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8막61장 (2부-2)
다행히 "후"는 담당교수의 입회하에. 마취를 한다음 집게를 들고 나의 입을 열고 썩은 어금니를 뽑으려 하였다.
그때였다.
앞니에서 금속과 부딛치는 소리와 동시 충격이 왔다.
"후"가 어금니를 뽑다 너무 힘을 가해 나의 앞니 끝부분에 집게가 닿으며 앞이빨이 조금 깨져버렸다.
아이코.
나는 죽을지언정 자식의 성공을 위해 이 치료용 의자에
누웠거늘
앞이빨 조금 깨졌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입회하던 담당교수가 부리나케 나의 썩은 어금니를 뽑아 내며 일은 매듭 지어졌다.
지금도 거울을 보면 왼쪽 앞이빨에 땜빵한 자국이 있다.
그려 ...
자식을 위한다면 이빨 다내놓아도 하나 아깝지 않았다.
다행히 "후"는 많은 경험을 쌓아 어엿한 치과의사로 성장하였고 지금"후"는 성공리에 인프란트를 시술한 것이다.
사실 치과의사 되는것은 판사나 검사 못지 않은 치열한 경쟁을 치뤄야 하였고 전국의 학부모들은 자식을 의사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여 있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후"가 남강고교를 강당에서 졸업식을 거행할때 졸업생이 400명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후"가 유일하게 "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였고 졸업생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400여명의 졸업생중 1등이라.
나는 그때 얼마나 흐믓했는지 모른다.
그런 "후"가 꿈에 그리던 치과의사가 되여. 나의 이빨을 치료하다니..
나는 그런 자식놈이 대견스러웠다.
그흔한 과외공부나 학원 강의 한번 듣지도 않고 홀로 독학으로 치과대학을 입학하고 홀로 치과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아무도움 없이 홀로 치과병원을 개원하여 어엿한 치과의사로 성장한 "후"가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 스러웠다.
부모님의 공경심에 보건의 제대후 그동안 모아둔 용돈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홍콩을 다녀온 효자였다.
과묵하고 말이 적었으며 무슨일을 할시면 나를 닮아서인지 끝장을 보는 자식이였다.
"후"는 그렇게 이천의 모퉁이에 병원을 개원하고 의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하며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