795년에 갑자기 정약종으로 바뀌었다. 당시 정약종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 분원에 살고 있었다. 정약종은 1799년에 약 2개월간 서울에서 지낸 일이 있었고, 가족과 함께 상경한 것은 1800년 5월의 일이었다. 어째서 서울 도저동에 살던 영애가 갑자기 광주 분원으로 팔려가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분명 일상적인 노비 매매로 볼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겹쳐 있었다.
문서화된 신분 증명
그녀의 세 주인은 모두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부거나 핵심에 근접해 있던 열성 신자들이었다. 특히 앞쪽 두 사람과 연결된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신유박해 당시 서소문 안팎의 신자 조직 계보가 훤히 드러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가 있다.
궁금한 점은 영애를 두고 천주교 교인들 간에 반복적인 전매 행위가 이루어진 사실이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 교회 조직과 관련된 활동의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노비 매매 증서는 일종의 신원 보증서 역할을 겸했던 듯하다. 정읍에서 근거도 없이 상경한 그녀가 누구 집 여종이라는 문서화된 소속을 갖게 된 셈이다.영애는 애초부터 천주교인이었기에 오대진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을 테고, 이후 다른 필요에 따라 다시 주인이 조신행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교중의 심부름이나 연락책 등에 준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은 어째서 자주 바뀌었을까? 일종의 신분 세탁이 계속 있었다는 얘긴데, 이 또한 교회 지휘부의 판단에 따른 것일 듯하다. 정약종의 여종 영애는 오대진과 조신행을 거쳐서 정약종의 노비가 되었고, 세 사람 모두 소유권의 이전을 확실하게 문서화 해두었다. 정약종은 조신행에게 10냥을 주고 영애를 사환, 즉 심부름하는 종으로 사들였다. 그러다가 1800년 8월 영애는 7냥을 지급한 뒤 속량 되어 양민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10냥에 산 여종을 7냥에 속량해준 셈이니, 정약종으로서는 상당히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었다. 돈이 실제로 오간 것이 아닌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영애가 광주에 사는 정약종의 사환이 되어 간 것은 당시 서울 교회와의 원활한 소통에 있어 그녀에게 모종의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영애는 어째서 이때 와서 스스로 양민으로 속량해줄 것을 청했을까? 정약종이 노비를 해방시켜준 것이 아니고, 본인의 요청이었다고 했다. 1800년 6월 임금 정조가 갑작스레 세상을 떴고, 8월은 4월 명도회의 설립 이후 교회 조직이 힘차게 되살아나고 있을 때였다. 교회 조직을 위해 그녀를 정약종의 울타리 밖에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정황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정약종은 명도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인 중에 노비의 신분으로 천주교인을 따라 주인이 바뀐 예는 영애 말고도 더 있다. 강완숙의 여종 소명(小明)은 당시 활동 범위가 넓어, 수많은 사람의 공초 속에 이름이 등장한다. 그녀는 원래 조시종의 처인 한신애의 여종이었으나, 강완숙에게로 보내졌다. 황일광 시몬도 처음에 홍주 땅에 살다가 1798년 홍산의 이존창를 통해 입교했다. 이후 경상도로 내려갔고, 1800년 2월에는 난데없이 광주 분원 정약종의 이웃으로 이사했다. 그러고는 다시 정약종을 따라 상경하여 정약종이 부쳐 살던 궁녀 문영인의 청석동 집에서 멀지 않은 정동의 주막집에 터전을 잡고 각종 연락책과 심부름을 하고 비선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것도 다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
당시 천주교회는 각 지역 거점을 연결하는 중간 매개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각종 성물과 교리서의 유통과 보급뿐 아니라, 신자 조직 간의 모임 정보와 행사 정보를 공유하는 일도 이들의 발품을 통해야만 했다. 정약종의 여종 영애 또한 이 같은 비선 조직의 연결책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밀스러운 연결을 통해서만 만남이 이루어진 당시 천주교 조직의 특성상 이 같은 연락책의 존재와 역할은 교회에 불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여종 영애의 이야기는 그같은 정황을 잘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