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토요칼럼 2026.7.18)
박정희의 중화학 선언의 진실
☆중화학 선언의 역사적 사명☆
(양해말씀)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은 전 세계 전무 후무한 후진국에서 선진국을으로 만든 정책입니다.
중화학 선언이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둥그런 풍선이라면 전부를 볼 수 없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중화학 최하 담당 살무자의 자격으로 매번 각각 다른 각도에서 보고 기록하고 있으니 중복되고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1. 중화학의 사명은 무엇인가?
(가) 박정희 대통령의 60년대의
경제개발 업적
한국은 62년 세계 최빈국에서 시작하여 71년까지 10년간의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자전거가 달리듯 넘어지지 않고 잘 달려왔다.
60년대의 경제개발 실적을 보면 수출은 61년 4만 불에서 시작하여 64년에 1억 불을 달성하고 67년 3억 불을 거쳐 70년에는 10억 불의 고지를 점령하였다.
3,4차 5개년 계획이 시작하는 한국의 경제 지표는 72년도 기준으로 수출 16.7억 불, 1인당 국민소득은 81불에서 시작하여 318불이 되었다.
단군시조 이래 쇄국 봉건주의 500년 조선조 왕국과 일본의 36간의 강점기와 건국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보리고개를 타파하였다.
농본지국가에시 공업국가로 전환하고 수출제일주의를 근간으로 전 세계를 향하여 달려 발전하여 왔다.
이로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읕 기근과 빈곤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이시아의 신생 싱가포르, 홍콩, 대만과 더불어 4마리의 용 중에 해당하는 NICS의 문턱에 올라서는 성장을 거두었다.
(이때는 한강의 기적은 아니로서 한강의 기적이란 용어는 76년 Newsweek지가 표지에 Koreans are comng!이라 하면서 Han River Miracle이라고 하며 시용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일본인을 게으르다고 한 민족이라고 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이룩하여 청구권 자금으로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포철의 종합제철, 철도, 도로, 항만등 국가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와 병행하여 국가 기간산업으로 정유, 비료, 시멘트와 電源 개발을 하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일어나는 자금소요는 초기에는 서독파견 광부와 간호사와 그리고 월남 파병으로 얻어지는 말하자면 종잣돈을 사용하였다.
60년대 후반에는 한국경제가 글로벌화되어 경제개발 차관을 사용하였다. 공장건설이 계속되자 차관이 불어나서 차관 망국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연체된 것도 없이 제대로 상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성장 정책에서 60년대의 업적을 보면 연평균 8.5%, 수출 41.3%로서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기간인 18년 6개월 중 60년대의 10년간에 댤성한 위업을 요약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60년대의 업적은 70년대를 향한 선진경제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60년대의 업적만으로도 박정희 대통령은 두말할 나위 없는 위대한 대통령이 됨에 틀림없다.
2. 중화학 공업화 정책선언의 필 요 타당성
70년대를 맞이하여 정부(EPB)는 자연 발생적 성장인 72년 초부터 시행 중인 76년 35억 불 달성을 거쳐 최종 10년 후인 81년에 53억 불을 달성하는 경제개발 10개년 계획을 필요 시행 중에 있었다.
경제기획원은 이 10개년 장기 경제개발 계획을 장밋빛 계획이라고 자화자찬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을 대망의 다시 오지 않는 70년대를 맞이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를 개척하는
국가적 관점에서 면밀히 분석해 보면 실망하는 것이었다.
3. 박정희의 중화학 선언과 관련하여 이 10개년 장기계회를 분석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가.) 정부(EPB)가 72년부터 추진 중인 70년대의 신장기 경제개발 계획은 안이한 계획이다.
대망의 70년대의 미래를 향하여 개혁적인 추진을 하겠다는 정신적 요소가 결핍되다.
정부(EPB)는 72년 초부터 72~81년간의 10개년 장기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 장밋빛 계획이라고 자랑했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균 성장률 70년대의 8%를 채용하여
81년도 수출 53억 불이란 숫자를 도출한 것이다.
대도약 (Epoch making Growth)을 한다는 흔적
하나도 없다.
나.) 노동집약 조립공업에서 장치 기술집약 공업으로 상향개 편히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구태 의연했다.
70년도에 10억 불 수출당시의 수출 상품구조를 보면 섬유 봉제품이 약 50%에 달했고 가발, 고무신, 합판과 광수산물이 뒤를 따르는 단순 노동집약적 구조였다.
인건비가 올라간 한국으로서는 저렴한 노임에 의존하는 산업형태로는 국제경쟁력이 없어져 버렸으므로 안건비가 저렴한 후진국과는 경쟁할 수가 없었다.
정부의 당초의 53억 불 달성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후진국이 따라올 수 없고 부가가치가 높은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산업구조로 개편하는 것이
산업발전의 정상적 궤도로 가는 길로서 이것이 중화학 공업 밖에 없었다
다.) 방위산업의 육성에 중화학이 필요 불가결 하다
71년에 착수한 방위산업은 시제의 단계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본격적인 양산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원자재를 공급하는 쳘강공업과 기계공업이 없었으므로 벽에 부닥쳤다. 방산의 정상적 발전을 하는 위하여서는 중화학은 필수적이었다.
이리하여 73년의 중화학 선언으로 71년의 방위산업은 중화학의 기계를 만나고 중화학은 기계공업에 속하는 방위산업을 만나 상부상조하였다.
3.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 선언을 하다
가.) 박정희 대통령은 73년 1월 12일 연두 내외신 기자 회견에서 80년대 초 목표 수출 100억 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불 달성을 목표로 한 중화학 선언을 했다
이것은 목표와 수단을 동시에 밝힌 혁명적인 것이었다.
수출 100 억불을 달성하려면 중화학을 해야 하고 중화학을 하게 되면 수출 100억 불이 저절로 달성된다는 논리이다.
빅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선언을 국가 최고정잭 사업으로 격상시켜 목표인 수출 100억 불과 수단인 중화학을 동시달성을 지상과 제로 하였다.
나) 중화학이란 중공업과 화학공업의 합성어로 일본이 전후 중화학으로 급속도로 발전하여 선진국이 되어 중화학 공업 ( Heavy and Chemical Industries)
이란 용어를 자랑 심아 사용하였다
일본은 철강, 기계와 조선으로 구성된 중공업단지와 정유공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석유화학 콤비나트를 합쳐 중화학이라고 했다.
한국이 중화학을 착수함에 있어서 일본을 모델로 했으나 일본은 제철과 조선 그리고 기계공업으으로 구성되는 중공업 국가였다
한국은 중화학을 만드는 6개 업종을 1) 철강 2) 비철금속 3) 조선 4) 기계 5) 전자 6) 석유화학 공업이라 하고 동시에 착수시키는 것으로 하였다
이들 모두는 업종별로 대규모 단지화하되 전자공업만 내륙단지로 하여 구미전자 단지로 하고
수출지향성임을 감안하여 모두는 항구가 있는 임해 공업단지를 건설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일본의 자연 발생적인 중화학과는 전연 판이한 것이었다.
이 한국의 6개 업종에는 업 중 분류상 중화학 공업 업종이 아닌 전자공업이 포함되어 있고 이미 본궤도에 오른 정유, 비료, 시멘트 등의 화학공업은 여섯 번째의 화학공업에서 빼고 석유화학 공업만 포함시켰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전 국민의 과학화 선언으로 과학기술 향상을 위한 연구소단지를 건설하여 중화학 건설 후를 대비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한국의 전세계적으로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