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애론] 현상학적 사유의 예술적 형상화 이선애의 작품세계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넓다고 좋은 강은 아니다. 좁아도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면, 좋은 강이리라. 깊다고 좋은 바다가 아니다. 낮아도 바닥이 보일 만큼 깨끗하다면 충분히 좋은 바다이리라.
Ⅰ. 로그인
이선애의 독서력은 작품 그 너머를 욕망한다. 그녀의 시선은 작품이라는 중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의 독서행위는 작품을 만나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작품이 시대의 명암과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반영한다면, 독서수필은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작품이 항해하는 배라면, 독서수필은 일종의 등대다. 독서행위는 작품과 동행하되, 수필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수필의 위치를 가늠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독서감상은 작품의 미학적 범주만을 사유할 수 없다.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작가의 삶과 작품,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역사적 맥락 등을 두루 살피는 문학적 안목이 필요하다. 이선애는 훌륭한 독자이면서 동시에 수필가다. 문학을 문학답게 읽어낸다는 의미다. 이 책 <강마을에서 보내는 독서편지>는 수필의 외연을 넓히는 차원에서 크다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문학은 객관적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간, 언어, 예술 등 가치개념으로 규정되는 사항들이 문학의 문학다움을 규정하는 데 용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선애 독서수필의 미적 울림은 수필이 ‘현상학적 사유의 예술적 형상화’라는 섬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 선택한 하나의 항로다. 조르쥬 뿔레는 독서현상학 속에서 비평의 방법을 마련하였다. 지금까지 우리 수필은 성찰과 저항이라는, 어떻게 보면 윤리의식과 사회의식에서 출발했다. 이선애의 독서수필은 그전과 달리 창작적 원리나 울림의 윈리, 즉 조르쥬 뿔래의 독서현상학으로 풀어나가는 데 의의가 있다. 뿔레는 “독서행위는 다른 사람의 의식에 흐르는 어떤 것을 자신의 것으로 포착하는 독자의 의식이다. 동일감을 드러내는 비평의식은 그렇다고 해서 괴리와 차이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상의 전적인 소멸을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평자는 독서현상학을 이선애 수필 분석 방법론으로 취택하고자 한다. 독서현상학은 저자로부터 시작하여 텍스트로, 텍스트에서 다시 훌륭한 독자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감상은 단순히 정보와 지식을 얻으려는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세상을 대면하여 자기와 세계를 이해하는 행위가 된다는 측면에서 작가와 훌륭한 독자 양자간 대화의 결과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작품을 읽는 것은 다른 작품을 생산하는 일이며,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유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라는 점을 환기해 둘 필요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학독서의 목적이고 본질적 양상이다. 문학독서는 작품에 대한 신뢰와 작품에 직접 접하는 즉물적 수용의 즐거움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론이 아니라 직접 수용이 문학독서의 일차적 조건이다. 통념적으로 ‘형상적 사유의 표현’으로 규정되는 문학의 속성을 현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문학독서라 한다면 이선애의 독서수필은 문학을 문학답게 읽는 게 무엇인가는 비교적 자명하게 그 상을 드러낸다. 달리 표현하자면, 언어예술로서 문학을 수용한다는 것쯤이 된다. 책을 읽게 되는 계기는 다양할 것이고, 그것이 독서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도 예상되는 점이다. 그러나 계기의 다양함을 모두 고려하여 개별화하는 일은 이 논의의 범위를 벗어난다.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독서과정에 미치는 영향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독서론의 난점 가운데 하나는 작가의 독서 구조나 독자의 독서 구조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독서의 현상학을 설명하는 뿔레에 따르면 “문학은 나의 의식과 대상 사이의 일상적인 부조화에서 나를 해방시켜 준다.” 문학은 형상화된 것이고, 자율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할이 가능하다. 그는 문학이 작가의 존재적 결단의 결과라는 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책은 작가의 몽상과 삶의 방식이며, 사고와 감정을 보존하는 수단이며, 죽음으로부터 자기를 구출하려는 욕구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작품의 가치를 이렇게 전제해야 하는 이유는, 그저 시도해 보는, ‘독서감상문’에 지나지 않는 작품은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 권대근/대한대학원대학교 교수
1. 구체성으로 다가가다
책읽기가 과정적이라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 그것이 구체성을 바탕으로 하는 독서라는 점일 것이다. 구체성으로 다가가는 책읽기는 이선애 독서수필의 큰 특징이다. 문학에서 세부의 묘사와 감정의 추이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인물의 행동을 사건의 진행에 맞게 그리고, 그것이 일반적 인물의 행동과 같은 구조를 보이도록 하는 것이 문학적 성공의 잣대가 되는 이유가 여기서 설명된다. 이선애는 뿔레처럼 형식이 정신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작품을 묘사하고 테크닉을 세세하게 분석하는 따위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이선애에게 있어서 작가란 작품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작품을 존재하도록 하는 자이며, 자신의 일상적 삶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정신적 삶의 정상, 즉 사유의 우주를 보여주는 자이다.
척독은 결코 시간이 없어 짧게 쓴 글이 아닙니다. 긴 편지를 쓰는 것 이상으로 애를 써서 작품성을 의식하고 제작된 글입니다. 척독을 읽고 나면 정경이 떠오르고 그림이 그려집니다. 절제된 비유와 간결한 표현, 말할 듯하지 않고 머금은 여백의 미를 추구합니다. 척독은 산문보다 오히려 시에 가깝습니다. 오늘날, 가장 척독에 가까운 것은 아마도 엽서(葉書)일 것입니다. 엽서를 가장 살뜰하게 쓴 사람으로 신영복 선생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한 달에 한 장 주어지는 엽서를 위해 머릿속으로 몇 번의 퇴고를 거쳐 십여 분 주어지는 시간 안에 빠르게 적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엽서는 감옥에서 세상을 향해 보내는 안타까운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가을이 깊어져 갑니다. 우수수 날리는 낙엽 사이로 추수가 끝난 빈 들의 고요한 모습이 보입니다. 이제 우리도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먼 곳의 벗에게 마음을 전하는 한 장의 편지를 써 보면 어떨까요? <마음을 담은 종이 한 장-척독>
일반적으로 서간체로 수필 쓰기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행위로 여겨졌기에 남성 위주의 문학 전통에서는 주변적 장르로 인식되어 왔다. 사대부들은 전화가 없던 시대에 편지를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편지라는 사적인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의사소통을 해온 것이다. 때문에 편지에 사용되는 언어는 일관성 있게 엮어 나가기 어려운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삶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측면에서 자아표현을 강조하면서 자아가 성숙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데에 효과적인 언어가 바로 편지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편지의 언어는 사건이 발생되는 즉시 보고되므로 편지의 수신자나 독자에게 현장감을 제공하면서 그 현장감으로 인해 인물의 심리와 감정에 더 많이 공감하게 한다. 때문에 사대부들은 자아의 발견이나 직접적인 접촉에의 욕망을 이런 서간체를 통해 표출한다. 즉 사건에 대한 직접성과 밀접성, 자기확증으로 인해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행동의 고백이나 정신적 경험의 강조에 유익한 것이 편지의 언어인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편지의 언어는 주로 내면적인 감정이나 정서, 비밀의 고백, 미결적인 사건이나 원인의 해명, 자기 변명 등의 내용을 담은 언어가 된다. 작가는 허균이 이대용에게 쓴 척독과 박지원이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면서, 박지원은 허균만큼이나 척독의 묘미를 알고 즐겨 쓰던 이였다고 평가한다. 특히 그들의 옛글에서 상황에 맞는 글을 찾아내어 적절하게 인용하는 데서 탁월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발견한다. 못 만나서 섭섭하고 송구한 마음을 “이제부터는 당분간 달 밝은 저녁이면 감히 밖에 나가지 않을 거요”라는 문장에 담아내는 여유를 그 근거로 삼는다. ‘척독’은 결코 시간이 없어 짧게 쓴 글이 아니라, 편지를 쓰는 것 이상으로 애를 써서 작품성을 의식하고 제작된 글이라는 게 작가의 견해다. 정경이 떠오르고 그림이 그려지고, 절제된 비유와 간결한 표현, 말할 듯하지 않고 머금은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는 차원에서 척독은 산문보다 오히려 시에 가깝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해석에 더하여, 오늘날, 가장 척독에 가까운 것은 엽서(葉書)라고 하면서 작가는 엽서를 가장 살뜰하게 쓴 사람으로 신영복 선생을 꼽고 있다. 감옥에서 한 달에 한 장 주어지는 엽서를 위해 머릿속으로 몇 번의 퇴고를 거쳐 십여 분 주어지는 시간 안에 빠르게 적은 그 엽서를 작가는 ‘감옥에서 세상을 향해 보내는 안타까운 메시지’로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삶은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일까요? 나는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가족을 사랑하고 있을까요?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앞을 알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그레고르 잠자 처럼 더듬이로 세상을 더듬어가고 여러 쌍의 마디가 있는 발로 기어나갈 때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잠자의 가족들이 행하는 ‘가족이란 이름의 폭력’이 소설 속의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가족에게조차 성가신 존재가 되면 말없이 외면당하는 슬픈 일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제 사유를 깊게 합니다. <가족이란 이름의 폭력>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작가는 우리네 삶의 부조리한 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데, 책 속에 나오는 이 벌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중 작가는 치매 노인이 먼저 떠올랐다고 하는 분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젊어서 몸과 마음을 바쳐 가족들에게 헌신한 노인이 치매가 발병하는 순간 가족들에 의해 외면당하고 요양원으로 보내지는 것이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과 교차하였다고 하는 지점에서 작가는 ‘잠자가 아버지의 사과에 맞아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자 축제하듯 가족들은 행복한 나들이하는 그러한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또 벌레가 된다는 것은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어서 그 속에 삶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다양한 의견들이 밤이 늦도록 분분하였다고 독서토론회 모습을 중계하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한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되어서 비로소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들뢰즈의 ‘동물-되기’로 해석한다. 독서토론회를 향기로운 지성의 향연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 그녀의 독서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 독서수필의 멋과 향은 책의 내용이나 감상보다 발단부에 소개된 독서토론 모임이 생긴 연유에 대한 몇 줄의 단상에서 나온다. 한 젊은이가 후미진 창원시 마산합포구 완월동 산북도로 아래에 헌책과 커피와 맥주를 파는 헌책방 겸 북카페를 개업했는데, 그때 작가는 너무 반가워서 일 주일에 한 번은 가서 커피를 마시고 맥주도 한잔하고 이 카페가 잘 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평소 책읽기를 밥 먹듯이 하는 작가의 강마을편지로 엮은 수필집은 세종도서로 뽑히기도 했다. 계간지 에세이문예뿐만 아니라 교육신문 등에 꾸준히 독서수필을 수년간 연재하기도 한 작가이기에 동네에 북카페가 생겼다는 게 얼마나 반가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오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 늘 걱정스러워서 가게 문 앞에, ‘함께 책을 읽고 시 낭송을 할 동네 사람들 모이세요.’라는 작은 쪽지를 직접 써붙였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큰 감동을 준다. 지성과 따뜻함이 흐르는 이선애의 독서수필은 이런 인간적인 서사를 품고 있어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더욱 가깝고도 친근하게 다가서는 것 같다.
2. 형상성을 음미하다
형성상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감각 차원으로 전환하여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수단과 그것이 구체화된 결과를 뜻한다. 국어사전에는 ‘형상’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감각으로 포착한 것이나 심중의 관념 등을 예술가가 어떤 표현 수단에 의하여 구상화하는 일. 또 표현되는 바탕이나 작품으로서 나타난 것. 그 표현 형식도 이름.” 구상화, 표현 등이 이 설명의 핵심에 해당한다. 철학적으로 대표되는 학문이 논리를 중심으로 추상적인 이론체계를 구축하고 원리를 발견하여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개별적 구체성을 바탕으로 공감을 추구한다. 결과로는 누구나 공감하는 예술품을 낳게 되는 것이 이상이지만 과정에서는 개별적인 구체성과 섬세한 자세함에 감동의 원천이 마련된다. 이선애의 독서수필은 감각적 공통성을 민감하게 느끼도록 구성되어 있고, 독자는 작가가 그렇게 해 놓은 데 공감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짜여져 있어 감동을 준다.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는 삶 자체가 ‘길 없는 대지’ 위를 걸어가는 여행이라고 말하는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고전문학 작품 중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길’ 자체가 주인공이자 주제인 고전을 특유의 현재적 시선으로 새롭게 읽어내는 책이다. 열하일기, 서유기, 돈키호테,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리스인 조르바, 걸리버 여행기라는 고전의 주인공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다. 우리도 길을 떠나려면 지도를 그려야 한다.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하늘의 별을 보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별은 고전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고전을 읽으며 우리 속에 숨어있는 야생의 본능을 되살려 보는 것은 어떨까. - <구도의 여정, 길 위에서 길 찾기>
고전을 ‘우리 시대의 별’로 인식하고 있는 이 수필에는 저자가 삶의 모퉁이를 돌면서 얻은 샛별 같은 사유가 은하수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그녀는 끝없이 이어진 ‘길’을 아스라이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수한 여인이다. 국어교사를 하면서 문학의 ‘길’을 나선 수필가다. 그녀의 작품에서 주축이 되는 그림자 형상은 ‘길’이다. 이선애의 수필 속에서 무시로 발견되는 ‘길’은 이선애 수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단초가 되는 핵심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길’은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해 주는 통로를 말한다. 어떤 상태로 가는 과정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선애에게 있어서 ‘길’은 작가가 직접 ‘길 위에서 길 찾기’라고 명명했듯이, 미지의 세계로 열려진 ‘창’이다. 그녀는 고전을 읽으며 우리 속에 숨어있는 야생의 본능을 되살려 보기를 독자에게 권한다. 작가는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길 위의 길을 언제든지 걸을 준비를 하고 있다. 전자의 ‘길’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이라면, 후자의 ‘길’은 사색의 시공으로 연결된 문학의 길이요, 예술의 길이다. 어느 때든 길로 통하는 길이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여인이다. 왜냐하면 이선애는 ‘어디로든 희망으로 내달릴 길은 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에서 시간으로, 꿈에서 꿈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 하늘 아래 한 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살았던 흔적들을 더듬으며 혼자 어디론가 떠나면서 지도를 그려보라고 권한다. 길에서 길을 묻는다. 그녀는 분명 혼자 걷는 샛길에서 ‘별’을 만나고 삶의 규칙을 발견하길 좋아하는 작가다.
백승영 교수는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고 말한 니체의 핵심 키워드를 통해 니체의 사상을 ‘디오니소스적 긍정 철학’이라 말합니다. 철학에서 탈근대적 전환을 가져온 니체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가 힘에 의해 수행하는 장소로 위버멘쉬(Übermensch, overman)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야 자신을 긍정하고 세계에 대해 긍정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 매 순간 모든 계기를 자기가 구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바람 몰아치는 들판에 홀로 선 젊은이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 일을 10년만 견디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궁하기 때문에 그 궁기를 면하고자 견디어 낸다면 진정한 자아가 눈을 뜰 것입니다. 신께서 문을 닫아 버릴 때는 반드시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고 합니다. 투덜거리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서 나를 누르는 중력을 극복하기 위해 몸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내 속에 있는 의지를 불러보십시오. 그러면 인생의 길섶마다 숨겨진 행운이 손을 내밀 것입니다. <아모르파티>
이선애 독서수필이 주는 맛이 어찌 지성미뿐이겠는가. 향기 또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사람의 내면을 투시하여, 문학적 인물을 되살리고 기억해 주는 행위야말로 얼마나 인간적인가. 동서양의 뜨겁게 산 사람들의 삶을 수필로 써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어느 한쪽에 한정하거나 치우치지 않고 세상의 이치를 발견해내는 것이 장점으로 보인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 일을 10년만 견디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 말은 어쩌면 청년이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려는 것보다는 물처럼 절벽을 만나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지나고 막히면 돌아가는 용기와 실천을 주문하고 있다. 물은 낮게 낮게 흘러야 바다와 만날 수 있다. 매순간의 삶을 자기 스스로 구상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한다. 풍부한 사료와 폭넓고 깊은 논의로 인간세계를 그려나가는 이유를 발견해 낼 때의 감동은 더욱 크다. 기억해야 할 인물의 가치를 독자 자신이 상상력으로 이해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땅 속에서 보석을 발견했을 경우와 같다. 의지를 불태우며 살아온 사람들의 의로운 결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동은 얼마나 큰가.
저 역시 80년대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문계가 아닌 상업계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니던 여상에는 교실을 공유하던 야간반 언니들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등교하면 가끔 교실이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반장이었던 저는 주간 아이들을 대표해서 저녁에 남아 야간반 반장 언니를 만났습니다. 저보다 몇 살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교복 입은 언니를 기억합니다. 그 언니와는 말이 잘 통해 꽤 오랫동안 이야기하였습니다. 교실은 깨끗해졌습니다. 삼십여 년 전의 마산은 전국에서 여성의 성비가 높았던 곳으로 유명하였습니다. 수출자유지역 공장으로 전국의 빈촌에서 어린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왔던 소녀들이 쏟아져 나오던 풍경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새까맣게 윤이 나던 단발머리 소녀들이 끝없이 밀려 나오던 수출자유지역 후문 앞... 와르르 쏟아지던 웃음들, 수런수런하게 들리던 그녀들의 목소리들, 옅은 푸른색의 근무복....『외딴방』은 결국 저의 이야기이고, 아픈 노동의 역사입니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천천히 뻘밭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살았던 가난한 장남들의 눈물이고, 웃음 많고 정이 넘치는 누나의 희망일 것입니다. 그 시절, 우리의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피는 눈부신 꽃의 시절일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핍니다>
이선애가 구사하는 언어는 분위기에 꼭 맞는 적절한 표현의 옷을 입고 있어 감동을 준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핀다’는 대단히 함축적이며 다의적인 표현이다. 왜 제목을 ‘사람 사이에 꽃이 핀다’라고 했는지 그 의도를 찾아보는 것도 이 수필을 재미있게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겠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핍니다>에서 독자들은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발견의 놀라움은 미적 감동을 준다. 다만 바슐라르가 주로 사물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논한 것과 달리 이선애의 경우는 한 생을 열정적으로, 의미있게 산 사람들의 열정적인 멋을 그려내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날들의 열정을 자신의 삶에 비추며, 80년대의 가난 속에서도 순수와 열정으로 현실을 헤쳐나갔던 젊은 사람들의 투쟁사에 자신의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이것은 자기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많이 이용된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과거를 위대하게 살아낸 인물 앞에서 작아지는 이선애 작가를 발견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최고의 쾌미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천천히 뻘밭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살았던 가난한 장남들의 눈물이고, 웃음 많고 정이 넘치는 누나의 희망일 것’이라는 표현은 이 책의 문학성과 그녀의 문재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완월동에 사는 동네 사람 몇이 모여서 독서 모임을 시작한 지 한 해가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냥 한 달에 두어 번 책 한 권 정해서 읽고 시도 낭송하고 이렇게 합니다. 가을밤이면 맥주집에서 가을시를 읽고, 봄꽃이 피면 봄꽃이 보이는 찻집에서 꽃에 관한 시를 두런두런 읽기도 합니다. 이번 달의 책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입니다. 제가 처음 책 소개를 했을 때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얘들이 읽는 책 아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고 유목적으로 탈주하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과 친절하고 예의 바른 과부댁으로부터 탈주하는 헉과 도망자 흑인 노예 짐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잭슨섬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하고 함께 미시시피강으로 탈주의 길을 갑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은 새로운 세계와 접속합니다.
<강을 따라 흐르는 우정과 탈주>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공감을 주는 설득력은 필수적이며 또 연상에 의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접근과 함께 다양한 비유의 구사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 심상에 의한 참신한 기법 같은 것도 시도해 볼 필요가 있겠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런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의 하나가 이선애의 <강을 따라 흐르는 우정과 탈주>라 하겠다. 이선애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탈주하는 인간의 모험이라는 걸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과 친절하고 예의 바른 과부댁으로부터 탈주하는 헉과 도망자 흑인 노예 짐의 이야기’라고 소개하면서, 그녀는 작중 인물, 탈주자 헉과 도망자 짐 두 사람간의 진정한 우정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 모두 탈주를 통해 새로운 세상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거는 탈주의 지점에서 우리는 용기의 위대한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시대의 승리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고수한다. 이 수필은 시대의 승리자보다 역사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자유를 택한 위대한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3 상상력을 구축하다
텍스트를 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일반 텍스트가 의미의 논리적 구축물이라서 독자는 의미를 찾고, 의미단위별로 분류하고 조합하는 과정에서 명백하고 일관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독서에 해당한다. 그러나 문학 텍스트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는 의미의 구축물이라기보다는 종횡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의미의 시렁이나 ‘의미의 그물망’에 가깝다. 독자의 능동적인 참여, 자신의 기억을 거기 투여하고 작가와 입장을 바꾸어 개입해 보고, 그리고 작가가 얽어 놓은 의미의 그물망에 자신의 기억과 기대를 한꺼번에 걸어 봄으로써 텍스트를 적극 수용하는 것이 문학텍스트의 속성이다. 문학텍스트는 주관적 수용이 필연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학텍스트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헉슬리는 이 소설을 통해 과학과 기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이러한 문학 작품이나 사상을 디스토피아라고 합니다. 그는 과학이 인간으로부터 유리될 때 나타나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 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기슭에 아카시아 향기는 바람을 타고 흐릅니다. 그 향기를 따라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존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내 삶의 주체는 과연 나인가? 소비의 주체가 나인가? 이런 물음에 정확히 답하는 삶이 되고 싶습니다. <과학기술이 만든 디스토피아>
이선애 작가가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하면서 연휴 동안 읽은 책’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다. ‘헉슬리는 이 소설을 통해 과학과 기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러한 문학 작품이나 사상을 디스토피아라고 하는데, 작가는 이 책은 과학이 인간으로부터 유리될 때 나타나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 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한다고 평가한다. 과학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이 디스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한 작가는 인간이 주체성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예술성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 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기슭에 아카시아 향기는 바람을 타고 흐른다. 그 향기를 따라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야만인 존의 모습을 생각하는 작가의 모습이 상상과 관념연상을 일으키며 감동의 진폭을 깊게 해준다. 그녀의 대다수 수필은 위에서 말한 사상의 정서화나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발단부와 결말부에 아주 잘 되어 있다.
노인은 매일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늘 빈 배로 귀환하는 소시민이지만 내일 다시 낡은 돛을 달고 짙고 푸른 바다를 향해 나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 속으로 출근하고 이따금 버거운 행운 버거운 고통 사이에서 잠깐잠깐 졸면 그사이에 별빛은 쏟아지고 바다엔 날치가 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밤하늘의 별빛을 오래 바라보고 싶어도 잡은 낚싯줄을 놓지 못합니다. 그렇게 잡은 큰 물고기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세상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상어들에게 뜯어 먹힙니다. 그래도 남은 꼬리와 머리를 배에 매달고 우리는 불빛 휘황한 항구 하바나를 향해 가야겠죠. 언덕 위 낡은 집에는 어제 신문이 있고, 침대에 누워 사자와 아프리카를 꿈꿀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노인을 위해 소년은 커피 한 잔을 가져옵니다. <사자 노인 그리고 소년>
칸트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논의 또는 평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의 미학적 또는 심미적 취향은 극과 극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제시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그리고 정당한 기준이 존재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성립한다. 이와 같은 가정 위에서 이선애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탁월한 해석력에서 가능해진다. 바슐라르 이론에 의하면, 문학적 상상력은 물질적 상상력과 원형적 상상력을 양극으로 하고, 역동적 상상력이 물질적 이미지를 변형 발전시켜 나가면서 미지의 보편적 가치를 찾아가는 탐색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선애는 <노인과 바다>를 읽고 인상 깊은 몇 개의 낱말들을 수첩에 적는데, 그녀가 뽑아낸 키워드는 산티아고 노인, 멕시코만, 사자 꿈, 오래된 신문, 야구, 팔씨름, 상어, 피 냄새, 청새치 그리고 소년 등이다. 이런 소설 속 구체어는 작가가 작품을 감상하면서 하는 가장 탁월한 활동인 상상력을 안겨준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인 삶의 형태는 노인에게 미끼가 될 작은 생선을 가져다주는 눈 맑은 소년으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작가는 이 책에 나오는 노인의 멋진 말,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을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명언을 오래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노인처럼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리고 조각배를 저어갈 것이라 다짐한다. 과거의 체험이 현재의 의식화된 체험 속으로 들어오는 길은 상상의 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로 말미암아 과거의 체험은 인간의 심리 속에서 현재의 체험과 결합되고 재구성되어 사실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체험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따라서 작가는 어떤 억압과 구속에서도 벗어나 모든 것이 자유로운 삶이 펼쳐지기를 기원하게 된다.
휴가의 끝자락을 마무리하면서 내년의 휴가를 기약하고, 다음 보너스를 기다리고, 군대 간 아들의 전역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을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주제로 부조리극을 쓴 샤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뜨겁게 읽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배롱나무 붉은 꽃 송이송이 수북하게 피어난 강둑을 보며 공사로 다소 부산한 학교에 앉아 기다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방학 중의 학교는 학생들 대신 공사를 하러 오신 분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하십니다. 돌가루가 수북한 복도에 천을 깔아두었고, 비닐로 막을 쳐서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배려해 주셨지만 먼지가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어서 제멋대로 날아다닙니다. 이것을 먼지의 부조리성이라고 할까요? - <삶은 언제나 기다림의 연속>
수필을 관조의 문학이라고 할 때, 이선애의 수필은 조금도 그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관심이 있는 것이면 모두 수필감이 된다. 다시 말해 ‘볼’ 시視의 차원이 아니라 ‘볼’ 견見의 차원으로 나아가서 종국에는 ‘볼’ 관觀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수필의 출발점이 제재라면, 결승점은 그것의 의미화다. <삶은 언제나 기다림의 연속>에서 이선애는 인간의 삶을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주제로 부조리극을 쓴 샤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뜨겁게 읽는다. 멀리 보이는 배롱나무 붉은 꽃 송이송이 수북하게 피어난 강둑을 보며 공사로 다소 부산한 학교에 앉아 기다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베케트는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하며 이런 기다림 속에서 드러난 부조리함을 ‘고도에 대한 기다림’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의 피신했던 작가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사장의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해놓았지만 먼지가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어서 제멋대로 날아다니는데, 이것을 먼지의 부조리성으로 명명하는 게 눈길을 잡아끌기도 한다. 이 수필의 백미는 마무리에서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짙푸른 무논의 벼들도 그 자리에서 여름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서 매일매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투덜거리고 노력하고 섭섭해 합니다. 여름은 참 멋지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뜨겁게 더 뜨겁게, 그녀에게 너무 빠져들지는 마십시오. 때론 적당한 거리에서 그녀와 밀당을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 강마을은 너무 덥습니다.”라며 ‘적당한 거리’가 ‘삶의 길’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제의식을 제재와 연결시켜내는 것이 수필을 문예화하는 데 중요한데, 지금까지 이선애는 이런 일을 잘 해내고 있다. 그녀가 보내온 수십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관조미학의 토대 위에서 빛나는 독서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삶은 언제나 기다림의 연속>은 확실히 남다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아야 할 것을 찾아 조리개를 맞추는 데 남다른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직한 도전을 우리는 이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체험을 확충하다
아주 평범한 말로, 우리는 독서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특히 수필의 경우 인간의 실제 삶을 묘사하고, 특정 지역의 특정 사건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경험을 확충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감각의 구체화, 사고의 확장, 사고방식의 전환, 사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마련 등이 체험의 영역에 든다. 이러한 체험을 위주로 하는 것이 문학독서의 특징이다. 다만 체험의 강도와 농도가 문제가 되지 그것이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오히려 체험을 제한할 수도 있다. 문학적 체험은 산술적인 총량이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신선함과 그 강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필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수필 쓰는 일은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을 상상력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문학적 경로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그 소재가 어찌 ‘생활’과 ‘자연’뿐이겠는가. 그 표현 방식이 어찌 ‘고백’뿐이겠는가. 수필가들은 폭넓은 독서경험을 통하여 그 작품세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수필이 ‘지성인의 문학’이라는 새로운 틀에 맞추어 좀더 그 지평을 넓혀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지성인이란 말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수필가도 지성인이기 때문에 사회의식을 지녀야 한다. 수필이 생활인의 애환만을 크게 받아들인다면, 작품세계를 스스로 좁히게 된다는 데서 독서수필의 필요성이 노정된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죽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토마스 도마 안중근은 종교보다도 국가와 민족이 우선이었습니다. 하얼빈에서 이토를 사살하고 그는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후라!” 라고 3번 크게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 만세!”라는 뜻입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 과정에서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습니다.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3월 26일 순국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공동묘역에 묻혔습니다. 일제는 시신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주지 않아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리아 후레, 대한독립만세>
이선애의 <코리아 후레, 대한독립만세>라는 작품 역시 사건을 보는 예리한 작가의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말과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은 작가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수필도 예술에 속한다. 냉철하고도 엄정한 판단으로 비뚤어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미적 진보의 펜을 휘둘러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안중근 의사에 관한 수필을 조명해 보는 것은 a better world를 추구해야 하는 문학의 목적에 비추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훌륭한 수필가는 사회의 한 복판에 서서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제를 작품 속에 담아내려고 늘상 노력해야 한다. 한 알의 보리나 밀에서 우주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수필에 독자는 매력을 느끼는 법이다. 좋은 수필은 무엇보다도 푹 찌르는 맛이 있고, 톡 쏘는 맛이 있어야 한다. 감성적인 아름다움으로 정서를 풍요롭게 해줌은 물론 현대독자들의 지적 욕구도 동시에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힘의 문학으로써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 수필은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뜨겁게 하는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주고, 수필적 메시지가 현실에 대한 강한 직시와 적발의 모습을 띠고 있어 감동을 준다. 글의 출발점을 인식에 두어, 제재에 대한 심오한 철학과 성찰, 그리고 관조를 시도하고,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미적 구조로 재조직, 담론전략으로 형상화해서 독자들에게 구성적 비유로 전달하고 있어 문학적 성취도 빛난다. 이 작품의 쾌미는 자신이 겪고 있는 낭만적 삶과 안중근 의사의 비장함에 대한 작가의 넉넉한 여유와 재미있는 해석이라 하겠다. “저의 가을은 이렇게 차고 고요한 숲을 거닐며 물봉선의 분홍 꽃송이, 늘씬한 연분홍 무릇꽃의 자잘한 꽃차례를 보며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젊은이는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불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향하고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애국심에 불타는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게 하고, 작가의 열정적이며 낭만적인 체취에도 흠뻑 젖게 한다.
이러한 사태의 근원은 무엇일까?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자연 파괴와 생태계 최고의 포식자로 가축에게 한 짓’ 일 것이다. 작은 바이러스에게 휘둘리는 우리는 이 초록별의 주인이라는 자만심을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 사라보예 지젝은 『팬데믹 패닉』에서 ‘코로나 19가 어떻게 세계를 흔들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이 사태는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온 인류에게 내린 잔혹하지만 정당한 천벌이다.”라고 하였다. 현답이다.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횡단하는 무국적 바이러스에 대해 누가 벌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리가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지금 유행하는 감염병이 자연의 우연성이 가장 순수하게 발현한 결과요, 그냥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숨겨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더 거대한 사물의 질서 한가운데 인간은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한갓 종에 불과하다.”라고 일갈한다.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수필을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감히 이 수필집 한 권을 권한다.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에 놓인 이 시 ‘코로나19’는 역설적인 관점이 주는 반전의 맛이 쾌미다. 어느 날 문득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해온 반갑지 않은 바이러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지 바이러스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팬데믹시대의 작가라면 코로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정착과 이탈의 가능성을 찾아 바이러스는 우리의 문을 열고 초대하지 않았는데도 들어오려고 한다. 이런 생사의 경계에 살면서 이선애는 ‘위드 코로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녀는 국가의 틀을 넘어 바이러스와 함께 협력과 연대의 지구공동체로 나아가야 하며,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반세기도 전에 했던 말, “모두 다른 배를 타고 왔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다.”를 기억하자고 외친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은 같은 배를 타고 바이러스의 강을 건너고 있다. 강의 가운데를 지나왔기를 그녀는 ‘이제 저 멀리 푸른 강나루가 보이기를 기도하는 심정’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근거로 사라보예 지젝의 『팬데믹 패닉』에서 “이 사태는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온 인류에게 내린 잔혹하지만 정당한 천벌이다.”라고 하였다. 현답이다.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횡단하는 무국적 바이러스에 대해 누가 벌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리가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지금 유행하는 감염병이 자연의 우연성이 가장 순수하게 발현한 결과요, 그냥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숨겨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더 거대한 사물의 질서 한가운데 인간은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한갓 종에 불과하다.”라고 일갈한다는 진술에 놓여 있다. 역설의 묘미가 빛나는 수필임에 틀림없다. 이 수필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이 현실인식의 치열성을 보이면서도 설득적인 면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인다는 것은 이선애 작가의 사고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이리라.
5. 가치를 지향하다
책을 읽는 것은 ‘문화 수행’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간단히 말하자면, 문화란 어떤 집단 사람들이 공유하는 삶의 방식과 지향성이다. 독서문화란 어떤 집단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 습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읽는 책이 어떤 가치지향성을 지닌다는 것을 전제한다, 현재 우리나라 독서문화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관심을 주제적 양식에 의존하여 충족한다는 점이다. 이선애의 독서수필이 쓰여지고, 높은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수필은 자아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를 잃고 현재에 묻힐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수필은 긴 시간의 간극 속에서 축척된 깨달음의 결과를 말한다. 작가는 질기고 무서운 폭염이 쏟아지던 여름의 끝자락에 지인들과 짙푸른 바다와 반짝이는 잎새가 아름다운 동백나무가 있는 여수 돌산도의 끝자락 거북목에서 하루를 묵는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찻집에 앉아 올봄 아버지를 여읜 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금슬이 유난스러웠던 지인의 아버지는 아침을 준비하던 사랑하는 아내 얼굴도 보지 못하고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고 한다. 꽃을 사랑하여 집 주변마다 꽃을 심어두고 즐기던 아버지를 보내고 돌아와 보니 주무시던 창 앞에 홍매화가 유난히 붉게 피어있더란다. 가고 없는 아버지의 손길이 닿았던 꽃밭과 진달래로 사태 진 산기슭마다 송이송이 핀 아버지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한다. 짙푸른 여수바다로 가는 이선애의 가방에 넣었던 한 권의 책은 이 시대 대표적 작가인 신경숙의 오래전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였다.
흔히 신경숙 작가에 대해 90년대 문학의 신호탄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80년대가 남성 작가의 시대라면 90년대는 신경숙으로 대표되는 여성 작가군의 등장을 어떤 평론가는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페넬로페의 가출‘이라고 비유로 명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경숙은 세계 대신 내면을 공동체 대신 개인을 더듬거리듯 속삭이듯 서정적인 문체로 이 소설 속에서 독립된 주체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여성의 욕망을 표현합니다. 이 소설 속의 화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그의 가족을 버리고 함께 떠나려 하지만 이것을 거부하고 외롭고 서럽게 주체적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 <여수 밤바다>
이제 여러 글 중에서도 절경의 손맛을 우려내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차례다. 바로 <여수 밤바다>는 자외선과 같은 섬세한 부분이자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상태와 동경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작가는 바로 고독한 정신의 움직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섬세한 내면 풍경을 세련된 관조로 그리고 있어서 자조문학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신경숙은 세계 대신 내면을 공동체 대신 개인을 더듬거리듯 속삭이듯 서정적인 문체로 이 소설 속에서 독립된 주체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여성의 욕망을 표현하였다. 보편적 욕망을 여성의 ‘주체성’과 상관화시켜 그 이미지의 의미망을 미학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 까닭으로 감동을 준다. 아버님의 보낸 슬픔에 젖어 있을 그녀의 어머니가 푸른 솔처럼 건강하고 씩씩하기를 기원하였다는 마지막 문장의 소망에 손맛이 힘껏 묻어난다. 순환하는 인생을 봄의 생명력에 기대어 풀어내고, 그 위에 영육을 하나로 묶는 고독한 정신의 사유가 여수 밤바다 위를 스쳐 가는 바람처럼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자외선 같은 섬세한 서정이 물결치는 모습이라고 할까. 그녀는 문학성을 안겨 주기 위해 내면의 풍경을 물감으로 그리듯이 감각적으로 구체화한다. 이렇듯 그녀는 마음의 여로를, 또는 한 지인의 상처와 꿈을, 특유의 미적 상상력으로 그려내어 독자에게 산뜻하면서도 시원한 정감을 안겨 준다. 거친 삶의 얼룩과 지친 흔적들을 여수 밤바다의 바람과 상관화시키면서 새봄 같은 내외면을 향한 여인의 갈망을 섬세한 필치로 잘 그려내고 있어 감동을 준다. 생생한 계절을 내 안에 불러들여 자신을 지나갈 시간이 어둡지 않도록 홀로의 침잠에서 깨어나 끈끈한 세포 하나 품어내고 싶은 작가는 ‘가고 없는 아버지의 손길이 닿았던 꽃밭과 진달래로 사태 진 산기슭마다 송이송이 핀 아버지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하는 지인의 아픔이 치유되길 소망한다. 모성을 지닌 작가의 언어적 감각에 찬사를 보낸다. 문학의 존재적 가치는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 기준을 설정해 의미를 구축하고, 내재된 것에 대한 정신적 토양을 견고히 하는 일이 문학의 사명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선애의 글은 견고한 바탕을 구축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함께 발을 딛고 서 있던 전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의 숲이었습니다. 용맹을 담보로 백성을 지킨 대가가 참담하게도 의병장의 목숨이었던 시대였습니다. 무능한 왕과 권력에 눈먼 자들이 지키는 이 사직을 떠나고 싶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께서 사직서를 올리고 오던 그 길에 하현달이 떠 있지 않았을까요. 자정 무렵에 나타나 세상을 비추는 이지러진 달을 보며 조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요. 슬픈 반달이 뜬 밤, 말을 타고 오던 강가에 들국화 곱게 피어 당신을 반겼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당신의 마음을 표현한 시를 읽습니다. <망우당에 보내는 편지>
이선애는 충절의 고장 의령에서 국어교사로 지낸 까닭으로 누구보다도 의령의 곽재우 장군에 대해 애정이 많다. 체험의 나열화로 얻는 일상적인 느낌보다는 제재의 의미화를 통한 미적 형상화가 주는 참신함이 더 수필적 감흥을 불러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망우당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우리는 곽재우 장군의 ‘충정’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선애는 그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면서 ‘당신은 인생에서 무엇을 위하여 불원천리(不遠千里) 험로와 거친 바람을 헤치고 길을 찾아 헤매셨나요?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나요? 없는 길을 내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셨던 것은 풍전등화의 임란 속에 오직 내 나라 백성들을 지키고자 그리하셨을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당신의 그 간절함을 다시 생각합니다.’라고 적어, ‘불원천리’ ‘풍전등화’를 곽재우의 나라사랑에 덧씌우고 있다. 이런 이선애의 서술전략으로 인해 수필은 더 문학적 향취를 거둔다. 이선애 수필은 경험을 넘어 위대한 삶을 살았던 위인들의 사상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찾고, 그 의미에 적절한 이미지를 덧씌우는 정서의 객관화를 통해 독자들을 미적 사유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관조하는 작가의 주관에 의해서 인물의 소성이 교감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문학성이 수필에 담기는 법이다. 자신만의 렌즈로 걸러진 이선애의 주옥같은 수필들은 문학보다 더 깊은 철학적 사유 위에서 위대한 곽재우 장군의 삶을 다양한 이해 방법론을 통해 감성과 지성으로 분석하고 있어 독자의 관심을 충분히 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문학을 문학답게 읽고 수용하여 문학적 재생산에 환원하는 일련의 과정과 결과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Ⅳ.
모든 문학이 다 그러하듯이 수필 또한 우리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수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우한용은 이미지의 생성을 만드는 상상력의 참여, 즉 이미지가 표상하는 외계에 대한 우리들 존재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란 사랑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미’의 근저에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감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아름다움의 척도로서 이미지의 생성을 이끄는 원형은 기실 바로 사랑과 표리를 이루는 것, ‘세계를 믿고 세계를 사랑하고 우리들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우리들을 도와주는 저장된 열광’이라고 한다. 그는 작가나 독자는 세계에 대한 찬가 없이 시가 있을 수 없음을 확인하면서, 자아의 깨달음과 마음의 울림을 일궈내야 하는 당위 속에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하였다. 뿔레는, 문학의 경우에, 지속이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현실적 삶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문학적 영감의 순간을 지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이 멈추는 순간에 발현되는 존재의 경이라고 본다. 이 순간은 작가가 존재에 대하여 최초로 의식하는 놀라운 순간이자, 작품을 탄생시키는 충동의 동기가 된다. 이 충동의 동기에 의해, 순간은 공간의 영역에서 그리고 지속의 영역에서 동심원적 운동을 하면서 작품이 된다. 문학이란 시대와 사회의 구체적인 표출이어야 하고 그런 사회 속에서 인간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에도 있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한 작가에게 혹은 문학작품 속에서, 순간은 시간이 아니다. 순간 속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작가는 시간을 구성하거나 되찾기 위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앙드레 지드는 언어 행위를 통해서 삶으로부터 거부된 영속성을 작품에 부여한다. 이러한 지드의 사유는 순간적인 실재에서 시간의 실재로 높아진다. 이선애의 독서수필은 존재가 써야 할 작품을 찾는 것인 동시에 잃지 말아야 할 시간을 찾는 시간 위에 놓여 있다. 문학은 인생의 표현이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도 작품이 보여주는 내용이 작가의 주관으로 들어온 경험의 여과된 재현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작가는 과거의 실재를 찾으며, 작품은 미래의 실재를 찾는다. 나아가 그녀에 있어서, 문학작품은 정신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부여하기로 작정한 ‘결말’에 얽혀 있는 조건들에 따라서 형성되는 것으로, 고유한 지속의 예상되고 요구된 변이들에 따라서 구조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뿔레의 말처럼 그녀는 인간의 시간이 인간을 선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살고 그리고 살기로 작정한 방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 결과 모든 것은 어떤 경험 혹은 그 경험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이선애의 현상학적 사유가 주관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는 객관으로 나아가면서 예술적 형상화로 마무리되기에 우리에게 설득을 안겨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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