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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군중 속에서 홀로 서는 신앙
능동적인 행함과 수동적인 반응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관찰은 우리에게 굉장한 깨달음을 가져다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들이 주위의 환경에 구애받음 없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살든지, 아니면 그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든지 하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자세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 자신이 어떠한 삶을 영위하겠다고 독자적인 결정들을 내리며 생활하든지, 아니면 단순히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반응하며 생활하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자세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진로 설정에 대한 결정권을 타인에게 넘겨주어, 그로 하여금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될지를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우리의 감정에 대한 사단의 조작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단지 이 경우에 있어서 사단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감정을 조작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그들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심사숙고하는 이성과 기도에 의존해 내리는 대신, 타인들에 의해 선동된 그들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줏대없는 결정들을 내리고 있음을 본다.
헌터 박사는 영국인 심장 외과의사였는데 그 자신이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동료에게, “내 생명은 내 성질을 건드리는 놈들의 손에 달려있어” 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한 자기 자신에 관한 그의 예언이 실현되고 말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 의사의 비위를 건드려 격노한 나머지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 것이다. 교육과 높은 지식 수준도 타락된 인간 본성의 미련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이 얼마나 자명한 실례인가! 그 모든 고등 학위들도 이 헌터 박사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주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문자 그대로 타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생사여부를 결정하도록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의사의 실수는 타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생의 유무를 실제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이들의 실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 주위에서 불필요한 감정적인 삶의 드라마들이 연출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 조차도 그에 가담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복수하기 위해 자신들의 격한 감정을 가누지 못하고 폭발하며, 아주 사악한 죄들이 하늘 책에 있는 그들의 이름 아래 기록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상실하고 있는데, 사실 이들은 행하기보다는 주위의 충동에 대해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확신하는 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규율적이고 절제된 삶을 유지하지 않는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종국에는 마귀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자신 속에 이러한 삶을 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친구와 적들로부터 오는 모든 도발성 자극들을 물리치며, 우리의 삶을 자제하는 능력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능동적 행함의 원동력
주위에서 오는 충동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는 비결은 빌립보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권면에 잘 나타나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예수님의 마음을 상기한다면 어느 누구도 복수심을 가지고 반격할 수가 없다. 십자가위에 달린 그리스도께서는 복수심이나, 앙심이나, 짜증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분의 기도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였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타락한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가? 물론이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들로부터 모든 자녀들이 물려받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똑같이 소유하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자신을 찌르는 단 한가지의 공박이나 모욕에도 결코 죄악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종류의 평온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 되어졌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가 가진 생각과 마음과의 연합이 우리 자신의 자복과 노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데는 우리 인간의 의지와 행동이 성령의 감동에 협력함으로서 만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측면을 강제로 우리를 위해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결정을 해야만 하며, 그리고 나서 또한 그 죄를 물리치며 거부하는 일을 해나가야 한다. 물론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이러한 과업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자신이 부당하게 취급당한 데 대해 분노하며 반응하는 것을 멈출 능력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는 그 어떤 반응도 전혀 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그리고 반응하려는 충동감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단계의 선택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물론이다.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 이러한 선택을 이행했을 때, 그것은 진정한 믿음의 극적인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다시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을 움직여 어떠한 죄의 행습도 깨뜨리는 힘으로 개입하시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
이러한 믿음과 더불어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며 해를 주는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고양하는 것이다. 많은 문제들이 바로 왜 이들이 그렇게 올바르지 못하게 행동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발생하곤 한다.
가해자를 향한 우리의 태도가 그가 한 행동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지를 대부분 결정하게 한다는 것은 실증적인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신체적으로나 말로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 중에 사려깊거나 이성적인 자세를 유지할 경향이 우리에게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럴 때, 종종 충동적인 분노가 우리 마음을 장악하여 자기 방어를 위해 무모하게 되받아치게 하곤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지나치게 예민한 감정들을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동기에 대해 몇 가지 질문들을 스스로 제기하고 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 얼마간의 이성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가해자가 그 어떤 오해로 인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진실로 믿고 있을 가능성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그 가해자를 향한 우리의 반응은 좀 더 개선적인 방향으로 발출될 수 있을 것은 틀림없다.
오래 전에 접하게 된 한 이야기는 참으로 감명적이어서 내 목회 기간 중 자주 이 이야기를 회중들과 나누곤 했다. 그리고 특히 개인적으로 견디기 힘든 어려운 몇몇 기간 중에 나 자신에게도 이 이야기를 상기시킬 필요가 여러 번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자기 친구와 함께 길가를 걸어가고 있던 필립이라는 한 희랍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 때 이 철학자의 적이 자기 창문 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이 두 사람을 보았으며, 그들이 자기의 창문 아래로 지날 때 한 양동이의 물을 이 철학자의 머리 위에 부어 버렸다. 하지만 이 현명한 철학자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기 친구와 담소를 나누며 계속 걸어갔다. 이 때 필립의 친구가 멈추어 서서 이 철학자에게 무례하게 물을 퍼 부운 그 자를 잡아 혼을 내 주겠다고 자청했는데, 그 때 필립은 아무도 자기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 조용히 이 친구에게 대꾸했다. 그러자 친구는 놀라서, “하지만 저 사람이 자네에게 물 벼락을 내렸지 않았는가? 지금 자네는 흠뻑 젖어 있어.” 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필립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니야, 자네가 잘못 판단했네. 저 사람이 나에게 물을 퍼부은 것이 아닐세. 그가 생각하기에 나라고 여긴 그 어떤 사람에게 물을 퍼부은 것일세.”
이 얼마나 훌륭한 자세인가! 타인들의 감정에 대해 이와 같이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정신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이 필립 철학자의 자세를 실행에 옮긴다면, 대부분의 개인적인 불화들과 인종적인 문제들, 그리고 국가들간의 분쟁들이 순식간에 해결되고 말 것이다.
변화된 이해를 가지고
얼마 전 나는 한 젊은 여성에게 침례를 준비시키고 있었는데, 그 당시 이 여성에게 교회의 교리를 마지막으로 재검토시키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했었다. 그 때 이 여성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저는 침례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라고 말했다. 계속 그녀가 말하기를, “지난밤 제 어머니가 저를 방문하여 저의 오빠를 제가 아직도 그토록 미워하기 때문에 제가 침례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상기시켜 주었어요” 라고 울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조심스러운 문의에, 이 캐롤이라는 여성은 자기의 단 하나뿐인 이 오빠를 왜 그 동안 증오해왔는지 처음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는데, 이 여성의 어머니조차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그녀가 일곱 살 때 부터 십대 소년이었던 이 오빠는 이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했고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큰 해를 가한다고 위협했으며, 이 여성은 그 후 8년 동안 이 잔혹한 오빠에 의해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이 사실에 접한 나는 캐롤이 느끼고 있는 자기 오빠에 대한 끈질긴 분노와 증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경험으로 인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당한 감정에 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로 이렇게 깊게 파여진 심리적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 여성의 느낌을 위로하며 바꿀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던 중, 나는 이 고령의 희랍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상기하고 그것을 이 여성과 나누게 되었다. 그런 후, 나는 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빠에 대해 몇 가지 더 문의 하였다. “그 오빠가 그리스도인이었나요?” “아니요.” 라고 캐롤은 대답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과는 정반대형의 사람이었어요. 항상 마귀들의 영향 아래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이 보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캐롤에게 권면했다. “캐롤, 당신의 오빠가 이때까지 그 생애 중에서 하나님 은혜의 능력을 결코 알지 못했다는 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는 진정으로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그의 생애 중 하나님의 임재함 없이는 그를 통해 역사하는 마귀의 작태들을 저항할 가능성이 그에게는 전무합니다. 그는 마귀에 의해 조작되고 이용되어 왔어요. 그가 주 예수님을 진실로 알기만 했더라면, 결코 그는 그런 상태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생인 당신을 분명히 사랑과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대했을 것입니다. 지금 캐롤 당신이 말했듯이 그 오빠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도 사악한 짓들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죄악들에 대항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이러한 그가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변화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안에서 캐롤이 발견한 그 기쁨을 그 오빠가 똑같이 경험할 수 있지 않겠어요? 캐롤, 그를 이용해 온 이 사악한 세력들의 영향으로부터 그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우리 당신의 오빠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내가 권면하였을 때, 그녀의 얼굴엔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번의 눈물은 더 이상 증오의 대상이 아닌, 동정과 기도의 대상이 된 파멸되고 있는 오빠에 대한 연민과 슬픔의 눈물이었다. 캐롤은 그 날 무릎을 꿇고 마귀의 세력에 포로된 자기 오빠를 구해달라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오빠에 대한 증오심도 그 눈물과 함께 깨끗이 사라져 버렸고, 다음날 나는 옛사람 캐롤이 물 무덤에 잠겨버림을 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오빠가 진정으로 자기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캐롤이 감지했을 때 그녀의 생애는 변화된 것이다. 그 오빠가 그녀를 한 귀중한 인격체로 느꼈다면 그가 그녀를 그처럼 노리개감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었는데, 그의 이해는 죄에 의해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애 중에서 우리를 냉대하는 이들에 대해 같은 이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들이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와 같이 계속 행했을까? 그들이 우리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느낌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고 한번 가정해 볼 수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해석하여 “그들이 이러한 불의를 진짜 나에게 범하지 않았어. 그들이 나라고 추정한 사람에게 그런 짓을 했을 뿐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 그들이 범하고 있는 일들을 그들 스스로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게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작은 돌멩이를 이마 위에 붙여 놓는 새우들이 가르쳐 주는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먼저,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다수의 행동에 기준하여 매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우리의 “위치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군중의 성향에 관계없이, 우리의 기분과 감정에 상관없이,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칙 위에 우리 삶을 영위해 나가기로 선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고 주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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